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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대학 2장 비즈니스 모델론-CHAPTER 1. 비즈니스 모델의 역사(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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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게임을 비즈니스화한 사람

여명기의 게임이라는 것은 인텔리, 그것도 '초'가 붙을 정도의 인테리들에 의해 개발되었습니다. 국립연구소의 박사나 미국에서도 톱클래스의 공과대학생들, 또는 그런 직함을 가진 과학자가 게임의 제작자였습니다. 시대로 말하자면 1950년대 후기부터 60년대 후기까지입니다. 게임은 과학자들의 실험적인 창작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이 창작물은 무료 전시, 혹은 무료 배포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초에 게임을 본격적으로 비즈니스화한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놀런 부시넬-
1934년 유타 주 클리어필드에서 시멘트 건설업을 하는 부친에게서 태어나다. 유타 주립대학(전자공학 전공) 졸업 후 하이테크 전기 메이커인 <암펙스> 사를 설립, 같은 해 업무용 게임 <퐁>을 발매하여 세계적으로 히트시킨다. 역사상 최초로 게임의 비즈니스화에 성공한 인물로 "게임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아시는 분도 많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타리> 사의 설립자인 놀런 부시넬입니다.

‘아타리’라는 사명(社名)은 바둑용어의 '단수(單手)'에서 왔다. 이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노런 부시넬은 '다음에 내 차례가 돌아오면 돌을 따내겠다'라는, 공격적인 이 바둑용어를 좋아했다. 덧붙인다면 노런 부시넬은 '텐겐(바둑판의 天元)', '센테(先手)'라는 이름의 자회사도 설립했다.

그는 <암펙스> 사에 재직하고 있을 때부터 여가시간을 이용해 남모르게 비디오 게임(코인으로 작동되는 업무용 게임을 말합니다)을 만들었습니다. 동기는 단순합니다. 대학시절 그는 <스페이스 워>에 열중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신이 게임을 설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고심한 끝에 완성된 것이 <컴퓨터 스페이스>라는 게임입니다. <스페이스 워>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이것도 우주전쟁을 소재로 한 게임이었습니다.

다만 <컴퓨터 스페이스>에는 <스페이스 워>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컴퓨터와 TV가 일체형으로 되었다는 점, 게임을 조작하는 두 개의 레버나 버튼이 붙어 있었던 점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차이는 25센트짜리 코인을 투입하면 1회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완성된 <컴퓨터 스페이스>를 들고 당시에는 핀볼 머신 등의 오락기를 제조하던 <나칭 어소시에이트>사로 회사를 옮겼는데, 이 회사가 바로 세계 최초의 코인 오퍼레이션 방식의 비디오 게임을 발매하게 된 것입니다. 1971년의 일입니다.

놀런 부시넬이 등장하기 이전의 미국 어뮤즈먼트 업계는 핀볼이 시장의 주류를 이루었다.

여담입니다만 '세계 최초의 비디오 게임은 <아타리> 사의 <퐁> 이었다'고 기술된 서적을 자주 발견합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나칭 어소시에이트> 사의 <컴퓨터 스페이스>'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퐁>은 그가 두 번째로 만든 작품입니다.


6. 아타리 사의 빛과 그림자(1)

"유타 주립대학에 재학하던 시절에 친구와 포커를 하다가 수업료 전액을 잃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솔트레이크시티의 어떤 유원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놀런 부시넬의 젊은 날 에피소드 중 하나입니다. 그는 이때부터 게임을 비즈니스로 삼는 공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페이스 워>를 거리에 갖고 나온다면 모두들 기뻐서 코인을 던질 텐데…."

이 공상이 후에 그에게 세계 최초의 업무용 (코인 오퍼레이션 방식의) 비디오 게임을 만들게 한 것입니다.

아카오 씨가 정의한 '디스플레이를 출력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비디오 게임의 광의(廣義) 의 정의다. 일본의 게임 업계에서는 어뮤즈먼트 시설의 기구(氣球)를 사용한 게임(체감 머신)과 구별하는 의미로 코인 오퍼레이션 방식의 일반 게임대를 비디오 게임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그런 협의(狹義)의 비디오 게임을 가리킨다.

그가 등장하기 이전에 게임은 연구기관이나 대학 등의 상아탑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 인텔리만의 소유물인 게임을 거리로 들고 나온 것은 놀런 부시넬의 공적이었습니다. 그러한 계기는 유원지에서의 아르바이트였습니다. 원문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고등 전자공학의 지식과 통속적인 놀이의 장. 이 대칭적인 두 영역에 정통했던 놀런 부시넬은 정말로 게임 비즈니스를 일으키는 데에 적합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게임 비즈니스로 성공하는 요령은 '오타쿠(집안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사람들)의 기술적인 지식'과 '노름꾼 같은 장사에 대한 센스'라는 것.

이렇게 해서 71년에 <컴퓨터 스페이스>가 등장했지만 세일즈 성적은 좋지 않았습니다. 판매 다수가 1천 5백~2천 대 정도였다고 합니다. <스페이스 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 게임은 너무 복잡하여 게임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낯설었던 것입니다.

이 실패를 계기로 놀런 부시넬과 그의 친구인 테드 다브네이가 5백 달러를 출자하여 72년에 아타리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노런 부시넬이 구상한 <퐁>은 아타리 사가 최초로 고용한 엔지니어 R. 아콘에 의해서 개발되었습니다.

<퐁>은 판매와 동시에 순식간에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핀볼대로 1주일에 40달러를 벌면 상당한 매출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퐁>은 1주일에 2백 달러를 벌었다고 합니다. <퐁>은 또 일본에 수출되어 볼링장 등에 설치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테니스 게임'으로 불리었는데, <퐁>은 PING PONG의 '퐁'에서 딴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놀런 부시넬은 손에 손가락을 넣고 입에서 '퐁' 소리를 내고는 "공을 반사할 때 이런 효과음을 넣어줘"라고 프로그래머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퐁>으로 성공한 놀런 부시넬과 그의 아타리 사는 70년대 전반 세계의 비디오 게임 시장을 석권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타리 사가 내놓은 두 번째 히트작은 <브레이크 아웃>이었습니다. <브레이크 아웃>이 뭔지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블록깨기>라고 하면 어떤 게임인지 금방 아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일본 전역의 다방 손님을 고개 숙이게 만든 대히트 게임기인 <블록깨기>도 76년의 아타리 제품이었습니다.

현재에도 어뮤즈먼트의 오락기기는 '하기 쉬움'을 무엇보다도 중시하여 개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게임센터에 롤플레잉 게임이나 시뮬레이션 게임이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


7. 아타리 사의 빛과 그림자(2)

하지만 사람 마음은 정말로 알 수 없습니다. <블록깨기>는 세상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지만 팔리는 것은 복사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타리 사는 실제로 상품지명도가 높은 대신 매출 회수가 잘 되지 않아 급기야 자금난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전환기는 갑자기 찾아옵니다. 76년 놀런 부시넬은 결국 아타리 사를 영화, 음악 산업을 하는 대기업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 매각하게 됩니다. 매각 가격은 2천 8백만 달러였습니다. 이처럼 놀런 부시넬은 히트 게임을 갖고 있었지만 양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게임 비즈니스는 겁난다고 해석해야 할까요? 겨우 5백 달러로 시작한 회사가 5년 후에는 2천 8백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 비즈니스는 굉장하다고 해석해야 할까요? 이 비즈니스사(史)의 옳고 그름에 대한 해석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매각 후 충분한 자금을 갖게 된 아타리 사는 염원이었던 신제품 개발에 착수하여 카트리지 교환 방식의 가정용 게임기를 개발하게 됩니다. 정식 명칭은 <아타리2600>(통칭 아타리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 이하 아타리 VCS라 함)으로 77년에 발매되었습니다.

[놀런 부시넬은 게임을 학문을 하는 곳에서 거리로 개방한 후 이번에는 그것을 가정으로 들여보내길 꿈꾸었다. 게임은 그의 2단계 스텝의 꿈에 의해서 가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만 현실을 수행한 것은 돈은 있지만 게임에 관해 꿈이 없는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라는 기업이었다.]

돈은 있지만 엔터테인먼트에 대해 꿈이 없는 기업이 엔터테인먼트에 참여한 결과, 시장 전체가 대혼란에 빠지고 해당 기업도 큰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비극은 그 후에도 거품 경제기의 일본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다.

상세하게 말하자면 미국에서는 <아타리 VCS> 이전에도 이미 <오딧세이>(72년/마그너박스 사) 등의 게임기가 여러 개 시장에 나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에 게임을 '보급시킨' 것은 이 <아타리 VCS>가 처음이었습니다. 너무 팔리기도 하고 갑자기 팔리지 않기도 하고…. 그것은 흥망의 변화가 심한 머신이었지만 <아티리 VCS>는 최종적으로 미국 전역에서 1천 4백만 대가 보급되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야기해 온 아타리라는 회사, 그리고 놀런 부시넬이라는 인물의 등장은 업무용, 가정용 게임 비즈니스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말할 <아타리 VCS>의 비즈니스는 그때까지의 아타리와는 다른 아타리가 컨트롤했다는 것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워너에 매각한 후 놀런 부시넬은 회장이 되었지만 78년에 그는 쫓겨나듯 아타리를 퇴직했습니다. 76년 이후의 아타리는 창업자가 사라진 후 워너가 소유한 아타리입니다.

77년에 발매된 가정용 게임기 <아티리 VCS>는 처음에는 별로 팔리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감각으로는 이 제품이 고가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아타리는 '겨우 2백 달러로 집에서 게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제품을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는 '게임을 집에서 하는 데에 2백 달러나 지불하나?'라고 생각해 <아타리 VCS>의 가치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타리 VCS>는 같은 해 11월에 40만 개가 제조되었으나 크리스마스가 지나서도 대부분 남았다고 합니다. 전혀 팔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보급은 지지부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약 2년 후 <아타리V CS>의 침체 무드를 쫓아버린 새로운 것이 일본에서 찾아왔습니다. 타이토가 개발한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미국에서 붐을 일으킨 것입니다.

타이토의 옛 이름은 '타이토 무역(大東貿易)'. 전신은 주크박스 등의 수입업자다.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히트를 계기로 게임의 수출이 시작된다. 미국판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미드웨이 사를 통해서 라이센스 판매되었다.

인베이더에 의해서 게임의 관심은 갑자기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이 현상에 이끌려 <아타리 VCS>는 매출이 급속하게 신장됩니다. 이때가 되자 우량 소프트도 조금씩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자 뒤늦게나마 <아타리 VCS>는 미국 전역에서 붐을 이루게 됩니다.


8. 아타리 사의 빛과 그림자(3)

인베이더에 의해서 게임에 대한 관심은 갑자기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이 현상에 이끌려 <아타리 VCS>는 매출이 급속하게 신장됩니다. 이때가 되자 우량 소프트도 조금씩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게임을 할 수 있는 기기는 거시적인 시점에서 본다면 분명히 시대가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시적인 소비자 심리에서 본다면 그것은 고액의 기기였을 뿐이다. '산업은 희망, 업게는 우울'이라는 시장구조는 당시의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임 시장은 한번 불이 붙으면 그 불꽃은 산불처럼 타오르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이 <아타리 VCS>의 경우가 정말 그랬습니다.

80년부터 급속하게 판매되기 시작한 <아타리 VCS>는 약 2년 동안에 미국 전가구의 17%에 보급되었습니다. 또한 아타리와 서드파티 사가 발매한 소프트 중에는 <피터폴>(81년/액티비전 사)처럼 3백만 개 이상 판매되는 것도 흔해졌습니다.

일본에서 게임뱅크가 윈도우 95 대응 게임 제 1탄으로 발매한 <피터폴~마야의 대모험>은 이것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하지만 3백만 개는 팔릴 것 같지 않았다.

82년 아타리의 매출은 20억 달러. 당시의 외환시세로 환산하면 5천억 엔. 이것은 닌텐도가 절정에 달했을 때의 매출과 거의 같습니다.

이대로 가면 아타리는 게임 비즈니스의 왕으로 군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재난은 83년에 찾아왔습니다. <아타리 VCS>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매출이 갑자기 떨어진 것입니다. <아타리 VCS>가 전혀 팔리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인은 서드파티가 우후죽순처럼 참여하여 게임소프트를 마구잡이로 만든 결과 유저가 게임에 싫증을 내고 아타리는 고객에게 신용을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타리 쇼크'가 일어난 것은 1983년 초였습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였던 아타리는 83년에 들어서자 막대한 결손을 안은 적자 회사로 전락했습니다.

미국의 경영학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아타리 쇼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아타리 쇼크라는 말은 일본에서는 '아타리의 실패'라고 번역됐습니다. 또한 그 용법은 소프트웨어의 마구잡이 제작을 지적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아타리 쇼크에 대해서 확실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아타리의 실패'라는 일본어 번역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타리 쇼크는 '워너의 실패'를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하자면 워너 커뮤니케이션즈 출신 사장과 임원이 산하의 아타리를 고물 회사로 만들었습니다.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의 제작 영화 <블레이드 러너>(82년 제작)를 보면 미래 도시에 'ATARI'라는 문자의 간판이 서 있다.

그런 까닭에 저는 83년의 이 사건은 '아타리의 실패'가 아니라 '워너의 실패'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아타리의 실패, 아니 워너의 실패는 소프트의 마구잡이 제작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더 큰 실수를 여러 가지 범한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9. 아타리 사의 빛과 그림자(4)

예를 들어 워너 출신 경영자는 회사의 재무 사정이 나빠지면 '신제품 개발은 모두 동결'이라는 멍청한 결단을 종종 내렸습니다. 사내의 기강 단속도 그들의 단골메뉴여서 게임제작자들의 복장이나 근무시간을 철저하게 관리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프로그래머들이 마약에 손대지 못하게 하려고 전백악관 SP를 보안 부장으로 초빙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연히 사원들은 경영진을 신용할 수 없게 되고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아타리를 떠났습니다.(주 1)

그리고 최악은….

워너 산하에 들어 간 아타리에게 치명적이었던 것은 경영진이 어느 누구 하나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타리의 쇼크는 소프트가 시시하다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워너의 실패(주 2)가 복합적으로 겹쳐서 일어난 것입니다.

70년대 전반에 아타리는 자유가 넘쳤습니다. 개발자는 마리화나를 피우고 경영자는 목욕을 하면서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공기가 새로운 발상을 낳고 미지의 놀이를 개척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상식을 벗어나기는 하지만) 놀이를 창조하기에 적합한 회사가 마치 실패한 회사를 비유해 부르는 상징처럼 불려지는 것이 과연 온당한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워너의 실패'였습니다. 72년 놀런 부시넬은 회사 등기를 할 때 그 당시 가장 열중해 있던 놀이에서 사명을 생각해냈습니다. 그것이 바둑 용어인 '아다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타리 쇼크(주 3)를 안이하게 '아타리의 실패'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 1: 앞에서 서술한 액티비전 사는 아타리를 퇴직한 개발자들이 설립한 회사. 그 당시 아타리는 우수한 두뇌의 유출이 심했다. 게임 비즈니스에서는 두뇌가 떠난 후 두 번째로 날개가 돋친 듯이 나가는 것이 자금이다. 그리고 이런 회사는 조만간 경영 위기에 몰린다.

주 2: 당시 워너의 관료적인 경영 체질은 데이비드 쉐프가 쓴《게임오버》(카도가와 쇼텐)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주 3: 원래 아타리 쇼크란 83년 가을에 일어난 워너의 주식 대폭락을 가리키는 것으로 월스트리트의 증권계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즉 달러 쇼크, 오일 쇼크와 마찬가지로 본래 아타리 쇼크는 주가의 '폭락'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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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ly published in Japan in 1996-2004 by Media Factory Co., Inc. T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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