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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휴대 게임기 시대 연 '게임보이' 제작자, 요코이 군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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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 기기로 게임을 즐기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게임 산업 초창기만 해도 이러한 광경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임은 게임기 앞에 앉아 즐기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과연 가전제품 개념이었던 게임기를 어디서나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사이즈로 만든 사람은 누굴까?

요코이 군페이. 그는 화투 회사였던 닌텐도를 완구 제조업체를 거쳐 게임회사로 거듭나게 한 장본인이다. 세계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워치’와 ‘게임보이’를 통해 휴대용 게임 시대를 열었다. 또한 ‘메트로이드’와 ‘파이어 엠블렘’ 시리즈 등 다양한 게임을 통해 8~90년대 게임 업계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 휴대용 게임기 시대를 연 요코이 군페이 (사진출처: retrogame.biz) 

불황에 빠진 닌텐도에 장난감과 게임사업을 제시하다 

1941년 교토에서 태어나고 자란 요코이는 친구들과 장난치며 놀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시샤 대학 전기공학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해 낙제만 면한 수준으로 간신히 졸업했다. 이후 한동안 취직 자리를 찾지 못했던 요코이는 1965년, 고향의 작은 화투 제조업체 닌텐도에 공장 설비보수 및 점검 기술자로 취업했다.

닌텐도는 화투와 트럼프를 제조하던 회사였다. 당시 닌텐도 3대 사장으로 경영을 맡고 있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야망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는 22세 젊은 나이에 사장에 취임한 후 일본 최초로 플라스틱 카드를 제조했고, 디즈니와의 제휴를 통해 아동용 카드를 제작해 백화점에 제품을 납품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다. 이후 야마우치 사장은 화투 외에도 택시회사, 즉석 밥&라면, 러브호텔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새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식품사업에서 큰 실패를 기록하며 닌텐도는 경영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닌텐도에서 요코이는 자신이 맡은 공장 기기 보수 및 점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일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노동이었다. 그는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공장에 굴러다니는 부품들을 이용해 장난감을 만들어 놀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자신이 제작한 장난감으로 놀고 있던 요코이는, 마침 공장을 돌던 야마우치 사장에게 그 장면을 들키고 말았다. 그는 곧 사장실로 불려갔다. 해고당하는 것이 아닌가 초조해하던 요코이에게 야마우치 사장은 독특한 제안을 했다.

“자네가 만든 그것을 상품화 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그렇게 요코이는 닌텐도의 신설 부서인 완구상품 개발과 과장이 되어 자신이 만든 장난감을 상품화했다. 그렇게 출시된 장난감이 바로 ‘울트라핸드’다. 닌텐도의 첫 완구상품 ‘울트라핸드’는 신축이 가능한 마름모형 플라스틱 격자 끝에 손잡이와 고무패드를 장착해, 멀리 있는 물건을 잡을 수 있도록 한 어린이용 완구다. 이 제품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요코이는 비로소 자신의 적성을 찾았다.


▲ 닌텐도의 최초 완구제품 ‘울트라핸드’ (사진출처: beforemariodot.com) 

그는 ‘울트라핸드’의 기세를 몰아 ‘광선총’, ‘울트라스코프’ 등 다양한 히트 상품을 통해 닌텐도의 완구사업을 궤도에 올려놓았다. 한때 부도 위기에까지 몰렸던 닌텐도는 완구사업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처음에는 단 두 명뿐이었던 요코이의 완구상품 개발과도 인원이 점점 늘어나, 어느새 닌텐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연구개발(R&D) 1팀으로 발전한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1975년, 닌텐도는 미국에서 출시된 세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마그나복스 오딧세이’를 보고 가정용 콘솔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당시 게임은 첨단 산업의 대표 주자였고, 야마우치 사장은 이를 통해 닌텐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기로 결심했다. 이후 닌텐도는 마그나복스사와 제휴를 통해 ‘오딧세이’ 제조•판매 라이선스를 따냈다. 77년에는 ‘컬러 TV게임’시리즈를 출시하며 게임 콘솔 제작에 뛰어들어 제법 괜찮은 성적을 냈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자사의 오리지널 제품을 갖지 못한 단계였다.


▲ 마그나복스와 제휴를 통해 닌텐도에서 제작한 ‘컬러TV게임’ (사진출처: beforemariodot.com) 

그러던 어느 날, 야마우치 사장의 담당 운전기사가 병가를 내 차를 운전할 사람이 급히 필요했다. 당시 회사에는 왼쪽에 운전석이 달린 외제차(일본 차는 운전석이 오른쪽이다)를 몰 수 있는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요코이가 비슷한 차를 몰고 다녔기에 1일 운전기사로 불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운전기사로 차출된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요코이는 화제 전환을 위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이전에 출장을 가는 도중 기차에서 어떤 회사원이 전자계산기를 두들기며 노는 것을 본 사례를 이야기하며, 계산기 크기의 게임기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팔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세밀한 사업 계획서도 휴대용 게임기에 대한 시장조사도 없었지만, 요코이의 아이디어는 야마우치 사장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며칠 후, 야마우치 사장은 샤프전자의 대표이사와 만나 해당 안건을 논의했다. 마침 전자계산기 분야에서 카시오에 밀려 주춤하던 샤프는 휴대용 게임기라는 신사업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닌텐도의 TV용 게임개발 기술과 샤프의 계산기 액정화면 기술이 합쳐진 새로운 놀이문화가 탄생했다. 바로 세계 최초 휴대용 게임기 ‘게임&워치(1980)’다.


▲ 세계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워치’ (사진출처: pocketgamer.co.uk) 

‘게임&워치’는 게임 업계에 혁명을 가져왔다. 아케이드 게임센터를 찾아가거나 TV 앞에 앉아서 즐겨야 했던 게임 문화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즐기는 문화로 재탄생 시킨 것이다. ‘게임&워치’는 게임 업계뿐 아니라 사회 현상으로까지 번졌으며, 일본에서만 1천만 대(공식 기록은 1,287만 대)가 넘는 판매 기록을 올렸다.

사실 ‘게임&워치’는 기술적으로 새로운 기기는 아니었다. 전자계산기 분야에서 이미 구시대 기술이 된 소형 흑백 액정을 사용했고, 게임을 하지 않을 때는 시계로 활용할 수 있도록 시계 기능을 붙인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요코이는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연결시켜 ‘게임&워치’라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냈다. 일명 ‘수평적 사고’다.

기존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 접근을 통해 결과를 찾아내는 것이 수직적 사고라면, 수평적 사고는 새로운 인식을 통해 창의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을 뜻한다. 게임 분야에 적용해 보자면 아무도 아직 만들어내지 못한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수직적 사고, 타 분야에서 이미 개발된 기술을 적용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수평적 사고다. 대부분의 업체들이 수직적 사고에 집중할 때, 요코이는 수평적 사고를 통해 ‘게임&워치’를 만들었다. 언제나 사물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새로운 응용 가능성을 찾는 요코이의 이러한 습관은 닌텐도 재직 시절 내내 이어졌고, 지금도 닌텐도의 핵심 개발 철학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의 혁신은 ‘게임&워치’ 개발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양한 ‘게임&워치’ 버전을 개발하며 수많은 아이디어를 담아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멀티 스크린과 십자키다. ‘1개 기기로 2명이 동시에 게임을 즐길 수 있다면?’ 이라는 발상에서 탄생한 멀티 스크린 버전은 비록 동시 플레이는 불가능했지만 향후 ‘게임보이 어드밴스 SP’를 거쳐 닌텐도 DS(이하 NDS), 닌텐도 3DS로 이어지며 닌텐도가 휴대용 게임 산업 1위 자리를 굳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왼손 엄지손가락 하나로 상하좌우 조작을 가능케 하는 십자키의 경우 ‘게임&워치’로 1982년 발매된 ‘동키콩’에 처음 도입되었는데, 이는 버튼과 스틱만이 존재하던 게임 조작 체계에 혁명을 가져왔다.


▲ 십자키와 멀티 스크린이 적용된 ‘게임&워치’ 동키콩 (사진출처: pocketgamer.co.uk) 

‘게임&워치’ 발매 이후 요코이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쁜 나날을 보냈다. 닌텐도는 ‘게임&워치’ 이후 게임사업을 계속 확장했는데, 아타리의 뒤를 이어 게임 업계를 석권한 패밀리 컴퓨터(패미컴, 1983)도 이 때 출시됐다. 닌텐도는 패미컴 공급 확대를 위해 다양한 게임을 출시했고, 요코이와 닌텐도 R&D 1팀은 그 중추에 서 있었다. 훗날 ‘게임의 신’이라고 불리게 된 미야모토 시게루 역시 요코이의 밑에서 게임 개발을 시작해 ‘동키콩’과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등을 제작하며 R&D 4팀(훗날 닌텐도 EAD)의 리더로 성장했다.

80년대 초중반, 요코이가 지휘하여 제작한 패미컴 게임으로는 ‘벌룬 파이트’와 ‘메트로이드’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1984년 출시된 ‘벌룬 파이트’는 풍선을 달고 하늘을 날며 적의 풍선을 터뜨려 떨어뜨리는 다소 평범한 액션 게임이었다. 그러나 이 게임에 차별성을 부여한 것은 바로 2인 동시 플레이 시, 적이 아닌 아군 플레이어의 풍선을 밟아 터뜨릴 수 있었던 PK(플레이어 킬) 요소였다.

사실 이전까지 ‘퐁(PONG)’으로 대표되는 1세대 스포츠게임을 제외하면, 플레이어 간 직접적 대결 요소가 들어간 게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플레이어의 마음 속 경쟁심을 자극한 ‘벌룬 파이트’는 ‘우정파괴 게임’의 시초로 불리며 많은 인기를 끌었고, 이후 출시된 게임들에도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참고로 ‘벌룬 파이트’의 메인 프로그래머는 이와타 사토루로이며, 훗날 야마우치 사장의 뒤를 이어 닌텐도 4대 사장으로 취임한 인물이다.


▲ PK 시스템을 구현해 많은 인기를 얻은 ‘벌룬 파이트’ (사진출처: zeroyenmedia.fr) 

1986년 발매된 ‘메트로이드’는 ‘슈퍼 마리오’ 시리즈의 발판 액션(플랫포머) 장르와 ‘젤다의 전설’의 자유롭고 방대한 탐험 요소, SF 공포 영화 ‘에일리언(1979)’에서 따온 외계 생명체 등이 어우러진 슈팅 게임이었다. 특히, 게임 속에서 우주 전투복을 입고 싸우는 전사가 아리따운 여성임이 밝혀지는 반전은 많은 플레이어를 매료시켰고, 특히 북미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 외에도 ‘아이스 클라임버’, ‘키드 이카루스’ 시리즈 등 주옥 같은 패미컴 명작이 요코이의 손에서 탄생했다.


▲ 독특한 세계관과 액션을 갖춘 슈팅 게임 ‘메트로이드’ (사진출처: neshq.com) 
 
‘게임보이’와 ‘버추얼 보이’, 천당에서 지옥으로 

80년대 후반, 요코이는 ‘게임&워치’의 뒤를 잇는 신형 휴대용 콘솔 ‘게임보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메트로이드’ 후속작을 무기한 연기하면서까지 개발한 ‘게임보이’는 ‘게임&워치’와는 차별화된 기기였다. ‘게임워치’는 미리 그려져 있는 그림의 점등을 통해 게임을 구현하기 때문에 1기기당 1개의 게임만 할 수 있었다. 반면 ‘게임보이’는 마치 TV에 연결해 즐기는 거치형 콘솔처럼 화면 전체를 픽셀 단위로 나눠 즉석에서 화면을 그려내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게임 카트리지를 갈아 끼우며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 휴대용 게임기 돌풍을 불러일으킨 ‘게임보이’ (사진출처: journaldugeek.com) 

‘게임&워치’의 기술 협력사였던 샤프는 무려 40억엔을 투자하고 ‘게임보이’ 전용 액정화면공장을 설립해 요코이의 ‘게임보이’를 지원했다. 요코이는 최소의 전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액정을 만들기 위해 우울증 약까지 먹으며 전력으로 몰두했다. 그의 피땀으로 완성된 ‘게임보이’는 1989년 발매 후 약 6년간 전세계에서 4천만 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후 ‘포켓몬스터 레드&그린(1996)’이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게임보이’는 전세계 판매량 1억 2천만 대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는 훗날 NDS가 출시되기 전까지 닌텐도가 전세계 휴대용 게임기 시장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게임보이’ 출시 이후 요코이는 1989년 미야모토 시게루의 참여 없이 게임보이용 ‘슈퍼마리오 랜드’를 제작했다. 속편인 ‘슈퍼마리오 랜드 2’에서는 마리오의 라이벌인 와리오를 등장시키며 다소 직선적이었던 마리오의 세계관을 확장시켰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동인 게임에 가까웠던 카가 쇼조의 ‘파이어 엠블렘(패미컴)’ 시리즈를 발굴하고 프로듀싱을 맡아 닌텐도를 대표하는 RPG 중 하나로 거듭나게 했다. 이듬해에는 ‘메트로이드 2’를 게임보이로 출시하는 등 쉬지 않고 전방위로 활약했다. 요코이의 활약으로 닌텐도는 세계 최고의 휴대용 콘솔 회사로 설 수 있었다.


▲ ‘게임보이’와 완벽한 시너지 효과를 낸 ‘포켓몬스터’ (사진출처: s0ftpedia.pw) 

90년대 중반은 닌텐도에게 선택의 시기였다. 닌텐도는 당시 90년 발매된 슈퍼 패미콤으로 가정용 콘솔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세가 새턴과 플레이스테이션이 속속 등장했고, 본격적인 고성능 게임기 시대가 열렸다. 닌텐도는 시류를 따라갈 것인지, 그들과 다른 길을 찾을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요코이는 게임기 고성능화 반대론자였다. 기기 용량과 연산 능력이 높아지면 보다 고품질 게임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가격이 비싸지고 아이디어 면에서도 결국 기존 게임기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게이머들에게 기존에 없던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고민끝에 닌텐도는 두 가지 콘솔을 동시에 개발하기 시작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춘 고성능 가정용 콘솔 ‘닌텐도 64’와 요코이의 3D 입체게임 전용 기기 ‘버추얼 보이(1995)’였다.
 

▲ 세계 최초의 3D 입체 가정용 콘솔 ‘버추얼 보이’ (사진출처: ifixit.com) 

‘버추얼 보이’는 여러모로 혁신적인 기기였다. 먼저 TV에 연결해 즐기는 거치형 콘솔이 아니라 전지를 사용해 휴대성을 높였다. 또한 고글형 모니터를 통해 두 눈에 다른 영상을 비춰 3D 입체 효과를 주는 기술이 적용됐다. 이는 게임 업계 최초의 3D 입체 콘솔로, 최근 각광받는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의 원형에 가깝다. ‘버추얼 보이’는 공개와 함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나 스티븐 스필버그 등도 공식 석상에서 ‘버추얼 보이’를 언급할 만큼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버추얼 보이’는 실험적 측면이 강한 나머지, 대중적 인기를 끄는 데는 실패했다. 휴대용 콘솔로 여기기에는 너무 컸고, 플레이 시 사용자의 시야를 100% 가린다는 특징 때문에 이동 중 즐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거치형 콘솔로 분류하자니 오로지 플레이어 1인만이 게임 화면을 볼 수 있어 가족이 함께 즐기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게임 화면에 3D 입체 효과가 적용되긴 했으나, 어둠 속에 빨간 선과 면이 만드는 입체 효과는 다소 조악할 뿐 아니라 눈의 피로도도 매우 높았다. ‘버추얼 보이’는 분명 혁신적이었지만, 대중화되기엔 단점이 너무 많았다.

결국 ‘버추얼 보이’는 전세계에 100만대도 채 팔리지 않는 참패를 겪었고, 1년도 안되어 생산이 중단됐다. 닌텐도의 게임사업 사상 최악의 흥행 참패였다. 자연히 ‘버추얼 보이’의 제작을 주도했던 요코이의 회사 내 입지도 급속하게 약화됐다.




▲ ‘버추얼 보이’는 플레이어 1인만 볼 수 있는 구조와 눈에 피로감을 주는 게임 화면 때문에 흥행에는 실패했다 (사진출처: giochi8bit.blogspot.kr) 

닌텐도 사직 후 새로운 출발, 그리고 닥친 불행 

요코이는 1996년 8월, ‘버추얼 보이’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닌텐도를 사직한다. 프로젝트 실패에 대한 압력이 아닌 자진 사퇴였다. ‘버추얼 보이’가 실패하긴 했지만 여전히 ‘슈퍼패미컴’과 ‘게임보이’ 시리즈는 잘 팔리고 있었고, 큰 손해를 보기 전 프로젝트 철수가 신속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닌텐도 주가는 여전히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에 더해 그가 회사 내에서 차지하던 입지를 고려하면, ‘버추얼 보이’의 실패만으로 경질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요코이는 그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이는 그가 평소 직원들을 대하는 철학의 연장선이었다. 요코이는 일본식의 수직적 명령구조를 싫어했고, ‘모든 직원은 존중 받아야 한다’는 이념을 갖고 있었다. 자신 뿐 아니라 전 직원들에게 상대의 직위 대신 이름 뒤에 ‘~~상(씨)’을 붙이게 하고, 직위에 상관 없이 모든 직원들의 업무공간을 동일하게 배분했다. 상호 평등과 존경을 바탕으로 한 기업문화. 이것이 요코이의 회사에 대한 철학이었다. ‘버추얼 보이’ 실패 책임은 해당 프로젝트를 고안하고 밀어붙인 자신이 진다는 판단 하에, 그는 30년 동안 근무했던 닌텐도를 떠났다.

퇴사 후, 요코이는 ‘세상을 좀 더 즐겁게 바꾼다’ 라는 일념 하에 주식회사 코토를 설립했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50대 중반을 넘어섰지만, 창조적인 일을 하겠다는 의지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코토는 완구와 게임을 전문으로 개발하는 중소기업으로, 요코이는 완구 및 게임 개발자 초심으로 돌아가 다양한 제품을 기획했다. 훗날 반다이남코가 유통한 휴대용 게임기 ‘원더스완’ 개발에도 어드바이저로 참여했으며, 훗날의 NDS용 두뇌트레이닝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암기용 퍼즐 게임 ‘군페이(GUNPEY)’의 제작도 병행하며 다시금 바쁜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 요코이 군페이가 제작에 참여했던 휴대용 게임기 ‘원더스완’ (사진출처: Wikimedia) 

그렇게 게임 업계에 또 한 번의 혁신을 불러올 것처럼 바삐 활동하던 요코이. 그러나 그의 열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코토를 설립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1997년 10월 4일. 요코이는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앞에 있던 트럭과 경미한 추돌사고를 일으켰다. 급작스런 사고에 놀란 요코이는 트럭 운전수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 뒤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차가 미처 사고 현장을 피하지 못했고, 차 바깥에 나와 있던 그를 그대로 들이받고 말았다.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결국 사망하고 만다. 향년 56세의 나이였다.

닌텐도를 세계 굴지의 게임회사로 올려놓은 휴대용 게임기의 마에스트로. 요코이 군페이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지지하던 야마우치 사장 역시 2002년 이와타 사토루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은퇴한 뒤 2013년 세상을 떠났다. 닌텐도는 미야모토 시게루를 위시한 게임 업계 2세대의 손에 맡겨졌다.

그러나 요코이의 흔적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다. ‘게임&워치’의 듀얼 액정을 더욱 진화시킨 NDS, ‘버추얼 보이’의 3D 효과를 융합한 닌텐도 3DS, 최첨단 기술보다는 체감형 가정용 콘솔이라는 독특한 길을 택한 Wii 등은 이제껏 게임을 즐기지 않았던 이들에게 ‘게임의 즐거움’을 선보여준다는 수평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이와 같은 요코이의 개발정신과 철학은 닌텐도 뿐 아니라 전 세계 게임 업계 종사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우수한 기술이 반드시 좋은 게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첨단 기술을 사용하면 비용이 상승하고, 이는 아이디어를 경직시키고 게임의 가격을 높이게 된다. 기존 기술을 다방면으로 활용하면 이제껏 생각지 못 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다.”
–요코이 군페이


▲ 수평적 사고를 강조했던 휴대용 게임기의 아버지 요코이 군페이. (사진출처: jikad.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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