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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없는 창작은 창작이 아니다, OOI에서 만난 '괴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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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무언가 새로운 것을 연구할 때는 우선 가정을 세우고, 표본을 설정해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시도해본다. 즉 실험을 하는 것인데, 이러한 과정은 게임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대중성과 시장성도 중요하지만, 신선한 콘텐츠가 탄생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실험정신이 필요하다.

검과 마법, 총과 폭탄, 미소녀와 메카닉… 재미있지만 한편으로는 뻔한 소재, 장르, 게임성. 이런 것들 너머에 아직도 우리가 찾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재미가 남아있을까? 실험게임 페스티벌 ‘아웃 오브 인데스(OOI)’ 박선용 대표는 그 답을 찾고자 벌써 4회째 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


▲ 올해로 벌써 4회째를 맞은 실험게임 페스티벌 '아웃 오브 인덱스' (사진출처: OOI)

지난해까지는 깔끔한 컨퍼런스홀에서 전시가 이루어졌는데 올해는 장소부터 실험정신을 강조하고자 영등포구에 위치한 인디아트홀 ‘공’을 택했다고. 아마도 과거 공장으로 쓰였음이 분명한 파격적인(?) 인테리어에 시작부터 압도됐다. 

“실험 없는 창작은 창작이 아니다”라는 박선용 대표의 모토처럼, 세계 7개국에서 모인 선정작은 하나 같이 실험정신이 가득했다. 참신하다 못해 어쩌면 괴짜스럽기도 한 12개의 가치 있는 실험을 여기 소개한다.


▲ 장소부터가 실험적이다, 여름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사진출처: 게임메카 촬영)

보헤미안 킬링, 진실유죄 거짓무죄

‘역전 재판’이나 ‘셜록 홈즈’ 등 대부분 추리 수사물은 범인을 색출하는 것이 목표다. 헌데 법정 공방을 전면에 내세운 ‘보헤미안 킬링’은 시작부터 범인이 누군지 보여준다. 바로 플레이어 자기 자신. 19세기 프랑스에서 발명가로 살아가는 주인공은 어느 날 한 여인을 집으로 유인해 잔혹하게 살해한다. 그리고 스스로 저지른 범죄로 인해 법정에 서게 된다.

하지만 순순히 죗값을 치른다면 게임이 진행되지 않으니. 이제부터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과거 회상, 즉 증언을 1인칭으로 직접 실천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실제 벌어진 사건과 다르게 알리바이를 꾸며 무죄인양 우겨야 한다는 것. 게임은 실시간으로 진행되며 총 아홉 가지 엔딩이 준비됐다. 변호사이자 역사에 박식한 개발자 덕분에 고증도 아주 그럴싸하다.


▲ 최선을 다해 스스로의 무죄를 증명하라, 물론 거짓으로 (영상출처: 공식 유튜브)

코덱스 배쉬, 어라 그 버튼이 아니네

‘코덱스 배쉬’는 빨강, 파랑, 노랑, 초록색 큼지막한 버튼을 놔두고 제시되는 문제에 맞춰 특정 색을 누르는 직관적인 게임이다. 오락실에서 연인들이 꺄르릇 웃으며 남들 염장 지르는 그 거 맞다. 다만 플레이 방식은 훨씬 활동적인데, 버튼을 방 이곳 저곳에 배치해놓고 문제 풀이를 위한 단서도 바닥에 흩어놓고 시작한다.

대다수 문제는 화면에 뜨는 지문으로 풀이 가능하지만 일부는 단서를 뒤져야 가리키는 색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혼자 플레이하는 것은 권장하지 않으며 친구들과 시끄럽게 떠들며 즐겨야 참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영국인 개발자 엘리스테어는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 부대끼며 친밀해지고 사회적 관계를 맺길 바란다고 전했다.


▲ 친구와 연인과 같이 하면 재미가 2배! 둘 다 없다면 그저 눈물만 (영상출처: 공식 유튜브)

아이단, 뒤를 돌아보면 낯선 풍경이

요즘 유행하는 던전 탐험게임을 보면 새로운 방에 들어서거나 다른 층으로 이동할 때 완전히 다른 장소가 나타나곤 한다. ‘아이단’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잠시 화면을 옮기는 것만으로 지형지물이 달라지는 신기한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쿼터뷰 시점으로 빛나는 점을 움직이게 되는데, 한번 들렀던 장소라도 잠시 다른 곳에 갔다 돌아오면 풍경이 달라져있다.

따라서 전방이 막혀서 뒤돌아나오면 어느새 지나온 길이 아닌 처음 보는 장소를 걷게 된다. 전투나 수집 요소는 일절 없고, 그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움직이면 끝. 도착하는 곳은 같지만 가는 방법은 플레이어마다 모조리 다른 셈이다. 미국에서 온 개발자 엘리엇은 돌아오지 않는 순간의 소중함을 음미하자는 의미에서 ‘아이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 어떤 의미에서 정말로 100명이 100가지 다른 경험을 하는 게임 (영상출처: 공식 유튜브)

키두: 어 리렌트리스 퀘스트, 한번 잘 기울여 보자

이제는 어지간한 구형 스마트폰도 기울임을 인식하는 자이로 센서를 장착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게임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런 면에서 아르헨티나 인디팀의 ‘키두: 어 리렌트리스 퀘스트’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기본적으로 한 소년이 계속해서 전진하는 간단한 플랫포머인데 도중에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구간이 여럿 등장한다.

가령 바로 앞길은 끊겨있고 아주 멀리에나 다른 통로가 보이는 거다.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스마트폰을 기울이면 게임 화면이 함께 움직여 앞길과 저 멀리 통로가 연결된다. 분명 서로 다른 길이지만 붙어있는 듯한 착시를 이용한 것. 이처럼 참신한 퍼즐뿐 아니라 서사와 음악에도 신경을 썼다고 하며, 한국어까지 지원해 편안하게 몰입 가능하다.


▲ 화면을 돌리는 퍼즐은 꽤 있지만 자이로 센서를 활용한 게임은 드물다 (영상출처: 공식 유튜브)

리갈 던전, 문서 없이 정의 없다

‘렛츠놈’, ‘레플리카’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국내 인디개발자 소미가 돌아왔다. ‘리갈 던전’은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팀장으로 새롭게 배속된 주인공이, 검찰에 송치할 수사서류를 꾸미는 게임이다. 개발자가 내세운 장르명은 이른바 수사서류 작성실무 시뮬레이션으로, 작정하고 지루하고 재미없음을 지향한다고. 법학을 전공한 이력이 개발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플레이어는 직접 서류를 살펴보며 사건을 파악한다. 여기에 어떤 의견서를 첨부하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점수가 달라지는데 일례로 절도는 2점, 살인은 15점이다. 이 점수는 곧 직무수행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직급을 올릴 수도 직위 해제될 수도 있다. 게임을 하다 보면 경찰의 성과주의가 지닌 폐해를 자연스레 느끼게 될 것이다.


▲ 법과 윤리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성과주의 폐해를 느껴보라 (영상출처: 공식 유튜브)

몰록 제로, 시스템에 복종할 것인가

게임이 서사를 전달하는데 있어 영화나 소설보다 우월한 점이 있다면, 플레이어가 게임 속 인물과 일체화되어 직접 콘텐츠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번 행사에서 유일하게 두 작품을 함께 올린 미국 인디팀 시밍리 포인트리스는 바로 이런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몰록 제로’에서 플레이어는 어느 악덕 기업의 근로관리 매니저가 되어야 한다.

게임 자체는 굉장히 단순하다. 정지, 빨리, 더 빨리 세 가지 버튼을 가지고 노동자를 움직이면 된다. 최대한 빨리 노동자를 이동시킬수록 많은 점수를 얻지만, 그럴수록 몇몇이 과로로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일반적인 게임은 고득점을 올리는 것이 지상과제다. 하지만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래야 할까? 선택은 플레이어의 몫이다.


▲ 마치 격무에 시달리는 기자를 보는 듯한...사랑합니다 편집장님 (영상출처: 공식 유튜브)

유 머스트 비 18 오어 올더 투 엔터, 후 방 주 의

시밍리 포인트리스의 또 다른 선정작 ‘유 머스트 비 18 오어 올더 투 엔터’는 세상에 다시 없을 공포게임이다. 장르는 공포인데 유령이나 살인마는 코빼기도 안 비친다. 제목은 우리말로 대강 18세 이상만 입장하시오’ 정도인데, 이 게임의 실체는 바로 어린 시절 첫 성인사이트 접속을 재현하는 것. 근데 방문이 안 잠긴다.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지 않는가?

‘몰록 제로’처럼 이 게임도 플레이는 아주 쉽다. 어느 날 주인공은 감기에 걸려 학교를 쉬었고 부모님은 모두 출근했다. 남은 것은 PC를 키고 누나들의 나체를 감상하는 것뿐. 문제는 상술했듯 방문을 안 잠근다는 것(대체 왜!). 한창 야한 사진을 보고 있는데 막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창 밖으로 차가 지나가기도 한다. 웬만한 공포 게임에 꿈쩍도 안 하는 기자도 이건 정말이지…


▲ 게임 행사에 와서 이렇게 야사랑 야동 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영상출처: 공식 유튜브)

픽처 프로세싱, 후~ 불기만해선 고쳐지지 않는다

2030 게이머라면 누구나 한번쯤 패미컴 팬에다 대고 숨을 불어넣은 추억이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메모리 오류로 게임이 실행되지 않거나 화면이 깨지기가 부지기수였고, 그럴 때면 먼지가 들어가서 그런가 하고 이리저리 후~ 불어보곤 했다. ‘픽처 프로세싱’은 바로 이러한 옛 시절의 향수를 담은 그림 맞추기 퍼즐게임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화면 속 타일이 온통 뒤죽박죽 혼란스럽다. 각 타일 디자인은 ‘슈퍼 마리오’나 ‘젤다의 전설’ 등 패미컬 시절 명작에서 따왔다. 잘못된 타일을 뒤바꿔 멀쩡한 게임 화면을 만들면 통과. 쉬워 보이지만 패미컴에선 도로와 나무 등을 어떤 색으로 처리했었는지 이해가 필요하다. 미국인 개발자는 그 감성을 충분히 느끼라고 아예 CRT TV 두 대를 가져다 놓았다.


▲ 단점은 패미컴 시절 게이머가 아니라면 전혀 재미 없다는 거? (영상출처: 공식 유튜브)

셈블런스, 구부렸다 폈다 뛰었다가 튕겼다가

플렛포머란 문자 그대로 발판(Platform) 사이를 뛰어다니는 게임 장르를 뜻한다. 이 바닥의 전설 ‘슈퍼 마리오’를 비롯해 이제껏 수많은 플랫포머가 출시됐고, 그만큼 상상 가능한 거의 모든 플레이 방식이 이미 활용됐다. 이에 남아프리카공화국 한 인디팀은 캐릭터가 뛰어다니는 메커니즘 대신 발판 그 자체에 주목해 ‘셈블런스’를 만들었다.

게임 구성은 여느 플랫포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작고 동그란 캐릭터를 조작해 뾰족한 가시를 피하고 빛나는 구체를 획득해야 한다. 재미있는 점은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을 때 캐릭터가 아니라 발판을 변화시킨다는 것. 가령 더 높은 곳까지 뛰기 위해 발판을 아래서 밀어 올리거나, 반대로 바닥을 내리쳐 꺼지게 할 수도 있다.


▲ 밀어 올리고 내리쳐 꺼지거나, 다듬어서 바로 출시해도 될 수준이었다 (영상출처: 공식 유튜브)

보로노이드, 우리의 싸움이 DJ에게는 음악이 된다

한창 시연에 몰두하다 오후 4시쯤되자 행사장 한 켠에서 “뚜쒸! 뚜쒸!”하며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졌다. 기자도 가볍게 어깨춤을 추며 가까이 다가가니 한 DJ가 슬라이드와 팬을 만지작거리며 비트를 뽑아내는 것이 아닌가? ‘OOI’가 드디어 축하 공연까지…하고 감탄하기도 잠시, 실은 ‘보로노이드’라는 선정작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게임의 골자는 네 명의 플레이어가 서로 작은 점을 조작해 펼치는 땅따먹기다. 제목은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에서 따왔는데, 그냥 쉽게 말해서 점끼리 싸우다 보면 여러 다각형이 형성되며 각자 영역이 만들어진다. 이와 별개로 점들의 움직임은 OCS(Open Sound Control)이란 형태로 DJ에게 전해지고 이것이 비트의 양상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독특한 메커니즘.


▲ 플레이어들과 DJ의 흥겨운 협연이 행사장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사진출처: 게임메카 촬영)

레조넌스: 더 라스트 스코어, 음치는 플레이 불가

기자는 노래를 정말 못한다. 알아주는 음치, 박치라 노래방에라도 끌려갔다간 창피 당하기 일쑤. 그렇기에 브라질 인디팀에서 선보인 ‘레조넌스’는 그 어떤 게임보다도 어렵고 난감했다. 일단 겉보기엔 평범한 퍼즐 플랫포머인데, 장애물을 돌파하기 위해 손가락보다 목젖 컨트롤이 더 중요하다. 마이크에 대고 특정 음계를 소리 내어야만 하기 때문.

처음 행사장에 들어섰을 때 어디선가 “아아아~” “우우우~” 괴성이 들리기에 뭔가 했다.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선 장벽을 부수거나 발판을 움직여야 하는데, 유일한 방법은 오브젝트가 지닌 것과 동일한 음역대로 외치는 것뿐이다. 농담 아니라 음치일수록 난이도가 수직 상승한다. 그나마 각 음계마다 다른 색의 파장이 나타나 제대로 하고 있는지 파악은 가능.


▲ 가정집에서 플레이하다 민원 들어와도 개발사는 책임지지 않는다 (영상출처: 공식 유튜브)

업슨넫됴, 일단 종료부터 해야 시작되는 게임

‘업슨넫됴’는 올해 선정작 중 가장 내용을 유추할 수 없는 제목이었다. 개발팀은 고3 수험생 둘이 의기투합한 ‘붕방. 나중에 들어보니 ‘업슨넫됴’는 ‘없는데요’을 비튼 말이라고. 무엇이 없는가 하니 바로 ‘경계’가 없는 게임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평범하게 창이 켜지며 로고가 올라가지만 이내 먹통이 되어 아무 조작도 안 먹힌다. 결국 플레이어는 게임을 강제 종료하는데…

그 순간 에러 메시지가 뜨며 본격적인 플레이가 시작된다. 게임창을 벗어난 ‘데이터소년’은 윈도우를 통째로 스테이지 삼아 종횡무진 오류 몬스터들을 쓰러트린다. 이외에도 키고 끄고 늘리고 옮기는 등 윈도우 창의 특성을 활용한 플레이 방식이 흥미로운데, 가령 상점을 프로그램마냥 더블 클릭해서 개방하고 아이템 구매는 드래그해서 빼와야 한다.


▲ 어쩌면 경계를 벗어나 자유롭고픈 고3 수험생의 염원이 담겼을지도 (사진출처: 게임메카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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