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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행] 3대 RPG '울티마', 판타지 덕후의 '덕질'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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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자 리차드 개리엇의 '덕질'로 만들어진 '울티마' 세계관 (사진출처: Ultima Codex)

흔히 ‘3대 RPG’ 중 하나로 꼽히는 ‘울티마’는 그 명성에 맞게 후대 게임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컴퓨터로 RPG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가상공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재미를 보여주었으며, 온라인 게임에서의 ‘아바타’라는 개념까지 확립한 게임이 바로 ‘울티마’이니 말이다. 국내 MMORPG의 흐름을 이끈 ‘리니지’도 ‘울티마’ 시리즈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을 정도니 그 대단함은 익히 알 만하다.

그런데 이처럼 위대한 게임으로 칭송 받는 ‘울티마’의 세계관은 사실 개발자인 리차드 개리엇이 어린 시절부터 해 온 ‘덕질’의 산물이다. 게임은 리차드 게리엇이 상상한 ‘자신이 세계 최강 주인공으로 나오는 세계’를 무대로 진행되며, 그 세계의 역사마저도 개리엇 자신이 차원의 문을 넘어 판타지 세계로 가는 데서 비롯됐다고 할 정도다. ‘덕질’도 이 정도면 꽤 중증이다. 시점에 따라서는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개리엇의 ‘덕질’로 시작해 ‘덕질’로 끝났다는 ‘울티마’ 세계관, 과연 어떻길래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걸까? 최고의 RPG 시리즈 ‘울티마’ 이면에 숨겨진 그의 ‘덕질’ 역사를 알아보자.

‘덕심’과 ‘자뻑’으로 만들었던 초기 세계관


▲ 펜과 종이로 상상을 써 나가는 보드게임, '던전 앤 드래곤' 플레이 사진
(사진출처: D&Diesel 유튜브 채널 영상 갈무리)

앞서 말했듯 ‘울티마’는 제작자의 또 다른 자아가 반영된 세계다. 개발자 리차드 개리엇은 어린 시절 취미로 환상과 낭만을 담은 게임을 만들었고, 그 결과가 ‘울티마’로 집대성된 것이다. 따라서 ‘울티마’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개리엇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미국 중산층 가정 출신의 개리엇은 어릴 때부터 소설 ‘반지의 제왕’과 보드게임 ‘던전 앤 드래곤’를 즐긴 인물이다. 그 탓인지 그는 판타지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특이한 점은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열성이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글과 그림으로 자신이 상상한 판타지 세계의 역사, 지리, 인물 등을 상세하게 구상했고, 자기 캐릭터의 활약을 구상한 시나리오, 던전 지도, 캐릭터 등을 꼼꼼히 정리해 기록으로 남겼다.

이처럼 상상을 구체화시키는 데 취미가 있던 개리엇의 삶이 바뀐 계기는 14살, 컴퓨터를 처음 접하고부터다. 당시 그가 다니던 클리어 크릭 고등학교에는 교육용 PDP-11 미니컴퓨터가 몇 대 들어왔는데, 이를 본 개리엇은 펜과 종이보다 자신의 상상을 훨씬 상세하게 표현해줄 도구를 찾았다고 여겼다. 이후 그는 전기공학박사였던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며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했고, 원하던 대로 16살 되던 해 ‘던전 앤 드래곤’ 게임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 개리엇이 텔레그래프로 하던 'D&D' 화면, 별표는 벽이고 각 문자는 캐릭터와 괴물을 뜻한다
(사진출처: Ultima Codex)

1977년 개발된 ‘D&D#1’는 PDP-11 미니컴퓨터와 연결된 텔레그래프를 이용한 게임으로, 던전을 탐험해 괴물을 물리치고 보물을 얻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그래픽도 단순 기호 문자열이 전부였다. 그러나 당시 펜과 종이가 아닌 컴퓨터로 RPG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새로운 시도였다. ‘D&D#1’에 깊은 인상을 받은 아버지는 개리엇을 오클라호마 대학 컴퓨터 캠프에 보내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아버지의 지지로 자신감을 얻은 개리엇은 총 30개에 이르는 ‘D&D’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게임 제작은 개리엇에게 있어 취미 영역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게임 개발에 뛰어든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컴퓨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였다. 당시 그는 애플 2에 맞는 그래픽을 갖춘 ‘D&D#28b’을 완성한 참이었는데, 이를 본 점주가 게임을 돈 받고 팔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점주에게 설득된 개리엇은 큰 마음 먹고 있는 돈을 털어 ‘D&D#28b’를 팔기로 했고,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아칼라베스: 파멸의 세계’다.

‘아칼라베스’의 줄거리는 개리엇이 구상한 판타지에 기초했다. 마법사 왕 ‘볼프강’의 사악한 둘째 아들 ‘몬데인’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좌를 찬탈해 세상에 악과 절망을 퍼뜨린다. 이에 ‘백색 빛의 브리티쉬’라는 영웅이 나타나서 ‘몬데인’을 물리치니, 사람들은 그를 ‘로드 브리티쉬’로 추대했다. 그러나 ‘몬데인’이 풀어둔 괴물들은 여전히 세상을 배회하며 파괴를 자행하고 있었다. 이에 ‘로드 브리티쉬’는 플레이어에게 괴물들을 처치하는 임무를 내린다.

재미있는 점은 바로 등장 인물들이다. 개리엇은 자신이 진행했던 보드게임 내용을 게임에 반영했다. 예를 들어 ‘로드 브리티쉬’는 개리엇 본인의 자아가 투영된 캐릭터로, 친구들과 보드게임를 할 때 자주 자기 캐릭터에 붙이던 이름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이 최강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자작 세계관이었던 셈이다. 시작이 이랬던 탓인지, 이후로도 개리엇은 게임을 만들 때마다 꼭 자신과 친구들을 반영한 캐릭터를 넣게 된다.


▲ 지퍼락에 담아 팔던 초기 버전 '아칼라베스' (사진출처: Ultima Codex)

어쨌거나 가게가 있던 텍사스 휴스턴에는 ‘아칼라베스’가 재미있다는 소문이 났다. 적절한 행운이 따라준 덕에, 우연히 ‘아칼라베스’를 접한 캘리포니아 퍼시픽 컴퓨터 회사가 유통계약을 맺자고 제안해 왔다. 덕분에 동네 가게에서 지퍼락에 담아 팔던 ‘아칼라베스’는 제대로 된 판매 창구를 얻고 상당한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다. 개리엇은 ‘아칼라베스’ 라이선스 비용으로만 150,000달러를 벌어들였는데, 이는 2017년 기준 472,500달러(한화 5억 3,292만 2,750원)에 달하는 액수다.

이후 개리엇은 ‘아칼라베스’로 번 돈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동시에 새로운 게임을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어 팔기 위해서는 우선 이름부터 바꿔야 했다. 사실 ‘아칼라베스(Akalabeth)’는 소설 ‘실마릴리온’의 네 번째 장 제목 ‘아칼라베스(Akallabêth)’를 철자만 바꾼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이듬해 발매한 게임 이름을 궁극의 역작이라는 뜻으로 다시 썼으니, 그것이 바로 ‘울티마’였다.

주인공보다 더 주인공 같은 ‘로드 브리티쉬’의 등장


▲ 개리엇은 자주 '로드 브리티쉬'로 분장하고 다녔을 정도로 자기 캐릭터에 심취해 있었다
(사진출처: Ultima Codex)

‘울티마 1: 첫 번째 어둠의 시대’는 제목은 바뀌었지만, 세계관과 줄거리는 ‘아칼라베스’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때부터 개리엇이 자신의 게임 속 분신 ‘로드 브리티쉬’의 설정을 더욱 상세하게 만든 동시에, 자기 주변인들까지 게임 속에 등장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울티마 1’의 시작은 플레이어 캐릭터 ‘이방인(the Stranger)’이 아닌, ‘로드 브리티쉬’를 중심으로 시작된다. 세계관 최강자이자 악당 '몬데인'의 숙적이기도 한 ‘로드 칸타브리지안 브리티쉬(Lord Cantabrigian British)’는 본래 ‘울티마 1’ 무대인 판타지 세계 ‘소사리아’ 태생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사는 실제 지구 태생으로, 실은 개리엇 본인의 분신이었다. 이름인 ‘칸타브리지안’도 그의 고향 캐임브리지를 중세 라틴어로 번역한 말 ‘칸타브리지아(Cantabrigia)’에서 따온 것이다.

‘로드 브리티쉬’는 어느 날 산책 중 언덕에서 뱀 두 마리가 꼬인 모습의 은제 장신구를 발견한다. 장신구를 줍자 눈 앞에 빛나는 마법 문이 열리고 그는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 문은 바로 마법의 세계 ‘소사리아’로 통하는 문이었다. ‘브리티쉬’는 여기서 동료들을 만나고 모험을 한 끝에 영웅이 된다. 여기 등장하는 동료들은 보드게임 캐릭터나 실제 친구를 본 따 만든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동료 ‘샤미노’는 개리엇의 대학 시절 별명인 동시에, 자기 보드게임 캐릭터 이름이기도 했다.


▲ '울티마 6'에 동료로 등장한 '샤미노' (사진출처: Ultima Codex)


▲ 개리엇이 20대 초반에 자기 보드게임 캐릭터로 만든 '샤미노'의 능력치 및 설정 기록 (사진출처: Ultima Codex)

여기까지 보면 ‘브리티쉬’가 주인공이어야 할 것 같지만, 개리엇은 자기 캐릭터를 다른 사람들이 조종하는 건 싫었던 모양이다. 게임은 차원여행자 ‘브리티쉬’가 악한 마법사 ‘몬데인’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해 ‘로드 브리티쉬’로 등극한 장대한 이야기의 끝에서부터 시작한다. 처치한 줄 알았던 ‘몬데인’은 사실 강대한 힘의 마법 보석을 사용해 다른 차원으로 도망친 것이었다. ‘울티마 1’에서 돌아온 그는 ‘로드 브리티쉬’에게 복수하고 세상을 정복하고자 한다.

돌아온 ‘몬데인’의 힘에는 ‘로드 브리티쉬’도 혼자서는 당해낼 수 없었고, 그는 자신을 ‘소사리아’로 오게 해준 장신구의 힘을 빌어 지구에서 새 영웅을 소환한다. 그가 플레이어 캐릭터 ‘이방인’이다. ‘이방인’과 ‘로드 브리티쉬’는 시공간을 가로지른 모험 끝에 ‘몬데인’을 처치한다. 그러나 ‘몬데인’을 제거하기 위해 시간여행으로 역사를 바꾼 결과 재앙이 닥치고, 네 대륙 중 세 개가 바다에 가라앉는다. 이후 생존자들은 영웅를 기리는 뜻에서 남은 유일한 대륙을 ‘브리타니아’로 개명한다.

이처럼 ‘울티마 1’ 세계관은 사정을 알고 보면 개리엇의 ‘자뻑’이 꽤나 심한 내용이었다. 게다가 이후 시리즈에서는 개리엇 본인뿐 아니라 가족과 친구까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친구이자 오리진 시스템 공동설립자인 척 뷰셰는 ‘척클’이라는 광대로, 실제 류트 연주와 활 쏘기가 취미인 친구 데이빗 왓슨은 음유시인 ‘이올로’로 등장한다. 그 외에도 헤어진 옛 여자친구, 회사 직원, 아버지 등 다양한 개리엇 주변인들이 게임 속 주요인물들로 등장했다.




▲ 개리엇의 친구 데이빗 왓슨 (상), '울티마' 캐릭터 '이올로' (하)
 '이올로'는 개리엇의 친구 데이빗 왓슨이 판타지 세계로 건너왔다는 설정이었다
(사진출처: Ultima Codex, Ultima wiki)

이러한 ‘울티마’ 초기 시리즈에서 세계관과 스토리상 중요한 역할은 늘 플레이어 캐릭터가 아닌 ‘로드 브리티쉬’와 그 친구들이 차지했다. 특별한 점 하나 없던 일반인이 다른 세계로 건너갔다는 것만으로 뛰어난 인물이 돼 영웅으로 거듭나는가 하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나이도 거의 먹지 않아 수백 살이 넘도록 그대로인 모습을 보여준다. 반대로 주인공 ‘이방인’의 역할은 ‘로드 브리티쉬’의 소환수에 가까웠다.

이 시기 작품 세계관과 스토리는 개리엇 개인의 취향과 상상이 무분별하게 집대성된 모양새였다. 플레이어가 아닌 NPC들이 스토리를 전부 끌어가는가 하면, ‘던전 앤 드래곤’ 판타지에 시간여행, 광선총, 우주선 등 온갖 요소가 난잡하게 섞여있었던 것이다. 이 때만 해도 ‘울티마’는 세계관이나 스토리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처럼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던 ‘울티마’ 세계관이 새롭게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이후 ‘울티마 4: 아바타의 퀘스트’부터였다.


▲ 판타지, SF, 시간여행, 공룡 등 개리엇이 좋아하는 건 다 들어간 '울티마 2' (사진출처: Ultima wiki)

‘게임은 악하지 않다’는 철학, '울티마' 세계관에 담다

‘울티마 3’은 보드게임에 기반한 방대한 자유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세계관이나 스토리만 놓고 보면 크게 특별한 점은 없었다. 용사가 사악한 마법사나 악마를 물리치는 이야기는 당시도 흔했고, 판타지와 SF의 혼합도 ‘마이트 앤 매직’과 ‘위자드리’ 등 다른 게임에도 나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게임이 아이들의 도덕적 타락을 부추긴다고 보는 풍조가 있었다. 그 탓에 ‘던전 앤 드래곤’은 게임 내 악마라고 쓰던 용어를 모두 가상 고유명사로 바꿨고, 카드게임 ‘매직 더 개더링’은 악마를 소재로 한 유닛을 한동안 내지 않기도 했다. 이러한 비난에서 ‘울티마’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울티마 3’는 높은 자유도로 게임 내 절도 및 살인 등 범죄가 가능했고, 악마적 분위기의 삽화까지 있어 학부모들의 잦은 원성 대상이 됐다.


▲ 판타지 게임이 10대 자살의 원인이라고 주장한 집단을 다룬 오클라호마 신문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개리엇은 이처럼 게임이 악으로 치부되는 사회상에 큰 반감이 있었다. 이 때 그는 다른 게임처럼 수비적인 태세를 취하지는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악마나 오컬트를 연상시키는 소재를 배제하는 대신, 능동적으로 ‘게임도 사람의 마음에 미덕을 고취시킬 수 있는 문화’라는 점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울티마 4’는 바로 이러한 개리엇 자신의 정신을 담은 상징적인 작품으로 기획됐다.

‘울티마 4: 아바타의 퀘스트’는 전작들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브리타니아’의 도의가 땅에 떨어진 시대를 다루었다. 냉혹 무비해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로드 브리티쉬’는 다시 한 번 ‘이방인’을 소환해 새로운 임무를 맡긴다. 그런데 이번 목적은 조금 특이했다. 악당을 처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진 마음과 희망을 되찾아줄 ‘궁극 지혜의 경전’을 찾아오라는 것이다. ‘악’에 맞서는 대신 ‘선’을 추구하는 내용을 다룬 셈이다.

‘울티마 4’는 게임 자체도 독특했다. 전작들처럼 자유도는 방대했지만, 사실 선행을 통해 ‘미덕’을 올리지 않으면 게임을 클리어 할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악행을 피하고 선행을 베풀어 ‘미덕’ 점수를 쌓아야 하고, 마지막에는 각 미덕의 사원을 방문해 명상을 하고 최종 던전 마지막 층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수수께끼를 풀면 주인공 ‘이방인’은 미덕의 화신 ‘아바타’가 되고, 지하세계에 있던 ‘궁극 지혜의 신전’을 솟아오르게 해 사람들에게 미덕을 전파한다.

‘울티마 4’ 때부터 시리즈는 ‘주인공이 위기의 순간마다 다른 세계에서 소환되는 성인(聖人)’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얻었다. 또 ‘브리타니아’ 세계관도 여덟 미덕을 숭상하는 신앙과, 이를 중심으로 한 흥미로운 스토리를 끌어갈 수 있게 됐다.


▲ 컴퓨터 RPG 중 최초로 '미덕'을 주제로 삼은 '울티마 4' (사진출처: Ultima Codex)

‘울티마 5: 운명의 전사들’과 ‘울티마 6: 거짓 예언자’도 ‘미덕’이라는 주제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여덟 미덕을 뒤틀어 만들어낸 여덟 악덕의 화신 ‘섀도우로드’들에 맞서는 스토리로, 미덕이 변질되면 악이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시사했다.

‘울티마 6’에서는 지하세계에서 흉측하게 생긴 괴물 종족 ‘가고일’이 올라와 인간과 전쟁을 벌인다. 그런데 사실 ‘가고일’은 본디 지하에 있던 ‘궁극 지혜의 경전’을 숭상하던 지적 종족으로, 경전을 되찾기 위해 올라와 성전을 벌였던 것이다. 게임은 주인공 ‘아바타’가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보고 화합을 도모하며 끝난다. 다양한 문화와 종족을 포용하는 관용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세 작품은 ‘울티마’ 시리즈 중 ‘계몽의 시대’ 삼부작으로 불린다. 그만큼 세계의 정립과 스토리 철학에 크게 신경을 쓴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이전 삼부작이 개리엇 개인의 꿈과 낭만에서 비롯됐다면, ‘계몽의 시대’ 삼부작은 ‘게임도 계몽적인 문화가 될 수 있다’는 철학을 반영했던 셈이다.


▲ 인간과 '가고일'이 화합을 이루는 '울티마 6'의 훈훈한 결말
(사진출처: Ultima Codex)

창조주가 떠난 ‘울티마’의 몰락


▲ '울티마 9: 승천'을 마지막으로 '울티마' 시리즈는 사실상 종결됐다
(사진출처: Ultima Codex)


‘계몽의 시대’ 삼부작으로 ‘울티마’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후 ‘울티마 7: 검은 문’ 이후 큰 재정적 위기를 겪는다. 1990년대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큰 변화가 일어나며 IBM PC 호환기종의 점유율이 높아진 반면, 오리진 시스템이 기반으로 삼았던 애플 플랫폼은 줄어든 것이다.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때마침 오리진 시스템이 위치한 텍사스는 대규모 부동산 버블로 돈마저 쉽게 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오리진 시스템은 당시 접근해 온 EA 일렉트로닉스에 인수되고 말았다. 이 때부터 오리진 시스템은 개발 방향성과 출시 일정에 있어 모회사 EA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이후 작품은 모두 ‘계몽의 시대’ 삼부작에 비해 훨씬 수준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개리엇은 ‘울티마’가 EA의 통제 속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참기 힘들어 했다. 과거 오리진 시스템이 독립된 회사일 때 그는 자신의 취향을 게임에 고스란히 담았다. 자아를 반영한 캐릭터가 역사를 만들고, 자기 별명을 딴 대륙이 존재하는 등, ‘울티마’ 세계관은 개리엇의 영혼과 같았다. 그렇기에 남의 강요로 ‘울티마’를 만드는 것은 그에게 있어 영혼을 팔아 치우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울티마’를 만들 수 없던 개리엇은 2000년 자진 퇴사했다.

EA는 개리엇 퇴사 이후에도 ‘울티마 10: 오디세이’라는 후속작을 낼 계획이 있었다. ‘울티마’라는 가치 있는 프랜차이즈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리엇이 떠난 ‘울티마’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울티마’ 세계관은 개리엇의 꿈과 환상으로 창조된 곳이며, 그의 정신적 성장과 함께 확대돼 왔다. ‘브리타니아’라는 세계 자체가 그의 자아를 반영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창조주가 사라진 ‘울티마’는 빠르게 생명을 잃었다.

EA가 기획한 ‘울티마 10’은 온라인 기반 멀티 플레이 게임이라는 등의 기존 시리즈와 동떨어진 이야기만 나오다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 외도 ‘울티마: 재탄생’, ‘울티마 포에버’ 등의 작품이 EA에 의해 계획됐지만, 대부분은 중간에 프로젝트가 취소됐고, 발매된 것도 금새 잊히고 말았다.


▲ 소리 소문 없이 취소된 '울티마 10: 오딧세이' (사진출처: GamesWall)

‘로드 브리티쉬’의 방랑


▲ 북미 '리니지'에도 등장했던 '로드 브리티쉬' (사진출처: Ultima Codex)

개리엇이 EA를 떠난 후에도 ‘로드 브리티쉬’는 그의 정체성 중 큰 부분으로 남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다른 게임을 제작하면 ‘로드 브리티쉬’도 해당 작품에 등장해 팬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로드 브리티쉬’가 ‘울티마’를 떠나 다른 게임들을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개리엇은 EA를 떠나고 얼마 후 엔씨소프트 오스틴 지부의 CEO로 들어갔다. 이 때 그는 ‘리니지’ 북미 서버에서 이벤트를 열었는데, 그 내용은 바로 ‘로드 브리티쉬’가 직접 플레이어들을 가이드해주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엔씨소프트에서 제작한 또 다른 MMORPG ‘타뷸라 라사’에는 ‘로드 브리티쉬’의 SF버전인 ‘제너럴 브리티쉬’가 등장했다. 이처럼 ‘브리티쉬’는 개리엇의 게임 아바타로 여기저기 출몰하며 화제에 올랐다.


▲ '제너럴 브리티쉬'로 직접 분장한 리차드 개리엇 (사진출처: Ultima Codex)

그러나 ‘울티마’ 이후 개리엇은 계속해서 게임 개발에 부진을 겪었다. ‘울티마’처럼 자신이 상상한 모든 것이 투영된 게임을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개발 방향성 차이로 또 한 번 불화를 빚은 그는 엔씨소프트에서도 퇴사했다. 그는 그 뒤로 포탈라리움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소규모 디지털 보드게임들을 제작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개리엇은 한동안 게임 개발에서 손을 떼고 우주여행을 비롯해 다양한 취미활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개리엇과 ‘로드 브리티쉬’는 아직도 자신의 ‘브리타니아’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2013년 개리엇은 ‘울티마 온라인’ 제작자인 동료 스타 롱과 함께 ‘울티마’의 정신적 후계 작품을 만든다고 발표했다. 다만 ‘울티마’ 프랜차이즈는 아직도 EA에 귀속되어 있으므로, 이 작품은 은유적 의미를 담은 ‘쉬라우드 오브 디 아바타: 포세이큰 버츄’라는 이름을 달았다. 개발비는 킥스타터 크라우드펀딩으로 두 번에 나뉘어 모금됐고, 300만 달러(33억 8,400만 원)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모였다.


▲ '울티마'의 정신적 후계작을 자처하며 발표된 '쉬라우드 오브 디 아바타'
(사진출처: '쉬라우드 오브 디 아바타' 공식 홈페이지)

2014년 ‘쉬라우드 오브 디 아바타’는 얼리 액세스로 스팀에 출시됐다. 게임은 이름만 다를 뿐이지 ‘울티마’ 세계관을 옮겨온 모양새였다. 곳곳에서 ‘아바타’의 상징인 ‘앙크(이집트 십자가)’ 모습도 보였고, 여덟 가지 미덕도 중요하게 언급됐다. 물론 ‘로드 브리티쉬’도 등장했다.

그러나 ‘울티마’ 세계관을 되살리겠다는 개리엇의 원대한 포부에도 불구하고, ‘쉬라우드 오브 디 아바타’는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다. 2017년이 된 지금도 얼리 액세스 단계에 머무르고 있으며, 불안정한 서버, 잦은 캐릭터 증발, 열악한 그래픽으로 ‘복합적’ 평가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리차드 개리엇과 ‘로드 브리티쉬’는 아직도 자신의 ‘브리타니아’를 되찾기 위해 방황하고 있다. 과연 그는 모든 꿈과 환상이 반영된 자신만의 세계를 다시 한 번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답은 ‘쉬라우드 오브 디 아바타’의 행방에 달린 듯 보인다.


▲ '쉬라우드 오브 디 아바타'에 등장한 '로드 브리티쉬', 방황이 길어서 그런지 사악해진 인상이다
(사진출처: '쉬라우드 오브 디 아바타' 공식 홈페이지)
이새벽
게임메카 취재팀 기자 이새벽입니다. 게임 배경에 깔린 스토리와 설정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습니다. 단지 잠깐 즐기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기사를 쓰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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