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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대학 2장 비즈니스 모델론-CHAPTER 1. 비즈니스 모델의 역사(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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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어나서 바로 사라지는 비즈니스 모델

만일 자동차나 맥주처럼 규제나 행정지도가 있었다면
게임 비즈니스는 이렇게 생생유전을
되풀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라바야시 히사가즈

게임 업계나 일반 산업계에서
게임을 특수한 세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프트 비즈니스는 전혀 특수하지 않다

아카오 고우이치

 

닌텐도나 세가 등 주요 게임업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전이나 컴퓨터 업계를 비롯해 여러 업계가 게임 비즈니스에 참여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결국 어떤 차세대 게임기가 팔리는가? 여러분의 관심은 여기에 집중되어 있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이 격렬한 게임기 시장 점유율 쟁탈전을 '차세대 게임기 전쟁'이라고 부르며 상당히 관심있어 하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이 강의는 '현 상황의 상품 분석과 장래 예측'이라고 해야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서둘러 결론을 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현 단계에서 차세대 게임기 전쟁을 예측하는 것은 연초에 그 해 크리스마스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지를 예측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사실에 반대되는 예상을 하곤 합니다.

게임 산업(가정용 게임기) 비즈니스 모델 이미지도

 

그보다는 먼저 게임 비즈니스의 본격적인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현명하다면 시간에 좇긴 성급한 '예상'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역사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비즈니스 모델의 역사입니다.

게임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업계 구조, 시장 특성, 성공 요인 등을 포괄적으로 포함한 비즈니스 모델이 변화되어 왔습니다. 비즈니스 모델이 변화할 때 새로운 승자가 태어납니다. 뒤집어 보면, 새로운 승자는 항상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있었습니다.

'게임을 판다'고 하는 비즈니스는 시행착오의 반복이었습니다.

누가 무엇을 누구와 손잡고 어떻게 파는가. 즉, 몇 가지의 비즈니스 모델이 태어났다가 사라져 갔습니다. 그 변화하는 모습들은 정말로 대담하며, 미래를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게임 비즈니스의 장래를 예측할 때 가장 의미 없는 것은 하드웨어의 성능만을 논하는 것입니다. 즉,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함께 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분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다 비즈니스 모델을 포함해서 논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예는 차차 이야기하겠습니다만, 비즈니스의 윤곽이 확실치 않은 게임기에서는 좋은 소프트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비즈니스 모델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원자폭탄과 게임

[게임은 처음에는 비즈니스의 대상이 아니었다. (중략) 게임이 생겨났을 때 돈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헌신적인 과학자가 한 명 있었을 뿐이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과 오늘날의 게임은 기묘한 역사의 끈에 의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 '맨하탄 계획'에 참여했던 과학자 윌리 비긴보섬 박사. 이 인물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세계에서 최초로 게임을 개발한 사람입니다.

원자폭탄과 게임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전쟁도구와 놀이도구입니다. 이 두 가지는 물과 기름 이상으로 거리가 먼 것이지만 사실은 '첨단과학의 사생아'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컴퓨터라는 장치가 생겨난 것도 폭탄의 탄도도 계산을 하기 위해서였다. 인터넷도 냉전 시대에 미국이 국가 기밀을 분산시키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전쟁은 하이테크를 진화시키고 군사는 하이테크를 리드한다. 이 분야에서 일본이 미국에 뒤쳐진 것은 일본이 '너무 평화롭기 때문'과 무관하지 않다.

윌리 비긴보섬 박사는 코넬 대학 대학원생이었을 때, 전쟁이 시작되자 운명의 끈에 이끌려 맨하탄 계획에 참여했습니다. 박사는 전자 부문의 주임을 맡았습니다.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폭발을 제어하는 회로는 그의 설계에 의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윌리 비긴보섬 박사는 우수했기 때문에 그런 어두운 역사를 짊어진 과학자의 한 사람입니다.

종전이 되자 박사는 군을 떠나 뉴욕 주에 있는 부룩헤이븐 국립연구소에 재직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세계 최초의 게임을 개발하게 됩니다. 연구소를 방문하는 견학자에게 '과학과 더욱 친숙해지게 하기 위해서' 게임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완성된 것은 1958년으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5인치 크기의 오실로스코프를 사용한 테니스를 연상시키는 게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의 개발에는 '즐기기 위해서'라는 것 이외에도 박사의 특별한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첨단기술을 '평화에 이용한다'는 의지입니다. 즉 '악의의 과학(=원자폭탄)'에 대한 거부감이 박사로 하여금 '죄가 아닌 오락'을 만들게 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은 종전 직후 박사가 미국과학자연맹 이사로서 핵 확산방지를 위해 정부와 조정활동을 한 것, 80년대에 들어서도 핵의 안전대책에 관한 자료수집 업무를 했던 것 등으로 증명됩니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원자폭탄의 개발 관계자를 예찬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종전 직후의 박사의 활동과 게임을 발명한 박사의 위업은 모든 사람에게 솔직히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게임을 만든 아버지의 위대한 공적

맨하탄 계획에 참여했던 윌리 비긴보섬 박사는 과학을 평화에 이용하는 일환으로 게임 개발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1958년 세계 최초의 게임이 탄생되었습니다.

박사의 전문지식은 전자공학 외에 물리학, 방사선학 등 다방면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는 그중에서 과감하게 게임을 연구대상으로 선택하고 또 완성시켰습니다. 우리처럼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결단을 존경해마지 않습니다. 만일 윌리 비긴보섬 박사가 없었다면 게임의 탄생은 더욱 늦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사는 오늘날 게임의 초석을 세운 인물입니다.

또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윌리 비긴보섬 박사의 헌신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원문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게임은 처음에는 개인의 작품이 아니었다. (중략) 게임이 태어났을 때, 제작자는 미래를 위해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오늘날 게임의 번영은 발명자의 혜안과 관용 덕분이다.]

윌리 비긴보섬 박사가 재직했던 부룩헤이븐 연구소에서는 발명품 전부에 대해서 특허를 취득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그러나 박사는 특허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박사는 이미 20개 이상의 특허를 가진 전문가였지만 게임에 대해서는 특허신청을 보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사는 게임의 미래에 무한한 가능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일 박사가 세계 최초로 게임의 특허를 가지면 그 권리는 국가에 귀속되어 버립니다. 박사가 국립연구소의 과학자인 이상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박사는 앞으로 새로운 게임을 만들 때마다 정부에 신청서를 제출한다거나 정부의 특허권이 너무 강해 다른 사람이 게임 개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특허신청을 포기해 자신과 국가의 권리가 게임에 미치지 않게 한 것입니다.

 

[연산 결과를 표시하는 데 디스플레이를 사용하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누구나 생각해내는 개념조차도 기본 특허를 낼 수 있고, 또 특허 특허하며 아귀처럼 무리 지어 다니는 컴퓨터 세계인 까닭에 비긴보섬 박사의 결단은 한없이 존경스럽다.]

윌리 비긴보섬 박사는 게임의 작가가 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 2, 제 3의 게임을 만들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게임을 창작하는 전문가가 태어나 아주 새로운 오락이 성장할 것을 예견했던 것입니다.

박사의 미래를 내다보는 눈에는 실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박사의 추종자는 예상 밖으로 일찍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게임이 태어나고 나서 약 3~4년 후 무대를 옮겨 지금까지 맨하탄 계획에 과학자를 많이 보냈던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두 번째 게임이 개발된 것입니다.

이 항목은 비즈니스 모델이 테마지만 게임은 아직 비즈니스가 되지 않았습니다.


4. 학생들의 공유 재산

1960 년대가 되자, 게임의 개발은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미디어 연구실이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연구소에 모인 학생들이 두 번째 게임 제작의 주역이었습니다.

당시의 MIT 학생들과 같은 프로그램의 달인들은 '해커' 라고 불리었다. 50년대까지의 해커란 '힘으로 물건을 움직이게 하는 도구실'이라는 의미였지만, 80년대 이후의 해커는 '컴퓨터 범죄자'라는 의미가 붙어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60~70년대에 해커라고 하면 모두가 경의를 표하는 존재였다.

당시에는 퍼스널 컴퓨터라는 것도 없었습니다. 컴퓨터라고 하면 초대형 범용기를 당연하게 여겼고, 그런 것은 극히 일부의 연구기관에만 있었습니다. MIT의 학생들은 이 특권(?)을 살려 여러 가지 게임을 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게임은 1962년 경부터 학내에서 유행한 <스페이스 워>입니다. 이 게임은 우주전쟁 게임입니다. 두 대의 로켓이 적함을 미사일로 파괴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원형을 제작한 것은 SF 소설과 철도 모형을 좋아하는 스티브 러셀이라는 젊은 학생이었습니다.

윌리 비긴보섬 박사의 세계 최초의 게임은 연구소에만 있었던 컴퓨터를 조작함으로써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워>는 PDP-1이라는 미니 컴퓨터상에서 움직이는 소프트웨어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 소프트웨어를 팔려고 했다면 학내의 친구들에게 팔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페이스 워>를 친구들에게 무료로 주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변경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즉, <스페이스 워>는 저작권을 무시한 퍼블릭 도메인 소프트웨어(PDS)의 일종이었던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PDS라 해서 저작 재산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용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공유재산으로 취급한다는 의미, 그리고 저작자 인격권은 결코 포기도 무시도 할 수 없다.

그 결과 <스페이스 워>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여러 가지로 개량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화면 전체에 우주의 바람이 불기도 하고, 로켓이 순간 이동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그 당시 MIT에는 여러 가지 버전의 <스페이스 워>가 있었으며, 또한 각각 독자적으로 개량되었습니다.

<스페이스 워>는 세계 최초의 게임 소프트지만 1센트도 주고받지 않았으면 저작권 주장조차도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게임=MIT 학생들의 고유재산' 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돈벌기에 혈안이 된 지금에 비해 그 옛날의 게임은 누구의 것도 아닌 공기였습니다.

그 정신은 지금도 퍼스널컴퓨터의 프리웨어 세계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윌리 비긴보섬 박사도 그랬고, 스티브 러셀을 비롯한 MIT의 학생들도 그랬습니다. 게임은 에고이즘의 대극에 놓여져 있었으며, 실험적인 창작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상이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하기 전의 게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비즈니스 모델의 역사 항목이 너무 길어져 부득이하게 1, 2부로 나눠 연재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게임을 비즈니스화 한 최초의 사람, 놀러 부시넬과 그가 창립한 '아타리'에 대해 연재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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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iversity of Computer Gaming World
Copyright(c) 1996-2004 by Hirabayashi Hisagazu, Akao Koichi
Originally published in Japan in 1996-2004 by Media Factory Co., Inc. Tokyo
Korean translation Copyright(c) 1996-2004 by A.K. Publishing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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