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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시 명인이 말하는 비밀. 그가 남긴 족적, 그리고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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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마켓 청년, 게임회사에 취직하다!

수퍼마켓 청년 타카하시 씨가 게임회사에 취직하게 된 것은 아무런 관련지식 없이 구입한 컴퓨터세트 때문. PC를 사용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고 그는 결국 PC와 관련된 일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런 그가 발견한 것이 바로 수퍼마켓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게임회사 ‘허드슨’.

‘놀러가도 되겠습니까’라는 그의 전화 한통화가 그를 허드슨에 입사하게 했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타카하시 씨가 과거에 수퍼마켓에서 일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당시의 이야기를 잘 아는 사람은 본인뿐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한국유저들 중에도 타카하시 씨의 옛 일화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왜 수퍼마켓에서 일을 했는지부터 설명해야겠다. 수퍼마켓에서 일하게 된 것은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정육점, 생선가게, 야채가게 중 어떤 아르바이트를 할까 고민했었고 고기나 생선보다는 매일 먹는 야채가 더 잘 팔릴 거란 생각에 야채를 판매하는 수퍼마켓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알고 있는 지식도 야채 쪽이 더 많았다.


스페이스인베이더가 등장했을 78년 당시, 게임비용이 꽤 비쌌다고 알고 있다. 당시 게임환경이 어땠는지 잠깐 말해달라.


당시 스페이스인베이더의 이용요금은 1회당 100엔이었다. 당시 싼 일본 술이 한잔에 100엔이었지만 꽤 비싼 요금이었다. 스페이스인베이터 외에 드라이빙 게임이나 블록깨기, 벨트 컨베이어를 이용한 게임들은 1회 즐기는데 10엔에서 50엔 밖에 하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스페이스인베이더의 이용요금이 얼마나 비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타카하시 씨의 당시 게임환경은 어땠는가?


전혀 게임을 즐기지 못했다. 당시에는 탁구 같은 게임이 가정화가 막 됐을 때 였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비디오게임은 꿈도 꾸지 못했다. 비디오게임이 성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는 찻집이나 드문드문 있는 게임센터를 가야만 했고 간다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게임을 즐길 수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한 것은 패미컴이 발매된 이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허드슨에 입사한 계기가 조금 독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꽤 비싼 컴퓨터를 구입했던 것이 지금의 타카하시 씨를 있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그때 구입한 컴퓨터가 샤프 사의 MZ 시리즈였다. 모니터, 본체, 프린터를 모두 합한 가격이 약 90만 엔 정도였고 이는 차를 사고도 남을 정도의 가격이다. 당시 본인이 처음 구입했던 중고차 가격이 25만 엔이었으니 얼마나 큰 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코볼, 포트란, 베이직이 한창 성행했을 때 본인도 컴퓨터를 공부하고 싶었고 대출을 통해 구입했었다.

하지만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컴퓨터 공부는 날로 시들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대출상환에 대한 독촉장이 집으로 날아오면서 이 컴퓨터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부터 컴퓨터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입사동기가 됐다는 것인가?


그렇다. 컴퓨터를 공부하면서 컴퓨터 관련업무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 즐겨보던 컴퓨터 잡지광고에 본인이 사는 곳 근처(주: 타카하시 씨의 고향은 삿포로, 허드슨의 본사가 삿포로에 위치해 있다)에 자리 잡고 있는 게임개발사 허드슨이 자주 나와 허드슨에 관심을 갖게 됐다.

허드슨의 문을 처음 두드렸을 때 반겨준 사람이 바로 지금 허드슨 회장으로 있는 쿠도 씨였다. 다행히 쿠도 씨가 본인이 회사 근처에서 야채, 과일을 판매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고 면접에서 본인이 컴퓨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영업을 하는데 있어 필요한 정력이 가득찬 사람이라고 판단해 “우리 회사에서도 그 활기 넘치는 목소리를 내주지 않겠는가”라는 권유로 입사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31번 째 허드슨 직원이 됐으며 영업파트에서 업무를 시작했고 1년 뒤에 본격적으로 기획 및 선전업무를 도맡았다.

★패미컴 붐으로 탄생된 타카하시 명인

1985년 11월에 발매된 수퍼마리오브라더스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급기야 패미컴이 품절사태에 이르게 된다. 당시 매스컴들은 패미컴과 닌텐도를 취재하기에 바빴으며 그들은 이런 패미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허드슨은 그 인물로 타카하시 토시유키 씨를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타카하시 명인이란 이름으로….



 


허드슨이 83년 패미컴의 서드파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무렵 발매한 ‘넛츠와 밀크’, ‘로드런너’를 통해 도산위기를 한번 경험했다고 알고 있다.


이야기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당시 닌텐도와 소프트웨어 발매계약을 하려면 먼저 주문을 해야 하는데 이 때 소요비용의 반을 발매 3개월 전에 우선 현금으로 지급해야했다. 당시 허드슨의 연간매출이 16억 엔~20억 엔 정도였는데 ‘넛츠와 밀크’, ‘로드런너’의 계약금으로 약 10억 엔 이상을 닌텐도에 지급해야했기 때문에 회사로서는 위기를 맞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타이틀의 판매량이 보장된 것도 아니었고 10억 엔을 지불한다하더라도 허드슨에는 아무런 이득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이틀이 팔리지 않으면 회사가 도산해버릴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었는지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해준 덕분에 두 타이틀은 예상 외로 많이 팔렸고 아직까지도 문제없이 허드슨에서 근무하고 있다. 당시 로드런너 홍보를 위해 20주 정도 일본 열도를 돌았던 적도 있었다.


타카하시 명인이란 별명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됐는가?


1985년부터 처음 사용했다. 사용하게 된 계기는 허드슨에서 개최한 전국 캐러번 패미컴 대회를 통해서였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게임명인’이란 칭호를 사용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은데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1985년에 슈팅게임 ‘스타포스’를 통해 캐러번 대회를 시작했을 때다. 본인이 담당했던 캐러번은 남큐수 가고시마부터 오사카까지 일본 남부지역이었고 행사는 36일간 해당 주요지역을 돌며 게임대회를 개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당시에는 패미컴 붐(주: 닌텐도의 수퍼마리오브라더스의 발매는 이 이후였다)이 불기 전 이었기 때문에 행사참여인원을 쉽게 모을 수 없었고 첫 대회였던 가고시마 대회에서는 최소인원 250명을 간신히 채우는 정도에서 행사를 마무리 했었다. 오전,  오후 두 번에 걸쳐서 대회를 진행했지만 그날 행사 참여인원은 350명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행사지역이었던 오사카 우메다에서는 아이들과 부모를 모두 포함해 약 5~6천 명이 참여할 정도로 행사는 메이급이 돼 있었다.


캐러번 활동은 아직도 하고 있는가?


아니다. 약 12년간 지속돼 온 허드슨의 캐러번 대회는 1996년 CESA가 도쿄게임쇼를 개최하면서 사라졌고 이후부터는 도쿄게임쇼 행사장을 통해 게임대회를 지속해오고 있다.


타카하시 씨에 대해서 몇 가지 정보를 찾던 중 라쿠텐 캐주얼게임사이트에서 근무하고 있는 마에다 야스유키(前田 靖幸) 씨과 관련된 코멘트를 많이 접했다. 특별한 관계인가?


 마에다 야스유키와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처음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코로코로 코믹이란 만화잡지사에서 코믹관련 행사를 개최했을 때였고 당시 그는 타미야에서 RC카와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었다.

★명인이기 때문에 힘들었던 생활들

‘타카하시 명인’이란 네임벨류가 더 강해질수록 그의 생활은 더욱더 힘들어졌다. ‘움직이는 광고탑’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스케줄은 점점 빠듯해져갔고 하루에 5개의 드링크를 마실 정도로 그는 일에 대한 집념을 불살랐다.


 


거꾸로 명인이었기 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많았을 것 같다. 가장 힘들었던 점이라면?


가장 힘든 점은 아이들에게 게임을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몇 번 진 적도 있지만 져서는 안 된다는 개인적인 소신 때문에 생활이 가끔 힘들어지기도 한다.

캐러번 활동을 하게 되면 항상 참가한 아이들에게 게임을 소개하거나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게임을 진행해야만 한다. 캐러번 활동의 본연의 목적은 게임홍보이며 게임홍보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소개하는 게임이 재밌게 보이도록 쉴 새 없이 설명해야만 한다.

결국 수많은 탄환을 피해야만 하는 각종 슈팅게임을 아이들과 대결하면서 또 다른 아이들을 위해 게임을 설명도 해야 한다. 결국 게임도 이기면서 각종 게임의 장점도 소개해야하고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이스코어 게임도 해야 하기 때문에 매 행사마다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명인으로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당시 허드슨 외에 다른 게임제작사들도 서로 자사의 게임을 홍보해 줄 명인 만들기에 집중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말해 달라.


당시 명인은 대략 40여 명 정도가 있었다. 라이벌이 있을 법도 했지만 명인이란 것이 특정 게임이벤트에서만 활약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데다 모두 다른 개발사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같이 게임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게다가 모두 자사의 게임만 열심히 즐겼지 다른 개발사의 게임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라이벌은 고사하고 서로간의 친분을 유지하는데도 힘이 들었다.


허드슨에는 총 몇 명의 명인이 있나?


사쿠라다, 카와다, 시마다 등 세 명이 있다. 이들은 특화된 게임에 단련된 사람들이 아닌 그냥 허드슨의 모든 게임을 두루두루 잘 하는 명인들이다.


잦은 행사로 많은 사고위험에도 노출됐을 것 같다.


가장 무서운 것이 교통사고다. 행사는 일반 무대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위험성이 높지 않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낮에 행사를 진행하고 야간에 이동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한 교통사고에 많이 노출돼 있는 편이다.

특히 이동시켜야만 하는 장비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고 무겁기 때문에 차량이동에 각별히 신경써야만 한다.

★명인으로서 할 수 있었던 일들과 말들

타카하시 씨는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 불필요한 체력까지 낭비해가면서 또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까지 포기하면서 비디오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껴 직접 ‘게임은 하루에 한 시간씩만 즐겨라’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해 줄 정도로 명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하는 동시에 자신이 속해있는 회사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가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타카하시 명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초당 16연사’다. 이 초당 16연사는 어떻게 해서 이뤄낸 성과인가? 홍보를 위해 만든 아이템은 아닌가?


절대 아니다. 초당 16연사는 1985년 제 1회 캐러번 전국대회 때 처음 생겨난 것이다. 당시 초당 얼마나 빠른 연사를 할 수 있냐는 한 아이의 물음에 연사를 시도한 결과 16회가 나왔고 그것을 계기로 그 이후 여러 게이머들 사이에서 ‘타카하시 명인은 1초당 16연사를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타카하시 명인의 모험도’를 비롯해 다양한 게임과 만화에 캐릭터로 등장해왔는데 그렇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게임 캐릭터로 등장하게 된 것은 사장의 권유에서였다. ‘모험도’는 아케이드게임인 ‘원더보이’를 패미컴 타이틀로 재구성한 것으로 게임을 홍보하기 위해서는 원더보이를 대신한 뭔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관련내용에 대해 사장과 상의하던 중 ‘타카하시, 요즘 명인으로 인기도 높아지고 있는데 자네가 해보면 어떻겠나’라고 권유받았고 그 이후 본인은 원더보이를 대신해 게임홍보에 참여하게 됐다.

코믹은 1985년 패미컴록키라는 만화책이 발간되면서 관련 캐릭터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30만부 정도의 판매량을 올렸던 만화책이 점점 인기를 얻으면서 200만부까지 판매량이 신장됐고 그 덕택에 타카하시 명인이 등장하는 만화의 분량도 점점 증가해 갔다.


타카하시 씨가 말한 것 중에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것이 바로 ‘게임은 하루에 한 시간’이란 말이다. 이 말에 녹아있는 참뜻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이런 말을 하게 됐는가?


비디오게임이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어감에 따라 아이들은 예전과 같이 방과 후에 친구들과 축구나 야구 등의 놀이를 하지 않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학교에 있을 때 조차도 휴대용게임기로 게임을 즐기면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뛰어다니지 않으려 하고 있다.

6시간이건 10시간이건 비디오게임을 계속 즐기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 불필요한 체력까지 낭비해가면서 또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까지 포기하면서 비디오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뛰어놀면서 아이였을 때 익혀야만 하는 삶의 과정을 비디오게임 때문에 그들은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 아이들답다는 말이 ‘비디오게임을 열심히 즐기는 것’이란 뜻으로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본인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1985년 후쿠오카 캐러번 대회이후 수많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모일 수 있는 캐러번 대회 때마다 ‘게임은 하루에 한 시간’이란 말을 해왔고 아직까지도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행사가 있으면 참석해 꼭 그 말을 해주곤 한다.

1시간이든 2시간이든 게임을 지속해도 되지만 그 기준을 정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됐으면 좋겠다.


과거의 허드슨게임과 지금의 허드슨게임에 대해 말해달라. 또 허드슨 게임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과 명작으로 손꼽을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가?


허드슨은 ‘봄버맨’, ‘모모타로 전철’ 등의 시리즈를 거듭해오며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파티게임을 주로 만드는데 주력해왔다. 비디오게임은 여럿이 즐겨야 본연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은 모두가 함께 즐겨야 한다는 기본 골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조금 복잡해졌다는 것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늘어났다는 정도. 과거에는 단순에 이렇게 게임을 즐기면 된다는 법칙만 존재했고 그를 통해 재미를 얻으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더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 과거 이상의 뭔가를 더 익혀야만 한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명작이라고 한다면 역시 ‘봄버맨’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지만 그래도 ‘로드런너’ 만큼은 아니다. 로드런너는 패미컴 서드파티 시작 후 처음 허드슨이 개발한 작품이며 여러 가지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을 내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또 로드런너는 다양한 플랫폼으로 재구성될 정도로 게임성도 인정받았고 패미컴으로만 125만장이 팔릴 정도로 인기도 높았다(주: 패미컴 붐의 주역인 수퍼마리오브라더스의 판매량이 35만장인 것에 비하면 꽤 높은 판매량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모험도’도 명작으로 꼽을 수 있다.


명인 타카하시 씨가 말할 수 있는 허드슨은 어떤 제작사인가?


개발사로서 역량은 있지만 어떠한 기준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뭐라고 딱 잡아 말하기는 힘들지만 어떤 한 가지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개발사라고 할 수 있다.

★비디오게임시장에 대해

“개구리가 된 일본 비디오게임시장은 올챙이 적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기술발전에 대한 경쟁만 할 뿐 게임으로서 정작 필요한 재미에 대한 것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며 “아이들도 쉽게 즐기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타카하시 씨는 말하고 있다. 일본 비디오게임시장은 미래를 위한 투자에 대해 무감각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본 비디오게임시장에 대해 현재 느끼고 있는 것을 타카하시 씨가 허드슨에 입사했을 때와 지금의 일본 게임시장을 비교하면서 말해 달라.


지금 일본 비디오게임시장은 과거 올챙이였을 때의 생각을 까맣게 잊고 계속 톱만 노리면서 나가려고 하고 있다. 게임 퀄리티는 점점 나아져가겠지만 게임으로서의 생명력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에는 십자키와 단 두 개의 버튼만으로도 게임으로서의 충분한 재미를 유저에게 선사했지만 지금의 게임은 더 복잡한 조작에 훨씬 멋진 화면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게임들이 선사한 만큼의 재미를 선사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게임의 재미보다는 기술의 우월함이 유저에게 더 어필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기술의 발전은 급속도로 진행됐을지 모르지만 게임성은 과거에 비해 그다지 발전되지 못했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은 더해졌지만 게임이 복잡해지면서 유저가 피부로 느끼는 재미는 과거에 비해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말한대로 최근 게임은 점점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허드슨이 허드슨 셀렉션을 통해 과거 게임들을 다시 리메이크하는 것이 이런 타카하시 씨의 의견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데 어떠한가?


앞서 설명했지만 게임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아이들은 신작게임을 쉽게 접할 수 없게 됐다. 아이들도 쉽게 게임을 접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원하는 재미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심플하면서 재미있는 게임을 개발해야만 했고 허드슨은 그 해답을 과거의 게임에서 찾았다.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허드슨 셀렉션을 발매했다고 이해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리메이크된 만큼 게임도 현재 트랜드에 맞게 바뀌었겠지만 마케팅 플랜도 당시와는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소비자가 줄어든 만큼 마케팅 규모도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마케팅 플랜은 게임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어렵다.


한국 게임시장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나?


비디오게임보다 네트워크를 이용한 온라인게임이 발달했다는 것은 이미 들어 잘 알고 있다.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허드슨 팬들에게 한 마디.


온라인이 발달한 만큼 양국의 게이머들이 온라인으로나마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양국의 게임시장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서로 협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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