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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미국 텍사스의 작은 창고에서 게이머들의 아드레날린을 샘솟게 하는 방법을 깨우친 한 쌍의 게임 개발자들이 등장했다. ‘존 카맥(John Carmack)’과 ‘존 로메로(John Romero)'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청년이 바로 그들이다. 울펜슈타인 3D와 둠, 그리고 퀘이크라는 세 가지의 게임명을 나열하는 것 이상으로 이들에 대한 수식문구가 필요하겠는가? 수만명이 넘는 게이머를 게임제작자로 탈바꿈시킨 둠 소스코드 공개사건, 회사 설립후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규모의 그래픽 카드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그들의 족적은 충분히 디벼볼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이번 코너의 주인공으로 ‘id소프트’를 임명했다.
물론 아마추어에 불과한 그들의 호기심 어린 장난이라고 생각한 워너는 선뜻 승낙했다. 그러나 존 카맥 일당이 불과 몇 개월 만에 새롭게 만들어 온 울펜슈타인 3D는 워너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 당연히 진짜 3D가 아닌 2D게임이었지만 공포영화에 버금가는 스릴과 흠잡을 곳 없는 게임구성은 그를 비롯한 모든 게이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자고 일어나서 스타가 됐다’라는 말은 이들을 지칭하는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당시의 게임제작사들은 이들의 시도가 단순히 운에 불과했고 하루아침에 출세한 햇병아리 정도로만 치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카맥과 로메로는 울펜슈타인 3D로 게임계의 판도를 바꿔놓기 이전에 이미 12개의 게임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서태지가 1집의 모든 곡을 준비한 상태에서 데모테잎을 들고 음반사를 찾아다녔던 것처럼(-_-;) 이들도 역시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해둔 상황이었던 것이다(그러고보니 서태지가 데뷔했을 때와 시기가 비슷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통사들은 id소프트와의 연줄을 잡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소프트디스크(SoftDisk)와의 계약 하에 거의 달마다 하나씩의 게임을 내놓는 두 사람을 접촉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그들의 게임을 얻어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id소프트에는 전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날아오는 팬레터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일쑤였다. 특히 id소프트에서도 조금 생긴 편(?)인 존 로메로는 팬레터를 꽤나 많이 받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 여지껏 수집한 팬레터를 모아놓고 들여다보던 중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 수많은 팬레터 중 대부분이 이름만 다르고 주소가 동일한 것이었다. 이 팬레터들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어포지(Apogee)'의 설립자 ’스콧 밀러(Scott Miller)'였다. 울펜슈타인 3D가 나오기 이전에 스콧은 이미 이들과 계약하기로 결심했지만 경쟁 유통사인 ‘소프트디스크’의 사전검열(?) 때문에 ‘어포지’라는 이름을 못 밝히고 계속해서 다름 이름으로 팬레터를 보내면서 연락을 기다린 것이다. 어쨌든 카맥과 로메로는 결국 이 노력에 감동하여 스콧 밀러에게 연락을 취하고 ‘커맨더 킨(Commander Keen)' 시리즈를 제작하기로 계약서에 사인한다.
국내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커맨더 킨 역시 울펜슈타인 3D와 함께 id소프트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한 작품이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장을 내미는 존 형제의 정신과 뜻이 맞지 않았던 이유 때문인지 이후 id소프트는 계약 후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어포지와 결별을 선언하고 액티비전과 유통계약을 체결, 현재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게임계의 판도를 바꾼 운명의 D데이, 1993년 12월 10일이 그렇게 다가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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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2월 10일, 둠의 공개 후 이 작품은 울펜슈타인의 차원을 뛰어넘는 FPS의 표준으로 자리 잡는다. 또한 이 작품은 1994년부터 미국에서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 인터넷의 확장에 큰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 스타크래프트와 O양 비디오(?)가 인터넷의 확산속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면, 미국에선 둠과 카멜라 앤더슨 비디오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진 인터넷의 확장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IT 산업발전에 있어 게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둠의 출시 후 1년 뒤에 나타난 둠 2는 출시당시 4인용 랜 플레이와 모뎀을 이용한 1:1 대결을 지원하여 게이머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냈다. 즉 1인칭 액션게임의 멀티플레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구축해낸 것이다. 물론 발전된 레벨디자인과 게임성이 이러한 장점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id소프트가 큰 인기를 누렸던 것은 게이머의 참여를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소스코드공개 방침이었다. 울펜슈타인 3D를 시작으로, 둠, 둠2, 퀘이크 등 자사가 제작하는 모든 게임의 소스코드를 공개하면서 게임제작의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줬다. 개발 직후 항상 그들이 공개하는 프로그램의 소스코드는 엄청난 숫자의 관련 게임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게임의 모든 최신기술이 집약된 소스코드를 공개하는 것은 개발자의 입장으로서 결코 쉽게 내릴 수 있는 판단이 아니다. 자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며 경쟁사의 견제를 받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만하다고 느껴질 만큼 자신감에 넘쳤고 또 그만한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어쨌든 id소프트의 이런 정신은 ‘모드(Mod)’라는 개념을 게임에 도입시킨 기념비적인 일로 기록된다. 또한 id소프트는 이러한 모드제작자들을 자사로 스카웃하여 차기 프로젝트에 착수시키는 대담한 행동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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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퀘이크 1편의 출시 당시엔 둠의 제작된 시기만큼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다소 무리하게(?) 높았던
요구사양과 난해한 세계관 등이 그 이유였는데 무엇보다도 경쟁작의 출시로 독보적인 정상을 지키고 있었던 위치가 흔들린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id소프트는 1년 뒤 곧바로 퀘이크 2를 출시하고 비교적 높은 사양에도 불구하고
한달만에 백만장 판매를 돌파시키며 또다시 타 제작사가 뛰어넘을 수 없는 아성을 구축한다.
또한 1996년부터 id소프트가 열기 시작한 퀘이커들의 축제, ‘퀘이크콘’은 상당히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게임대회의 개념이 전무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행사에서 id소프트사는 게임디자인에 관한 워크샵을 비롯해 여성 게이머들을 위한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며 일반인은 물론 개발자들에게도 큰 도움을 줬다. 이후 id소프트는 더욱 본격적인 엔진라이센스 계약을 맺게 되는데 제다이나이트 2: 제다이아웃캐스트, 솔저 오브 포춘, 하프라이프, 하프라이프 카스, 스타트렉 엘리트포스, 아나크로녹스 등 수많은 명작들이 퀘이크 엔진을 이용했다. 그러나 언제나 퀘이크의 명성이 이어질 순 없었다. 당시 갑작스럽게 등장한 에픽메가게임즈의 언리얼 토너먼트가 id소프트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멀티플레이 전용게임으로 등장한 언리얼 토너먼트는 퀘이크 2와는 다른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며 퀘이크 게이머는 물론 일반 게이머들의 관심까지 한꺼번에 끌어들이게 된다. 바야흐로 id소프트가 퀘이크의 후속작으로 살아남느냐 죽느냐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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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퀘이크 3 아레나 테스트버전이 출시되며 PC 게임계는 또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본래 id소프트는 퀘이크 2 출시
이후 확장팩 제작에 전념하고 과거 울펜슈타인이나 둠처럼 싱글플레이의 묘미를 새롭게 살리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듀크뉴켐 3D와 언리얼 토너먼트의 위력은 예상 외로 막강했다. 게임가에서는 “id소프트의 시대는 갔다”라는, 안 그래도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id소프트 개발진들의 성질(?)을 건드리는 말만 오고갔다. 이 중 메인 프로그래머이자 id소프트의 회장이기도 한 존 카맥은 듀크뉴켐 3D가 출시되던 당시 이미 제작해둔 트리니티 엔진을 이용한 싱글플레이 게임 제작을 철회하고 퀘이크 3를 멀티플레이 전용 게임으로 제작하자고 팀원들에게 권유를 시작했다. 퀘이크 2가 출시되고 한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한 존 카맥의 요구는 관철됐고 언리얼 토너먼트의 모든 효과와 특징을 흡수하고 또 멀티플레이 안정성에서 막강한 기능을 보유한 퀘이크 3 어리너를 1999년 출시한다. 이와 같은 발표는 1998년 3월 미국의 개발자 포럼에 존 카맥이 글을 남기는 것으로 시작됐는데 당시 게이머들의 항의는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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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점차 언리얼 토너먼트에 익숙해져 가고 있던 게이머들은 퀘이크 3의 테스트 버전이 출시되자 변함없는 믿음으로 다시 퀘이크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후 CPL과 같은 세계적인 게임대회에서 퀘이크 3를 앞다투어 소개하고 수많은 고수들이 탄생하며 다시 id소프트의 세상이 도래한다.
퀘이크 3로 또다시 인기궤도에 오른 id소프트는 1997년 당초 계획했던 울펜슈타인의 부활을 이뤄냈다. 2001년 id소프트는 그래이 매터 인터랙티브, 너브 소프트웨어와 파트너쉽 계약을 맺고 자신들을 이 자리에 있게 한 과거의 역작,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을 단기간에 제작하여 출시한다. 퀘이크 3 아레나 그래픽 엔진으로 제작된 이 게임은 출시 이후 한달 여만에 또다시 1백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달성한다. 이 작품은 2001년 말 퀘이크 3 엔진으로 제작된 EA의 메달 오브 아너와 미묘한(?) 경쟁을 시작하는데 똑같이 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개성을 갖춰 두 작품 모두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당연히 id소프트는 엔진판매나 리턴 투 캐슬울펜슈타인의 판매량 정도에 안주할 회사가 아니었다. 이들은 이미 1999년 퀘이크 3가 출시되던 당일부터 둠 3 프로젝트에 착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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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에 열린 E3에서 둠 3의 플레이 영상이 비밀리에 공개된 적이 있었다. 화면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가 물리역학에 의해 반응하는 것과 실사를 보고 있는 듯한 게임플레이 영상은 업계관계자들과 게이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 당시 세계적인 개발자들의 포럼엔 “둠 3의 플레이 영상을 보고 이 바닥에 입문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한다”라는 멘트가 가득할 정도였으니 그 위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id소프트는 둠 3로 그간 ‘엔진장사업체’라고 불렸던 4년간의 공백기간에 있었던 오해를 모두 풀어버리겠다는 각오다. 그들의 호언장담에 믿음이 가고 존 카맥의 거만한 행동에도 눈살을 찌뿌리지 않는 이유는 10년 앞을 넘겨보는 심미안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고도의 기술력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게이머들은 id소프트의 도전에 항상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으며 어떠한 돌출행동에도 비난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둠 3라는 괴물이 또다시 게임업계에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지 벌써부터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한다. 마냥 부럽지 않은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도전정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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