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길마님의 하루
‘이 X새끼야. 지난 공성전 때 공성 쪽 길드 매수해서 수성한 것 다 안다! 그렇게 돈 처먹이고 수성하고 싶냐. 더러운 새끼들!!’
뮤의 초대성주를 맡고 있는 황태권 씨(47 · 서울 강서구)는 PC를 켜자마자 게시판부터 확인한다. 오늘도 여지없이 그를 욕하는 비난성 글들이 게시판에 도배되어 있다. 거대길드의 군주로서 이제 욕먹는 일은 일상사가 된지 오래다. 그는 게시판에 나도는 각종 비난성 글과 길원 들의 요구사항을 파악한 후 게임에 접속한다. 뮤 초대성주인 그의 캐릭터는 연합길드를 이끄는 군주다. 한마디로 온라인게임 세계의 ‘왕’이다. 게임을 시작하니 길원 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귓속말을 보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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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직장인인 황태권 씨. 하지만 온라인게임 뮤에서는 일국을 다스리고 유저들에게 존경받는 군주다 |
“길마님, 하이!”
“오빠, ㅎㅇ”
“오랜만이다! 너 요즘 접(게임접속)을 안하더라. 무슨 일 있냐?”
일반적으로 길드장을 가리키는 말로는 남자는 ‘길마님’, ‘형님’으로 통하고, 여자는 보통 ‘오빠’로 부른다. 단 나이를 불문하고 길드장에게는 절대적으로 존칭을 써야한다. 채팅창에 인사말 러시가 끝난 후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길드원들의 민원을 해결할 시간이다.
연합길드 장으로서 400여명이 넘는 길드원들의 대소사를 챙기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게임에 접속할 때마다 길드원간의 사소한 불협화음부터 상대길드의 도발까지 길드장이 해결해야 할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다. 더구나 일주일 후에 공성전이 열리기 때문에 적대길드와의 신경전이 장난 아니게 살벌하다. 이때 한 길드원이 용탑안의 자리싸움으로 적대 길드에게 PK를 당했다고 호소해 왔다.
“길마님, 용탑안에서 오토(자동 사냥프로그램) 돌리고 있는데 ○○길드 새끼들이 다굴쳐서 누웠어요(죽었다)”
“싸가지 없는 놈들! 그 놈 캐릭 명이 뭐야?”
평소 앙숙지간인 길드라서 그런지 채팅창의 분위기는 한층 격앙되어 있다. 길드의 수장인 황씨의 ‘윤허’만 떨어지면 곧바로 적대길드와 한바탕 싸움을 치룰 태세다. 20대의 혈기왕성한 유저들은 채팅창에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원로 게이머인 황씨는 길드장의 입장에서 항상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는 흥분한 길드원들을 자제시키고 사건현장으로 달려간다. 분쟁지역에 도착한 그에게 적대 길드원들은 또 한 차례 욕설을 퍼붓기 시작한다.
“야! 사기꾼 길드장 왔다!”
“나 고딩인데, 너 나이 살 처먹고 할일이 그렇게 없냐?”
“미친 것들, 니 ××는 ××다”
일단 부모 욕이 나오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성을 읽기 시작한다.
하지만 길드장의 명령이 없이 절대 상대를 먼저 처서는 안 되는 것이 이 바닥의 불문율.
만약 길드장이 길원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그 길드 전체가 서버에서 ‘왕따’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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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 캐릭터는 온라인게임의 또다른 운영자다. 군주 캐릭터의 대부분은 나이 지긋한 중년게이머들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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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예의를 지켜가며 상대방 길드장과 일대일 대화를 통해 조심스럽게 중재를 시도한다. 상대 길드장도 나이 50을 바라보는 중년 게이머. 어느 정도 말이 통한다. 다행히 협상이 원활히 이루어져 각 길드장들이 서로 사과를 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됐다.
길드장 선에서 분쟁이 마무리되자 서로 으르렁 거렸던 길드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렇듯 게임 운영자도 해결 할 수 없는 게임 속 온갖 분쟁들을 길드장들의 한마디로 모두 정리된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10대나 20대 애들이 길드장을 맡으면 안하무인으로 날뛰기 마련이지. 그런 길드는 결속력이 없어 오래가지 못한다구. 대부분 거대길드는 보통 30대 후반이나 40대의 정도의 사람들이 길드장을 맡곤 하지. 그래야만 게임상에 확실히 위계질서가 잡히거든”
나이든 사람은 게임하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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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나이든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가 많다. 40대 이상의 게이머들을 보면 ‘직장 잃고, 가정에서 소외당하고, PC방에 파묻혀 게임에만 빠져있는 인생 패배자’ 정도로 색안경을 끼고 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평범한 가정에 건실한 직장이나 사업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아버지’들이다. 온라인게임 뮤의 연합 길드장을 맡고 있는 황태권 씨도 슬하에 두 자녀를 두고 있다. 지금은 게임상에서 운영자보다 더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그였지만 2002년 뮤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게임의 ‘게’자도 모르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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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의 중년의 나이지만 황씨의 게임에 대한 열정은 10대, 20대 못지 않게 뜨겁다 |
“주로 해외 출장을 많이 나가가는 직업이지. 직장 일에만 얽매여 있어 점점 애들하고 멀어지더라구. 그래서 그때 고등학생인 큰아들과 친해지려고 같이 게임을 하기 시작지. 지금은 아들 녀석은 군대가고 나만 게임을 하게 됐지”
아저씨는
게임계의 ‘신주류’
온라인게임을 즐기는 중년층 중 70% 이상은
PC방 운영을 하는 업주들이다. 나머지 30%는 일반 직장인이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중년 게이머들은 PC방, 식당 등 주로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거나 레미콘
기사, 경비 등 하루 2교대로 근무하는 ‘시간제 종사자’들이 많다. 또 부부가 함께
게임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남편이 직장간 사이에 남편 캐릭터 돌려주는 주부들도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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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욱한 담배연기, 재털이에 수북히 쌓인 꽁초, 명예 퇴직자, 소외받은 가장, 무능한 아버지 등 중년 게이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아직도 부정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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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황씨와 같은 직장인의 경우에는 퇴근 후 저녁 시간대에 집에서 게임을 플레이 한다. 주로 PC방에서 하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애들도 많은데 혼자 넥타이 메고 PC방에 출근하기도 뻘쭘해서 주로 집에서 한다”고 대답한다. 특히 20대 애들이 옆에서 보고 있으면 마치 ‘나도 늙어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하는 듯한 눈빛으로 보는 것 같아 사람 많은 PC방은 안간다고 한다. 오랜 연륜 으로 자연스럽게 길드장으로 추대된 그는 요즘에는 캐릭터 키우는 일보다 길드 관리하느라 정신없다.
최근 게임에 공성전이 업데이트 되어 적대길드로부터 성을 지키느라고 머리털이 빠질 지경이다. 평화로운 시절이 지나가고 그야말로 난세가 온 것이다. 업체의 부당한 서비스에 대해 강하게 항의를 하는 것도 아저씨 유저들의 몫이다.
업체도
벌벌 떠는 중년파워!!
지난 3월 15일, 황씨에게 급한 연락이
왔다. 뮤 공성전에서 초대성주를 맡았던 유저들이 웹젠에 집단항의를 하러 간 것.
그 자리에 모인 초대성주들은 최소 30대에서 많게는 50대 이상의 게이머들이다. 게임
상의 문제점이 드러나자 자리를 떨치고 무작정 개발사로 돌진한 것도 열혈 게이머들도
바로 아저씨들이다. 업체의 운영자들이 나타나자 황씨를 비롯한 초대성주들은 초장부터
거세게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지금 공성전, 속된 말로 개판이요 개판!”
“저희도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조금 기다리시면…”
“언제까지 기다리나? 우리도 젊은 애들한테 온갖 욕을 먹어가면서 게임하는 게 좋은 줄 아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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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업체에 직접 찾아가 잘못된 점을 사정없이 지적하는 중년 게이머들 앞에 업체들도 꼼짝을 못한다. 어린 것 들은 할 수 없는 아저씨들만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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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일 줄 모르는 아저씨들의 기세에 업계관계자들은 진땀만 쏟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 모인 유저들은 모두 게임상에서 소위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말 한마디가 수백 명의 유저들이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들이다. 이들 아저씨 게이머들에게는 단순히 “알아보겠다”라는 미봉책은 통하지 않는다.
아저씨들은 업체측의 확실한 답변을 받을 때까지는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는 저력이 있다. 그렇다고 업체 사람들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법. 결국 이날 초대성주들은 공성전 준비기간을 일주일 늘린다는 답변을 즉석에서 받아냈다. 이것이 젊은 사람들은 하지 못할 아저씨들만의 ‘올드 맨 파워’다.
게임을
왜 하냐고? 그냥 하는 거지!!
대부분 유저들은 게임을 재미있어서
한다고 말한다. 특히 게임을 좀 한다는 유저들은 장르, 그래픽, 조작법, 사운드 등
게임성을 꼼꼼히 따져가며 선택한다. 또 조금만 실증을 느껴도 쉽게 게임을 접는다.
하지만 아저씨 유저들은 다르다. 이들에게 게임을 왜하냐고 물어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질문이 없다.
“아저씨, 나이 어린 애들한테 욕먹어 가면서 왜 게임을 하는가요?”
“술 먹고 담배 피는 게 이유가 있나? 그냥 하는 거지”
황씨 아저씨는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식으로 기자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저씨 유저들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게임성’ 같은 것은 따지지 않는다. 그냥 손에 맞고 눈에 익으니까 한단다. 또 ‘현거래’, ‘오토프로그램’ 등 업체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금지사항’도 이들에게 있어서는 우스울 뿐이다.
“와우(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재미있다는데 해 보셨어요?”
“와우? 그거 조작법이 까다로워서 조금 하다가 때려치웠지. 누르는 키가 너무 복잡해서 내 손에 안 맞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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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바둑, 낚시같은 취미생활에서 최근에는 '온라인게임'이 아저씨들의 주요 '놀거리'로 각광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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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돈과의 전쟁! 만만치 않은 게임 유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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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길드장 하면 한달에 전화비만 30만원 이상은 기본이지, 전화세고지서 나오는 날이면 마누라가 난리난다구. 요즘에는 060서비스 이용한 것 아니냐고 의심까지 하더군” 아저씨 게이머들로서 게임플레이에 가장 큰 애로사항은(?) 업체도 유저도 아닌 ‘가정’이다. 특히 한달에 들어가는 게임유지비가 만만치 않아 용돈은커녕 비상금으로 꼬불쳐 놓은 쌈짓돈을 다 털어도 빠듯할 지경. 황씨의 경우 길드원과 전화통화가 잦아 한달 전화비만 해도 30만원 이상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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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비, 게임 이용료, 인터넷 사용료 등 게임유지비가 만만치 않게 든다 |
또 한달에 한번씩 길드원과 현모(직접만나는 모임)하는 날에는
명색이 길드장으로서 한턱 쏴야하니 그야말로 기둥뿌리가 뽑힐 지경이다. 길드장을
맡으면서 현모나 아이템 구입에 쓴 돈이 못해도 3백만 원은 넘는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일요일마다 공성전이 있어 주말이 평일보다 더 바쁘다. 공성전 때는
길드의 간부들이 모여 PC방에서 함께 플레이하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천상 PC방으로
출근해야 한다.
“다른 마누라는 낚시나, 조기축구에 남편 뺏겼다는데 우리 마누라는 게임 때문에 못살겠다고 안달이더군”
이러다보니 부인에게는 면목이 안설 수밖에 없다. 자식들 다 키워 군대까지 보냈는데도 아내만 보면 자동적으로 PC의 모니터를 끄곤 한다. 이건 완전 수험생이 따로 없다.
그는 이제 6개월 동안 맡아왔던 길드장의 자리를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게임을 당분간 쉬려고 한다. 이제는 길드의 일선에서 물러나 길드의 고문역할로
좀더 자유롭게 플레이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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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자식들이라고 했던가? 이들 때문에 아저씨 게이머들이 집안에서 온전히 게임한판 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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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아빠의 청춘'
아저씨 게이머 황태권 씨, 그에게 있어서
‘게임’이란 어린놈들한테 욕이나 먹고, 시간 뺏기고, 돈 잡아먹는, 어쩌면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물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중년 게이머들은
젊은이들보다 몇 갑절 더 열성적으로 게임에 몰두한다. 어쩌면 이들에게 있어서 게임은
세상사에 찌든 고단한 몸을 잠시나마 쉬게 하는 또 하나의 ‘인생’은 아닐까. 그래서
중년 게이머는 단순한 ‘재미’보다는 게임 속 ‘인생’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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