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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연대기(The Luna Chronicle)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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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게임메카와 이야인터렉티브는 ‘귀환병이야기’ ‘쿠베린’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판타지 소설 작가 이수영씨의 ‘루나 연대기’를 매주 월/목요일 주 2회 연재합니다. 소설 ‘루나 연대기’는 ‘루나온라인’의 기본 세계관인 블루랜드를 배경으로 한 왕자의 모험담을 담고 있습니다.

 

은빛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모습이 귀족가의 기사단을 연상시켰다. 앞에 서 있는 것은 검은 단발머리에 아직은 앳된 모습이 남은 아리따운 여성이었다. 걸친 망토에 박힌 문장은 붉은 초승달. 문장을 보아도 확실히 정규 기사단이다.

키안은 여기사는 난생처음 보았기 때문에 두 눈을 의심했다. 이 눈앞의 여기사도 이종족일 지도 몰랐다. 여자가 기사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가?

“리앤님~!”

통통한 소녀는 말 그대로 통통 달려서 여기사에게 매달렸다.

“정말 오랜만에 뵈어요!”

“한 달 만이네. 그런데 왜 길에서 싸우고 있었지?”

말은 소녀에게 말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키안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살벌한 기운을 이미 느끼고 있었던 탓이다. 그녀는 섬세한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키안 로혼 발로르. 그러는 그대는 누군가?”

리앤은 그의 말투에서 고압적인 기운을 느꼈다. 그런 기운은 어지간히 몸에 익지 않으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알케르 시의 기사 리앤입니다. 발로르경, 어디서 오신 분이신지?”

“기사? 이곳에 기사단이 있단 말인가?"

“말이 심하오!”

그가 얼굴을 찌푸리자 리앤의 뒤에 있던 다른 두 명의 기사들이 울컥했다. 초라한 행색을 한 주제에 함부로 하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도 분명히 들었다. 루이루아를 가리켜 천한 것이라고 하던 말을.

“이 아이와는 무슨 일이신지?”

리앤은 여전히 침착하게 물었다. 멀리서 루이루아와 키안이 일으킨 소동을 보고 그녀는 자칫하다간 거대한 덩치를 가진 이방인이 루이루아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위험천만했다.

“다짜고짜 하대를 하면서 덤벼들었다.”

키안이 귀찮다는 듯이 턱짓을 하자, 옆에 있던 루이루아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난 망토에 대해서 물었을 뿐이야!”

“내가 답할 의무는 없다. 게다가 너는 무례했다.”

잘라 말하는 그를 보고 리앤은 흥분하는 루이루아를 제지했다. 그녀 역시 왜 루이루아가 키안에게 달려들었는지 짐작이 갔다. 특이한 물품을 모으는 루이루아에게 있어 저 정체불명의 이방인이 걸친 검은 망토는 호기심의 대상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상대는 어린 소녀입니다. 그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릴 테니 그만 용서해 주시지요.”

저렇게 거만한 태도라면 귀족임이 분명했다. 알케르 시가 비록 마법사들의 도시라 해도 고위귀족과의 마찰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블루랜드 내에서 고위귀족의 존재는 무척 드물었다. 어지간한 자가 아니라면 귀족이라고 나서지도 않는다.

키안은 그녀를 무뚝뚝한 얼굴로 보다가 고개만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그 태도에 격분한 다른 기사들이 칼자루에 손을 댔지만 리앤이 급히 제지했다. 그녀가 말리는 사이에 그의 모습은 금세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하지만! 나에게 함부로 말했다구요! 천하다니. 그런 말을 듣고도 참아요?”

루이루아가 분해서 소리치자 리앤은 고개를 내저었다.

“너도 경솔했어. 억지가 통할 상대에게나 큰 소리를 치도록 해. 자칫했으면 위험했어.”

“핏, 저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어요.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는다고요.”

루이루아는 불만어린 어조로 항의했지만 리앤은 뒤에 선 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되도록이면 타지의 귀족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해라. 귀족들과 시비가 붙어서 좋은 일은 없어.”

“하지만, 단장님!”

씨근덕거리면서 젊은 기사가 항의해 왔다. 아직 3년 차인 알케르 기사단의 막내인 질렌이었다.

“그 자는 아무리 보아도 타지의 귀족으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오지에서 갓 튀어나온 촌놈처럼 보였다구요.”

“아냐. 그 말투는 남을 지휘해 본 자의 말투야. 게다가 검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 그런 자를 향해서 너는 검을 뽑을 셈이야?”

그녀의 말에 젊은 기사는 침묵했다. 옆에 있던 루이루아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그러고보니 좀 이상하네요. 무기라고는 전혀 없던 것 같은데 그 이방인은 대체 어디서 온 거죠?”

그렇다.  

알케르 항구로 들어오려면 알케르 평원이나 창공의 탑이 있는 곳을 거쳐야 만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 곳을 혼자 몸으로 뚫고 왔으면서 무기도 없단 말일까. 리앤은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 그 괴상한 말투를 가진 남자는 루이루아를 단번에 죽이려고 했다. 마치 벌레를 밟아 죽이려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그녀는 그 남자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이상하구나. 넌 그 남자가 무섭지 않았니?”

그녀가 조용히 묻자 루이루아의 눈이 커졌다.

“무서워? 뭐가? 그저 이상한 재질의 이상한 망토를 가진 이상한 놈이었을 뿐이에요.”

그 천연덕스런 대답에 리앤은 고개를 내저었다. 루이루아는 어리긴 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 역시 이런저런 일을 겪어 능숙한 거래를 이끄는 상인. 각종 물품들을 다루고 많은 자들을 겪어 왔다. 그런데 이렇게나 그 이상한 작자의 살의에 대해 무감각했다니.

그녀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키안은 거리를 그냥 걷고 있었다. 꽤 넓은 곳이라 생각했지만 돌아다니다 보니 그다지 넓지도 않았다. 기사단이 있는 것을 보니 체계가 잡힌 도시라는 것만은 분명했지만 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낯선 거리와 너무나 낯선 사람들, 그리고 낯선 단어와 풍습.

그는 샀던 빵을 금방 먹어버렸다. 그리고 다 먹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무료하니 오히려 불안하기까지 했다. 아무데나 걷다가 길거리에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앞치마를 멘 소녀가 다가와 물었다.

“무엇을 드시겠어요?”

얼결에 앉았는데 식당이었던 모양이다. 키안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로 옆 자리에 앉아서 뭔가 알 수 없는 음료를 마시는 여자들을 보고 소녀에게 물었다.

“시원한 거. 어떤 게 있지?”

“시원한 거라면 빙수와 딸기얼음주스가 좋죠. 오렌지 주스도 있어요. 술은 안 팔아요.”

“그럼 오렌지 주스.”

목이 말랐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소녀가 가져온 음료를 입에 대다가 놀랍도록 개운한 그 맛에 혹해 두 잔을 연이어 들이켰다. 뭔지도 모르고 죽죽 들이키고 나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배가 부르면 낙관적이 되는 법.

방금 전까지 우울했던 기분을 털어버린 그는 느긋하게 생각했다.

이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를 고향에서 몰아낸 이유로 쫓기진 않으리라. 이미 고향에 대한 애착은 없다. 아예 모르는 곳이라면 그에 적응해서 살아가면 되리라. 고독은 이미 익숙했다. 배척하는 시선에 위축되진 않는다.

키안은 느긋하게 생각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한 지식과 물품이었다. 그가 가장 잘 하는 것은 사냥이었다. 그러니까 굶어죽을 염려는 없을 터. 어디든 짐승은 있기 마련이다.

그는 새 담뱃대에 불을 붙이고 느긋하게 연기를 뿜어냈다. 독한 향기가 가슴 속에 들이차자 점점 더 침착해지는 기분이었다. 중독성이 있는 독초지만 어쨌거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데 탁월한 물건이었다. 그는 오가는 사람들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물건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사냥에도 도구가 필요하다. 그에겐 동료는 있었지만 도구가 없었다.

 

++++

 

킴볼은 모처럼 맞는 휴식에 기분 좋게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어제 들이킨 맥주는 맛있었고 안주도 좋았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휴가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이번 주에 그는 비번이었다. 그가 담당한 비공정이 떠났으니 항구의 경비도 모처럼 휴식기를 맞이한 셈이었다. 이 휴식기에 그는 느긋하게 전에 만들던 블레스트 아머를 손질할 셈이었다. 다 만들어 놓고도 아직 조각을 하지 못했던 지라 오랫동안 찜찜했었다.

어젯밤 이방인의 모습을 보고 떠올린 것이 사자였다. 이미 멸종한 전설적인 맹수지만 그 생김새는 꽤나 위엄이 있으니 새겨 넣기에 적당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 외에 한 쌍으로 건틀렛이나 프레일은 만들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집안 청소를 적당히 해두고 그는 큼직한 호밀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버터를 듬뿍 바르고 꿀을 뿌린 빵은 먹음직스러웠다. 그는 적당히 베어 먹으면서 마당에 마련된 간이 대장간에 주저앉았다. 주업은 치안경비대였지만 그래도 그는 드워프다. 드워프가 손에서 망치를 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렇게 휴식기가 되면 그는 자잘한 물품을 손수 만들곤 했다.

문제는 이것을 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만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그의 부친인 바케론은 킴볼이 만드는 물품에 항상 흠을 잡았다. 인간 대장장이만도 못한 물건을 내놓지 말라고 호통을 쳐댔다. 허기야 심심풀이로 만드는 물품이 좋은 평을 받긴 어려울 터였다. 그래도 가끔은 서운하기도 했다. 인정 못 받는 드워프는 반편이나 다름없으니까.

알케르 시에는 드워프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다른 드워프들과 달리 하이 드워프들은 높은 평가를 받는 전사들로 보통 마탑에 고용되었다. 일반 드워프보다 숫자가 적은 만큼 그들의 힘은 강했다. 180이 넘는 큰 키와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을 가진 킴볼은 그 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전사였다. 비공정과 연관된 항구에서는 모두 하이 드워프나 드워프를 경비대원으로 고용했다.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블루랜드에서 비공정의 관리는 곧 생명과 연계되었다. 얼음지역에서 하이엘프의 도움을 받아 아이스시드를 받아 오는 것이 비공정의 가장 주된 임무였다.

블루랜드에는 물이 귀했다. 비가 오지 않으니 귀할 수밖에 없다. 사실 샘이라고 하는 것도 없다. 결계로 대륙을 보호하고 있으니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없는 셈이다. 하지만 생물에게 물은 필수다. 그래서 하이엘프들이 살고 있는 북부 얼음지역에 가서 아이스시드를 얻어 와 블루랜드에 배포한다. 그것이 바로 비공정 관리 마탑과 경비대의 임무였다. 이것은 어떠한 단체와도 독립된 일로 어떤 자들이라도 간섭할 수 없었다.

킴볼이 하이드워프로 태어났을 때 부친인 바케론은 화를 버럭 내고야 말았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기술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하이 드워프는 전사 드워프지 물품을 만드는 드워프가 아니다. 심하게 낙담한 바케론은 킴볼을 볼 때 마다 구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성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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