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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간다] 견적서의 추억, 용산 전자상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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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두 가지쯤은 용산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기대하던 게임CD를 구입했던 일, 파트타임으로 모은 돈으로 게임기를 샀던 일, 조금이라도 싸게 PC를 사기 위해 여기 저기 견적서를 떼고 다녔던 일, 최신 기종 컴퓨터를 구입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느꼈던 두근거림 등 용산은 게임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거쳐가는 곳이다.

하지만 최근 용산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새로운 전자 제품들이 출시되면 흔히 이야기하는 ‘대세’라는 것도 바뀌기 마련이고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런데 용산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흐름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작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손님, 맞을래요?” 사건이나 올해 초 용산 3대 쇼핑몰이었던 ‘이지가이드’의 고의도산 등은 용산에 먹구름을 몰고 왔다. 지금의 용산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상가가 되어버렸다.

국내 IT문화 보급에 공로자였고, 최대 수혜자였던 용산. 지금의 용산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시절의 용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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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순이' 집터. 용산 명물 중 하나였던 '용순이'가 살던 집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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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다리. ‘용산던전 입구’로 불리는 곳. 예나 지금이나 바뀐 점이 없다. 굴다리 끝에 위치한 백업CD 아저씨들은 여전히 그곳에..

“노트북 하나 보고 가세요” 선인상가

선인상가는 용산전자상가의 입구인 굴다리를 나오자마자 처음 접하게 되는 상가다. 용산에서 PC와 관련 제품 판매 매장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한 바퀴 돌면 용산의 PC시세를 모두 파악했다고 봐도 될 정도이며, PC관련 용품을 구입하기 위해 용산에 온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려야 하는 필수 코스 중 한 곳이다. 일단 선인상가가 어떻게 변했는지 들어가 보기로 했다.

기자는 PC조립 매장이 즐비해 있는 과거의 용산을 떠 올리면 입구에 들어섰다. 그런데 왠걸? 선인상가 내부 풍경은 상당히 많이 바뀌어 있었다. 둘러보니 PC조립매장보다는 오히려 노트북 매장이 더 많았다. 조립 PC 판매대가 주를 이루던 과거와 상당히 대조적이다. 2년 만에 방문이긴 하지만 이렇게 바뀌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 쇼핑몰 그리고, 이지가이드

이렇듯 PC조립 매장들로 북적이던 선인상가가 노트북을 주력 상품으로 삼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이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일이라고 한다면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바로 인터넷 PC조립 쇼핑몰의 등장과 이지가이드의 고의 도산이다.

쇼핑몰 등장 이전, 용산 전자상가는 ‘싼 가격’을 경쟁력으로 내세워 조립 PC판매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대 인터넷 쇼핑몰이 등장하면서 용산의 ‘싼 가격’이란 경쟁력이 사라져 버렸다. 가격비교 사이트 ‘다나와’를 필두로, 각종 쇼핑몰을 통해 PC제품의 도매 가격이 투명해지면서 용산 소매상들은 그야말로 옷을 홀딱 벗고 장사하는 격이 된 것이다. 용산 매장 대부분이 소매상들이다 보니 도매가격으로 PC를 쇼핑몰보다는 비싼 것은 당연지사. 특히 막대한 자본력으로 무장한 거대 쇼핑몰과 용산의 소매상들이 같은 수준의 가격경쟁을 펼칠 수 없다.

결국 소매상들 입장에선 당장 몇 대라도 더 팔아야 자금회전이 생기고 그것으로 다른 제품을 들여올 수 있는 상황이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손해를 보고 팔 수 밖에 없다. 과거처럼 마진을 붙였다간 단번에 ‘쇼핑몰보다 비싼’ 제품이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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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 수의 매장이 노트북을 주력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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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창이 내려진 매장들. 이러한 매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소매상들뿐만 아니라 용산일대의 도매상들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지난 3월 용산일대 PC도매상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준 이지가이드 고의도산 사태. 용산 3대 쇼핑몰 중 하나였던 이지가이드가 고의적으로 부도를 내고 해당 업체 대표가 회사자금을 챙겨 해외로 도주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에 뒤를 따르듯 인터넷상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쇼핑몰 몇 곳도 연쇄적으로 부도를 냈다. 조사 발표에 따르면 이 역시 고의 부도였다고 한다. 도매상들에게 외상으로 물품을 사들이고, 그것을 소비자에게 현금을 받고 판매한 뒤,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고의로 도산한 것이다. 한 마디로 ‘먹튀(먹고 튀다)’한 것이다.

이지가이드에 물품을 조달하고 돈을 받지 못한 도매상들의 피해규모는 최소 40억에서 최대 90억에 이란다고 보도된 바 있다. 평균적으로 한 도매업자가 받지 못한 물품대금이 수천에서 수억에 이른다고 하니 피해를 당한 도매업자의 사업이 휘청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이 도매상들이 문을 닫는 사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왜 도매상들은 쇼핑몰들과 외상거래를 할 수 밖에 없었을까? 그 이유는 악질적인 용산일대의 관행에 있다. 도매상이 쇼핑몰을 상대로 현금을 받고 물품을 납품하려 하면, 쇼핑몰들은 고개를 좌우로 젖는다. 현금 거래를 원하는 도매상과는 거래를 하지 않는 다는 뜻이다. 이런 악질적인 관행이 팽배해 있지만 한 대라도 더 팔아야 하는 절박한 도매상들 입장에선 별 말을 못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립 PC보다 그나마 상황이 나은 노트북을 판매하는 도, 소매상이 많아진 것이다. 노트북의 경우 기타 옵션(메모리, 하드 디스크, 무선 인터넷 사용기기)등으로 조금이나마 마진을 남길 수 있고, 완제품이기 때문에 소비자들도 안심하고 구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제 더 이상 선인상가는 조립 PC의 메카가 아니다.

“여기가 골동품가게야, PC패키지 매장이야?” 도깨비 상가

이번엔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한 도깨비 상가를 가보았다. 도깨비 상가는 주로 PC패키지 게임이 주를 이루는 상가다. 기자 역시 과거 이곳에서 많은 구입했었고, 저렴한 가격에 주얼CD(외부 패키지와 메뉴얼을 없애고 CD만 판매하는 제품)를 여러 개 구입했었다. 단돈 5천원으로 게임 CD를 살 수 있는 고마운 곳이 바로 도깨비 상가다.

그런데 이곳은 선인상가보다 상황이 더 심했다. 주얼CD 매장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었고 그나마 남아있는 PC패키지 매장들도 수 년이나 지난 게임을 진열해 놓고 있었다. 최신 게임은 ‘가뭄에 콩 나듯’ 찾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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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더 이상 주얼게임CD 매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2000년 발매된 ‘악튜러스’도 진열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골동품 가게에 온 기분이었다. 그나마 최근 출시된 ‘C&C3: 케인의 분노’가 최신작 코너를 외로이 지키고 있었다. PC패키지 게임 시장이 아무리 힘들다고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물론 요즘은 소비지가 직접 매장에 들러 게임 패키지를 구입하지 않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래서 매장에 소홀히 꾸며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출시되는 신작 PC패키지 게임이 많다면 지금처럼 옛날 게임을 진열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매장은 신작 게임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다. 일주일에 약 두, 세 개의 PC타이틀이 발매되는 북미와 우리는 너무나도 딴판이다.

이 시점에서 PC패키지 시장이 이처럼 침체된 이유에 대해서 일일이 이야기하는 것은 사족에 가깝다. 독자들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복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지인인 게임 개발자와 함께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가 떠 올랐다.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당시 인기를 끌었던 호러 어드벤처게임 ‘화이트데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2002년 정도였으니 각종 잡지를 통해 공짜CD가 배포되기 이전이다.

개발자: 손노리에 아는 사람한테 들었는데, ‘화이트데이’ 패치 한 번 뜨면 다운로드 수가 30만이 넘는데.

본인: 우와! 그렇게 대박난 줄은 몰랐네.

개발자: 크크, 그런데 문제는 팔린 패키지 수가 그 반에 반도 안된다는 거야. 답답한 현실이지?

“닌텐도DS의 효자는 R4?” 나진상가 지하

‘용산이 참 힘들구나.’라는 생각에 기분이 쳐진 채로 다음은 비디오 게임 매장이 응집해 있는 나진상가 지하로 가보았다. 그래도 다행이 이곳은 나름대로 과거의 활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매장 이곳저곳에서 가족단위 혹은 연인들이 닌텐도DS와 Wii를 구경하는 풍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기대하던 PS3가 썩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한 때 비디오 게임 시장이 수렁으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왔었다. 하지만 다행히 닌텐도DS가 젊은층의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 잡으면서 지금의 활기를 유지하고 있다.

닌텐도DS가 지금처럼 성공한 요인을 살펴보면 아이러니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닌텐도코리아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물론 어느 정도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요인이 있다. 바로 불법 소프트웨어인 ‘R4’의 존재다.

‘R4’는 본래 멀티미디어 지원 장치(동영상, MP3 등을 사용할 수 있는)로 개발됐지만, 이 ‘R4’를 이용해 불법 복제된 게임데이터 파일을 실행하는 용도로 변질됐다. 간단히 말해 정품 게임팩을 구입하지 않고도 불법 복제된 게임데이터를 사용해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인 것이다. 각종 불법다운로드 사이트를 통해 유저들은 돈 한푼 내지 않고 다양한 게임들을 다운받아 즐기고 있는 상황이다.

PSP 역시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본래 PSP에 내장되어 있는 소프트웨어를 불법 개조해(일명 커펌) 게임CD를 구입하지 않고 최신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반대로 PS3의 경우 현재 이러한 불법 개조가 존재하지 않아 하드웨어 판매량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말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점은 과거 우리가 저질렀던 못된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PC패키지 시장은 불법복제로 인해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우리는 PC패키지 시장을 없앤 것도 모자라, 이제는 비디오 게임 시장까지 위협하고 있다. 비디오 게임 시장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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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닌텐도DS에도 'R4'가 깔려있는가?

‘손님 맞을래요?’ 사건 이후의 용산을 다녀와서

용산을 취재하면서 기자가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 ‘용산에선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 말아라.’ 용산 상인들 대부분이 기자라고 하면 일단 떨떠름함 표정을 짓고 사진이라도 찍으려 하면 언성을 높이며 카메라를 치우게 했다. 언론에 대한 적대심이 대단했다. 이런 상인들의 언론에 대한 적대심은 1년 전 그 사건이 이후부터라고 한다.

바로 “손님 맞을래요?” 사건.

이 사건은 작년 이맘때 인터넷을 뜨겁다. 고객을 상대로 협박에 가까운 언행을 내뱉은 용산의 한 카메라 매장 직원의 행태가 뉴스를 통해 보도되면서 일파만파 확대됐다. 각종 언론과 네티즌들은 마치 용산이 협박과 바가지의 온상인 것인 양 질타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용산 전자상가의 전체적인 이미지 추락은 물론, 찾는 사람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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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바로 그 사건

‘바가지’는 용산이든 어디든 전자상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있다. 친한 지인이 학생 시절 강변역에 위치한 거대 쇼핑몰에서 파트타임을 뛴 적이 있다. 그가 일한 곳은 컴퓨터 매장으로 한국 굴지의 유명 그룹 소속 매장이었다.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 가장 먼저 교육시키는 것이 소비자를 보는 안목이다. 어떤 안목인고 하니,

“잘 봐서 컴퓨터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 같으면 비싸게 불러.”

보통 이 매장의 경우 ‘거대 쇼핑몰, 그것도 한국 굴지 그룹 소속의 매장이니 믿을 만하겠지.’란 생각에 찾아오는 소비자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일단 ‘PC까막눈’ 소비자가 걸려들면 4만원 제품이 7만원으로 변신한다. 두 배는 아니니 양심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소비자가 왜 이리 비싸냐고 물어보면 “대기업 제품이라 프리미엄이 붙어서 그래요. 대신 A/S는 확실하죠.”라고 얼버무리면 끝. 4만원에 사나 7만원에 사나 A/S는 똑같다.

기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런 협박조, 바가지가 비단 용산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곳이든 양심적인 상인이 있고 그렇지 못한 상인이 있다. 비양심적인 몇몇 상인을 보고 모든 상인이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물론 용산 자체적인 정화작업도 필요하다. 실추된 이미지를 끌어올리고 좋은 제품을 싸게 공급하며, 소비자에게 친절할 수 있도록 상인들 자체적으로도 노력해 나가야 한다. 이런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비로소 소비자가 돌아올 것이다. 지금처럼 무작정 숨기고 막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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