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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개발사의 과거와 굴욕 (3) - 되로 주고 말로 받은 닌텐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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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유명 개발사의 과거와 굴욕 (1) - 동양편 보러가기

우리가 몰랐던 유명 개발사의 과거와 굴욕 (2) - 서양편 보러가기

닌텐도 ‘플레이스테이션’이 탄생할 뻔 했다고?

▲ '플레이스테이션'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콘솔 게임을 즐기지 않는 분이라도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후속 기종인 ‘플레이스테이션2’까지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2억대 가까이 팔린 대기록을 가지고 있고,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3D 게임 시대를 개막한 장본인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원래 ‘플레이스테이션’이 ‘닌텐도’사의 상표를 달고 나올 뻔 했다는 사실은 아십니까? 우리가 몰랐던 유명 개발사의 과거와 굴욕, 이번 시간에는 ‘플레이스테이션’의 탄생과 성공에 얽힌 닌텐도에 대한 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편한 동거: 소니와 닌텐도가 손을 잡고 게임기를 개발하다

▲ 소니의 성공신화를 이룩한 '워크맨'

예나 지금이나 ‘소니’는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기업입니다. 당시 ‘워크맨’을 비롯한 ‘소니’의 가전 제품은 일본 시장뿐 만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도 ‘Made in Japan’을 앞세워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잘나가던 ‘소니’에 괴짜가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 ‘구타라기 겐’입니다.

▲ 바로 이 사람이 '구타라기 겐'

1975년에 소니에 입사한 구타라기 겐은 오디오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둔 후, 미래의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생소하던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일부러 배우고, 컴퓨터들을 사다가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구타라기 겐’이 게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던 닌텐도의 ‘패미컴(NES)’덕분이었습니다. 아들의 생일 선물로 패미컴을 선물하자, 아이가 너무나 즐겁게 패미컴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구타라기 겐은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다’라는 확신을 얻습니다.

▲ 닌텐도 절정기의 상징이었던 '슈퍼 패미컴'

구타라기 겐은 당시 업계의 선두주자였던 닌텐도를 일부러 찾아가서 게임기 사운드 처리 방식의 변경을 제안했습니다. 거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직접 고안한 사운드 처리 칩을 닌텐도가 신형 게임기-슈퍼 패미컴(SFC, 혹은 SNES)-에 채용하도록 설득하고 마침내 채용에 성공했지요. 이 당시 컴퓨터 부문 사업이 죽을 쑤던 소니 입장에서 닌텐도의 사운드 칩 채용은 고무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닌텐도는 소니와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닌텐도는 소니의 앞선 기술력을, 그리고 소니는 경험 없던 게임 시장에 닌텐도라는 든든한 동반자를 가졌으니 서로 만족스러운 장사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가장 만족스러운 사람은 구타라기 겐이었습니다. 구타라기 겐의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언젠가 소니가 게임기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고, 소니와 닌텐도의 합작은 그 첫 단계일 뿐이었습니다.

▲ 지금이야 소니가 노트북으로 잘 나가지만...

역설적인 것은 ‘소니의 게임기 프로젝트’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소니의 최고 경영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워크맨’과 ‘텔레비전’으로 소니를 일구어냈던 최고 경영진들은 새로운 시장인 게임기 사업에 진출하길 두려워했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소니의 컴퓨터 부문 사업이 한창 부진했던 터라 이런 두려움은 한결 더해져 디지털 관련 사업을 제안하는 구타라기 겐을 ‘미친사람’ 취급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타라기 겐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 게임 역사를 영원히 바꾼 'CD-ROM'

1990년대 초, 새로운 매체인 ‘CD-ROM’가 등장하면서 게임기 업계는 혁명을 겪게 됩니다. 답답한 용량을 가진 기존 롬 카트리지나 플로피디스켓에서 벗어나 고용량을 사용할 수 있는 ‘CD-ROM’으로 더 화려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닌텐도와 소니는 ‘CD-ROM을 매체로 하는 슈퍼 패미컴의 차세대기’의 개발 협정을 맺게 됩니다. 당시 기술력으로는 최강이었던 소니와 게임 업계의 1위인 닌텐도가 공식적으로 손을 잡자, 소니와 구타라기 겐은 ‘이제 게임 시장에 진출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습니다.

중소기업(?) 닌텐도에게 뺨을 맞은 소니

▲ 이것이 바로 문제의 '닌텐도 플레이스테이션'

1991년에 접어들자 ‘CD-ROM을 매체로 한 차세대기’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상태였고, 이제 남은 것은 공식 발표뿐 이었습니다. 소니와 닌텐도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 최대의 가전제품 박람회인 ‘CES 1991’에서 제휴 사실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세계 게임 시장과 가전 업계에 혁명을 가져 올 대 사건 이었지만 이 발표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1991년 5월, 닌텐도는 본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닌텐도는 유럽에서 명성 높은 가전업체인 ‘필립스’와 손을 잡고 ‘슈퍼패미컴용 CD-ROM 어댑터’를 공식 개발한다고 선언합니다. 소니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닌텐도에게 뺨을 얻어맞은 꼴이었습니다.

▲ 마른 하늘의 날벼락, 아니 싸대기.

소니는 이런 배신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소니가 거래해 왔던 가전 시장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비열한’ 배신을 그것도 중소기업(?) 닌텐도에게 큰 굴욕을 당한 것입니다. 당연히 소니의 경영진들은 닌텐도의 이런 ‘비열한’ 행동에 대해 크게 분노했고, 당장 게임기 사업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애들 코 묻은 돈이나 뜯어내려고 이 수모를 당해야 하느냐?’라는 말이 경영진 내부에서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닌텐도에서도 이런 배신에 대해 소니 측에 나름대로 할 말은 있었습니다. 소니의 엄청난 기술력과 자금력을 알고 있는 닌텐도였기에 ‘혹시 소니가 우리를 이용해 게임 시장을 장악하려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품어왔고(실제로 소니는 그럴 계획이었습니다.), 카트릿지 롬을 통해 수익을 얻는 닌텐도의 정책과 CD-ROM은 근본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닌텐도로서는 ‘뱃속에서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니의 라이벌이었던 필립스와 손을 잡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CD-ROM 자체가 닌텐도와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판단한 닌텐도는 결국 ‘CD-ROM 프로젝트’를 완전히 접어버립니다.)

▲ 필립스와 개발하려 했던 '슈퍼패미컴용 CD-ROM 어댑터'. 결국 중단된다.

소니는 기로에 섰습니다. 게임 사업을 완전 포기하고 전통적인 가전제품 시장으로 되돌아 갈 것이냐? 아니면 게임 사업에 진출해 닌텐도에게 제대로 ‘엿’을 먹일 것이냐? 경영진들은 이전부터 게임 사업의 포기를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이제 소니는 게임 사업을 포기하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갑니다.

그러나 1992년 6월, 소니 경영진 회의에서 모든 것이 바뀝니다. 이날 소니의 ‘오가 노리오’회장이 개최한 경영진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소니의 게임기 사업 여부’가 판가름 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회의 분위기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대부분의 고위 경영진들이 게임기 사업 철수를 주장하고 있었고, 그대로 통과될 분위기였습니다. 만약 그대로 통과되었다면 지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볼 수 없었겠지요.

여기서 구타라기 겐은 최후의 승부수를 던집니다. 오가 노리오 회장의 불 같은 성격을 자극한 것입니다. 구타라기 겐은 ‘게임기 시장에 소니 같은 대기업이 진출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 지금 게임기 시장에서 발을 빼는 건 조그만 닌텐도에게 소니가 굴복한다는 인상만을 남겨줄 것이고, 시장은 물론 마쓰시타 같은 라이벌 대기업도 소니를 비웃을 것이다. 차라리 우리가 최신 기술로 닌텐도를 꺾어버리면 훌륭한 복수가 될 것이다’라는 요지로 오가 노리오 회장을 자극한 것입니다. 특히 오가 노리오 회장은 닌텐도와의 협정 문서에 직접 사인까지 했으니까요.

▲ 닌텐도왈, 소니 멍청한 놈들아 약오르지?

이러한 구타라기 겐의 발언에 대해 ‘정통 소니맨’인 오가 노리오 회장은 격분했습니다. 오가 노리오 회장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추진하시오!’라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소니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게임기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입니다. 이후 오가 노리오 회장은 게임기 사업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올 때 마다 구타라기 겐을 강력히 지지해 게임기 사업을 흔들지 못하도록 막았고, 구타라기 겐은 게임기 개발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닌텐도와 세가 덕분에 성공한 ‘플레이스테이션’

업무용 컴퓨터인 ‘워크 스테이션’에 비해 놀이용 컴퓨터라는 의미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명명된 소니 게임기 프로젝트는 처음에는 잘 되지 않았습니다. 닌텐도가 게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마당에 아무 것도 모르는 소니가 ‘어딜 감히 넘보느냐’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고, 게임개발사들도 ‘팔리지도 않을 게임기인데 뭘 개발해?’라는 태도로 무시했습니다.

구타라기 겐은 이런 부정적인 반응에 정면승부를 감행합니다. ‘플레이스테이션’프로토 타입을 들고 다니면서 게임 개발자들에게 3D 데모를 보여줘 ‘플레이스테이션’이 얼마나 강력한 성능을 가졌는지 몸으로 직접 느끼게 했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구현되는 3D 그래픽에 개발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대부분의 개발자들이 ‘플레이스테이션’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합니다.

▲ 지금 보면 웃긴 그래픽이지만 당시에 '버파'의 그래픽은 가히 혁명이었다

이런 정면승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쟁자인 ‘세가’ 덕분이었습니다. ‘세가’는 세계 최초의 3D 격투게임인 ‘버추어 파이터’를 게임쇼에서 선보였습니다. 당시 2D가 지배적이던 게임 업계에 ‘버추어 파이터’의 비주얼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고, 개발자들은 3D의 위력을 깨닫게 됩니다. 덕분에 ‘플레이스테이션’의 3D 성능을 본 개발자들은 ‘차세대 게임 플랫폼이 다가오고 있다’라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된 것이죠.

소니의 뺨을 갈겼던(?) 닌텐도의 고압적인 정책도 ‘플레이스테이션’이 본궤도에 오르는데 한 몫 했습니다. 닌텐도가 ‘롬 카트리지’방식을 위해 신기술인 ‘CD-ROM’ 프로젝트를 포기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닌텐도는 기기 판매 외에 이 ‘롬 카트리지’를 통해서도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죠. ‘롬 카트리지’를 한 개 팔 때 마다 제작사는 일정 라이센스료를 닌텐도에 지불해야 했고, 심지어 판매마저 닌텐도 독자 유통망을 통해 판매되는 구조였습니다.

▲ 이 카트릿지를 하나 팔 때마다 닌텐도는 흐뭇, 개발사는 우울

이러한 닌텐도의 상술에 여러 개발사가 지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소프트웨어 판매량에 비해 남는 것이 없고, 오로지 닌텐도의 배만 불려주는 이런 구조는 안된다’라는 분위기가 개발사에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개발사들이 ‘플레이스테이션’이 등장하자 닌텐도에게 침을 뱉고 돌아서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꼭지에서 다시 하도록 하죠.

이런 저런 시련을 겪고 1994년 12월 ‘플레이스테이션’이 마침내 일본에서 출시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는 여기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전 세계적으로 1억 2천만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습니다. 6천만대가 팔린 닌텐도의 ‘패미컴’이나 5천만대가 팔린 ‘슈퍼패미컴’을 간단히 제쳐버리고 ‘플레이스테이션’이 게임기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습니다.

▲ 세가의 회심작, '드림캐스트'. 그러나 '드림캐스트'는 세가의 마지막 도전이 된다.

‘플레이스테이션’의 힘은 강했습니다. 닌텐도의 경쟁 기종인 ‘닌텐도64’는 애초에 상대도 되지 않았고, 2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세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가 새턴’이 ‘플레이스테이션’에 밀리자 황급히 차기작인 ‘드림 캐스트’를 발표했지만 이 역시 ‘플레이스테이션2’에 밀려버립니다. 결국 세가는 게임기 제조 산업을 떠나야 했고, 아직까지 이 때의 충격에서 회복하고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마 닌텐도가 소니를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소니 경영진 회의에서 게임 사업을 포기했다면 ‘플레이스테이션’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 ‘구타라기 겐’은 실업자 신세가 되었거나 어딘가의 한직으로 좌천당했겠지요. 그러나 소니와 구타라기 겐은 멋지게 복수를 해냈습니다. 아니, 단순히 ‘복수’를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닌텐도가 가지고 있던 제왕자리를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닌텐도의 오만과 독선이 부른 서드파티의 이탈

▲ '플레이스테이션' 성공의 견인차 역할을 한 '파이널 판타지 7'

앞에서 이야기했던 ‘플레이스테이션과 소니의 복수’가 멋지게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시 서드파티의 힘이 가장 컸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스퀘어의 ‘파이널 판타지 7’이 결정적인 계기였지요. 그런데 원래 ‘파이널 판타지7’은 닌텐도의 차세대 기종으로 개발되고 있었던 게임입니다. 아직까지도 닌텐도용 FF6의 3D데모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기도 합니다. 진위는 불분명하지만.

사실 ‘파이널 판타지6’까지 이전 ‘파이널 판타지’시리즈는 모두 닌텐도 계열 기종으로 출시되었을 정도로 스퀘어는 닌텐도의 확고한 서드파티였고, 팬들 역시 ‘파이널 판타지’의 차기작이 닌텐도 기종으로 나오리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퀘어가 닌텐도를 배신하고 ‘파이널 판타지7’을 ‘플레이스테이션’용으로 개발한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 SFC사상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파이널 판타지 6'

닌텐도측과 팬들은 ‘배신이다’,’이건 파이널 판타지가 아니다’등의 격한 반응을 보였지만 ‘파이널 판타지7’은 가장 많이 팔려나간 ‘플레이스테이션’소프트가 되면서 그 위용을 과시합니다. 그런데 왜 스퀘어는 닌텐도를 배신한 것일까요?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었지만, 닌텐도의 불합리한 소프트웨어 유통에 많은 개발사들이 서서히 염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닌텐도의 가장 좋은 서드파티라고 칭해지던 ‘남코’마저도 닌텐도의 이런 독단적인 유통 구조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소니가 제시하는 조건은 파격적이었습니다. 닌텐도로 게임을 하나 내려면 1년에 3개 이상의 게임은 낼 수 없었고, 거기에 게임 한 장당 20달러 가까운 라이센스료를 지불해야했습니다. 그러나 소니는 개발사 마음대로 게임을 내도 됐고, 수수료도 절반인 10달러 정도만 받았습니다. 여기에 소니가 제시하는 게임 유통 조건도 유혹적이었습니다. 닌텐도 계열로 내면 닌텐도의 독자적인 유통망으로 게임이 유통해야 했지만, 소니는 그럴 필요가 없이 ‘게임 회사가 알아서 하면 된다’며 재량권을 부여했습니다. 거기에 덤으로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용 개발도구와 기술지원까지 친절하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닌텐도의 기술지원이 없다시피 하던 시기에 말입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닌텐도 10년간의 암흑기

소니의 이런 파격적인 조건에 끌리지 않을 개발사는 없었습니다. 많은 회사들이 닌텐도를 이탈해 소니의 서드파티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닌텐도를 이탈한 회사는 다름 아닌 닌텐도의 가장 중요한 서드파티인 ‘남코’였습니다. 사실 남코와 닌텐도의 갈등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닌텐도가 첫 게임기인 패미컴을 발매 할 당시 남코는 아케이드(오락실)게임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남코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닌텐도는 남코에게 여러 우대 조치를 주었고, 소프트를 무제한으로 낼 수 있는 특권까지 주게 됩니다.

▲ 남코를 성공 반열에 올려놓은 '팩맨'

그러나 1982년 미국에서 ‘아타리 쇼크’가 일어나자, 남코에게 준 무제한 소프트 발매 권리가 ‘닌텐도 쇼크’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 닌텐도는 이 권리를 빼앗아버립니다. 남코로서는 열 받는 일이었고, 결국 소송까지 가게 되지만 패합니다. 남코는 어쩔 수 없이 권리를 포기하고 대신 닌텐도 계열 게임기 외의 다른 게임기로도 게임을 발매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남코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닌텐도는 분개했고, ‘남코와는 다시 거래를 말아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남코와 닌텐도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관계는 서서히 악화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남코는 닌텐도의 중요한 서드파티 중 하나였습니다. 게임센터를 휘어잡던 왕년의 남코는 닌텐도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고, 이런 불편한 동거는 ‘플레이스테이션’ 이전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 남코의 '아이돌마스터' 역시 처음에는 오락실용으로 개발되었다.

1990년대 초반,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가 가동되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한 회사 중 하나가 바로 남코였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 초기부터 남코는 ‘플레이스테이션’독점으로 ‘릿지 레이서’나 ‘테일즈 오브 시리즈’를 발매하기 시작했고, 닌텐도 쪽에는 닌텐도64의 부진한 판매량을 트집잡아 더더욱 소프트웨어의 발매 개수를 줄입니다. 남코의 ‘플레이스테이션’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냐면, 남코에 ‘플레이스테이션’개발자인 ‘구타라기 겐’의 아들을 입사시켜 줄 정도였으니까요.

▲ 남코는 여전히 아케이드 시장의 강자다. 사진은 '태고의달인 9대목'

이런 상황은 ‘스퀘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슈퍼 패미컴의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냈다’라는 평가를 받은 ‘파이널 판타지6’의 대성공 이후 스퀘어는 3D로 된 ‘파이널 판타지’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닌텐도가 소니와 벌이던 CD-ROM프로젝트를 포기하고 롬 카트릿지를 고집하면서 스퀘어는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대용량 3D 데이터는 롬 카트릿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스퀘어가 아무리 설득을 벌인다고 해도 먹힐 닌텐도가 아니었습니다.

참다 못한 스퀘어는 ‘파이널 판타지’를 ‘플레이스테이션’에 들고 가버리고, 닌텐도는 ‘배신’이라며 크게 분노합니다. (자기들이 소니에 한 계약 파기는 어떻고?) 닌텐도의 사장이 ‘이후 스퀘어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는 절대 닌텐도 기종으로 발매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발표할 정도로 두 회사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 'FF7'은 닌텐도의 10년 암흑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소니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었습니다. 마땅한 킬러 소프트가 없어 고민하고 있던 차에 스퀘어의 ‘파이널 판타지’는 그 이름만으로도 위력이 있었고, 더구나 3D인 ‘파이널 판타지7’는 ‘플레이스테이션’의 강력한 3D 성능을 알리게 되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으니까요. 게다가 자신들을 배신한 닌텐도에게 뺨까지 날려주는 꼴이니 더욱 만족스러웠습니다.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로 유명한 에닉스 역시 ‘닌텐도64’까지는 닌텐도와 긴말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플레이스테이션2’에 정식으로 서드 파티 참여를 선언하게 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닌텐도가 고집하던 ‘롬 카트릿지’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닌텐도에게 큰 이윤이 돌아가는 구조는 둘째 치더라도, 당시의 대세였던 3D 게임을 따라가기에 ‘롬 카트릿지’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편하게 CD-ROM 이용해서 찍어내면 될 게임을 불편하게 ‘롬 카트릿지’로만 발매하라고 닌텐도가 강요하니 개발사들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죠.

▲ 로딩 빠른 것 빼고 아무 장점도 없는 롬 카트릿지는 '닌텐도64'의 발목을 잡게 된다

결국 이런 대규모 개발사들과 더불어 대부분의 개발사가 닌텐도에서 ‘플레이스테이션’ 진영으로 넘어가거나 멀티를 선언하게 됩니다. 닌텐도 입장에서는 이런 개발사들의 배신이 이가 갈릴 노릇이지만, 자신들의 오만과 독선으로 빚어진 일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소니를 배신하고 필립스를 선택할 당시부터 닌텐도의 이런 배신과 오만은 게임 개발 업계에서 비판의 대상이었고, 이런 비판에 귀를 막은 것은 다름 아닌 닌텐도 자신이었으니까요. 이후 닌텐도는 ‘닌텐도64’부터 ‘게임큐브’까지 약 10여년 동안을 ‘GBA’등의 휴대용 게임기에 의지하는 암흑기를 보내게 됩니다. 단순히 소니의 ‘싸대기’를 한 방 날린 것 치고는 너무나 큰 대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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