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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DC] 10년 만에 밝히는 ‘화이트데이’ 포스트 모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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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노리가 개발한 `화이트데이`

2000년대 초반, PC게임을 즐겼던 사람 중에서 ‘화이트데이’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2001년 출시된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이하 화이트데이)’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포가튼사가’ 등 RPG로 이름을 알린 손노리가 개발을 맡아 화제가 된 작품이다.

당시 ‘화이트데이’는 1만 5천 장의 공식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화이트데이’의 성적은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당시의 어두운 현실이 반영된 결과다. ‘화이트데이’는 발매 초기 3천 장을 판매했을 때 패치 다운로드만 무려 15만 건을 달성했다. 즉, 당시 초고속 인터넷 보급과 함께 등장한 불법 사이트, 속칭 ‘와레즈’에 피해를 입은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화이트데이’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으며, 지금도 이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열띤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그만큼 ‘화이트데이’가 국내 게이머에게 인상 깊었고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마비노기’, ‘마비노기 영웅전’ 등으로 이름을 알린 넥슨의 이은석 실장은 당시 손노리에서 ‘화이트데이’의 디렉터로서 게임 개발을 진행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재미있게 게임을 개발했다는 이은석 실장. 그리고 10년이 지난 25일, 이은석 실장은 넥슨이 주최한 ‘넥슨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 2012(NDC 2012)’에서 당시 ‘화이트데이’를 개발할 때 경험한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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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넥슨 이은석 실장

제대로 된 공포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IMF로 인해 나라 전체가 힘들었던 20세기 말. 한국 게임산업은 말 그대로 ‘걸음마’ 수준이었다. 선배 개발자도 거의 없었고 PC와 온라인게임 모두 합쳐서 현재의 1/100에 불과했던 시장 규모, 창의력과 기획력, 표현력, 사업력 모두 부족했던 시기였다. 또한 다른 장르보다 RPG가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은석 실장은 당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캡콤의 ‘바이오 하자드’ 못지 않은, 제대로 된 공포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그 때까지 나온 공포 게임들은 별로 무섭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 무서운 게임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손노리에 입사하기 전인 1996년부터 1997년까지 3D SF 공포 어드벤처 게임 제작에 참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아픈 경험도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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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편을 발표한 공포 게임의 대명사 `바이오 하자드`

첫 시작. 포부는 컸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그러나 개발 환경은 순탄하지 않았다. IMF로 나라 전체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고 수천만 원의 자본금으로 막 독립한 손노리는 13명의 개발자가 3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었다. 이 중에서 ‘화이트데이’ 개발은 6명이 파트 타임으로 진행했다. 풀타임으로 계산하면 3명이 게임 전체 개발을 진행한 것이다.

그리고 3D 게임을 한 번도 개발해 본 적이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손노리에서는 3D 게임 개발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초기 목표 개발기간을 10개월로 잡고 진행했지만 당연히 불가능했다. 게임은 커녕 기술 개발에만 1년 이상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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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에서는 이미 3D가 대세였지만 국내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화이트데이’의 3D 랜더링은 엔트리브 서관희 이사가 배경을, 이은석 디렉터가 캐릭터를 담당했다. 이들은 기술 개발에 돌입한 지 8개월이 지나서야 기술 데모를 완성할 수 있었다. 기술 데모는 학교를 배경으로 주요 캐릭터가 등장하는,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 데모가 개발자들에게 큰 비전과 영감을 주었다. 기술적인 가능성과 어떻게 분위기를 전달하면 되는지에 대해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이 때 깨달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무섭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잘 아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서울 수 있다. 또한 ‘버그’도 정말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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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자들에게 큰 비전과 영감을 준 기술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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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것도 아닌데 모르면 무서운 장면

디렉터 승급. 좌충우돌 게임 개발기

개발 2년 차에 접어들면서 이은석 실장은 디렉터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명시적인 권한과 책임을 갖게 되면서 더욱 의욕적으로 개발을 진행했다. 이은석 실장은 게임 성격과 이율배반적인 ‘화이트데이’라는 제목과 학교를 배경으로 삼은 공포 게임이라는 점, 1인칭 시점의 게임 등 기본적인 컨셉은 유지하되 기존 공포 게임과 다른 방향으로 개발을 진행하고자 했다.

당시 공포 게임은 게임 패드 조작법을 키보드로 그대로 옮기고 좁은 장소 단위로 로딩하는 방식을 채용하는 등 대부분이 ‘바이오 하자드’를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이은석 실장은 입력과 로딩 방법에서 ‘바이오 하자드’와 차별점을 뒀다. 입력은 현재 FPS 게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마우스와 키보드를 함께 사용하는 방법을 채택했고 하나의 건물 전체를 로딩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PC에 적합한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와 함께 게임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전체적으로 다듬는 작업에 돌입했다. 이은석 실장은 과감하게 ‘남자’ 위주로 캐릭터를 삭제하고 시나리오도 짧지만 높은 퀄리티를 갖출 수 있도록 재구성했다.

그러나 개발 과정에서도 아쉬운 점은 있었다. 이은석 실장은 게임에 대한 구상과 회의, 이에 대한 문서화, 시연 등이 당시에는 잘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좀 더 잘했어야 했다고 반성했다. 또한 몇 달 간격으로 최신 플레이 데모를 만들고 꾸준히 내부 공유한 점은 잘 한 것이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목표’ 공유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로 인해 일정 연기가 자주 발생했다. 그리고 게임 개발자 중에서도 공포 게임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놀래키는 것을 취미로 즐긴 이은석 실장과 이원술 사장 외에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개발자들이 ‘RPG의 명가’ 손노리에서 RPG를 만들고 싶어했던 사람이었다는 점도 문제점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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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트앨범`의 조작 방법은 당시엔 생소했다

게임은 현실을 적절히 모사해야 재미있다

이은석 실장은 단순히 유저를 깜짝 놀래키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 자체가 무서운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매체에서 영감을 받고자 했다. 이은석 실장이 가장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은 ‘링’, ‘주온’ 등 일본 공포 영화였다. 이들 영화는 잔인하기 보다는 공포 자체를 전달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가 하고자 했던 게임 스타일과 비슷했던 것이다. 영화 뿐 아니라 이은석 실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명한 ‘이토 준지’의 작품이나 ‘드래곤헤드’ 등의 공포 만화를 참고했다.

실제 게임에 등장하는 본관은 ‘폐소공포증’을 느끼도록 현실 학교의 긴 복도를 그대로 가져왔다. 반면 신관 호텔로비는 ‘여고괴담 2’, ‘샤이닝’처럼 ‘광장공포증’을 유발하고자 했다. 불타는 광장에서 벌어지는 보스전은 ‘캐리’, ‘패컬티’ 등의 영화를 참고했다.

가장 많은 영감을 준 것은 ‘현실체험’이었다. 이은석 실장은 개발자들과 함께 밤 중에 학교를 여러 차례 몰래 잠입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복도,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는 소리,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다른 이로 인해 ‘여자 화장실’에 숨어서 들기지 않을까 걱정하며 문도 닫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등 진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이은석 실장은 “게임은 현실을 적절하게 모사해야 유저가 더 큰 쾌감을 느낀다. 현실을 100이라고 할 때 현실을 보고 만들면 80짜리 창작물이 나오지만, 80짜리 창작물을 보고 게임을 만들면 50짜리 밖에 나오지 않는다.”며 ‘현실체험’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게임에 영향을 준 것은 국악인 황병기 교수의 ‘미궁’이었다. 회사에서 ‘미궁’을 틀었더니 모두가 기분 나쁘다는 반응을 보였고 이에 진짜 공포를 만들 수 있겠다는 짖궂은 확신을 이은석 실장은 갖게 된다. 곧바로 황병기 교수에게 허락을 받고 게임에 수록하여 인터넷에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덕분에 ‘연주자 자살설’, ‘세 번 들으면 죽는 음악’ 등의 루머가 발생했지만 이은석 실장은 “수백 번 들었지만 잘 살고 있다”며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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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감을 준 만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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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던 `현실 체험`

나는 ‘플로우 이론의 신봉자’

이은석 실장은 자신을 ‘플로우 이론의 신봉자’로 자칭했다. ‘플로우 이론’이란 적절한 동기와 능력을 갖춘 개인이 능동적으로 일에 참여해 느끼는 만족감인 ‘몰입 상태’를 경험하게 되면 그것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을 말한다. 이은석 실장은 유저가 몰입 상태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명확한 목표’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유저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관문, 자물쇠, 열쇠’의 어드벤처 진행의 기본 구성 3요소를 도입했다. 여기에 보기 좋게 평면도를 만들고 유저가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다중 구조로 배치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게임의 주인공은 유저가 쉽게 감정이입 할 수 있도록 평범한 전학생으로 설정하는 한편, 주요 여성 캐릭터 3명은 당시 많은 인기를 누렸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요 인물 레이, 아스카, 신지에서 모티브를 따서 만들었다. 성우들에게도 이들을 직접 보여주면서 비슷하게 연기하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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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릭터간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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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문과 자물쇠, 열쇠의 예시

레벨 디자인은 건축설계사가 만든 도면을 토대로 진행했다. 현실을 기반으로 만든 도면이기 때문에 ‘설득력’ 있는 디자인이 나왔다. 덕분에 게임을 완성할 때까지 배경원화를 만들지 않고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유저를 놀라게 한 ‘수위’는 이은석 실장이 어린 시절 MSX로 즐긴 ‘미드나잇 브라더스’에서 등장하는 적을 모티브로 만들었으며, 영화보다는 1시간짜리 청소년 드라마에 가깝게 스토리를 구성하고 사운드에 많이 투자하여 분위기를 살리는 방식을 채택했다.

다만 이은석 실장은 개발 중간에 ‘프로토타입’을 만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개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데모’는 계속 만들었지만 게임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게임 시작부터 엔딩까지의 흐름이 잘 잡히지 않았고 다른 사람과의 공유도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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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을 즐긴 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 중 하나였던 `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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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석 실장은 이런 식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지 못해 아쉬웠다고 한다

‘머리귀신’과 ‘더미 영상’의 추억

개발자간 갈등, 버그로 인한 출시 연기 등 우여곡절 끝에 ‘화이트데이’는 2001년 9월 출시된다. 이은석 실장은 추석연휴를 이용하여 게임이 출시되자마자 해외로 배낭여행을 빙자한 도피를 하게 된다. 그러나 파리의 PC방에서 유저들이 게임에 대해 호평하는 것을 보고 감격했다고 한다.

이 밖에 이은석 실장은 게임에 등장하는 ‘머리귀신’에 대한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머리귀신’은 타이토의 ‘버블보블’에 등장하는 유령 고래처럼 유저를 압박하는 존재다. 1초마다 10cm씩 벽, 바닥 상관없이 다가오는 존재로 많은 유저들을 공포에 떨게 한 ‘머리귀신’은 사실 이은석 실장이 개발자들도 모르게 인터넷에서 발견한 사진을 토대로 데모 버전에 숨겨놓은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엔트리브 서관희 이사가 게임을 하다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 환호했다고 한다. 다른 개발자들이 진짜 심령사진이라면서 말리기도 했지만 이은석 실장은 사진의 출처를 확인하고 허가를 받아 게임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소개한 것은 ‘패키지에 숨겨진 영상’에 대한 것이다. 이은석 실장은 당시 ‘화이트데이’ 마스터 버전 용량이 300mb에 불과했기에 불법 복제에 취약할 것으로 생각하고 영상을 넣는 방식으로 용량을 늘렸다고 한다. 용량이라도 늘려서 불법 복제를 조금이나마 방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은석 실장은 웃으면서 당시 절박했던 심정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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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관희 이사를 쓰러지게 만든 `머리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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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법복제를 조금이나마 막기 위한 대책이었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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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드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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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소개
화이트데이의 싱글 플레이 모드는 전형적인 어드벤처 게임의 모습을 띤다. 기존의 호러 어드벤처가 액션성을 강조한 것에 비해 화이트데이는 퍼즐적인 요소와 스토리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싱글 플레이 모드에서 액션성을 전...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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