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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의 역사 제1부 - RTS 태어나다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의 역사 제2부 - 좋았던 한 시절, 1995-1998 |
3D RTS의 개막: 토탈 어나힐레이션(1997)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3D기술이 게임업계의 화두로 떠오릅니다. 기껏해야 3D를 ‘흉내 낸’ 2D들이 판치고 있던 시절, 3D 가속 카드를 이용한 3D 그래픽 구현은 게이머들과 제작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많은 게임들이 3D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RTS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3D 그래픽’이라는 대세는 아직까지 2D가 확고히 지배하고 있던 RTS계에도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했고, 1997년 한 RTS게임이 등장하면서 3D RTS시대가 열립니다.

▲ 지금까지 이 게임 이야기가 왜 안 나왔나 궁금하셨을 분도 계실 듯.
1997년 9월 발매된 케이브 독의 ‘토탈 어나힐레이션’은 말 그대로 혁명이자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정교한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유닛과 지형 그리고 기존의 RTS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규모 물량전은 새로운 시대에 RTS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지형의 높낮이까지 정교하게 구현되어 있는 ‘토탈 어나힐레이션’에 전 세계 게이머들은 흥분했고, ‘토탈 어나힐레이션’을 보고 놀란 블리자드가 ‘스타크래프트’의 발매를 연기하고 제작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었다는 전설은 아직까지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대규모 물량전은 ‘토탈 어나힐레이션’에서 처음 선보인 것인데, 후반 게임에 접어들면 1분당 수백개의 유닛이 꾸역꾸역 나와 전선으로 몰려드는 경악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 이 정도면 유닛이 별로 없는 축에 속한다
그러나 ‘토탈 어나힐레이션’은 결과적으로 아쉽게 실패한 게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임 자체도 혁신적이었으며 비평가, 게이머 양쪽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고 시대를 앞서간 멀티플레이 서비스까지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박’을 터트리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일반 게이머들에게는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토탈 어나힐레이션’이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기 때문입니다.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3D 그래픽은 분명 시대를 앞서간 부분이었습니다. 3D로 정교하게 표현된 맵이라든가, 유닛의 디테일은 지금 봐도 그렇게 밀리지 않는 훌륭한 그래픽입니다. 그러나,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발목을 잡은 것 역시 그 훌륭한 3D 그래픽이었습니다. 이 3D 그래픽 때문에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사양은 꽤 높은 수준을 요구했고, 후반부 물량전으로 가면 당시의 최고급 사양으로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요구 사양이 더 높아지게 됩니다. 당연히 평범한 게이머가 가지고 있는 시스템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을 수준이었지요.

▲ 3dfx사의 부두2. '파이널 판타지7' PC판을 하려고 샀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높은 사양은 ‘토탈 어나힐레이션’가 너무 시대를 앞서간 데 있었습니다. 1997년 당시는 PC용 3D그래픽카드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기로, 3D 그래픽 구현에 어떤 기술을 사용할 것인지 표준조차 정해지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엔비디아와 ATI, 3DFX사는 ‘OpenGL’이나 ‘Direct3D’등 서로 다른 3D기술을 주력으로 밀고 있었으며, 특히 3DFX사의 경우에는 ‘Glide’라는 독자적인 3D API를 밀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Direct3D가 나머지 API를 누르고 게임 업계에서 승리를 거두긴 하지만 이는 먼 훗날의 이야기)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토탈 어나힐레이션’은 어쩔 수 없이 3D 가속 카드를 이용하지 않고, 오로지 CPU와 RAM로 3D 그래픽 처리를 처리하게 됩니다. 3D 가속 카드가 붙어 있어도 3D 게임이 느릿하게 돌아가던 판에, 이런 식으로 3D를 처리하니 당연히 사양이 올라갈 수 밖에요. 시대를 앞서간 대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혁신적인 면에 가려 그 동안 주목 받지 못했던 부분이지만, 사실 ‘토탈 어나힐레이션’은 게임 자체에도 조금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게임이 느릿한 진행(이 문제는 후속작인 ‘토탈 어나힐레이션: 킹덤즈’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이라 지루한 면이 있었고, 밸런스와 버그 문제도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발목을 서서히 잡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새로 등장한 ‘스타크래프트’와 비교하면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진행과 밸런스는 그다지 칭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사양 면에서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 '토탈 어나힐레이션: 킹덤즈'. 판타지 배경인 건 좋았는데...
‘토탈 어나힐레이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블리자드사의 ‘스타크래프트’에게 RTS 최강자 자리를 넘겨주고 짧은 전성기를 마칩니다. 그리고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제작사인 케이브독 역시 몇 번의 합병과 매각을 거친 끝에 2005년,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됩니다. 시대를 앞서간 개발사와 게임의 비극이었습니다.
이후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제작자들이 ‘개스 파워드’라는 회사를 세우고 ‘던전 시즈’ 시리즈를 제작하다, 2007년 ‘토탈 어나힐레이션’의 정통 후계자 격인 ‘슈프림 커맨더’를 발표했지만 이 역시 상업적 흥행에는 실패합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슈프림 커맨더’ 역시 평론가와 게이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사양이나 게임의 난이도 문제 등, ‘토탈 어나힐레이션’과 비슷한 이유로 흥행에 실패했다는 점입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요?

▲ '슈프림 커맨더'. 이 사람들은 운이 없는 것인가,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인가?
어쨌든 ‘토탈 어나힐레이션’은 RTS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임 중 하나며, 그 이름은 RTS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토탈 어나힐레이션’이 2D에 머물러 있던 RTS를 3D RTS로 끌어올려, 좀 더 심도 있는 전술이 RTS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한 신호탄 역할을 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영원한 공적입니다. 그리고 ‘토탈 어나힐레이션’이 개막한 3D RTS 시대는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RTS의 새로운 형제, 3D RTT의 등장: Myth와 3D RTT들(1997)
게임의 장르는 보통 커다란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습으로 진화합니다. 그 옛날부터 원시인들이 즐기던 전략 게임이 PC와 더불어 RTS로 발전했고, RTS에서는 다시 RTT라는 새로운 장르가 분화됩니다. Real-Time Tactics-즉, 실시간 전술 게임을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생산이 없는 RTS’입니다. 게임의 컨트롤 자체는 RTS와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RTS에 있는 생산이나 자원채집, 테크 등의 거시적인 전술은 생략되고 전장에서 유닛을 운용하는 순수한 전술 능력을 겨루는 게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최초의 RTT게임은 1993년, 마이크로프로즈사에서 발매한 ‘영광의 전장(Fields of Glory)’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RTS인 ‘듄2’의 발매가 1992년이었으니 RTT역시 RTS와 비슷한 길이의 역사를 가진 셈입니다. 이 ‘영광의 전장’은 워털루에서 벌어진 나폴레옹과 연합군의 전투를 다루고 있으며, 실시간으로 전투가 진행된다는 것과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전투가 구현되었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영광의 전장’ 이후 RTT는 RTS만큼의 인기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의 지지층을 확보하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RTT의 성격 때문에 실제 벌어졌던 전투를 기반으로 한 RTT가 다수 등장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1995년 발매된 ‘클로즈 컴뱃’ 시리즈나 2000년 발매된 ‘쇼군: 토탈 워’와 ‘서든 스트라이크(리얼리즘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만)’등이 있습니다. 이들 게임들은 모두 실제 벌어진 전투를 배경으로 한 RTT이며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RTT로 1997년 발매된 번지소프트(여러분이 생각하는 바로 그 번지 맞습니다)의 ‘Myth’가 있습니다. 3D RTS의 개막을 ‘토탈 어나힐레이션’이 알렸다면, ‘Myth’는 완전한 3D 전략게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진정한 3D 전략게임이었습니다. (사실 ‘Myth’는 엄밀히 말하면 RTT이므로 ‘3D 전술게임’이겠지만 RTS와 같은 뿌리로 보고 ‘전략게임’으로 통일하겠습니다.)

▲ '미쓰'. 잔인한 묘사로도 유명했던 게임이다.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소수 유닛을 가지고 적을 격파하는 구조의 게임인 ‘Myth’는 유닛과 지형, 맵 모두가 3D로 렌더링 된 진짜 3D 전략게임이었습니다. 특히 ‘Myth’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3D 가속 카드 지원과 더불어 ‘물리엔진’을 최초로 도입한 전략게임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지형 위에 있는 물건을 폭탄으로 공격하면 물건이 저 멀리 날아가는 등의 효과는 게이머들에게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렇듯 ‘Myth’ 역시 ‘토탈 어나힐레이션’만큼 혁명적인 게임이었습니다. 그러나, RTS가 아닌 RTT라는 마니악한 게임 방식이었고 당시에는 3D 가속 카드 자체가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짭짤한 성공 이상의 대성공은 아니었습니다. ‘번지넷’이라는 강력한 멀티플레이 서비스까지 지원하며 ‘Myth’는 반전을 시도했지만, ‘Myth2’ 발매와 함께 황당한 사건이 터지면서 번지소프트의 꿈은 공중으로 날아가버립니다.
다음해인 1998년 발매된 ‘Myth2: Soulblighter’는 게임 자체로는 꽤 괜찮은 게임이었습니다. 전작인 ‘Myth’의 명성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게이머들과 평론가들 역시 ‘Myth2’에 호의적인 반응이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Myth2’의 인스톨러에 버그가 있어서 언인스톨시에 게임 뿐만 아니라 다른 디렉토리까지 몽땅 지워버리는 치명적인 버그가 발생한 것입니다. 하드디스크가 통째로 날아가버릴 수도 있는 이런 치명적인 버그가 발생하자, 번지소프트는 눈물을 머금고 ‘Myth2’를 리콜할 수 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됩니다.

▲ '미쓰2'의 리콜사태가 없었다면 '헤일로'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
결국 재정이 악화된 번지소프트는 2000년 마이크로소프트에 인수되어 저 유명한 ‘헤일로’시리즈를 제작하면서 기사회생합니다. 그리고, ‘Myth’ 브랜드에 대한 권리는 ‘GTA’의 제작사인 2K 인터렉티브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에 번지소프트에서는 더 이상 ‘Myth’를 만들지 않게 되었고, 이후 ‘Myth’시리즈는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됩니다. 말 그대로 황당한 최후입니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샜지만, ‘Myth’이후 RTT는 ‘토탈 워’ 시리즈와 ‘그라운드 컨트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는 ‘월드 인 컨플릭트’까지 계승됩니다. 사실 최근의 RTT장르의 인기를 보면 RTS에 비해 초라한 수준이지만, RTT만의 독특한 게임성에 반한 많은 열혈팬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RTT의 앞날은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3D RTS 시대와 함께 출현한 새로운 강자: 홈월드와 렐릭 엔터테인먼트(1999)
‘토탈 어나힐레이션’ 이후 RTS계는 점점 더 블리자드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마땅한 대작이 없는 상황에서 ‘스타크래프트’의 지배력은 공고해져만 갔고, 웨스트우드는 삽질에 삽질을 거듭하고 있는 형편이었지요. 2D도 아니고 3D도 아닌 어설픈 2.5D인 ‘스타크래프트’를 모방해 여러 RTS들이 나왔지만, 그렇게 큰 반향은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짜 3D RTS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토탈 어나힐레이션’이 등장한지 2년 후인 1999년, 한 신생 개발사가 ‘완전한’ 3D RTS를 발매하면서 게임계는 경악하게 됩니다. 바로 렐릭 엔터테인먼트의 ‘홈월드’입니다. ‘홈월드’는 드넓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RTS로, 배경이 배경인 만큼 완벽한 3D 기술이 도입되어 있었습니다. 우주 함대를 이끌고 적을 격멸하는 ‘홈월드’의 게임 구조는 다른 어떤 RTS와도 달랐고, 정확히 말하면 RTS와 RTT가 혼합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 진짜 3D RTS, '홈월드'
기존의 RTS와 전혀 다른 방식의 게임 스타일로 드넓은 우주에서 벌어지는 서사시적인 ‘홈월드’의 전투에 게이머들은 열광했습니다. 인터페이스가 조금 불편하고 권장사양이 높다는 것을 제외하면, ‘홈월드’는 흠 잡을 부분이 그다지 없는 잘 만들어진 게임이었고 덕분에 이름 없는 신생 개발사의 게임임에도 상당한 판매고를 기록합니다.
‘홈월드’의 성공 이후 렐릭 엔터테인먼트는 게임계에서 큰 주목을 받으며 3D RTS의 선구자로 자리잡습니다. 2002년 ‘임파서블 크리쳐’, 2003년 ‘홈월드2’ 등의 3D RTS를 계속 제작하며 명성을 쌓아갑니다. 그리고 2004년 봄, 거대 유통사인 THQ는 렐릭 엔터테인먼트를 천만달러(약 100억원)에 인수합니다. 1997년 설립된 무명의 개발사였던 렐릭 엔터테인먼트가 불과 7년만에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것입니다. 렐릭 엔터테인먼트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홈월드’가 있었음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런 렐릭 엔터테인먼트의 급성장과 더불어 RTS계는 크게 3개 회사가 주도하는 형태가 됩니다.
블리자드 제국의 빛과 그늘
‘스타크래프트’의 대성공 이후 블리자드는 가히 ‘제국’이라고 부를만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습니다. 특히 ‘디아블로2’까지 대박을 치면서 블리자드는 RTS 세계 최대까지 노릴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개발사로 성장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게이머들이 블리자드 게임에 열광했었고, 열광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열광할 것입니다.
그러나 블리자드 제국의 급성장은 RTS계에 있어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블리자드 스타일과 웨스트우드 스타일이 경쟁하던 시절에는, 두 스타일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개성을 추구한 다양한 RTS들이 나왔습니다. 게이머들 역시 그런 개성 있는 게임에 호의를 보였던 좋은 시절이었지요.

▲ 위대한 고전게임 '스타크래프트'
하지만, ‘스타크래프트’가 RTS 시장을 평정해 버리자 게이머들의 인식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게임 그 자체가 재밌냐 아니냐’가 아니라 ‘스타크래프트보다 재밌냐 아니냐’를 RTS의 기준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특히 동아시아에 있는 모 나라의 게이머들이 이런 경향이 특히 강했고, 이런 시류에 편승해 ‘스타크래프트’를 적당히 베낀 얄팍한 RTS들이 시장에 대거 출현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모방품이 그렇듯 엄청난 혹평과 함께 순식간에 시장의 저편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이런 상황은 RTS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게이머들에게 ‘아무리 RTS가 나와봤자 스타크래프트가 최고의 RTS임. 굳.’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더욱 강화시켜, 어떤 RTS를 보든 ‘스타크래프트’와 놓고 비교하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날 뿐이었습니다. 특히 ‘스타크래프트’를 아주 아주 사랑하는 동아시아의 모 나라가 이런 현상이 심했는데, 게이머들의 대다수가 ‘스타크래프트’에 중독된 나머지 같은 회사에서 만든 ‘워크래프트3’을 보고도 ‘이거 뭐야 스타만도 못하잖아’라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에는 좀 덜하지만)

▲ '워크래프트3'이 '스타크래프트'만 못하다니, 타우렌이 웃을 노릇이다.
이 자리에서 굳이 ‘스타크래프트’의 가치를 외면하고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타크래프트’가 잘 만든 RTS라는 것은 누가 어떤 말을 해도 변하지 않을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머리에 9mm 총알이 박힌 것도 아닌데,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스타크래프트’를 사서 즐겼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불과 10여년 이라는 짧은 시간에 엄청난 성장을 이뤘고, 지금도 발전하고 있는 RTS들을 1998년에 출시된 ‘스타크래프트’라는 잣대로 평가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잣대가 바로 ‘블리자드 제국의 그늘’입니다.
RTS 천하삼분지계: EA와 Relic, 그리고 Blizzard (2002-현재)
렐릭 엔터테인먼트의 대성공 이후 RTS계에는 크게 3개의 회사가 남았습니다. RTS의 원조인 웨스트우드를 합병한 EA 로스엔젤레스, 3D RTS의 선구자 렐릭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RTS의 절대 강자인 블리자드입니다. 이 3개 업체 중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역시 블리자드였습니다. ‘스타크래프트’는 세계적으로 대성공(특히 한국)을 거두었지만, 블리자드 역시 3D RTS 시대가 왔음을 절감하고 있었고 언제까지나 ‘스타크래프트’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2002년 7월, 블리자드의 신작인 ‘워크래프트3’이 발매됩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워크래프트3’은 말 그대로 명작입니다. 3종족 구도였던 ‘스타크래프트’를 능가하는 4종족 구도가 생긴 것 이외에, ‘워크래프트1’ 부터 이어져 온 전통 있는 세계관 그리고 낮은 사양과 배틀넷이라는 강력한 멀티플레이 플랫폼의 지원은 ‘워크래프트3’을 감히 명작 게임으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부분입니다. 특히, 게임 역사상 최고의 패륜아 아서스의 등장은 그 동안 블리자드 게임에 내려졌던 ‘싱글 플레이가 허접하다’는 평가를 단 한 번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 백성을 사랑하던 왕자님이 게임 역사상 최고의 개XX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워크래프트3’은 4종족 구도를 제외하면 크게 혁신적인 게임은 아니었습니다. ‘홈월드’나 ‘Myth’처럼 보고 놀라 뒤로 넘어갈 게임은 아니고, ‘스타크래프트’와 마찬가지로 ‘적당히 성공할 만한 요소’를 잘 배합한 균형이 잘 잡힌 3D RTS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게이머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괴상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만은 못했지만, ‘워크래프트3’ 역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RTS 명가 블리자드’의 이름을 공고히 했습니다.
블리자드가 잘 나갈 동안, 웨스트우드를 집어삼킨 중소기업 Eat all은 ‘스타크래프트’의 대성공에 크게 놀랐(혹은 배가아팠)습니다. 기껏 비싼 돈 들여 RTS ‘원조’인 웨스트우드를 합병했지만, 별 힘도 못 쓰고 죽어버린 꼴이었니까요. EA는 고심 끝에 최근(2000년 언저리)의 웨스트우드 실패는 매너리즘화 된 ‘웨스트우드식 RTS’에 있다고 보고 전혀 다른 방식의 ‘커맨드 앤 컨커’를 내놓습니다. 바로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입니다.

근 미래를 배경으로 미국, 중국, GLA(아랍연합)의 3파전을 그린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은 한 마디로 잘 만들어진 RTS였지만, 분명히 ‘C&C’의 후계자로 삼을 RTS는 아니었습니다. 기존 ‘C&C’의 세계관과는 1g도 관계가 없는 설정도 설정이지만, ‘웨스트우드식’ 인터페이스를 포기하고 ‘블리자드식’ 인터페이스를 과감히 채용한 게임이었으니까요. 게다가 ‘C&C’시리즈의 전통으로 여겨지던 동영상(Full-Motion Video)도 없었습니다.
이런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을 두고 웨스트우드 팬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건 나의 C&C쨩이 아니야! 나의 C&C쨩은 이렇지 않아! 더러운 중소기업 EA는 얼른 사과해!’라면서 극렬히 반발하는 팬부터 ‘EA가 시대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고 좋은 RTS를 만들었다’는 호평까지 극과 극을 달렸습니다. 아직까지도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가끔씩 ‘제너럴이 C&C인가?’라는 논쟁이 벌어질 만큼 ‘제너럴’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습니다.

▲ '제너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레드얼럿3'의 황당한 오리엔탈리즘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다.
팬들의 반응이야 어쨌든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자체는 꽤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너럴’이 ‘C&C’시리즈의 성격과는 맞지 않지만 그래도 잘 만들어진 RTS라는 증거겠지요. 하지만 ‘제너럴’에 쏟아진 팬들의 비난이 무서웠는지 EA는 이후 발매된 ‘C&C3’등의 게임에서는 웨스트우드식 인터페이스를 다시 되살립니다. (하지만 EA도 성공한 ‘제너럴’을 놓치기 아까웠는지,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3’ 이후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2’를 제작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워해머'도 '워해머'지만, 렐릭이라면 역시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가...
렐릭 엔터테인먼트는 ‘홈월드’ 이후로 지금까지 EA나 블리자드와는 또 다른 방식의 RTS를 개척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렐릭의 간판 게임인 ‘워해머40k: 던 오브 워’에 도입된 신 개념들은 렐릭의 RTS가 다른 RTS와 어떻게 차별화 되어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먼저 RTS에 유닛을 ‘분대’단위로 움직인다는 개념을 도입했고, 자원을 ‘채취’하는 것이 아닌 영역을 확보하면 해당 영역의 수입이 들어온다는 개념을 추가했습니다. 이후 이 두 가지 개념은 ‘워해머40k’부터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까지 렐릭이 만드는 RTS의 주요 개념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분대가 위급한 상황에 빠지면 단축키 하나로 간단히 본부까지 후퇴하는 ‘후퇴’기능도 렐릭 RTS의 큰 매력입니다.
에필로그: 아니오, 게이머 동무. RTS는 시작일 뿐입니다.
RTS는 다른 어떤 게임보다도 PC만을 위한 게임 장르입니다. 비록 RTS의 조상들은 가정용 게임기를 기반으로 태어났지만, PC로 넘어온 이후 PC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컨트롤러를 게임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며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마우스와 키보드입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RTS게임은 마우스와 키보드로 플레이 했을 때 최고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게 설계되었습니다. 어떤 RTS든 제대로 된 ‘컨트롤’을 위해서 다양한 단축키의 사용과 빠른 마우스 조작이 필수입니다. 반면, 패드로 모든 게임을 즐겨야 하는 콘솔 게임기에서 RTS는 ‘버려진 장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PC의 인터페이스를 기반으로 진화한 게임을 패드로 제대로 즐길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 이걸로 RTS를?!
콘솔용 RTS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미 ‘레드얼럿1’ 시절부터 콘솔용으로 많은 RTS들이 ‘컨버전’되었고, 최근만 보더라도 ‘C&C3’이 Xbox360으로 발매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PC의 인터페이스를 기반으로 한 RTS게임을 아무리 충실히 콘솔로 옮겨놓는다 해도 ‘패드 조작’라는 넘사벽에 막혀 게이머들은 학을 뗄 뿐이었지요.
그러나 PC게임의 불법복제가 날로 심해지는 상황에서, PC게임의 대표주자인 RTS나 FPS는 불법복제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두 장르는 누가 봐도 콘솔에 어울리지 않는 PC게임장르였지만, 결국 게임업체들은 RTS나 FPS를 개발하더라도 PC게임 시장과 함께 불법복제가 덜하고 수익이 많이 나는 콘솔 시장을 함께 노리는 구조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전략적인 변화는 자연스럽게 ‘콘솔을 위한 새로운 인터페이스’의 RTS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 복돌짓 때문에 RTS가 콘솔로 갔다?
이제 곧(2008년 11월) 발매 될 UBI의 ‘톰 클랜시의 앤드워’는 앞으로 RTS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한 척도가 될 만한 실험적인 게임입니다. ‘톰 클랜시의 앤드워’는 애초부터 콘솔 시장을 노리고 개발된 RTS입니다. 당연히 콘솔로 RTS를 즐길 때 인터페이스의 불편함에 대한 극복이 필요했고, ‘앤드워’는 ‘음성명령’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런 불편함을 돌파하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주 내로 ‘앤드워’가 정식 발매 된다면, 콘솔 RTS의 불편함을 ‘음성’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 판가름 날 것입니다.

▲ '앤드워' 데모버전을 해봤는데, '카메라'라고 하면 안되고 '캐메라'라고 하면 인식하더라구요!
PC게임 시장은 불법복제로 인해 큰 고통을 받고 있지만 EA, 블리자드, 렐릭은 여전히 RTS 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 때 ‘웨스트우드를 죽인 장본인’으로 비난 받던 EA는 ‘C&C3’, ‘C&C: Red Alert3’등을 발매하며 ‘C&C 시리즈’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블리자드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대성공에 안주해 오랫동안 침묵해 왔지만, ‘스타크래프트2’를 발표하며 RTS 제왕 자리를 굳건히 유지할 기세입니다. 렐릭 엔터테인먼트는 향상된 그래픽과 물리 엔진으로 무장한 ‘워해머40k: 던 오브 워 2’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RTS는 채 20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가장 빠르게 발전한 게임 장르 중 하나입니다. 도트가 눈에 보이던 2D 그래픽은 정교해진 3D 모델링과 현실적인 물리엔진으로 바뀌었습니다. 길도 못 찾아 헤매던 멍청한 유닛은, 이제 초보자 정도는 손쉽게 바르는 똑똑한 인공지능으로 거듭났습니다. 여기에 멀티플레이의 발달과 함께 게이머는 RTS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전쟁을 안방에서 내 손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RTS는 안드로메다로...(농담)
RTS의 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RTS는 이제 콘솔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앤드워’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음성명령’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다면, 앞으로 RTS는 ‘마우스와 키보드로 즐기는 PC게임’이라는 영역을 벗어나 ‘목소리로 즐기는 콘솔 게임’으로 진화할 것입니다. 10년, 아니 한 5년 뒤의 RTS는 어떤 모습일까요? 어떻게 진화해 있을까요? 그 먼 옛날 돌도끼로 무장한 원시인들의 작전 회의에서 시작된 RTS는, 이제 새로운 기술들과 함께 한 차원 더 높은 게임으로 도약하려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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