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과 버파의 드림 매치는 꿈일까?
같은 장르, 비슷한 느낌의 게임이 둘 이상 있을 때 그 관계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경쟁 관계이거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동반자 관계이다. 그러나 인간사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듯, 게임 사이의 관계도 단순히 경쟁자, 동반자로 명확히 나누어지진 않는다. 겉으로 보면 경쟁 관계인 듯 싶지만 그 경쟁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도, 그 경쟁이 지나쳐 서로를 베끼기도 하는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런 애증관계의 대표적 사례를 들자면 90년대 중반부터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3D 격투게임을 이끌어 온 ‘버추어 파이터(이하 버파)’와 ‘철권’의 관계를 들 수 있다.
3D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 3D의 태동기
‘스파2 대쉬’가 한창 오락실을 주름잡고 있던 93년 후반, 생소한 게임이 오락실에 떡하니 등장한다. 마치 나무토막 같은 딱딱한 캐릭터들, 그러나 엄청난 입체감(당시로는)이 살아 숨쉬는 3D 대전격투 게임, 세가의 ‘버파1’이 출시된 것이다. 사실, 3D 기법을 사용한 게임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버파1’처럼 ‘3D란 이런 것이니라’라고 알려주는 게임은 없었다. 2D 게임과는 다르게 카메라는 캐릭터의 기술에 따라 거리와 각도를 이리저리 바꿔 가며 움직였고, 공중에 뜬 캐릭터를 현실처럼 공격하거나 다운된 적을 공격하는 등 사실적인 물리효과까지 적용되었다. 또한, 비현실적인 2D 캐릭터의 움직임과 달리,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한 사실적인 움직임은 3D 대전격투라는 장르를 순식간에 대전격투의 주류로 끌어올리는 데 한 몫을 했다. 이러한 ‘버파1’의 파급력은 마치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정도의 게임 발전을 가져왔다. ‘스파2’가 ‘혁명’이었다면 ‘버파1’은 ‘충격’ 그 자체였다.
▲버파를 시작으로 3D게임 개발이 본격화된다
그리고 불과 몇 개월 후, 남코는 ‘버파1’보다 조금 늦었지만 그래픽 완성도가 한결 높은 ‘철권1’을 출시한다. ‘철권1’은 10단 콤보, 화려한 이펙트 등을 필두로 ‘버파’가 개척한 3D 대전격투에 뛰어들었으나 ‘버파1’에 비하면 큰 충격을 주지 못했다. 게임 시스템 전반적인 부분에서 ‘버파1’을 상당히 닮은 ‘철권1’은 ‘버파1’의 후발주자 정도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버파1’의 쓰나미급 충격은 후발주자 ‘철권1’이 쉽게 추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철권1’은 ‘버파1’의 흥행 후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던 어설픈 3D 대전격투 게임들과는 달리,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준 유일한 게임이었고, ‘버파1’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나름대로 흥행에 성공했다.
▲버파에 밀렸지만 나름 흥행한 철권1
그러나, ‘철권1’을 비웃기라도 하듯, 94년 말 세가는 ‘버파2’를 출시한다. 안티얼라이징 효과와 더 세밀한 폴리곤이 적용되어 전작보다 훨씬 깔끔해진 그래픽과 자연스러워 진 모션, 타격감, 그리고 전작의 인기를 등에 업은 ‘버파2’는 3D 게임의 선두주자의 위용을 톡톡히 뽐낸다. 특히 ‘버파2’에 이르러 공중콤보를 정식으로 구현하고 프레임 이득을 계산해가며 펼치는 타격전을 강화시키며 ‘버파’의 특징을 확실히 만들어간다. ‘버파2’는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엄청난 흥행을 하지만, 난이도는 약간 어려운 감도 있었다.
▲전작에 비교하면 각이 많이 사라졌다
승승장구하던 ‘버파2’, 그러나 남코는 ‘버파2’에 대항하기 위해 ‘철권’ 시리즈를 더욱 가다듬어 ‘버파2’ 발매 4달만에 ‘철권2’를 출시한다. 역시 전작보다 훨씬 깔끔해진 그래픽과 캐릭터 디자인, ‘버파’의 3버튼 체계와는 달리 익숙한 4버튼 체계, 개성넘치고 다양한 캐릭터들의 추가 등 ‘철권2’는 여러 모로 ‘버파2’를 주춤하게 만들 정도의 인기를 모은다. ‘철권1’에서 애매모호했던 게임 색깔이 비로소 어느 정도 정해진 느낌이었다. 특히 몇 가지 기술만 알더라도 손쉽게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성은 게이머의 나이층이 비교적 어린 국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모은다.
▲철권2는 버파를 따라잡기에 충분했다
시리즈를 거듭하며 ‘버파2’와 ‘철권2’는 3D 격투게임계의 양대산맥으로 우뚝 서게 되고, 대전격투 게임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비록 처음에는 ‘버파’가 우세했으나 ‘철권’이 뒤이어 따라오는 형세로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서로의 퀄리티를 높이는 시너지 효과를 낳는다.
버파 선배, 이제 물러나시죠?
3D 대전격투계의 지존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던 세가와 남코는 각각 3번째 시리즈를 출시한다. 이 시기는 ‘버파’와 ‘철권’의 게임성과 특색이 가장 뚜렷해지는 시기이지만, ‘버파’와 ‘철권’의 희비가 본격적으로 엇갈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선발매는 역시 세가였다. 96년 가을 출시된 ‘버파3’는 고저차 적용, 횡이동, 맵 변화 등 참신한 시스템 대량 추가된 타이틀이다. 특히 ‘E’버튼을 활용한 횡이동 시스템의 적극 도입으로 인해 보다 입체적인 전투가 가능해져 현재 ‘버파’의 모습이 거의 완성되었다. 특히, ‘버파3’의 그래픽은 96년이라는 제작 연도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섬세했고, 보다 좋아진 타격감과 캐릭터 무게감 등은 실전 격투를 연상케 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각진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그래픽
그러나, ‘버파3’의 급격한 진화가 너무나 참신했던 것일까, 살짝 느려진 스피드로 인한 심리전과 다양한 상황에서의 섬세한 컨트롤이 요구되는 ‘버파3’는 그 높은 난이도와 잦은 패치버전 출시 탓에 라이트 유저들의 외면을 받게 된다. 특히 국내에서는 최신 3D 기판의 높은 가격과 어려운 시스템 설명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탓에 ‘버파2’에 비교하면 인기를 크게 끌지는 못한다. 그래도, 한국 게이머가 일본 대회에 나가 일명 ‘코리안 스탭’을 구사하며 우승하기도 하는 등 국내 매니아들도 꽤나 힘들게 ‘버파3’를 즐겼다.
세가가 살짝 주춤하는 사이, 97년 초 남코가 발표한 ‘철권3’는 엄청난 인기를 모은다. 버튼을 눌러야 하는 ‘버파3’와는 달리 이동 조작키를 상하 방향으로 튕겨줌으로써 간편하게 횡이동이 가능했고, 더욱 스피디한 조작감, 파워풀한 콤보, 매끄러운 이동으로 인해 향후 ‘철권’의 틀을 정확히 잡았다. 특히 몇 가지 기술만 제대로 터득해도 금새 중수급으로 올라설 수 있는 접근성은 ‘철권3’의 흥행에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한다.
▲대 히트를 친 철권3
이듬해, 세가는 ‘버파3 TB’를 출시한다. ‘버파3 TB’는 수 많은 ‘버파3’의 밸런스 조절본을 통합시키고 팀 배틀을 구현한 버전으로 일본에서는 ‘버파2’에 맞먹을 정도로 인기를 모으지만, '버파3'가 흥행하지 못 한 국내에는 거의 보급이 되지 않았고, 서서히 국내 게이머들은 ‘버파’를 잊어가기 시작한다. 반면에 99년, 남코가 ‘철권3’를 베이스로 개발, 출시한 ‘철권 TT’는 2인 태그 매치라는 장점(보다 게임을 오래 즐길 수 있었다)을 바탕으로 전작을 뛰어넘는 흥행을 기록한다. 비록 ‘철권3’의 히트에 고무된 남코가 전작의 캐릭터들을 집어넣어 만든 우려먹기 게임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철권TT’는 출시 후 10년이 넘은 현재까지 오락실에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타이틀이기도 하다. ‘철권3’와 ‘철권TT’의 연이은 히트로 인해 대전격투 게임의 왕좌는 ‘스파’, ‘KOF’를 거쳐 ‘철권’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10년 넘게 현역으로 뛰고 있는 철권 TT
▲'철권TT'는 더욱 깔끔해진 그래픽으로 PS2에 이식되며 초월이식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비록 이 세상이 날 힘들게 하더라도
남코가 ‘철권3’와 ‘철권TT’로 연이은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동안, ‘버파’는 그에 미치지 못 한 것이 사실(일본에서는 ‘버파3 TB’가 분발했지만 다운이식의 대명사가 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냈음)이었다. 그러나 남코는 ‘버파’의 참신함과 다양성을 은근히 부러워했고, 세가는 ‘철권’의 쉬운 게임성을 탐냈다. 이는 ‘철권4’와 ‘버파4’의 시스템적 변화에서 엿볼 수 있다.
2001년 8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철권4’와 ‘버파4’는 또 다시 치열한 경쟁을 예고하는 듯 보였으나 적어도 국내에서 그들의 경쟁은 정말 힘없이 끝나버리고 만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두 가지 다 ‘철권’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철권TT’의 엄청난 히트 속에 등장한 ‘철권4’는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데뷔하였고, 그래픽적 부분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철권4’에서는 ‘버파3’의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일단, 무한맵으로 대표되던 ‘철권’의 맵에 벽과 고저차가 생겼다. '철권' 특유의 매끄러운 이동은 상당히 축소되었고, 시원시원한 공중콤보도 엄청나게 축소되었다. 타격 이펙트는 어딘가 텅 비어 보였고, 캐릭터간 간격이 좁아져 마치 다른 게임을 보는 듯 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철권’의 색깔을 잃은 것이다.
▲높낮이, 벽, 캐릭터 간격 등 여러모로 버파3가 생각나는 철권4
그에 비해 ‘버파4’는 ‘철권’의 간편한 횡이동 조작법을 도입하고 네트워크 카드 시스템(이후 철권5에서 따라한)으로 이름, 기록, 아이템 등을 관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게임성에 있어서도 ‘버파’의 색을 철저히 지켰고, 기존 매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도 얻으며 나름 화려한 재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버파4’의 경쟁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철권4’가 아닌 ‘철권TT’였다. 그래픽, 게임 밸런스, 게임 외적 측면까지 무엇 하나 떨어지는 것 없는 ‘버파4’였지만 ‘철권TT’에 익숙해진 국내 게이머들에겐 그저 낮설고 어려운 게임에 불과했다. 당시 필자가 다니던 오락실들은 ‘철권TT’ 5~6쌍, ‘철권4’ 1쌍, ‘버파4’ 1쌍 정도를 일반적으로 갖추고 있었으니 당시 상황을 짐작할 만 하다.
▲버파4의 카드 시스템을 보며 얼마나 부러웠는지.. (국내에선 거의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철권4’와 ‘버파4’의 경쟁은 결국 양 쪽 다 큰 인기를 끌지 못하며 흐지부지 끝나게 된다. 특히 이 당시는 국내외로 아케이드 시장이 축소되며 ‘스파’는 시리즈를 접었고, ‘KOF’는 제작사의 부도로 인해 저물어가던, 대전격투 장르 전체의 암흑기이기도 했다.
이제 서로의 길을 갑시다
이후, 남코는 ‘철권4’의 실패를 거름삼아 ‘철권5’를 발매하며 기세를 회복한다. 그러나 시리즈가 거듭되며 ‘버파’와 ‘철권’은 더 이상 경쟁관계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 점점 더 늘어만 가는 기술 수, 깊어진 심리전, 고수 숫자의 증가 등으로 정도는 다르지만 매니아적 성향이 강해진 탓에 유저층이 이미 확립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버파’와 ‘철권’의 게임성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극명히 갈라져 3D 대전격투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게임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굳이 승자를 가리자면 여전히 아케이드의 지존은 ‘철권TT’와 ‘철권5’를 앞세운 남코였다.
▲헤이하치 죽는다는 남코의 낚시는 저를 패닉상태에 빠지게 했었죠
이후, ‘버파5’와 ‘철권6’은 E3 2006에서 프로모션 영상으로 한번 더 부딪히지만, 결국 발매 시기도 1년 이상 차이가 났고, 이미 대전격투 게임의 주력 시장이 콘솔로 넘어온 상태라 이렇다 할 경쟁을 벌이진 못한다. ‘버파4’부터는 PS2로, ‘철권6’과 ‘버파5’는 Xbox로도 이식되며 기종 경쟁까지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버파’와 ‘철권’의 경쟁은 현재 ‘철권’의 승리로 기울어진 상태다. ‘버파5’는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기대에 못 미치는 판매량을 보였으며, 최근에는 ‘철권’ 뿐만 아니라 ‘스파’, ‘DOA’ 등에도 밀리는 형국이다. 최근엔 ‘철권’도 상당히 매니악한 게임이 되어가는 듯 하지만 ‘버파’는 일반 유저들을 포옹하기엔 너무나도 어려웠다. 비록, 격투 시뮬레이션을 지향하는 듯 한 사실적인 모션은 매니아들에겐 호평을 받고 있지만 일반 유저들에게는 너무 밋밋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기도 하다.
▲게임성이나 그래픽 등에서는 상당히 인정받는 버파5, 그러나 흥행은?
그에 비해 ‘철권6’는 아직까지 대전격투 게임의 정상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까지 국내 오락실의 메인 게임은 ‘철권’이며 유저층 또한 넓다. 또한 최근에는 ‘철권크래쉬’를 통해 대전격투게임 프로게이머의 등장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최신작인 ‘철권6’의 판매량은 ‘스파4’에 추월당했고, 바운드 콤보 시스템 때문에 라이트 유저의 유입이 힘들어지는 등 ‘철권’도 나름대로의 고충을 가지고 있다.
▲철권6: BR은 캐릭터 수만 40명, 캐릭터 당 기술 수도 많으면 200개가 넘는다.. 어려워!!
최근에는 ‘철권6’과 ‘버파5’부터 활성화된 네트워크 대전 등으로 다른 사람과의 대전을 집에서 쉽게 즐길 수 있게 되었고, 과거에 비해 콘솔 보급률도 많이 늘어나는 등 대전격투 장르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한 때는 국민 게임으로 불리었으나 점차 매니아적 성향이 강해지고 있는 지금, 향후 두 게임의 변화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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