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블리자드의 프랭크 피어스 부사장이 ‘DRM(Digital Rights Management: 불법 복제 방지 시스템) 개발은 결국 지는 싸움이며, 해당 시스템에 대한 개발진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플레이어의 커뮤니티는 매우 방대하며, 그 중 많은 유저들이 DRM 시스템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싶어한다. 그들의 수는 개발진보다 훨씬 많다’ 고 말했다. 사실상 DRM 개발 포기 선언이나 다름 없는 말이다.
▲ 프랭크 피어스 블리자드 부사장, "DRM 싸움은 지는 싸움"
예로부터 게임 개발자들의 가장 큰 적은 불법 복제였다. PC게임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던 90년대에는 불법 복제 타이틀이 디스켓이나 CD 등 오프라인으로 은밀히(혹은 대놓고) 거래되었지만, 인터넷의 발달과 와레즈 사이트의 등장으로 안방에서도 손쉽게 불법 복제 타이틀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개발자들은 유저들의 반감을 각오하고서라도 매우 강력한 DRM을 개발하거나, 아예 DRM 시스템을 포기하고 소유욕이 날 만한 게임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등 다양한 방향으로 고민하고 있다.
계속해서 강화하기엔 비용적 부담에 비해 효과가 크지 않고, 그렇다고 아예 없애버릴 수도 없는 계륵 같은 존재, 다양한 DRM의 기상천외한 모습을 통해 개발자의 고뇌를 짐작해 보자.
암호표 없이는 게임 못 해!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게임을 사면 소규모 책자 수준의 암호표가 첨부되어 있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암호표는 게임을 설치할 때, 혹은 플레이 도중에 특정 암호를 입력하지 못하면 게임을 진행할 수 없는 가장 단순한 DRM 시스템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페르시아의 왕자’의 경우 물약 암호표에 따라 물약을 먹지 않으면 왕자가 죽게 된다. 그러나 단순한 암호표는 쉽게 복사가 가능했고, 배포하기도 쉬웠다.
▲ 추억이 새록새록, 페르시아의 왕자 물약 암호표
위와 같이 암호표 DRM의 가장 큰 적은 ‘복사기’ 였다. 타이틀과 암호표가 함께 복사되어 떠돌아다니면 전혀 효과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CD나 디스켓과 달리 복사기에 넣고 버튼만 누르면 쉽게 복사가 되는 단순 암호표는 말 그대로 ‘형식적 관문’ 정도로 취급당하곤 했다. 이러다 보니 게임 개발사도 다양한 암호표 방식을 개발하여 유저들의 불법 복사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 중 가장 효과를 거둔 방식은 흑백 복사기의 한계를 이용한 것이다. 손노리의 ‘포가튼 사가’의 경우 CD 표면에 다양한 색의 암호를 인쇄하여 흑백 복사로는 제대로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게임 초반부에 CD의 암호를 묻는 이벤트가 있는데, 이 때 일정 이상 틀린 대답을 하면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하지 못 하게 된다. 컬러 복사기가 없는 경우 CD표면 스캔 이미지를 컴퓨터를 통해 확인하거나, 색연필로 일일히 색을 칠해서 수제 암호표를 만드는 수 밖에 없었다.
▲ CD 표면에 컬러 암호를 인쇄한 손노리의 '포가튼 사가'
루카스아츠의 ‘원숭이섬의 비밀’은 두 개의 원판을 돌려 가며 해적의 얼굴을 조합하는 다소 복잡한 암호 원판을 첨부했는데, 이를 복사하려면 정교한 가위질과 원판 조립 등이 필요했다. ‘매니악 맨션’의 경우에는 진한 보라색 종이에 검은 글씨를 인쇄하여 맨눈으로 보면 그럭저럭 알아볼 수 있지만 복사를 하면 온통 검은색만 나오는 암호표를 첨부하여 복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 같은 암호표는 복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복사기로 1초만에 복사할 수 있는 일반 암호표보다 복사하기가 훨씬 까다로웠다. 한마디로 불법 복제 타이틀을 플레이하려면 상당히 귀찮은 과정을 거치게 해서 불법 복제를 줄인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가정용 컬러 복합기가 속속 등장하고, 초고속 인터넷이 확산되며 복잡한 암호표도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자 이 같은 암호표 방식의 DRM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 '원숭이섬의 비밀'의 원판 암호표, 일일히 그리는 정성을 보이기도
너무 참신했던 나머지 정품 유저들마저 혼란에 빠뜨리고 만 암호 DRM도 있다. 국내에 ‘래리 2’ 로 알려진 ‘레이져 슈트 래리 2’의 경우 황당한 암호로 유저들을 당황하게 만든 사례다. ‘래리 2’는 16명의 여자 그림과 전화번호가 적힌 암호표를 보고 게임 화면에 표시된 사진과 일치하는 여성의 전화번호를 입력해야만 게임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흐릿하게 인쇄된 여성들의 얼굴은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한참 동안이나 암호표와 모니터를 비교하다가 비장한 각오로 전화번호를 입력했으나 결국 튕겨져 나와버리는 황당한 상황은 불법 복제 유저와 정품 유저 모두에게 혼란을 주는 DRM이었다.
▲ '래리2'의 암호표, 정말 헷갈린다
인증 안 해도 게임은 할 수 있는데… 재미는 덜할걸?
설치 시 CD키를 입력하도록 하는 고전적인 DRM은 CD나 디스켓 표면에 CD키를 적어 놓는 간단한 조작 하나만으로도 쉽게 무너지는 약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블리자드의 ‘배틀넷’ 시스템은 게이머가 입력한 CD키를 인터넷을 통해 인증함으로써 하나의 CD키를 불특정 다수가 공유하는 것을 제한했다. 물론 인터넷에 연결하지 않는 싱글 플레이에서는 CD키 인증이 필요없지만 배틀넷을 통해 다른 유저들과 게임을 즐기려면 타인이 사용하지 않는 CD키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후 프리 배틀넷 서버와 CD키 유출 등의 문제가 발생하긴 했으나, 온라인 인증 시스템 자체는 꽤나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
▲ 블리자드 배틀넷의 최종 진화 버전
이러한 멀티플레이 시 온라인 인증을 요구하는 DRM은 PC를 넘어 콘솔에도 활발히 적용되고 있다. 불법 복제가 아닌 중고 게임 거래를 방지하는 용도이긴 하지만, EA가 발표한 ‘온라인 패스’ 시스템의 경우에도 제품에 부착된 고유 키(일회용)를 인터넷을 통해 인증해야만 멀티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위와 비슷하다. 이러한 온라인 인증 시스템은 전세계적인 초고속 인터넷 보급이 가져온 효과이다.
너무 나갔다, 유비소프트 사태
온라인 CD키 인증 시스템의 취지는 정품 CD키가 없는 유저들의 온라인 접속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은(혹은 접속하지 못 하는) 유저는 온라인을 통해 CD키를 인증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불법 복제 게임을 사용하더라도 싱글 플레이만 한다면 아무런 제약을 가할 수 없었다. 때문에 블리자드를 비롯한 많은 개발사들은 ‘버리기 아까울 정도로 매력적인 멀티플레이’를 제공함으로써 정품 타이틀 구매를 유도했다.
▲ EA는 '타이거 우즈 PGA투어' 를 시작으로 멀티 플레이 권한을 부여하는 '온라인 패스'를 적용했다
그러나, 몇몇 개발사들은 노력에 비해 좋지 못한 결과를 얻었다. 온라인 인증을 통해 유저들의 게임 플레이를 구속한다는 점에서 유저들의 반감을 산 것인데, 얼마 전 유비소프트가 자사의 인기 게임들에 적용한 DRM이 대표적인 예이다. 유비소프트는 ‘어쌔신 크리드2’, ‘스플린터 셀: 콘빅션’ 등 인기 타이틀에 온라인 접속을 해야만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한 DRM을 적용했다. 문제는, 멀티 전용 게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면 게임을 실행할 수 없으며, 인증을 한 뒤 싱글 플레이 모드로 플레이하던 중이더라도 인터넷 연결이 끊기면 즉시 게임 진행이 멈춘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패키지 게임을 온라인 게임처럼 인터넷에 접속해야만 즐길 수 있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국내의 경우 인터넷 사정이 좋은 편이지만,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은 국가에서는 인터넷 연결이 끊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많은 게이머들이 불만을 호소했다.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한 DRM이 게임을 정상적으로 즐기는 정품 유저들에게 먼저 반발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유비소프트의 DRM을 뚫으려는 해커들의 공격으로 인해 온라인 인증 서버가 다운되어 정품 이용자들이 게임을 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3월 2일 정식 출시된 ‘사일런트 헌터 5’의 경우 발매 하루만에 DRM 없이 즐기는 크랙(비록 부분적이었지만)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유비소프트 측은 “어차피 해적판은 완전하지 못하다.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계속 진행해 보면 불완전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 유비소프트는 트위터를 통해 최신 DRM에 대한 자신감을 표시했지만...
그러나 결국 4월 말 ‘어쌔신 크리드 2’의 완벽한 크랙이 공개되며 유비소프트 측은 사실상 패배했고, 크랙 배포자들은 영웅 취급을 받았다. 정당한 게임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유비소프트가 ‘악의 축’으로, 불법으로 게임을 뜯어고치는 트랙 배포자들이 ‘영웅’으로 둔갑한 것은 유비소프트의 DRM이 일반 유저들에게 얼마나 외면받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DRM과 불법 복제, 이 중 나쁜 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불법 복제다. 게임을 무단으로 복제, 배포하고 그것을 받아가는 유저들이 없다면 애초에 DRM이 나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불법 복제를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블리자드 프랭크 피어스 부사장의 말처럼 DRM을 공격하는 유저들은 게임 개발자보다 훨씬 많고, 어떠한 DRM도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어쌔신 크리드2의 불법 공유 현장, 너무나도 허망하게 뚫렸다
불법 복제와 DRM의 싸움을 막는 근본적인 방법은 두 가지다. 강력한 법적 규제를 통해 불법 공유를 단속하거나, 유저들이 자발적으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DRM 시스템으로 유저를 강제하려 한다면 유비소프트와 같은 ‘악의 축’ 취급을 받는 사태까지 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DRM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불법 복제 유저는 줄어들지 않는다. 불법 복제 유저도 정품을 사고 싶어지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DRM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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