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온: 영원의
탑>메카리포트] 왠지 자는데 허리가 아파 눈을 떴어요. 오 마이 갓, 동아리방이에요. 어젯밤에 친구들과 술을 퍼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는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해는 중천에 떠 있어요. 전공 교수님의 ‘한 번만 더 빠지면 넌 F다’라는 경고가 번뜩 뇌리를 스치며 ‘이번에도 학사경고면 제적인가’하는 엄청난 불안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와요. 불안해 미치겠지만, 이미 지나 간 일은 어쩔 수 없어요. 쿨하게 게임이나 하러 가기로 해요. 대한민국을 짊어질 젊은 청춘이지만 오늘만큼은 천족의 미래를 위해 내 청춘을 바치기로 해요.
접속하니 온통 유일템으로 도배를 마친 천군 총사령관 계급을 단 멋진 내 캐릭이 보여요. 일단
게임에 접속했으면 삼십 분 정도는 대도시에 서 있어야 해요. 지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날 클릭하고
내 장비를 보며 감탄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해요. 이 아이템을 맞추기 위해 여자친구, 레포트, 학점, 과제, 미팅, 소개팅 전부 포기했어요. 게임
할 시간에 공부했으면 과 수석도 우스운 얘기였을 거에요.
이제 슬슬 마족 오골계들을 사냥하러 가기로 해요. 어비스에 도착해보니 오골계 녀석들이 떼
지어 천족 치유성을 집단 구타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와요. 천족의 총사령관으로서 천족의 일원이 맞고 있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요. 가서 멋있게 저 사람을 구출해주기로 해요. 난 쿨하고 멋진 도시 총사령관 검성이니까요.
멋지게 마족들을 해치우고 나서 시크하게 ‘컨트롤 좀 늘리셔야 할 듯’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오 마이 갓. 공식홈페이지 메인에 뜰 법한 엄청난 미녀 캐릭터에요. 몸매도 착하디 착해요. 김태희가 보고 울고 갈 정도에요. 저 사람은 분명히 여자일 거예요. 남자라면 저렇게 커스터마이징에 신경 썼을 리가 없어요. 오만 년 전에 죽어버렸던 연애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에요. ‘이런 곳은 위험하니 우리 엔씨톡이나 하면서 같이 다녀요’라고 말해요. 시크한 도시 남자지만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하기 때문이에요. 올레, 그 치유성이 알았대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을 만들고 치유성님을 초대해요. 이미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여성과 함께하는 행복한 어비스 학살을 하고 있어요. 인터넷으로 방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때 막 헤드셋으로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와요.
이런 젠장, 초딩이에요. 얼굴은 누나가 만들어준
거래요. 아름다운 어비스 학살이고 뭐고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님아, 그 장비 어디서 나와요’, ‘님아 돈점’, ‘님아 저 이 퀘스트만 좀 도와줘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 이름이
님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에요. 오늘 일진이 아주 사나워요. 빨리
종료하고 교수님께 한번만 더 봐달라고 빌어봐야겠어요.
오늘도 야근이에요. 아마 내일도 야근일 거예요. 사무실엔
벌써 나 혼자밖에 없어요. 집에서는 부인이 오늘도 안 들어온다며 우리가 정말 신혼이 맞느냐고 따지고
있어요. 누구 때문에 이렇게 일하는데 정말 야속해요. 과장님은
나한테는 야근하라 그래 놓고는 쏜살같이 칼퇴근했어요. 세상이 아무리 험난하다지만 나한테만 이럴 수는
없는 거에요. 어차피 사무실에도 나밖에 없는데 게임 좀 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거에요. 그래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하루종일 일만 하는 건 말도 안 돼요. 머리라도 식힐 겸 아이온을 하기로 해요. 접속하니 매일 계속되는 야근으로 벌써 한달째 레벨이 그대로인 불쌍한 내 캐릭이 보여요. 파티사냥 할 시간조차 없어서 일부러 솔로플레이 최강이라는 정령성으로 키웠어요.
오늘도 요새 주변 몬스터만 잡는 인생이지만 사무실에서 게임하는 게 어디냐며 스스로 위안해요. 오늘따라 몬스터들도 픽픽 잘 눕고 사냥이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오늘따라 소환 좀 해달라는 귓말도 안 오고 이렇게 쾌적한 아이온을 즐겨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왠지 자꾸만 뒤통수가 따가운 기분이 들어요. 뒤를 돌아보니 오 마이 갓, 사장님이에요. 평소에는 사무실에 한 번도 안 오시던 사장님께서 왜 오늘따라 오신 건지 모르겠어요. 이미 수습하기엔 글렀어요. 사장님이 수고하라고 하시더니 뒤돌아 나가셨어요. 난 망했어요. 갑자기 집에 있을 아내 얼굴이 떠올라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때 마침 뭔가 스친 것 같더니 내 캐릭이 날개를 접고 엎드려 있어요. 캐릭터나 나나 험난한 세상 처량한 건 마찬가지에요.
피시방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더니 사람들이 쳐다봐요. 아직은 젊은 청춘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다들 나만 쳐다보는지 모르겠어요. 자꾸 알바가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내가 야구 동영상이라도 볼까
봐 걱정되는 표정이에요. 왜 날 다른 40대 배불뚝이 아저씨들
취급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표정으로 아이온을 실행시켰어요. 귀여운 분홍색 양 갈래 머리 꼬꼬마 캐릭터가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고 있어요.
역시 캐릭터가 딸보다 더 귀여워요.
너무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있었더니 조심스럽게 알바가 다가와서 말해요. ‘여기서 야구 동영상
보시면 안돼요’. 나이 먹는 것도 서러워 미치겠는데 이런 취급이나 당해야 한다니, 아들뻘 되는 알바를 한 대 후려치고 싶지만, 꾹 참고 그냥 집에
가기로 해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마누라가 바가지 긁을지도 모르니 빨리 가야 해요. 오랜만에 PC방에 왔어요. 오늘은 4교시까지밖에 안 하는 신나는 수요일이에요. 오늘은 사실 학습지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지만 딱 삼십 분만 하면 집에 가서 밀린 숙제 따위는 금방 해치울 수 있을 거에요. 문이 열리자마자 알바형이 귀찮다는 뉘앙스가 잔뜩 풍기는 눈으로 날 째려보고 있어요. 하지만 난 대한민국의 여름과 겨울을 지배하는 위대한 초딩군단의 일원이에요. 날 막을 수는 없어요. 당당하게 카운터로 걸어가 오백원짜리 동전을 내밀며 “30분만요”라고 말해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말해야 해요.
피씨방 의자에 앉는 게 게임 시작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난 유치한 게임이나 하는 친구들과 다른 시크한 도시 초딩이니까 캐릭터가 멋진 게임을 해야 해요. 드디어 아이온에 접속했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녀시대의 제시카누나의 얼굴로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지만, 얼굴을 만드는 건 너무 어려웠어요. 그냥 기본 얼굴들도 예쁘니까 그렇게 하기로 해요.
눈 깜짝할 사이 삼십 분이 흘렀어요. 알바 형한테 5분만 더 시켜달라고 조르고 싶지만 한 번만 더 말했다간 알바 형이 나를 안드로메다로 관광 보낼 것만 같아요. 어쩔 수 없이 집에 가기로 해요. 집에 오자마자 사이트에 접속하고 아이온을 시작해요. 오 마이 갓, 계정이 끝났으니 결재를 하래요. 계정 결재를 하려면 엄마의 핸드폰이 필요해요. 회원가입 할 때도 엄마 핸드폰을 빼오려다 걸려서 비 오는 날 먼지 나듯 맞았었는데 또다시 목숨을 건 핸드폰 빼내오기라니, 세상은 너무 험난한 것 같아요. 때맞춰 학습지 선생님까지 왔어요. 오늘 아이온을 하기는 그른 것 같아요. 눈물을 머금고 컴퓨터 전원 버튼을 내려요. 글: 게임메카 임경희 기자(aion@gamemec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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