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스라마스! 지옥으로의 여정

"끝도 없는 간섭에 이젠 진저리가 나는군. 중요한 연구를 하던 중이었소. 몇 주간의 준비와 특별한 의식이 필요한 아주 섬세한 마법 말이오." 심문을 위해 몇 시간이고 대기하라는 명을 받은 켈투자드는 모욕감에 치를 떨며 말했다. 그리고 최대한의 자제심을 발휘하여 자신을 고발한 이들과 마주했다. 키린 토의 공식 대변인인 드렌던과 모데라,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맹렬히 켈투자드를 비난해왔다. 그렇지만, 안토니다스가 나타날 때까지 최후의 심문을 시작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과연 이 대마법사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드렌던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섬세한 마법이라고? 그런 마법은 내 생전 처음 들어보는군."

그는 작은 나무 상자를 하나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켈투자드, 마지막까지 너는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구나."

"드디어 안토니다스께서 그 존엄한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푸시는구나. 이제 넌 끝장이다."

"지각이냐? 나이가 드니 힘든가 보군." 켈투자드가 비꼬자 안토니다스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선택은 하나뿐이란 사실을 명심해라."

좋을 대로 생각하게 내버려둬...

숨을 몇 번 고른 후 안토니다스는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내 건강을 염려할 때가 아닐 텐데? 사실 이번 일로 급한 용무가 있어 다른 곳에 들렀다 왔다."

"금지된 마법의 증거를 찾기 위해 내 연구실을 뒤졌겠지? 당신이 더 잘 아는 사실 아닌가?"

"그래, 네 연구실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더군. 그런데 노스렌드의 네 창고에서는..." 안토니다스는 역겨운 듯 켈투자드를 쳐다보았다.

제길, 독선에 가득 찬 영감이 쥐새끼처럼 내 실험실을 기웃거렸군. "당신에게 무슨 권한이 있다고..."

안토니다스가 지팡이로 바닥을 쾅 내리치는 순간 켈투자드는 침묵해야 했다. 그는 다른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이 자는 노스렌드의 창고를 실험실 삼아 더러운 마법을 연구해왔다. 자, 모두 직접 확인해라. 이것이 바로 그 연구의 결과니까!" 안토니다스는 모두에게 내용물이 보이도록 나무 상자를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부패하고 있는 쥐들의 시체가 보였다. 그 중 살아남은 두 마리가 상자 측면을 기어올라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몇몇 마법사들은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고 곳곳에서 경악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뒤쪽에 조용히 앉아있던 금발의 하이 엘프도 깜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가 바로 캘타스 왕자였다.

켈투자드도 상자 안의 쥐들을 보았다. 모두 쓰러져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 실험도 실패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언젠가 반드시 불사의 언데드 표본을 창조할 것이기에... 그러면 이 비난의 목소리가 그치고 그의 노고는 널리 인정을 받게 되리라. 그건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다.

너를 침묵시킨 마법에는 허점이 있다. 어떻게 해제할지 알려줄까?

늘 켈투자드의 편에 서서 목표에 한 발짝 가까이 가도록 도왔던 그 수수께끼의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그래, 알려줘!` 켈투자드는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한번 까딱이더니 순간 이동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녀가 사라지자 하이 엘프 왕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평소 같았으면 이 광경을 조롱하며 즐겼을 켈투자드지만 안토니다스의 공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침묵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켈투자드는 다시 마법을 풀어보려 애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이 상황을 묵과했다. 이제 그의 수상한 혐의를 속속들이 들춰내어 처벌한 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이 자가 악의 마법을 연구했다는 증거가 우리 손에 들어왔다. 이제 이 근방 마을 주민들은 키린 토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저주로 여기는 실정이다."

"거짓말!" 마침내 켈투자드가 입을 열었다. 마법사 몇이 그를 둘러싸고 어떤 해명이라도 하길 기다렸다. "농민들도 우리처럼 2차 대전쟁을 잊지 않고 있다. 네가 오크에 대해 무얼 알고 있느냐? 오크 흑마법사들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우리의 저항이 무의미한 그런 힘 말이다. 거기에 대항할 마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죽은 쥐로 군대라도 만들 셈이냐? 자연의 질서를 거슬러 창조한 조악한 존재들로?" 안토니다스는 냉담하게 말했다. "네 일지도 찾았다. 끔찍한 발견에 대해 자세히도 적었더군. 물론 오크가 현재의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수용소를 탈출한다면 우리에게 다시 위협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오크를 상대하는 일이라도 그렇게 가련한 존재들을 이용할 수는 없는 법!"

"당신보다 젊은 사람의 생각은 무조건 무시하는 경향이 있군." 켈투자드가 반박했다. "쥐에 관해 해명하자면 나의 연구 진척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기준일 뿐이지. 요새 어떤 실험에라도 쓰이는 게 바로 생쥐 아닌가."

안토니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북쪽에서 보낸다고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울 리가 없는데 좀 수상한 생각이 들었지. 너도 알고 있겠지. 국왕이 세금을 올려서 시민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걸. 네 이기적인 목표를 위해 힘을 남용하다간 농민들의 반감을 살 수 있다. 너 하나 때문에 로데론이 시민 전쟁의 불길에 휩싸일 수 있는 것이지."

사실 켈투자드가 세금에 관해 알 리 만무했다. 보통 마법사들은 더욱 높은 차원의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안토니다스는 약간 과장된 논리로 그를 위협했던 것이다. "앞으로 좀 더 조심하도록 하지..." 켈투자드가 앞니를 부드득 갈며 대답했다.

"이 정도 비밀을 감추려면 보통 조심해서는 안 되겠는데..." 드렌던이 비꼬았다.

모데라도 거들었다. "키린 토는 우리의 안전은 물론, 동부 왕국의 모든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올바른 길만을 걸어왔다는 사실은 너도 알겠지. 그런 우리가 인간성을 배반하는 짓을 할 수는 없다. 대외적으로는 물론 진실로 말이야! 네 연구에 성과가 있었다면 기껏해야 우리를 이교도로 몰았다는 것뿐이야."

뭔가 잘못 알고 있군. "우리는 벌써 수백 년 동안 이교도라고 불렸지. 교회는 우리의 방식을 한 번도 옹호한 적 없지 않은가. 그런 여론에도 우리는 건재하다."

모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앙과 타락만을 불러오는 어둠의 마법을 피했기 때문이지."

"아니야, 그들에게 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야!"

"그만." 안토니다스가 지친 듯 드렌던과 모데라를 향해 말했다. "말로 해서 들을 자 같았으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켈투자드의 이름 모를 친구가 이미 경고했었다. 비록 그때는 믿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파국으로 치달았지만 원인 모를 해방감이 밀려왔다. 사실 연구를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기에 제한적인 실험만 가능했고 그 때문에 진행이 더디었기 때문이다.

"명백한 증거가 드러났다." 안토니다스가 엄숙하게 말했다. "테레나스 국왕도 우리의 판결에 동의한다. 그 광적인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네 지위를 박탈하고 모든 재산을 압류할 것이다. 그리고 달라란은 물론 전 로데론에서 추방하겠다."

켈투자드의 심장은 고동치고 있었지만, 좌중에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키린 토의 모든 이들은 분명 그에게 치욕을 주었음을 알았다. 비록 켈투자드는 조용했지만 모두 복수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 두려움은 훗날 켈투자드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의 물건들이 국왕의 손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 * *

늑대 한 무리가 벌써 몇 시간째 켈투자드의 뒤를 밟고 있었다. 늑대들도 마법은 두려워하여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간격을 유지했다. 켈투자드는 어깨너머를 조심스레 응시하다가 늑대들이 으르렁거리며 공격할 기미를 보이자 그들의 머리에 마법을 날렸다. 때마침 고맙게도 혹한의 강풍이 휘몰아쳐 늑대들은 추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앞에 정상이 보였다. 황량한 산꼭대기에서 그는 어떤 승리의 예감을 느꼈다. 그곳이 바로 얼음왕관의 정상이었다. 전에 이 빙하에 도전한 이들도 있었지만 살아남아 후일담을 전할 수 있었던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켈투자드는 혈혈단신 얼음왕관의 꼭대기에 올라 온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한의 땅, 이곳 노스렌드 대륙의 지도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손에 들어온 지도는 켈투자드가 떠날 때 꾸린 다른 짐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한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울뿐더러 목적지 또한 불확실한 상황에서 순간 이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안감에 모피를 두른 망토를 입었지만 와들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다. 두 다리는 마치 돌기둥처럼 굳어지고 온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어서 추위를 피할 곳을 찾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고 말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빛이 보였다. 마법의 문양이 새겨진 방첨탑 너머 요새가 보였다. 이제 살았다! 켈투자드는 서둘러 방첨탑을 지나 원초적 힘에 의해 떠있는 듯한 다리를 건넜다. 그가 다가가자 요새의 성문이 천천히 열렸지만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에 진동하는 악취에도 경비병들은 미동조차 않았다. 켈투자드의 생쥐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이 언데드 거미들은 생전의 힘과 능력을 거의 보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경비를 설 수도 없을 테니까. 이들의 창조자는 굉장한 실력의 강령술사가 분명하다.

놀랍게도 경비병들이 켈투자드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짐승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는 흔쾌히 요새로 들어섰다. 바깥 공기와는 확실히 다른 훈훈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거미를 닮은 생명체를 본뜬 석상이 부서져 있었다. 요새는 최근에 지은 듯했지만 그 석상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북쪽으로 오는 동안 고대의 폐허에서 비슷한 물건을 본 기억이 났다. 하지만, 온몸의 한기 때문에 더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한 강령술사가 거미들의 왕국을 정복하여 이들을 언데드로 만들어버리고 보물을 전리품으로 취했을 것이다. 켈투자드의 가슴은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여기서 분명 굉장한 비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구석에 거미와 말벌을 섞어놓은 듯한 모양의 거대한 괴수가 보였다. 그것은 천천히 켈투자드에게 다가왔다. 우뚝 솟은 몸통에는 무수한 상처 자국과 붕대가 보였다. 경비병들과 같은 언데드였지만 거대한 부피에 놀라움이 우선했다. 켈투자드는 이런 괴물을 무덤에서 일으킬 능력은 고사하고 물리칠 힘이 자신에게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생명체는 거대한 몸통에서 울려 퍼지는 깊은 저음으로 켈투자드에게 인사를 건넸다. 비록 완벽한 공용어를 구사했지만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소리였다.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와 혀차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대마법사여, 주인님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나는 아눕아락이라 하오."

지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췄다니 놀라운 따름이었다!

"주인님이라는 그분 밑에서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거대한 생명체가 켈투자드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한입 식사거리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긴장한 켈투자드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분을 뵐 수 있을까요?"

"아직은 때가 아니오." 아눕아락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당신은 지식을 목표로 하여 인생을 헌신했소. 칭찬받을 만한 일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마법사로서 당신의 경험은 주인님을 모시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소."

도대체 이런 말을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혹시 이 청지기는 그를 경쟁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가능한 빨리 오해를 풀어야 한다. "키린 토의 전 일원으로서 나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마법을 쓸 줄 압니다. 주인님께서 어떤 일을 맡기더라도 성공적으로 해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가요? 정말 그렇다면, 앞으로 알게 되겠지요."

켈투자드는 언데드 거미 중 한 마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모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군요. 같은 종족에서 나온 건가요?"

"그렇소, 우리는 원래 네루비안 종족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살고 있었소. 그러던 어느 날, 주인님이 오신 거요. 우린 어리석게도 그에게 도전했소. 그분을 쓰러뜨릴 수 있으리란 헛된 망상을 품은 게지. 우리 중 다수가 죽고 언데드로 부활했소. 살아생전 난 네루비안의 왕이었소. 지금은 지하군주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불사의 몸을 받는 대신 그를 섬기기로 동의했소" 켈투자드는 마음 속에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랍군...`

"비록 선택의 여지가 없는 동의였지만."

그 강령술사에게는 언데드를 복종시킬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켈투자드는 아마 필멸의 종족 중에서 이곳에 자유 의지로 발을 들인 첫 번째 인물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점점 불안해지던 켈투자드는 화제를 돌렸다. "이곳에는 당신의 종족이 가득하군요. 지금 이곳을 통치하는 게 당신입니까?"

"난 언데드가 되어 동료들을 이끌고 새로운 주인님을 위해 이 지구라트를 정복했소. 그리고 주인님의 뜻대로 이곳을 뜯어고쳤지. 내게 낙스라마스를 통치할 권한은 없소. 이곳에는 우리 종족만이 살고 있는 게 아니니까. 이곳은 네 전당 중 한 구역에 불과하오."

"그렇다면, 갑시다. 지하군주여, 나머지 전당들도 둘러보고 싶군요."
 

* * *
 

그리고 현명한 강령술사는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인근 묘지에서 시체를 얻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키린 토에서 즉각 조치를 취했을 테니까.

켈투자드는 세 번째 전당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눕아락은 무기고와 전투 훈련 장소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하군주가 인도한 방안에는 수백, 아니 수천 개의 물통과 화물 상자가 단단히 포장되어 있었다. 도대체 왜 낙스라마스에 이렇게 엄청난 수량의 보급품이 필요한 것일까? 피라미드가 포위되는 사태를 대비해 미리 비축해둔 것일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오. 주인님께서 당신을 산 채로 남겨두고 싶어하시거든."

켈투자드는 너무 놀라서 기가 막혔다. "방금 제가 죽을 뻔했나요?"

"살아있는 육신으로는 주인님을 섬길 수 없는 자들이 많이 있소.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 액체를 쓰는 것이오." 완전히 얼이 빠진 켈투자드에게 지하군주가 말했다. "자, 이리 오시오.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 있소."

아눕아락이 그를 데려간 감옥에는 두 명의 죄수가 있었다. 행색을 보니 마을 주민 같았다. 한 남자가 잠이 든 여자를 안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매우 창백했고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둘 다 살아있었지만 여자는 병색이 역력했다. 켈투자드는 지하군주를 근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절망에 빠진 여자의 흐릿한 눈동자가 켈투자드를 발견하자 금세 반짝였다. "주인님, 자비를 베푸세요! 제 몸이 허물어지고 있어요.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요. 제발 제게 불화살을 내려 안식을 허락하세요."

그녀는 강령술사의 노예가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눕아락의 말로는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켈투자드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외면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남자의 팔을 뿌리치고 감옥 쇠창살에 매달렸다. "제발, 조그마한 동정이라도 베풀어 주세요! 제가 아니면 우리 남편이라도!" 그녀는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쉬, 여보! 조용히 해." 그녀의 뒤에서 남자가 속삭였다. "난 절대 당신을 떠나지 않아."

"저 여자 좀 조용히 시켜요!" 켈투자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눕아락에게 말했다.

"여인의 소음이 성가신 건가?" 아눕아락은 한줄기 번갯불처럼 쇠창살 사이로 앞발을 날렸고 여자의 심장 부위를 관통했다. 지하군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녀의 몸을 바닥으로 치워냈다.

남자는 슬픔에 울부짖었다. 켈투자드는 죄책감이 들어 그를 외면했지만 바닥에서 여인의 시체가 꿈틀거리며 크게 구부려지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남자도 울음을 그치고 입을 떡 벌린 채 서 있었다.

죽은 여인의 피부가 약간 녹색을 띤 회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발작도 서서히 멈추고 어느새 구부정하게 일어서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홱 돌리더니 남편을 발견하고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경비병, 당장 이 남자를 내쫓아라." 그녀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투덜거리며 뒤엉킨 갈색 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어 묶었다. 그때 켈투자드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투명한 피부 아래 검은 혈관이 비춰 보였고 눈동자에는 음산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남편은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여보? 당신 괜찮아?"

남자가 잠시 주저하다가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가자 비통에 찬 그녀의 웃음소리는 고함으로 바뀌었다. "가까이 오지 마!"

하지만, 남자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나아갔다. 여인이 힘껏 밀쳐내자 남자는 감옥 안을 날아올라 쇠창살에 크게 부딪혔다. 그리고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거기 가만히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쉬고 있었다. "안 그럼 당신을 해치니까." 그녀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뒷걸음질치다가 어느새 감옥 반대편 벽까지 이르렀다. "당신을 해쳐. 당신을..." 울음 섞인 그녀의 말은 어느새 다른 의미로 바뀌었다.

뭔가를 뜯어내고, 찢고, 씹는 소리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서운 건 때때로 나지막이 들려오는 구슬픈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그것은 언데드 여인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지만 멈출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극도의 메스꺼움과 공포를 느낀 켈투자드는 순간 이동으로 낙스라마스를 빠져나왔다. 눈길을 몇 걸음 휘청거리며 걷다가 넘어져서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깨끗한 눈을 한 줌 집어 더러워진 입가와 얼굴 전체에 거칠게 문질러 보았지만, 자신이 본 것을 결코 지울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이런데 만약 그 일에 끼어들기라도 했다면?

켈투자드는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강령술사는 세상 모든 이들이 비난하는 그 마법을 그냥 학구적인 호기심만으로 파고든 것이 아니다. 또한, 그 계획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요새를 방어하는 정도로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좀비로 만드는 액체를 대량 생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낙스라마스는 거대한 규모의 보급품, 무기, 방어구, 훈련 장소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수비를 위한 조치일 리가 만무하다. 그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갑작스런 돌풍이 그를 강타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으스스한 망령 한 무리가 그의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 수년 전 켈투자드는 보랏빛 요새 에서 그들에 관한 문헌을 찾아본 적 있었다. 이 희뿌옇고 반투명한 형체를 한 망령들에 대한 설명으로는 번뜩이는 두 눈에 싸늘한 원한만이 가득하다는 것뿐이었다.

망령 중 하나가 그의 앞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다시 생각해보는 건가? 너도 봐서 알겠지만 간사한 재주를 부려봤자 헛수고일 뿐이다. 주인님을 피할 수 없어! 여하튼 네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어디로 가고 싶으냐?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누굴 믿겠느냐?

망령은 그를 다시 요새 안으로 순간 이동시켰고 여러 전당을 지나 밑으로, 또 밑으로 데려갔다. 켈투자드는 여러 장소를 지나면서 나중에 결코 기억해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지하 깊숙이 자리한 거대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으스스한 냉기가 뼛속까지 사무쳐왔다. 동굴 가운데는 아찔할 정도의 바위 첨탑이 우뚝 서 있었다. 눈 덮인 첨탑의 측면에는 나사 모양의 계단이 둘러져 있었다.

켈투자드와 망령들은 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은 기대 반, 근심 반으로 두근거렸다. 그는 느려지는 걸음을 다시 한번 재촉했다. 하지만, 그 효과도 오래가지는 않았고 아주 무거운 손아귀가 뒤에서 잡아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노스렌드까지의 긴 여정으로 생각보다 훨씬 지친 것이 분명했다.

올려다보니 멀리 첨탑 꼭대기에 커다란 수정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 송이의 눈도 쌓이지 않은 그 수정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이 났다. 강령술사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망령 하나가 냉기 돌풍으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속도가 다시 늦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켈투자드는 신경질적으로 망토를 몸 쪽으로 잡아당겼다. 숨이 가빠왔지만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얼굴로 세찬 진눈깨비가 불어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단 가운데 지팡이를 기대어 놓고 잠시 멈추었다. 공기가 매우 탁해서 숨 쉬기도 힘들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 숨이 가빴다. "잠시만, 좀 쉬게 해줘." 켈투자드는 가까스로 내뱉었다.

그의 뒤에 있던 망령 하나가 대답했다. "우리는 안식이 없는 몸이지... 그런데 왜 네게만 안식을 허락하겠느냐?"

켈투자드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점점 더해만 가는 피로에 어깨를 움츠렸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보니 빛나는 수정에 가까이 와 있었다. 여기서 보니 수정은 흡사 왕좌처럼 생겼고 중앙에 흐릿하지만 어두운 형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주위를 사악한 기운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망령들이 그의 몸을 통과하자 켈투자드는 소스라치게 놀라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 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차갑게 떨리는 손으로 망토를 잡아당기는 그의 목구멍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나왔다. 갑자기 켈투자드는 끔찍한 충동에 휩싸여서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인님은 대체 어디에 있나?"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떨리고 있었다.

어떤 대답도 없고 싸라기 눈보라만이 매섭게 몰아쳤다. 켈투자드는 비틀거리며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뒤돌아 보았다. 모든 계단마다 가시가 돋아나와 그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져만 가는 그 가시 때문에 고개는 숙여졌고 등은 굽었다. 똑바로 서서 걸을 수조차 없었다. 머지않아 켈투자드는 주저앉아 무릎을 꿇게 되리라.

그때 강령술사의 음성이 켈투자드의 마음속에 울러 퍼졌다. 그 소리는 더는 키린 토에서처럼 먼 곳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이것이 네게 들려줄 첫 번째 교훈이다. 나는 너나 네 종족에게 어떠한 애정도 없다. 아니, 오히려 나는 이 세계에서 인간성이라는 것을 말살하려 하며 이 계획에는 어떠한 실수도 없으리라. 나에겐 그러한 권능이 있다.

가혹한 망령들은 켈투자드를 계속 앞으로 떠밀었다. 치욕스럽게도 그는 지팡이마저 버리고 두 손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강령술사가 내뿜는 사악한 기운이 그의 어깨를 눈 속 깊이 짓눌렀다. 켈투자드는 온몸을 흔들며 흐느꼈다. 그는 완전히 학대당하고 있었다. 철저히 속은 것이다. 육체는 피곤한 정도를 넘어 절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네 아무리 무모하게 날뛰어도 나를 속일 수는 없으리라. 나는 결코 잠들지 않는 자이니.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책을 읽는 것처럼 네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노라. 나를 꺾을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은 품지 마라. 네 연약한 마음으로는 내가 마음내키는 대로 부리는 이 힘에 도전할 수 없으리니...

켈투자드의 로브는 이미 오래 전에 찢어졌고 바지는 얼음 첨탑의 거친 계단 앞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손과 무릎에서 피가 흘러나와 그의 발자취를 따라 또 다른 흔적을 그리고 있었다. 켈투자드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려 발버둥쳤다. 왕좌에서는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왕좌는 수정이 아니라 얼음으로 이뤄져 있던 것이다.

불멸이란 굉장한 선물 일수도 있지만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고통일 수도 있노라. 네가 나를 부정한다면 진정한 고통이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겠다. 그때 너는 내게 죽음을 구걸하리라.

켈투자드는 가까스로 왕좌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갔다. 그리고 더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왕좌로부터 나오는 초인적인 힘과 증오의 기운에 압도당하여 머리를 조아려야 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한쪽 뺨이 단단한 돌 바닥에 닿았다. "제발," 그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제발!"이라고 다시 한 번 외치는 순간 그는 구속에서 풀려났다.

마침내 그를 짓누르던 힘이 사라지고 망령들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켈투자드는 일어설 수도 있었지만 고문이 진짜 끝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켈투자드의 두 눈에 그를 괴롭히던 자의 모습이 보였다.

왕좌에는 판금 갑옷 한 세트가 `앉아` 있었다. 갑옷 표면에서는 어떠한 빛도 반사되지 않았기에 완전히 검은색 같아 보였다. 사실 계속해서 쳐다볼수록 모든 빛과 희망, 그리고 온전한 정신력을 흡수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장식이 달린 투구는 반으로 갈라져 뚜렷한 왕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갑옷의 다른 부분처럼 속은 텅 빈 것 같은데 중앙에 푸른색 보석이 하나 떠있었다. 한쪽 건틀릿은 거대한 도검을 쥐고 있었다. 칼날에는 다음과 같은 뜻의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 힘이 있었노라. 그리고 여기 절망 또한 있었노라."

나의 부관이여, 네가 가장 갈망하는 꿈을 이루고도 남을 만큼의 지식과 마법을 주겠다. 그러나 그 대가로 너는 살거나 죽거나 네게 남은 시간 나를 섬겨야 한다. 날 배신한다면 영혼이 없는 하수인으로 만들겠노라. 그때도 너는 내게 복종하리라.

리치 왕이라는 이 유령을 섬겨야 한다고? 켈투자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를 섬기면 큰 힘을 얻게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만한 지식을 얻기까지는 영겁의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진실로 죽음까지 걸만하다면 저주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전 당신의 종입니다. 맹세합니다." 거의 목이 쉬어버린 켈투자드가 말했다.

그 대답을 들은 리치 왕은 켈투자드에게 낙스라마스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빙하 바깥에서는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커다란 원형으로 서 있었다. 그들의 팔에 흑마술의 힘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 동시에 팔을 들어올렸다 내리자 윙윙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와 켈투자드의 사고가 흐려졌다. 그리고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시전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너를 세상으로 내보내 내 권능의 증인으로 삼으리라. 산 자들에게 나의 대사로 파견하겠노라. 그곳에서 동지를 모아 나의 원대한 계획을 추진하라. 그들에게 환상을 심어줘라. 질병과 폭력을 이용하라. 그리고 아제로스에 나의 주둔지를 세워라.

놀랍게도 빙하가 움직이며 쪼개지고 있었다. 지구라트 꼭대기의 얼어붙은 땅을 뚫고 거대한 건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로브를 입은 자들은 마법 시전에 더욱 힘을 쏟았고 웅장한 피라미드가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엄청난 폭발력으로 얼음 조각이며 바위 덩어리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그 구조물은 대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려는 듯 솟아오르고 했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낙스라마스는 공중에 떠올랐다.

여기, 너의 방주가 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