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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사스토리] 블리자드 2부, 스타크래프트와 RTS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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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사 스토리] 블리자드 3부작

1부: 블리자드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2부: 스타크래프트와 RTS 전쟁

3부: 천만제국,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괴물이 나왔다! ‘토탈어나힐레이션’을 목격하는 순간 블리자드 개발자들은 할말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완벽한 3D, 현란한 전투효과, 100여 개 이상의 유닛, 실제 전장을 모니터에 넣은듯한 이 괴물은 90년대 RTS전국시대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이대로라면 가망이 없다. 지금 이 괴물과 맞붙는다면 승패는 불 보듯 뻔하다.

“그래, 처음부터 다시 만들자!”

블리자드는 거의 완성단계였던 프로젝트를 버렸다. 뼈를 깎는 결단이었다. 그리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프로젝트는 무한 연기됐고 당연히 유저들의 관심은 냉대로 바뀌었다. 잘못하면 그간 아성을 하루아침에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100% 만족할만한 게임이 아니라면 출시 하지 않는 게 블리자드의 신념이다. 그들은 묵묵히 개발에만 전념했다. 1998년, 2년 간의 인고 끝에 드디어 결실이 나왔다. 게임사의 물줄기를 바꾼 ‘스타크래프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알파버전 당시의 `스타크래프트`. 그래픽과 인터페이스 모두 `워크래프트2`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2부: 스타크래프트와 RTS 전쟁

RTS 전국시대, 출사표 던지다

“우리는 RTS게임에 너무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개발자들이 가장 즐기는 장르이기도 합니다.”

-블리자드 수석 부사장 폴샘즈-

블리자드의 중심에는 RTS가 있다. 블리자드 노스에서 개발한 ‘디아블로’를 제외하면 블리자드의 모든 게임이 RTS 게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월드오브워크래프트(WOW)’ 역시 RTS게임 ‘워크래프트’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비록 개발이 중단되거나 무기한 연기되었지만 ‘워크래프트 어드벤처(장르: 어드벤처)’나 ‘스타크래프트: 고스트(장르: 잠입액션)’ 역시 그러하다. 이 점을 제외하고 서라도 블리자드가 지금처럼 전 세계적으로 신뢰받는 개발사로 자리매김하는데 RTS게임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혼돈의 시대, 돌파구는 RTS!

그렇다면 블리자드는 왜 RTS를 선택했을까? 해답을 찾으려면 90년대 중반, 게임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90년대 중반은 한마디로 혼돈의 시대였다. 엄청난 기술의 발전은 콘텐츠의 혁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같은 게임만 찍어내듯 나오는 요즘 국내시장처럼 당시 북미 게임계도 시대를 바꿀 혁신적인 게임이 없었다.

유저들은 80년대를 풍미했던 어드벤처와 RPG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인디아나 존스’, ‘원숭이 섬의 비밀’, ‘페르시아의 왕자’, ‘울티마’ 등 명작 어드벤처 게임들의 인기감소와 함께 어드벤처 장르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시에라, 루카스아츠 등 메이저급 회사들은 게임에 실사영화를 도입한 ‘인터렉티브 무비’를 내놓았지만 반응은 시큰둥했다. 차라리 영화를 보고 만다는 식이었다. 시대는 보다 획기적인 게임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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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등장한 장르가 바로 RTS다. 92년 최초의 RTS게임 ‘듄2’는 게임계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전략과 전술은 물론 생산과 소비 등 모든 명령을 실시간으로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재미. 그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리고 ‘듄2’를 필두로 다양한 RTS 게임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 최초의 RTS로 평가받고 있는 웨스트우드의 `듄2`

 당시 RTS는 새로운 것을 원하는 게이머들에게 ‘신천지’와 같았다. 때문에 많은 소규모 개발사들은 앞다투어 RTS 게임 개발에 뛰어들었다. 신천지를 조금이라도 먼저 개척하기 위해서 말이다.

마우스의 보급도 RTS 전성기에 날개를 달았다. 마우스는 80대년 초에는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컴퓨터 전문가들이나 가지고 있음직한 물건이었다. 그만큼 고가이기도 했다. 때문에 당시 평범한 게이머들은 키보드만을 사용했고 출시되는 게임들 역시 키보드만으로 조작하는 게임들이었다.

하지만 80대 후반, 90년 대 초에 들어 마우스가 게이머들에게도 널리 보급된다. 가격도 낮아지고 질도 좋아져 많은 게이머들이 마우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마우스의 보급으로 일반 게이머들이 RTS게임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조성됐다. 블리자드는 이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감지했고 몸을 실었다. 그들은 ‘워크래프트’로 그 첫발을 내딛었다.

▲ 블리자드는 10년이상 근속한 직원에게 검과 방패를 준다. 검과 방패른 받은 직원은 블리자드의 핵심개발자라는 뜻이다

RTS전성기를 열었던 게임들

덕분에 90년 대 게임시장은 RTS게임의 전성기였다. 많은 RTS 명작들이 90년대에 탄생했으며 몇몇 시리즈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래픽부터 소재까지 다양한 모습의 RTS가 등장했다.

살펴보면 ‘스트롱홀드’, ‘토탈어나일레이션’, ‘C&C’, ‘워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그라운드 컨트롤’, ‘에이지오브엠파이어’, ‘홈월드’, ‘킹덤언더파이어’ 등 현재까지도 유명한 RTS게임 대부분이 이 당시 개발됐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작품으로 ‘토탈어나일레이션’과 ‘홈월드’를 꼽을 수 있다. ‘토탈어나일레이션’은 당시 RTS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견인차 역할을 한 게임이다. ‘스타크래프트’ 역시 시스템적으로나 그래픽적으로나 ‘토탈어나일레이션’의 영향을 받았다.

▲ RTS 게임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명작, `토탈어나일레이션(좌)`과 `홈월드(우)`

‘홈월드’는 ‘RTS게임의 배경은 지상’이라는 기존 RTS 통념을 깨고 우주공간에서의 전투를 표현했다. 게임의 카메라 시점과 실감나는 유닛 간 전투, 새로운 형태의 인터페이스, 뛰어난 3D 그래픽, 놀라운 최적화 등 혁신적인 RTS 게임의 진화가 바로 이 ‘홈월드’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산 RTS 게임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게임은 2000년 출시된 ‘킹덤언더파이어’를 들 수 있다. ‘워크래프트3’보다 2년 앞서 영웅 시스템을 도입해 RPG 게임 못지 않은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멀티플레이는 ‘스타크래프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스피드감이 뛰어났고 당시엔 여러 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또 배틀넷과 비슷한 개념의 워게이트 시스템을 도입해 플레이어 간 온라인 대전이 활발하게 펼쳐지기도 했다. 현재는 블루사이드에서 ‘킹덤언더파이어’의 적통을 이어 여러 장르의 Xbox360 타이틀로 발매되고 있다.

이 시기의 게임들은 후에 멀티플레이 게임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RTS는 특성상 플레이어간 대결과 협동 플레이가 주요한 재미인 게임이다. 때문에 당시 개발자들 간편하고 강력한 멀티플레이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당시의 멀티플레이 기술들이 밑거름이 되어 현재의 뛰어난 멀티플레이 게임들이 싹을 피울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RTS 시장은 수 많은 경쟁사가 경합을 펼치는 ‘레드오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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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수작 RTS 게임 `킹덤언더파이어`

거성 웨스트우드와의 8년 전쟁

지금부터 RTS의 양대산맥으로 통하는 블리자드와 웨스트우드간의 라이벌 전을 다루고자 한다. ‘듄2’를 시작으로 웨스트우드가 EA에 합병되는 8년 동안, 이 두 개발사는 RTS 대권을 놓고 치열한 경합을 펼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블리자드와 웨스트우드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게임을 출시했고 대결했다. 본격적인 두 RTS 명가의 대결. 지금부터는 그 8년간의 이야기다.

1차전: 듄2 VS 워크래프트 ‘돌 세례 맞은 워크래프트’

“워크래프트를 처음 봤을 때, 이렇게 인기를 끌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단순히 ‘듄2’와 비슷한 게임으로 알았죠. 하지만 블리자드라는 개발사는 앞으로 주목해야 할 회사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했습니다.”

-CGDC(컴퓨터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 대변인 러셀 드 마리아-

지금의 블리자드를 있게 한 ‘워크래프트’, 그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워크래프트는 듄2의 모방작!’ 94년 ‘워크래프트’가 출시됐을 당시 게이머들은 블리자드를 향해 비난부터 쏟아냈다. 당시 웨스트우드는 최초의 RTS를 개발한 거성이었다. ‘듄2’의 카리스마는 블리자드가 감히 넘을 수 없는 큰 벽이었다. ‘듄2’ 팬들은 블리자드를 ‘다른 작품을 베끼는 못된 개발사’로 치부해 버렸다.

솔직히 당시 ‘워크래프트’가 ‘듄2’와 비슷했던 건 사실이다. 물론 ‘워크래프트’가 ‘듄2’ 이후에 출시된 게임인 만큼 그래픽도 좋았고 인터페이스도 편했다. 하지만 ‘듄2’의 강렬한 인상을 넘지는 못했다. 때문에 게이머들은 ‘듄2’를 중심으로 ‘워크래프트’를 바라봤고, 그 결과 ‘아류작’으로 치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95년 당시 웨스트우드는 지금의 블리자드처럼 인기 개발사였으며, ‘듄2’는 지금의 WOW처럼 최고의 명작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자 비난일색이었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기 시작했다. ‘워크래프트’의 숨은 매력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워크래프트’는 세계관과 인터페이스로 ‘듄2’와 차별점을 두었다.

‘듄2’는 우주시대를 배경으로 한 SF물이었지만 ‘워크래프트’는 판타지세계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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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리자드의 첫 번재 RTS `워크래프트`

크리스맷젠이 창조한 워크래프트의 흥미로운 스토리가 통한 것이다. 편리한 인터페이스도 눈길을 끌었다. ‘듄2’의 보병은 도트 2~3개로 이루어져 구체적인 외모나 생김새는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워크래프트’의 유닛은 ‘듄2’보다 크고 세밀하게 표현됐다.

인터페이스의 경우 ‘듄2’는 마우스를 드래그해 여러 유닛을 선택할 수 없었다. 때문에 유닛 하나하나를 클릭해가며 게임을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워크래프트’에선 마우스 드래그로 한 번에 여러 유닛을 선택할 수 있게 바뀌었다. 때문에 보다 속도감 있는 전략을 구상할 수 있게 됐다. 마우스 드래그는 지금은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시도였다.

비록 아류라 비난 받았지만 ‘워크래프트’는 확실히 ‘듄2’보다 진일보한 게임이었다. 그러나 첫해 10만장 정도 판매됐고 흥행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그렇게 ‘워크래프트’는 힘겹게 신고식을 마쳤다. 하지만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를 통해 RTS 메이커로써 인지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다음 해인 95년, 블리자드는 그들의 운명적인 라이벌과 본격적인 대결에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바로 ‘커맨드&컨커’가 게임계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2차전: C&C VS 워크래프트 2 ‘자존심을 건 혈전!’

“우리가 의도한 게임은 멀티플레이 기반의 게임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파괴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지를 건설하고 유닛을 이용해 건물을 방어하는 게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웨스트우드 공동설립자 루이스 캐슬-

90년대의 게임계가 남긴 유산을 들라면 적어도 ‘커멘드&컨커’와 ‘워크래프트’가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이 두 게임간의 경쟁과 공존은 향후 게임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94년 웨스트우드는 ‘C&C’를 출시한다. 당시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웨스트우드의 우세를 점쳤다. 그도 그럴 것이 ‘C&C’가 보여준 비주얼은 가히 충격에 가까웠다. 미션 중간 실제 배우들이 등장하는 FMV(Full Motion Video)동영상은 그 자체가 한편의 영화였다. 실사였던 덕에 게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징이 잘 드러났는데 그 중에서도 악의 축으로 등장한 NOD의 지도자 케인은 지금까지도 게이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그래픽과 인터페이스가 보기 좋게 바뀌었고 등장하는 유닛도 매력적이었다. C&C는 플레이하는 즐거움과 보는 즐거움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이상의 RTS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극단적인 찬사까지 보냈다.

같은 해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2 타이드 오드 다크니스’를 내놓는다. ‘워크래프트2’의 무기는 고해상도 그래픽과 방대한 스토리다. 이미 ‘워크래프트’의 스토리는 웬만한 판타지 소설에 버금갈 정도로 진화해 있었다. 또, C&C처럼 장황하고 화려한 동영상에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짧고 간결한 비주얼로 승부를 걸었다. 유저들의 눈을 한번에 휘어잡는 블리자드 동영상이 이때부터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덕인지 ‘워크래프트2’는 100만장 이상 팔렸다. 게임계 관계자들 역시 놀랄만큼 기대 이상의 성공이다. 하지만 ‘C&C’의 인기를 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이때만 해도 ‘C&C’는 RTS 분야에서 경쟁자가 없을 정도였다. C&C의 판정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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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우드의 `커맨드앤컨커(좌)`와 블리자드의 `워크래프트2`. 94년, 두 RTS 명가의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된다

3차전: C&C:타이베리안 선 VS 스타크래프트 ‘블리자드의 카운트펀치’

“처음에는 주당 50시간, 그 다음에는 80시간을 일하다 결국에는 아예 회사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가져다 주는 음식을 먹고 소파에서 잠을 자는 생활이 계속 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 만들고 있는 게임을 플레이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스타크래프트 레벨디자이너 밥 핏치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두 라이벌간의 경쟁은 클래이맥스로 치닫는다. 다름아닌 ‘스타크래프트’와 ‘C&C:타이베리안 선’이 맞붙었기 때문이다. 98년, 블리자드는 ‘스타크래프트’의 완성버전인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를 발매한다. 이에 질세라 같은 해 웨스트우드는 C&C의 후속편인 ‘C&C 타이베리안 선’으로 응수했다. 두 개발사의 운명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승부였다

웨스트우드는 그 동안의 승리에 자만했는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C&C 타이베리안 선’은 당시 일반적인 게이머들의 PC가 소화하기 어려운 고사양을 요구했다. 그렇다고 그래픽이나 인터페이스에서 전작에 비해 발전된 부분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화려한 동영상도 더 이상 새롭지 않았다. 게이머들은 C&C에서 ‘게임’을 원하지 ‘영화’를 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웨스트우드는 시장의 싸늘한 반응을 다작으로 돌파하려는 실수를 범했다. 번외편인 ‘레드얼럿’ 시리즈를 포함해 비슷한 속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무려 13개 이상의 ‘C&C’ 게임이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발매됐다. 게이머들은 범람하는 ‘C&C’시리즈에 싫증을 느꼈던 것일까? 웨스트 우드는 빙산에 부딪힌 타이타닉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침몰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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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맨드앤컨커: 타이베리안선(좌)`와 `스타크래프트`. 두 개발사의 실질적인 승부는 이 두 작품에서 결정됐다

정체된 웨스트우드와는 달리 블리자드는 ‘스타크래프트’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승부를 걸었다. ‘스타크래프트’의 성공요인을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워크래프트’에서 ‘스타크래프트’로 브랜드를 바꾸었다. 이는 곧 판타지에서 SF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웨스트우드가 ‘C&C’ 브랜드만 고집할 때,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라는 브랜드를 과감히 벗었다. 이는 엄청난 모험인 동시에 기회였다.

둘째, ‘테란’, ‘프로토스’, ‘저그’의 3종족을 도입했다. 당시 RTS는 2종족체제가 대세였다. ‘C&C’도 GDI/NOD의 2종족이 등장한다. 유닛수가 100개 이상 되는 ‘토탈어나힐레이션’도 종족은 2개였다. RTS의 생명은 밸런싱이다.

어느 한 종족이 우세하면 승부 자체가 되지 않는다. 종족을 하나 더 추가시키려면 수십 배의 치밀한 밸런싱 조절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게임을 하나 더 만드는 격이다. 스타는 기존 RTS와는 달리 3종족을 채택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적중했다. ‘스타’가 지금까지 인기를 끄는 이유는 테란/프로토스/저그 간의 물고물리는 치밀한 전략 시스템 때문이다.

셋째, 대중적인 사양이다. 블리자드 게임은 사양이 높지 않기로 유명하다. ‘타이베리안 선’이 비주얼에 비해 높은 사양을 요구했다면, ‘스타크래프트’는 펜티엄 2급이면 무난히 돌아갈 수 있도록 최적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부감 없는 2.5D를 보여줬다. 부담 없는 사양은 누구라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게임으로 ‘스타’를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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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베틀넷이다. ‘스타크래프트’가 이렇듯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멀티플레이의 역할이 컸다. 특히 배틀넷은 기존 멀티플레이의 개념을 한 단계 진보시킨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배틀넷 시스템은 ‘디아블로’에도 사용되었었지만 액션RPG 게임이라는 특성상, 또 통신 인프라가 부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큰 빛을 발하지는 못했다.

▲ `스타크래프트` 한국대박의 일등공신 배틀넷

하지만 ‘스타크래프트’는 RTS 게임이었기에 게이머 간의 대결에 잘 어울렸으며 배틀넷 시스템 자체도 ‘디아블로’ 당시보다 더욱 세련되어졌다.

블리자드, 엘도라도 한국을 향해

“스타크래프트를 만나고 게임에 대한 나의 느낌은 확신으로 바뀌었죠. 생각을 해보세요. 얼굴도 모르는 8명의 유저가 사이버공간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새로운 개념. 이건 된다! 네트웍게임은 나에게 있어 가능성 그 자체 였습니다”

-한빛소프트 김영만 회장-

아이러니하게도 ‘스타크래프트’는 게임에 대해 가장 배타적인 한국에서 대박 히트를 기록했다. ‘스타크래프트’를 가져온 한빛소프트 김영만 회장(당시 LG소프트 시절)은 게임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IMF 한파가 한국 경제를 강타했던 99년 당시, 한국의 게임산업 기반은 척박했다. 게임은 일부 마니아들만 열광하는 폐쇄적인 문화쯤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로 인해 한국 게임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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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C방(좌)과 e스포츠(우)는 `스타크래프트`에 의해 탄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스타크래프트` 신드롬은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PC방의 등장, 게임에 대한 인식변화, 게임 산업확대,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출범 등등 ‘스타크래프트’는 한국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또 한국에서만 300만장 이상, 전 세계적으로는 500만장 이상이 판매되는 진기록을 수립한다.

스타크래프트는 IMF이후 1조 1400억 원 이상의 산업 확대효과와 15만 명 이상의 고용을 창출 했다. 프로게이머라는 신종직업을 만들었으며, e스포츠라는 새로운 문화가 창출됐다. 직장인들은 퇴근 후 당구장이나 호프집 대신 PC방에 모여 ‘스타 한판 즐기는 문화’가 일상화 됐다. 한빛소프트는 스타크래프트에 이어 ‘디아블로2’를 성공적으로 연착륙 시키며 한빛소프트를 ‘게임종가’로 올려놓았다.

‘스타크래프트’는 마치 생명을 가진 나무처럼 한국시장에 찬란한 과실을 맺었다. 황금의 땅 한국을 발견한 블리자드는 웨스트우드와의 대결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 스타가 전성기를 구가할 2000년, 웨스트우드는 또 다른 확장팩인 ‘C&C 타이베리안 선: 파이어스톰’을 출시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상태였다.

‘스타크래프트’의 그래픽에 대해선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되기 전 블리자드 개발진은 게임쇼에 참석했다. 그런데 깜짝 놀랄 만큼 멋진 그래픽의 RTS게임을 목격한다. 천재개발자 ‘크리스 테일러’가 개발한 ‘토탈어나일레이션’이었다. ‘토탈’은 당시로선 전례가 없었던 획기적인 시스템과 인터페이스, 그래픽을 보여주었다. 블리자드 임원진은 ‘스타크래프트’가 지금보다 더 뛰어난 게임이 아니라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 개발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고 출시는 약 2년이 미뤄졌다.

4차전: 워크래프트3 VS 듄3  ‘길고 긴 전쟁의 마침표!’

“성공이란 것은 폭발 가능성이 있는 로켓과 같습니다. 유독 히트작을 만든 후 사라지는 개발사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성공이란 로켓을 제 궤도에 올려놓지 못하고 폭발한 것입니다. 실패만큼이나 성공 뒤에도 크나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웨스트우드 공동 창업자 루이스 캐슬-

90년대 게임계를 뜨겁게 불태우다 사라진 웨스트우드, 창업자 루이스캐슬의 말에는 그 동안의 회한이 섞여있는 듯하다. 블리자드와 웨스트우드는 생애 마지막 대결을 준비한다. 2001년,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2: 레인오브케이아스’를 출시했다. 같은 해 웨스트우드는 ‘듄2’의 후속작 ‘엠퍼러: 배틀 포 듄(이하 엠퍼러)’을 내놓았다. 결과는 블리자드의 승리였다.

게이머들은 90년대와 달리 더 이상 ‘듄’에 감응하지 않았다. 반대로 블리자드는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로 쌓아 올린 이미지 덕분인지 ‘워크래프트3’ 역시 좋은 평가를 받는다. ‘워크래프트3’는 시리즈 영웅시스템과 수준 높은 최적화로 각 종 해외 유명매체로부터 ‘올해의 게임상’을 수상한다. 특히 유즈맵 셋팅 툴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유즈맵 중 하나인 ‘카오스’는 한국 개발사들이 그 형식을 본 따 온라인 게임으로 개발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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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퍼러: 배틀포듄(좌)`과 `워크래프트3`. 웨스트우드는 `엠퍼러:배틀포듄`에서 운명이 결정됐다

반면 ‘엠퍼러’는 마니아들은 열광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끌진 못했다. 한국시장에 어필하기 위해 한글화까지 했지만 블리자드에 매료된 한국유저의 눈길을 잡진 못했다. 당시 대세는 멀티플레이였는데, ‘엠퍼러’의 멀티플레이에 대한 평가는 ‘스타에 못 미친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8년 전과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 된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문 개발사의 마지막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2003년, 웨스트우드를 소유한 EA가 100명의 웨스트우드 개발자들을 해고시켰고 사실상 웨스트우드는 폐쇄됐다. 그렇게 최초의 RTS를 탄생시킨 웨스트우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후에 나온 ‘C&C 제너럴’시리즈는 엄밀히 말해 웨스트우드의 작품이 아니라 EA의 게임이라고 봐야 적당하다.

그리고 웨스트우드의 종말과 함께 RTS시대의 끝을 예고했다. 이를 감지한 것일까? 블리자드는 RTS를 넘어 온라인게임이라는 새로운 격전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바로 천만제국 ‘월드오브워크래프트’가 조금씩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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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인지 필연인지 두 게임 명가의 RTS게임 출시 주기는 비슷하다

번외 이야기 - 웨스트우드의 액션 RPG `녹스`

두 개발사의 대결은 RTS뿐만 아니라 액션 RPG에서도 치열했다. 블리자드가 ‘디아블로’를 개발한 큰 성공을 거두자 웨스트우드는 같은 액션 RPG ‘녹스’를 발표한다. ‘녹스’ 는 ‘디아블로2’가 연기됐던 2000년 초에 출시됐는데, 당시 게이머들 사이에선 ‘디아블로 킬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

‘녹스’는 잘 만든 게임으로 평가 받았지만 ‘디아블로’의 아성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특히 문제점으로 지적된 점이 바로 시나리오였다. ‘녹스’의 시나리오는 현실 세계의 주인공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계로 소환되고 본래 현실 세계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을 나타냈다. 중후한 시나리오의 ‘디아블로’에 매료되어 있던 게이머들은 가볍고 탄탄하지 못했던 ‘녹스’의 시나리오에 실망한다.

또 멀티플레이 역시 배틀넷이라는 강력한 시스템을 갖춘 ‘디아블로’에 비해 빈약했기 때문인지 그다지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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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우드의 액션 RPG `녹스`. 수작이지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 `1부: 블리자드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러가기

3부 예고

블리자드, 어디로 가는가! 블리자드노스라는 오른쪽 팔을 잃은 블리자드. 온라인게임 시대, ‘에버퀘스트’의 SOE, ‘다크에이지오브 카멜롯’의 미씩, 그리고 최근 ‘워해머 온라인’의 EA까지, 수많은 강자들이 이들 앞에 놓여있다. 천만제국 WOW의 신화! 그리고 공룡으로 변한 블리자드의 미래. 그 숨가쁜 스토리가 3부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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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온라인
장르
MMORPG
제작사
블리자드
게임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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