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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녀메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미연시 거장 ‘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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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매우 매우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일본 미소녀게임 거장 ‘엘프(elf)’가 문을 닫는다는 사실이죠. '엘프'는 지난 3월 31일 '폐업'했으며, 공식 홈페이지마저 모두 닫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청춘 시절을 즐겁게 해준 '엘프'가 없어진다는 사실에 많은 미소녀게임 팬들이 애도를 표했습니다. 심지어 본사로 찾아가 '폐업'에 유감을 표한 유저들도 줄을 이었다고 합니다.

대체 엘프가 어떤 회사이기에 이렇게 많은 게이머들이 슬퍼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엘프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유저들에게 ‘어드벤처 미소녀게임’이라는 세계를 열어준 수문장과 같은 회사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명작을 쏟아낸 최고의 '미소녀게임' 회사로 기억되고 있지요.


▲ '엘프'사 로고 (사진출처: 엘프 공식 홈페이지)

옛날 생각이 납니다. 필자도 엘프의 ‘하급생’으로 미소녀게임에 입문했었던지라 엘프의 폐없 소식을 듣고 꽤 마음이 아팠답니다. '스타크래프트’로 PC 게임을 처음 접한 사람이 블리자드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설적인 미소녀게임 제작사 '엘프'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엘프'의 주요 타이틀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보인 미소녀게임 제작사

엘프는 1989년 일본 도쿄에 설립된 미소녀게임 전문 개발사입니다. 이후 1990년대 현지 미소녀게임 시장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한 개발사로 우뚝 섰죠. 당시 경쟁사로 손꼽히던 앨리스소프트와 함께 ‘동쪽의 엘프, 서쪽의 앨리스’라고 불리며 시장 양대산맥으로 군림했습니다. 워낙 오래전이라 타이틀 판매량이 제대로 집계된 수치는 없지만, 체감상 실로 대단한 위엄을 자랑했죠.

그리고 현재 미소녀게임의 대명사로 쓰는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라는 신조어를 창조한 게임 ‘동급생’의 제작사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드래곤나이트’, ‘내일의 유키노죠’, ‘애자매’, ‘유작’, ‘노노무라 병원’ 등 미소녀게임 유저라면 누구나 알 법한 명작을 줄줄이 탄생시켰죠.


▲ '드래곤나이트' 타이틀 메인 이미지


▲ '유노' 메인 이미지

특히, 1996년 발매된 ‘이 세상의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YU-NO(이하 유노)’ 는 '엘프' 타이틀 중에서도 최고의 명작으로 호평받는 작품입니다. 유명 시나리오 라이터 칸노 히로유키가 제작에 참가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그리 높진 않지만, 일본 현지에서는 아직까지도 미소녀게임 역사상 최고의 명작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미연시’라는 단어를 창조한 게임 ‘동급생’

‘동급생’은 1992년에 발매된 타이틀로, 앞서 설명했듯 ‘미연시’라는 신조어를 만든 단초가 된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을 조종해 다양한 히로인과 만나고, 지속적으로 그녀들을 만나며 관계를 쌓아가야 합니다.

'동급생'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히로인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정확한 장소를 찾아가 만나야 이후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최근 미소녀게임의 기본틀처럼 여겨지는 ‘비주얼노벨’과는 많이 다릅니다. 원하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략하고픈 히로인을 손수 찾아가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핵심이죠.


▲ 익숙한 교복을 입은 '동급생'

‘동급생’ 히로인들은 아무 때나 호출해서 만날 수 없습니다. 캐릭터 특징이나 버릇이 각각 다르며, 시간에 따라 머무는 장소도 바뀌죠. 원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각 캐릭터가 출몰하는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또한, 주인공이 가진 돈, 다른 히로인과의 친밀도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이벤트 역시 달라지기 때문에 별로 관심 없는 히로인과의 관계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지요. 자칫 잘못하면 다른 캐릭터와 필요 이상으로 친해져 원하는 히로인과 맺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여기에 미려한 그래픽은 보는 재미를 살리는 주 요소로 활약했습니다.

‘동급생’은 당시 미소녀게임 판매량 신기록을 달성하며 수많은 팬들을 양성했습니다. 우스개소리로 ‘미연시도 안 해본 녀석이 사랑을 알겠냐’라는 말까지 나오게 만들었으니 그 파급력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 추억 돋는 화면 구성이다

자매를 동시에 공략한다고? ‘애자매’

‘애자매’는 엘프의 자회사 실키즈의 작품입니다. 1994년에 발매됐는데 자매를 동시에 공략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출시 전부터 큰 이슈가 됐었습니다. 지금이야 '자매 공략'이 흔한 소재지만, 그때만 해도 업계에 흔치 않았던 ‘충격과 공포’ 수준의 테마였기 때문이지요.


▲ 시대를 풍미했던 미연시 '애자매'

소재가 쇼킹한 탓인지 한국에는 정식으로 수입된 적이 없어 해적판으로 유통됐었죠. 하지만 나름의 한글 패치가 되어있었던 터라 국내에서도 미소녀게임 팬들의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졌습니다. 당시 동네 게임 CD 판매점에 가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케이스에 CD만 덩그러니 들어있는 형태로 조용히 거래됐었죠. 오래전 일이라 추억처럼 언급하지만 해적판은 엄연히 '불법 유통' 제품입니다. 그런 타이틀은 사시면 안됩니다(…)

각설하고, '애자매'의 경우 첫 타이틀이 워낙 인기가 많았던지라 리메이크도 되고 후속작도 나왔죠. 애니메이션도 여러 차례 제작됐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리메이크 버전과 후속작, 파생 콘텐츠 모두 그다지 좋지 않은 평가를 받으며 '애자매'라는 이름도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갔었습니다. 

그러나 2014년 5월 실키즈에서 ‘애자매 4’를 내놨습니다. '애자매 4'는 큰 호평을 받으며 그간의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켰죠. 전작에 비해 그래픽 퀄리티를 크게 높힘과 동시에 기존 ‘애자매’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본연의 재미를 최신 트랜드에 맞게 잘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애자매 4'는 꽤 현대화되어 있다

미연시 아니고 호러 스릴러, ‘유작’ 시리즈

1995년에 출시된 엘프의 또 다른 대표작 ‘유작’은 미소녀게임이 아닌 호러 게임입니다. 일단 간판부터가 노란색 수건을 두른 수위 아저씨죠. 이후 1998년에는 ‘취작’, 2001년 ‘귀작’으로 명맥을 이었습니다.


▲ 미소녀게임 회사에서 왠 수위아저씨가.. 하겠지만, 엘프 로고가 당당히 박혀 있다

세 작품 모두 학생들을 습격하는 수위 아저씨로부터 도망치는 게 목표입니다. 또한 타이틀별로 모습은 비슷해도 이름은 다른 수위 3명이 등장하죠. 첫 타이틀 '유작'은 '이사쿠', 그 차기작 '취작'은 '슈사쿠', 마지막 '귀작'은 '키사쿠'입니다. '공포의 수위'라는 부분이 손노리의 대표 공포게임 '화이트데이'를 생각나게 하네요. 

'유작' 시리즈 3편은 수위를 보는 시각이 각기 다릅니다. ‘유작’ 주인공이 평범한 남학생인 반면, ‘취작’에서는 플레이어가 수위 아저씨 ‘슈사쿠’를 조종할 수 있죠. 마지막 작품 ‘귀작’은 주인공이 수위 아저씨 ‘키사쿠’로 바뀝니다. '키사쿠'는 이번 작품에서 새사람이 되어 어린아이를 키우는 남자로 등장하죠.

미소녀게임 제작사가 무슨 호러 스릴러 어드벤처냐고 하시겠지만 의외로 평이 좋았습니다. 첫 작품 '유작'의 경우 문이 잠겨버린 학교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중간중간 위기가 닥쳐옴에 따라 점점 고조되는 긴장감에 플레이어를 죄어오는 수위의 으스스한 분위기가 합쳐져 ‘공포’라는 테마가 잘 살았죠.


▲ 3부작이라고, 나름 삼형제다


▲ 인상이 너무 험악해서 무섭지만.. 저 정도면 많이 참은 것

비운의 명작 ‘노노무라 병원 사람들’

국내에서 ‘야근병동’과 함께 '미소녀게임'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노노무라 병원 사람들’도 '엘프'의 작품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엘프 자회사 실키즈에서 1994년에 낸 게임이죠.

‘노노무라 병원 사람들’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동급생’이 크게 히트하자 엘프는 그와 비슷한 부드러운 게임을 계속 만들고자 했죠. 그런 엘프의 방향에 반발한 몇몇 제작진이 과격한 시나리오와 CG가 들어간 게임을 만들고자 했었습니다.


▲ '노노무라 병원 사람들' 메인 이미지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노노무라 병원 사람들’입니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성범죄를 소재로 해 출시 당시 논란도 적지 않았지요. 하지만 단순히 ‘과격함’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탐정'을 앞세워 범죄를 추적하는 탄탄한 시나리오와 추리 요소로 기존 '엘프' 팬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일본 현지에서는 꽤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죠.

그런데 국내에서는 앞서 언급된 세 작품에 비해, ‘노노무라 병원 사람들’을 제대로 플레이 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한글 패치로 인한 잦은 버그와, 폰트가 모두 깨져 글이 보이지 않는등 플레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드벤처 미연시의 몰락, 기억 속으로 사라진 엘프

1990년은 그야말로 엘프의 최전성기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 초중반부터 신작들의 잇따른 흥행 실패, 과거 잘 나갔던 작품 리메이크가 혹평을 받으며 거짓말처럼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부터 비주얼노벨 방식을 빌린 미소녀게임 ‘에어(Air)’가 크게 성공하며 엘프의 가장 큰 무기였던 어드벤처 요소, 고퀄리티 CG, 치밀한 시나리오가 시장에 하나도 통하지 않았죠.


▲ '미육의 향기' 메인이미지

그나마 2008년에 출시된 ‘미육의 향기’가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어 기세가 돌아오는 듯 보였습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엘프는 간판 원화가 이치카와 사샤의 그림을 필두로 남녀 간 불륜을 메인으로 하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미육의 향기'를 끝으로 더 이상 괄목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며 결국 2016년 3월 31일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최근 미소녀게임은 비주얼노벨 방식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쁜 일러스트에, 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텍스트와 선택지, 연출 CG가 대부분이다보니 플레이어가 게임 속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상당히 제한되죠. 그래서 공략하는 맛이 살아 있던 1990년대 엘프의 게임을 그리워하는 팬들도 꽤 많습니다. 지금은 정말 드문, 어드벤처 방식 미소녀게임 선두주자였으며 10년 남짓 미소녀게임 대표 게임사로 군림해온 그들이 보여준 성과가 너무나 눈부셨기 때문이지요.

혹시 최근 엘프가 문을 닫았다는 사실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그들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설명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이번 달에는 너무 탓하지 말고 조용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랜 기간 엘프의 게임을 사랑했고 즐겨온 만큼 누구보다도 상심이 큰 사람일 테니까요.


▲ 엘프의 마지막 작품 ‘마로의 환자는 가텐계 3’을 올 클리어하면 나오는 문구
"지난 27년 간,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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