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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전쟁, 테러… 대재앙과 맞물린 운 없는 게임들

지난 11일 일본 열도를 강타한 대지진은 쓰나미와 원전 방사능 유출 등 사상 최악의 대참사를 불러왔다. 이번 재해로 인해 총 2만 3,000여명에 육박하는 사망/실종자가 발생했으며, 교통과 전력 공급 또한 차질을 빚고 있어 피해 복구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유출은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에 또 하나의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정말 끔찍한 일이다.

게임업계 또한 이 같은 상황에 애도를 표하는 의미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피해지역 복구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의연금 모집과 기부는 물론, 각종 게임 캐릭터를 내세운 ‘힘내자, 일본!’ 프로젝트까지. 국내외 게임업체들의 이러한 자발적 운동은 모두 함께 재해를 극복하고 희망을 전달하자는 공동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 21세기 최대/최악의 지진이 강타한 동일본 지역


▲ 일본 게임 개발사들의 '힘내자, 일본' 프로젝트가 한창이다

여기에 더해 몇몇 게임업체는 발매 예정이던 자사의 게임 타이틀 출시를 연기하거나 취소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대지진으로 인해 생산이나 유통 공정에 차질이 빚어졌거나, 혹은 국민적 애도 차원에서 홈 엔터테인먼트의 결정체인 게임 타이틀 출시를 잠시 미루자는 의도도 있지만, ‘지진’ 과 ‘쓰나미’, ‘재앙’ 등을 모토로 제작된 게임들은 얘기가 다르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다룬 재난 어드벤처 게임 ‘절체절명도시 4’ 는 아예 출시 자체가 취소되어버렸고, 대지진과 쓰나미, 화산폭발 등의 재해로 무너지는 도시에서 목숨을 건 레이싱을 벌이는 ‘모터스톰 3: 아포칼립스’, 좀비 바이러스로 폐허가 된 도쿄를 무대로 한 액션을 다루는 ‘용과 같이 오브 더 엔드’ 등은 발매가 무기한 연기된 상태이다. 심지어는 NDS로 발매되는 ‘원피스: 언리미티드 크루즈 SP’ 까지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 ‘흰 수염’ 이 지진으로 해일을 발생시키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발매를 무기한 연기했다.


▲ 지진 재해의 직격탄을 맞은 두 게임, 절체절명도시 4(위)와 모터스톰 3(아래)


▲ 쓰나미 발생 장면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원피스: 언리미티드 크루즈 SP2' 도 발매가 연기됐다
위 사진은 '원피스'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해일

그러나 위에 언급된 게임들은 솔직히 억울한 면도 있다. 조금만 더 일찍 출시되었다면 아무 일 없이 발매되고, 완성도에 따라 흥행할 수도 있었던 게임들이기 때문이다. 예고 없이 찾아든 대지진으로 인해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에 걸친 개발자들의 땀과 노력이 일고에 묻혀버린 것이다. 게다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디 가서 억울하다는 말도 못 하는 입장이다. 이 게임들을 출시하기 위해선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마음 속 상처가 치유된 후를 기약하거나, 혹은 관련 요소를 삭제/수정하는 수 밖에 없다. 실제로 게임계의 역사를 훑어보면 지진, 테러, 전쟁 등의 재앙 때문에 많은 게임들이 출시 연기나 수정 등의 영향을 받았다. 대재앙과 우연히 맞물려 출시된 운 없는(?) 게임들을 짚어보자.

사상 최악의 테러, 9.11

2001년 9월 11일 일어난 ‘9.11’ 테러는 미국 건국 이래 최초로 본토 최중심부가 공격받은 사건이자 약 3,000여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사상 최악의 테러였다. 뉴욕 한복판에서 위용을 자랑하던 WTC 쌍둥이 빌딩이 힘없이 주저앉는 모습은 전세계에 생중계됐고,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은 테러에 대한 국가 안보 회의와 비상 경계령을 선포하는 등 전 세계가 테러의 무서움에 경악했다.


▲ 9.11 테러는 전 세계를 경악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 와중에 ‘테러’ 나 ‘붕괴’ 를 암시하는 게임이 멀쩡히 출시되었을 리가 없다. 9.11 테러의 직격탄을 맞은 게임은 그 해 11월 발매 예정이었던 ‘비루바쿠(BuileBaku, 해외명 Detonator)’ 였다. 제목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빌딩 폭파’ 인 이 게임은 빌딩 폭파를 주제로 한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비루바쿠’ 는 소재 자체가 참신했기에 발매 이전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았으나, 발매 두 달 정도를 앞둔 시점에서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수 천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면서 붕괴되어 버린다.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다.

빌딩 잔해로 뒤덮힌 끔찍한 사고 현장과 유족들의 모습이 TV를 통해 중계되는 가운데 빌딩 폭파 시뮬레이션 게임을 출시할 수 있을 리 없다. 때문에 ‘비루바쿠’ 의 출시는 무기한으로 연기(당시에는 중지설까지 나돌았다)되었고, 이듬해 봄 게임성을 대폭 수정해 퍼즐 비스무리한 게임으로 조용히 발매됐지만 흥행에는 실패하고 만다. ‘절체절명도시 4’ 제작진과 ‘비루바쿠’ 제작진이 만나면 할 얘기가 참 많을 듯 하다.


▲ 출시 전 공개된 '비루바쿠' 스크린샷, 지금이라면 모를까 저 당시 받아들이기엔...


▲ 결국 퍼즐형 게임으로 바꾸어 출시했으나 흥행에는 실패하고 만다


▲ 절체절명도시 4 개발진과 비루바쿠 개발진이 만나면...

‘비루바쿠’ 처럼 스트라이크 성 직구를 맞진 않았지만, 꽤나 많은 게임들이 나름대로의 곤욕을 치렀다. 세상 모든 범죄가 게임에서 유발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항상 예로 드는 게임 ‘GTA’ 도 9.11 테러의 여파를 피해가진 못했다.

당시 락스타가 개발 중이던 ‘GTA 3’ 는 뉴욕시를 모델로 한 리버티 시티에서 다양한 범죄행위를 다뤘는데, 당초에는 다양한 비행기 관련 미션이 존재했으나 9.11 테러 이후 비행과 관련된 미션을 대폭 삭제했다. 또한 게임에 등장하는 리버티 시티 경찰들의 복장을 뉴욕시의 경찰과 다른 색으로 변경하면서 개연성을 최대한 축소했으며, 그 외에도 상당 미션과 고어 효과 등을 삭제했다. 게임계의 악동(?)이라 불리우는 락스타도 미국 전역을 강타한 테러의 충격을 무시할 순 없었나 보다. 이후 락스타는 후속작인 ‘GTA: 산안드레스’ 와 ‘GTA 4’ 등에 수 많은 비행미션(여객기를 몰고 댐으로 돌진하는 등의 미션도 존재)을 삽입하면서 그 한(?)을 풀었다.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임 'GTA' 도 9.11 여파는 견디기 버거웠나 보다


▲ 비행 미션이 대폭 삭제되며 'GTA 3' 의 비행기는 곁다리 수준이 되었다


▲ 이 때의 설움을 해결하려 드는지(?), 후속작에는 계속해서 비행 미션을 집어넣는 락스타

‘C&C 레드얼럿 2: 유리의 복수(이하 유리의 복수)’ 또한 9.11 테러로 인한 출시 진통을 겪었다. 지금도 명작으로 회자되는 ‘C&C 레드얼럿 2’ 의 확장판으로 개발되던 ‘유리의 복수’ 는 연합군과 소련군, 그리고 소련의 유리가 세계정복을 위해 창설한 제3세력 유리군 간의 치열한 전투를 다룬다. 최근의 몰락세와는 달리 이 당시는 C&C 시리즈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유리의 복수’ 또한 출시 이전부터 상당한 이슈를 몰고 다니며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출시와 겹쳐 9.11 테러가 떡 하니 발생한다.

이로 인해 세계무역센터 빌딩 등의 주요 건물을 테러하는 장면이 담긴 미션과 패키지 아트 등이 모두 수정/삭제되었고, 이미 2000년 출시되어 매장에서 판매중이던 ‘C&C 레드얼럿 2’ 도 표지 교체를 위해 전면 회수되었다. 세계무역센터 빌딩 폭파 장면이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국민들의 항의 때문에 홈페이지도 폐쇄하고, 소매점에 배포해 놓은 포스터와 패키지들이 전량 회수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망연자실해야 했던 웨스트우드 관계자들의 얼굴 표정이 눈에 선하다. 게임 출시가 미루어진 것은 덤이다.


▲ 9.11 테러를 연상시키는 표지(빨간 박스 안) 그림이 바뀌었다

그 외에도 MS의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는 맨해튼 지형이 너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테러범들이 이 게임으로 훈련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고 결국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삭제한 새 버전을 배포했으며, 테러범과 경찰 간의 대테러전을 다룬 FPS ‘카운터 스트라이크’ 의 1.3 패치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판단 하에 적용이 연기되었다. 또한, 테러와 크게 상관 없는 ‘월드워 3’ 등의 게임들도 출시가 연기되었다. 일본 대지진으로 ‘프로야구 스피리츠 2011’ 등의 출시가 연기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민감한 시기에는 몸 조심

2008년 5월 12일, 중국 쓰촨성(四川省) 일대를 강타한 리히터 규모 8.0의 대지진은 7만 명의 사망자, 1만 8천 명의 실종자, 37만 명의 중상자와 900만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대참사였다. 이에 중국 문화부는 지진 발생 1주일째인 19일부터 3일간을 국민적 추모 기간으로 지정하고 중국 내 모든 온라인 게임 서비스를 전면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 서비스 중이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리니지’ 등 대다수의 온라인 게임의 서비스가 중지되었다. 이는 재해 지역 외 중국 전지역에 의무적으로 적용된 조치였다. 물론 추도의 의미는 좋지만, 지진으로 인한 전력난이나 자발적인 애도가 아닌 국가적 정책으로 인한 서비스 중지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 7만 명의 사망자를 낸 쓰촨 성 지진
추모 기간엔 국가적으로 엔터테인먼트나 유흥 관련 영업을 금지했다

한편, 민감한 상황과 맞물렸음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출시를 감행한 게임도 존재한다. THQ가 얼마 전 출시한 ‘홈프론트’ 는 북한이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고 미국 본토를 침공한다는 가상의 미래 시나리오를 배경으로 하는 FPS로, 지난 ‘E3 2009’ 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줄곧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리고 작년 11월,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 도발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6.25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교전으로, 작년 3월 벌어진 천안함 사건과 맞물려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감을 최고조에 달하게 만들었다.

연평도 사태로 인해 한국 국민들의 전쟁에 대한 불안이 확산되고 있는 와중, THQ는 ‘홈프론트’ 의 출시를 예정대로 진행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연평도 사태는 비극이지만, ‘홈프론트’ 는 가상의 미래를 다룬 픽션일 뿐이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결국 ‘홈프론트’ 는 북미와 유럽 등에 예정대로 2011년 3월 발매되었다. 현재 ‘홈프론트’ 는 다소 평이한 게임이라는 평가와는 달리 북미와 유럽 등지에서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여기에는 민감한 소재로 인한 호기심 마케팅도 한 몫을 했다. ‘게임은 게임일 뿐’ 이라. 게임 개발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납득할 수도 있다.


▲ 김정일 사망 이후 군사력을 강화한 북한이 미국을 침공한다는 내용의 '홈프론트'


▲ 게임 내용은 미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긴 한데...
그나저나 저 '영장' 글자는 뭐지... 영장류라는 뜻인가?

그러나 논란의 대상이 미군으로 옮겨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EA가 작년 10월 출시한 FPS ‘메달 오브 아너: 티어 1’ 은 멀티플레이에서 탈레반이 되어 미군을 사살할 수 있는 모드가 논란이 되자 멀티플레이 모드 내 탈레반 표기를 모두 삭제했다. 또한, 2009년 4월에는 코나미가 출시 준비 중이던 TPS ‘식스 데이 인 팔루자’ 의 개발이 취소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식스 데이 인 팔루자’ 는 2006년 실제로 벌어진 팔루자 전투(당시에도 진행 중이던 이라크전의 일부였다는 점도 한몫 한다)를 다룬 게임으로 발표 직후 미국 국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고, 결국 공개 보름 만에 개발이 전면 취소되었다. 아쉽게도, ‘저 전쟁들은 비극이지만, 저 게임들은 단순한 픽션일 뿐’ 이라며 시민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출시를 강행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탈레반이 되어 미군을 사살하는 멀티플레이 모드로 많은 항의를 받은 '메달 오브 아너'

사실 게임업체 입장에서는 출시 지역의 마케팅적 요소를 고려하여 게임의 출시나 수정 여부를 결정하는 것 뿐, 딱히 경영철학에 의거한 행위는 아니다. 위에 예를 든 게임들도 1차 구매 대상이 미국과 유럽 게이머들이기 때문에 이라크나 탈레반, 혹은 한국 게이머들의 반발은 관심 대상이 아닐 뿐이다. 너무 타산적으로만 보는 걸까? 아무튼, 당분간 지진이나 재난, 방사능 관련 게임은 보기 어려워질 듯 하다.


▲ 내심 기다리고 있던 재난 게임 '아이 엠 얼라이브' 도 당분간은 기대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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