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동성] 로망은 할인보다 강했다

연말은 전세계적으로 대표적인 ‘게임 대목’입니다. 연말특수를 겨냥해 출시되는 대형 타이틀도 많고, 기종을 가리지 않고 큰 폭의 할인율을 붙인 ‘세일 릴레이’가 이어집니다. 특히 올해의 경우 밸브 측에서 발표한 최고 인기 출시작 25개 중 무려 5개가 11월에 출시됐을 정도로 연말 경쟁이 치열했는데요, 이러한 틈바구니 속에서 예상치 못한 게임이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그 주인공은 지난 12월 18일에 스팀을 통해 출시된 택티컬 FPS 신작 ‘레디 오어 낫’입니다. 출시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신작이기에 연말할인에 포함되지 않고 정가에 판매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출시 직후부터 31일 오전 11시경까지 전세계 최고 판매량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레드 데드 리뎀션 2, 사이버펑크 2077, 세키로: 섀도우 다이 트와이스, 호라이즌 제로 던 등 수많은 대작이 50% 이상 할인 중임에도 장기간 강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레디 오어 낫은 의외의 한 방을 넘어 앞으로도 생각해볼 만한 주제를 던집니다. 하나는 연말을 장식할 기대작 다수가 기대에 못 미치는 재미로 실망감을 안기던 와중에 등장한 몇 안 되는 수작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FPS 장르의 경우 배틀필드 2042, 콜 오브 듀티: 뱅가드 등 11월에 출시된 대작들이 혹평을 면치 못한 가운데, 레디 오어 낫은 최근 보기 힘들어진 정통 택티컬 FPS 맛을 제대로 살렸다고 평가되며 반가움을 표한 게이머들이 적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기간에 타협하기보다 다소 지체되더라도 게임을 장기간 갈고 닦으며 의도한 재미를 제대로 보여준 점입니다. 레디 오어 낫은 2016년 6월부터 개발되어 무려 5년 만에 스팀 앞서해보기에 돌입한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특히 소수를 대상으로 비공개 테스트를 오래 진행하며 ‘택티컬 FPS’에 집중한 핵심 게임성을 완성해냈습니다. 사이버펑크 2077이 불러온 충격 이후 게이머 사이에서는 출시가 다소 늦어지더라도 제대로 된 게임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졌는데요, 이러한 여론에 부합하는 타이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은 유행에 편승하지 않는 게임성입니다. 레디 오어 낫은 빠른 템포에, 라이트한 게임성을 앞세운 FPS 트렌드를 거스르는 타이틀입니다. 범죄현장을 진압하는 경찰부대를 주인공으로 삼아 다소 까다롭더라도 팀원 간 합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 전술적인 면모가 한층 강조됐죠. 레디 오어 낫이 유명 개발사 신작이 아님에도 발표 당시 눈길을 모았던 이유도 다소 낡았다고 평가된 장르를 다시금 살려보려는 시도에 기대감을 표하는 팬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부분은 게임을 직접 해본 게이머들이 가장 크게 체감하는 부분인데요, 스팀 유저 리뷰에도 명맥이 끊겨버린 SWAT 시리즈가 생각난다는 의견도 있고, 택티컬 FPS 원조지만 최근에는 그 특징이 희석됐다고 평가된 레인보우 식스 시리즈보다 정통에 가깝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9월에 출시된 아마존 ‘뉴 월드’는 옛날 MMORPG가 떠오른다는 평가를 받았고, 로스트아크도 금강선 디렉터가 게임 내 공지로 유저들과 소통한 것에 대해 ‘옛날 생각난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런 부분을 ‘로망’이라고도 부르는데요, 게임업계 전체적으로 잊고 있던 로망을 살려보는 것도 좋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