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의 필수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엑셀 내에 게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물론 최근의 이야기는 아니고 1995년 개발된 엑셀 95의 이야기이기는 하다. 엑셀 95에는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고통받는 영혼들의 전당(Hall of Tortured Souls)’이라 불리는 독특한 이스터 에그가 등장한다. 이 이스터에그는 길찾기 게임으로, 전당을 걸어다니며 엑셀 95를 개발한 개발자들의 이름과 사진을 만나볼 수 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엑셀 그 자체로 게임을 만드는 신비로운 개발자도 등장했다. 생성한 함수에 입력한 변수에 따라 값이 자동으로 출력된다는 점과 사용자 정의 함수를 만들 수 있는 VBA(Visual Basic for Applications)를 사용, 엑셀을 게임엔진처럼 사용한 것이다. 이를 통해 엑스컴 스타일의 게임 엑셀컴(EXLCOM)을 포함, 신묘한 게임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개발자들이 어디선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대부분 사무용 프로그램밖에 사용하기 힘든 환경의 산물이었다.
국내에도 이와 같이 엑셀을 사용해 게임을 만든 개발자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무용 프로그램밖에 사용하기 힘든 ‘직장인’, 낸디 앤 우디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엑셀 방탈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재미와 독특한 스토리(그리고 자연스러운 월급루팡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가진!)를 전하는 낸디 앤 우디로부터 엑셀 방탈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컴활 1급 함수에서 시작된 독특한 게임, 엑셀 방탈출
엑셀 방탈출은 텍스트 어드벤쳐 기반의 방탈출 게임으로, 엑셀만 있다면 어떠한 환경에서, 개발자의 말에 따르면 심지어 회사에서도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해 암호를 풀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방탈출 게임의 기본 시스템을 엑셀의 함수 기능으로 구현해, 입력, 엔터, 클릭만으로도 진행되게끔 만들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언급하자면, 엑셀의 함수를 작동시킬 수 있는 특정 키워드를 입력하면 저절로 장면이 전환된다. 이렇게만 듣는다면 다소 단순해 보일 수 있겠으나, 진행 중 발견되는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저장한다는 점, 상세보기를 통해 관찰할 수 있다는 점, 상호작용을 통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다양한 연출이 등장한다는 점은 여타 디지털 방탈출 게임과 그 골자가 동일하다. 엑셀의 시스템을 게임 엔진처럼 활용한 셈이다.
이 모든 구조는 엑셀의 기본이자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 ‘IF’ 함수에서부터 파생됐다. 공식 블로그에서 무료로 플레이할 수 있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컴퓨터활용능력 1급 수준의 함수만을 사용해 제작했다. 보다 높은 완성도와 풍부한 스토리를 자랑하는 에피소드 2, 에피소드 3, 외전: Act 1에는 매크로 사용이 다수 발생해 불가피하게 VBA를 사용하게 됐지만, 골자는 동일하다.
이렇게 대표적인 사무 프로그램 엑셀만 있다면 언제든 할 수 있기에 게임의 주 타겟층은 자연스럽게 직장인이 됐다. 이에 자연스럽게 회사에서 몰래 할 수 있는 ‘월루(월급루팡, 회사에서 다른 짓을 하며 월급을 챙겨간다는 뜻의 신조어)’용도 함께 개발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엑셀 방탈출을 재미있게 즐긴 한 유저가 흑백으로 이루어진 ‘월루용 버전’이라는 아이디어를 전하며 뒤늦게 추가된 것이다.
게임을 만들 수 있다면 무엇이든 활용한다, 낸디 앤 우디
낸디 앤 우디는 사무용 프로그램이라는 엑셀의 시스템을 묘하게 비틀어 ‘엑셀 방탈출’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팀이다. 어렸을 때부터 플래시, 파워포인트, 쯔꾸르, HTML, 마인크래프트 등 다양한 창작이 가능한 프로그램으로 탈출 및 퍼즐게임을 만들던 이들이, 현업 중 자주 쓰는 프로그램인 ‘엑셀’을 만나 탄생한 것이 바로 엑셀 방탈출이다. 초기 작품은 방탈출을 좋아하는 주변 친구들에게 소소하게 공유했는데, 이것이 어쩌다 보니 점차 규모가 커져 많은 이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게 됐다고.
낸디 앤 우디가 엑셀 방탈출을 개발하며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바로 ‘몰입감’이다. 유저들이 무한한 상상을 할 수 있게 돕는 텍스트의 장점을 적극 활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유저들이 더욱 쉽게 게임 속 공간과 환경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공간 묘사에 힘썼다. 더해 엑셀에서만 만날 수 있는 연출을 추가해 매력을 더했다. 낸디 앤 우디는 “특별한 메시지는 없지만, 엑셀 방탈출을 진행하는 그 순간만큼은 유저들이 스토리에 완벽하게 몰입하여 (근무)시간이 녹을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어려운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업이 있는 만큼 무엇 하나 놓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에피소드 2 제작 당시에는 승진과 T/F팀 발령 등으로 매일 야근이 이어진 와중, 빠른 시일 내 차기작을 선보이겠다는 욕심에 제작 기간을 무리하게 짧게 잡고 말았다. 이 모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야근과 밤샘 제작이 이어졌고, 결국 병이 나고 말았다. 호평을 받기는 했지만, 개발자로서는 “‘더 잘 만들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라는 것이 낸디 앤 우디의 이야기다. 물론, 현재는 회복을 끝냈고 밸런스를 맞춘 개발 일정을 맞추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엑셀 방탈출은 이들이 직접 의도한대로 직장인들에게 회사 생활의 한줄기 빛이 되어주고 있다. 낸디 앤 우디는 “에피소드 2 완료 후 컨디션 난조로 인해 기약 없이 장기간 휴식을 취하고 돌아오겠다고 공지했는데, 많은 분들께서 댓글과 메일로 격려의 말씀들을 보내주셔서 크게 감동받았다. 덕분에 5개월 만에 새로운 에피소드로 복귀할 수 있었다. 정말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엑셀에서 시작된 낸디 앤 우디의 세상, 어디까지 펼쳐질까
낸디 앤 우디는 앞으로 엑셀 방탈출을 찾아주시는 유저들이 존재하고, 아이디어가 마르지 않는 한 힘 닿는데까지 연재할 생각이다. 엑셀 방탈출 외에도 기타 실험적인 게임을 공식 블로그를 통해 엑셀 방탈출 외전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또, 이렇게 얻은 영감을 적극 활용해 지금까지 출시 된 게임과는 전혀 다른 추리 기반의 게임을 구상하고 있다. 엑셀 방탈출의 에피소드들을 소재로 한 오프라인 방탈출 카페나, 모바일 게임을 제작하는 행복한 상상과 유저들의 응원으로 하여금 다음 에피소드 제작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상상이 아주 먼 미래가 되거나 오지 않는 미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의 창작욕에 힘을 더해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앞으로도 다양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힌 낸디 앤 우디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인 저희가, ‘미래에는 게임 회사 CEO가 되어있지 않을까?’라는 행복한 상상을 꿈꾸게 해준 많은 유저 분들께 너무나도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전했다. 더해 “엑셀 방탈출 에피소드 3 악몽을 정말 열심히 만들었다”며, “연말까지 진행하는 크라우드 펀딩에도 많은 관심을 부탁한다”는 말로 유저들과 게이머들에게 감사와 부탁을 전했다. 이들이 새롭게 공개할 에피소드 3에는 어떤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만나보게 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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