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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영웅으로 죽거나 살아서 악당이 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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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either die a hero, or live long enough to see yourself become the villain."

영웅으로 죽던지, 살아서 악당이 되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거야.

2008년 여름 개봉한 ‘다크나이트’ 중 하비 덴트의 대사이다. 이 대사야말로 실로 인간사를 꿰뚫는 철리(哲理)가 아닌가 싶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 대사는 어느 종목에 대입하더라도 다 통용이 된다. 이 말은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예컨대 운동선수라 하면 20대에 팀을 우승시키고 최고의 활약을 할 땐 영웅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30대가 되어서도 비슷한 연봉을 요구하며(자신이 프랜차이즈 스타임을 내세워) 20대전성기와 비슷한 활약을 하지 못할 경우(비슷한 활약은 불가능에 가깝다) 팬들은 이제 그만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며 아우성을 친다. 바로 그때 팬들은 그 선수를 영웅에서 악당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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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

이런 과정은 비단 영화나 현실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악을 대적하는 과정에서 영웅은 죽던지 아니면 결국 악한 인물로 전락하게 된다는 영웅의 인간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말이 바로 “영웅으로 죽던지 악당이 되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라는 말이다.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세상을 좀 더 살기좋은 곳으로 바꿔보겠다고 나섰던 수 많은 학생들이 변절 혹은 변심한 후 수구세력에 가세하여 가장 가열차게 자신이 몸담았던 곳을 핍박하거나 가장 정의를 추구하던 자가 그토록 비판하던 불의한 모습으로 변하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실례되는 말일지 모르지만 故 노무현 전대통령의 경우야 말로 살아남아 악당이 되는 것을 온몸으로 거부한 사례라 하겠다. 그는 살아서는 보통 사람의 영웅으로 살아왔으며 또 ‘기득권층의 악당’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말년으로 갈 수록 이곳 저곳에서 공격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영웅으로 기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악당이 되고 말았으며 은하계에서 명왕성이 퇴출당한 것이나 이동국이 미들스브로에서 부진한 것까지 그 악당의 탓으로 돌려졌다. 결국 누구보다 강한 성품을 지닌 영웅은 묵묵히 모든 비난을 감수하다 스스로를 더 이상 악당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극단의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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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노무현, 누구보다 강하던 영웅

게임에서도 이 같은 현상은 일어난다. 누구보다 정의와 공공의 안녕을 추구하던 영웅이 어느덧 악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가장 드라마틱하면서도 슬프고 괴로운 심정을 안겨준다. 게이머들은 적으로 등장한 타락한 영웅을 물리치면서도 일말의 연민과 동정을 품게된다. 실로 씁쓸한 그들과의 만남. 그럼 이제부터 끝내 악당으로 변모한 그들을 만나보자.

지금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명작게임 ‘디아블로’는 영웅의 악당화를 잘 보여주는 게임이기도 하다. ‘디아블로’에는 칸두라스를 다스리는 레어릭 왕이 등장한다. 레어릭 왕은 용기와 신념, 정의를 아는 인물로서 강한 정신력과 도덕성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때문에 디아블로가 그를 자신의 종복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그는 넘어가지 않았다. 비록 디아블로가 그의 몸을 지배하긴 했지만 정신은 끊임없이 그에 저항했다. 결국 디아블로는 레어릭 왕을 포기하고 다른 대상을 물색하였고 불행히도 그의 아들인 알브렉트를 그 대상으로 낙점하고 만다.

디아블로는 알브렉트의 몸에 들어가 괴물로 변신, 신전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들을 잃어버린 레어릭 왕은 격분하여 마침내 영혼과 인성 모두 망가진 채 암흑왕으로 변모. 많은 이들을 학살하고 공포정치를 실시한다. 악의 상징인 디아블로와 싸웠던 정의롭던 레어릭 왕은 결국 정의를 지키던 영웅에서 타도의 대상인 악당으로 타락하고 라크다난 장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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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어릭왕, 뼈만 남은 스켈레톤 킹으로 변하였다

‘디아블로’가 일으키는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엔딩에서 ‘디아블로’를 물리친 전사는 악마 ‘디아블로’를 봉인한 소울스톤을 얻게 된다. 세계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한 이 위대한 영웅의 행보가 여기서 그치면 얼마나 좋으련만 불행히도 영웅은 한발자국 더 앞서나가려다가 끝내 악당의 길로 빠지고 만다. 자신만은 디아블로의 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판을 한 나머지 소울스톤을 자신의 이마에 박아버리고 만 것이다.

▲ 디아블로1의 엔딩, 영웅은 결국 타락하고 만다

결국 영웅은 소울스톤에 의해 타락하고 다크원더러가 되어 여행을 떠난다. 얼마 후 영혼은 모두 잠식당하고 악마 ‘디아블로’는 부활한다. 영웅의 일생은 이토록 허망하게 끝나고 악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다음은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리치왕, 바로 아서스의 차례이다. 여기서 잠깐 짚어두자면 아서스와 리치왕은 동일인물이 아니었지만 후에 아서스가 리치왕과 합체해 리치왕으로 거듭나게 된다. 다시 아서스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그는 본래 얼라이언스의 인간 국가 로데론의 국왕 테레나스 메네실의 장자로 태어났으며 정의감과 충성심이 매우 뛰어난 왕자 중의 왕자이자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엄친아격 청년이었다.

그러나 스컬지의 침공이 시작되고 아제로스가 전쟁에 물들자 아서스는 조국을 적들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참전, 최전선에서 싸운다. 그러나 지나치게 승리라는 목적에 충실한 나머지 수단의 잔학성을 간과하게 되었다. 언데드가 될 운명이라는 이유로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는 등 그는 점차 조국을 수호하는 정의로운 청년영웅에서 위태로운 정신 상태의 위험인물로 변모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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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스, 모범청년이...

그러던 와중 로데론을 침공한 스컬지의 장군 공포의 군주 말가니스를 추격, 노스랜드까지 간 아서스는 힘이 역부족이라는 걸 깨닫는다. 힘을 키우기 위해 눈에 불이켜진 아서스는 리치 왕이 던져놓은 '미끼'인 악의 룬검 서리한(Frostmourne)을 취하게 되어 말가니스를 물리치게 되지만 그 대가로 정신은 리치 왕의 손아귀에 지배당하게 된다.

본래 아서스는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을 더럽히겠다는 각오였고 서리한의 힘 역시 백성을 위해 쓸 작정이었다. 그러나 리치왕의 유혹은 점차 아서스의 정신을 파괴하고 만다. 정신이 붕괴된 아서스는 로데론으로 돌아와 아버지 테레나스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살부(殺父)라는 인류최악의 패륜을 저지르고 왕이 된 아서스는 본격적 악당의 길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공포정치를 자행하고, 실버문을 침공한데다 마침내 스승인 우서까지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만다. 끝내는 스스로 리치왕과 합체하여 리치왕이 되어버린다. 살아있는 악의 화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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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내 악의 화신으로...

마지막으로 살펴 볼 영웅이자 악당은 ‘메탈기어솔리드’의 빅보스이다. 빅보스는 원래 1964년 구소련에서 촉발된 핵전쟁위협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다(메탈기어솔리드3). 그러나 1995년의 아우터헤븐의 무장봉기(메탈기어), 1999년의 잔지바랜드 무장봉기(메탈기어2: 솔리드스네이크)에서는 무장봉기를 일으킴으로서 세계를 외려 위태롭게 만드는 악당으로 변모한다. 그때마다 솔리드 스네이크의 활약에 의해 세계는 다시한번 구원을 받지만 빅보스는 왜 영웅에서 악당으로 전락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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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탈기어1, 동료인줄 알았던 빅 보스가 최종보스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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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탈기어2, 죽은 줄 알았던 빅 보스가 다시 등장한다

빅보스가 핵전쟁위협에서 지구를 구하고 났을 때 그는 자신이 거대한 연극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놀아났음을 알게 됐다. 그 와중에 국가에 의해 희생을 강요받는 군인들을 목격하게 되고 그 비극적 운명을 절감하게 된다. 거기에는 자신을 단련시켜준 스승이자 가족,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더 보스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일이 포함되어있었으며 그녀를 따르는 코브라부대의 희생이 잇달았다.

그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돌아온 빅 보스에게 남겨진 진실은 더 보스가 국가의 안위를 위해 가족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살해당하는 비인간적 임무를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그 임무에는 자살도 허락되지 않았고 동료들을 사지로 몰아넣어야 하는 데서 오는 미안함같은 감정은 허락되지 않았다. 더 보스를 살해한 이후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빅 보스는 군인들을 부당하게 희생시키는 시스템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렇게 빅 보스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아우터헤븐과 잔지바랜드의 봉기를 일으키지만 결국 아들인 솔리드 스네이크에 의해 저지당한다. 하지만 그 뜻은 ‘메탈기어솔리드4: 건즈오브패트리어트’에 와서 결국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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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보스는 가족 같은 제자인 빅 보스에게 살해당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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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탈기어솔리드4 엔딩에서 등장하는 빅 보스

지금까지 영웅에서 악당의 모습으로 변신한 게임 속 캐릭터들을 만나보았다. 물론 그들의 변신에는 어쩔 수 없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박수칠 때 떠나라’와 ‘떠날 때가 언젠지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말은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란 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위에서 언급한 캐릭터들은 모두 강한 성품을 지닌 자들이다. 조금 더 잘하려다가, 완벽을 추구하려다가, 내가 남들 대신 짐들을 짊어지려다가 악당으로 변하고 만다. 만약 이들이 어느 정도에서 만족하는 성품이거나 너무 강해서 부러지기 쉬운 성품이 아닌 부드럽고 융통성을 발휘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악당으로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 좋은 평판을 지닌 채로 평온한 일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인생에서 때로는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도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다. 그러나 멋진 악당, 인간적으로 끌리는 악당이 있어야 주인공과 작품이 빛나지 않겠는가. 지금은 악당으로 변해버린, 하지만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왕년의 영웅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이 글을 맺는다.

PS. 혹 솔리드 스네이크가 나중에 악당이 되지 않을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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