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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 넌! 모방과 벤치마킹 사이의 미묘한 게임 열전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이다.”

이 유명한 문장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상사회 건설과 인간의 삶, 그리고 예술의 본질에 대해서 논한 명언이다. 동시에 각종 표절 논란이 터질 때 마다 항상 대두되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필자도 어릴 땐 위인전 맨 뒤쪽의 ‘이 책을 읽고나서…’ 란을 참고하여 독서감상문을 쓰곤 했고, 대학 시절엔 쏟아지던 각종 보고서의 숲을 선대 위인(...)분들의 족보를 이용하여 헤쳐나가곤 했다. 엄밀히 말하면 표절 행위이지만, 사실 이 정도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귀여운 모방도 때와 상황을 가려야 한다. 시험 도중 옆 자리 친구의 답안을 모방한다거나, 더 나아가 모방한 논문을 학회에 등록하는 등의 행위는 ‘죄송합니다’ 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스케일을 좀 더 키워 히트곡을 슬쩍 고친 후 자신이 작곡한 노래로 꾸민다거나, 타사의 제품을 베껴서 팔아먹거나 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다. 물론 그래놓고도 뻔뻔하게 장사하는 경우는 더 문제고, 그걸 가만 놔두는(혹은 장려하는) 나라도 병림픽 금메달 감이긴 하지만 말이다.


▲ 퀴즈! 위 제품들은 모방일까요 벤치마킹일까요?

그런데, 이 모방이라는 게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보니 정말 노골적인 표절행위가 아니면 사실 처벌이 애매하다. 음악의 경우에는 ‘멜로디가 몇 소절 이상 반복되면 표절’ 등의 경계를 지정하기 쉬운 편이지만, 그래픽과 시스템, BGM, 컨트롤 등 수 많은 콘텐츠가 얽히고 霞 만들어지는 게임은 모방과 벤치마킹의 경계가 더욱 애매모호하다. 관대하게 바라보면 ‘슈퍼마리오’ 와 ‘슈퍼피카츄’ 는 전혀 다른 게임이라고 할 수 있고, 엄격히 적용하면 ‘스페이스 인베이더’ 이후의 모든 슈팅 게임과 ‘이얼 쿵푸’ 이후의 모든 대전격투 게임은 표절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사실 게임의 역사를 크게 바꿔 놓은 몇몇 혁신적인 게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게임은 과거에 나온 게임 시스템들을 쏙쏙 뽑은 후 좀더 매력적이고 재미있게 재구성하는 공정을 거쳐 출시된다. 여기에 창의적 시스템 한두 개가 들어가거나 타 게임보다 퀄리티가 월등히 높거나 하면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비꼬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과거에 있었던 시스템을 채용했다고 해서 무조건 모방이라고 비난할 순 없다는 것이다.


▲ 이쯤 되면 모방이니 표절이니를 떠나서 재미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봐도 여전히 뭔가 꺼림칙한 게임이 간혹 눈에 띈다. 어렴풋이 비슷한 느낌을 주는 정도부터 위에 언급한 ‘슈퍼피카츄’ 처럼 아예 대놓고 복사/수정한 수준의 게임까지 그 범위도 각양각색이다. 그래도 잊혀져가는 고전 게임이나 망한 개발사의 게임을 모방한다면 그나마 낫지, 최근에는 그 모방 대상이 현재도 시리즈가 제작 중인 패키지 게임이거나 활발히 서비스 중인 온라인 게임에까지 미치고 있다.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불행히도 명예훼손이나 기타 등등 여러 어른들의 문제 때문에 필자에게는 이러한 게임들의 표절 여부를 마음대로 평가할 권리가 없다. 그래도 최소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쯤은 가능하다. 평가는 독자 여러분이 직접 하시길 바란다.

피터 몰리뉴의 던전 키퍼, 그리고 던전스

피터 몰리뉴의 ‘던전 키퍼’ 는 ‘역발상의 승리’ 라고 부를 수 있는 게임이다. ‘던전 키퍼’ 는 ‘용사가 되어 몬스터를 쳐부수고 보물을 얻는다’ 라는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어 엎어서 ‘감히 내 던전에 무단으로 침입해 온 용사들을 잡아서 혼내준다’ 라는 새로운 방식의 장르를 창조해 냈다. ‘던전 키퍼’ 를 시작으로 다양한 디펜스 형식의 게임이 출시되었으나, ‘던전 키퍼’ 의 아성을 넘은 게임은 없었다.


▲ 지금 해도 재미있는 '던전 키퍼', 어서 3편 만들란 말야!

그러던 중 지난 8월, 독일의 게임업체 칼립소 미디어가 발표한 ‘던전스’ 는 ‘던전 키퍼’ 를 기억하는 게이머들에게 꽤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신선하다는 말은 이제껏 없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낸 게임에 수여하는 수식어가 아니다. ‘던전스’ 스크린샷과 게임 특징을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했다.

“이거 설마 던전 키퍼 후속작 아니야?”

실제로 ‘던전스’ 는 ‘던전 키퍼’ 와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이름이 비슷한 것은 둘째치고, 던전의 지배자가 되어 영웅들을 유혹한 후 다양한 덫과 몬스터 군단으로 그들을 사로잡아 고문하고, 일꾼들을 이용해 던전 구조를 바꾸거나 시설을 제작하는 등의 게임 스타일은 ‘던전 키퍼’ 와 다른 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 외에도 오버 뷰 방식의 카메라 워크, 캐릭터나 배경 디자인과 색감, 분위기 등……. 물론 ‘던전스’ 만의 추가 요소도 몇 개인가 있긴 했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던전 키퍼 후속작’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던전 키퍼 3’ 의 개발 중단 이후 시리즈의 부활을 기다리던 올드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엔 충분했다.


▲ 이름도 느낌도 그대로! 스크린샷만 보면 '던전 키퍼 3'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던전스’ 는 ‘던전 키퍼’ 의 라이선스를 취득해서 만든 정식 후속작이 아니었다. ‘던전 키퍼’ 의 라이선스는 중국의 넷드래곤이 취득하여 MMO로 제작 중이며, 제작자 또한 공식 트위터를 통해 ‘던전스는 던전키퍼를 따라한 게임이 아닙니다’ 라는 글을 남겼다. 아무튼 지난 2월 8일 출시된 ‘던전스’ 는 ‘던전 키퍼’ 의 후속작을 그리워하던 올드 팬들에 의해 나름대로 많이 팔렸지만. 아쉽게도 게임 자체의 평은 그지 좋지 않다. 아마도 ‘던전스’ 를 구매한 팬들은 ‘페이블’ 에 몰두하고 있는 피터 몰리뉴가 어서 다시 ‘던전 키퍼 3’ 를 제작하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내가 '페이블' 을 포기할 것 같아, 안 포기할 것 같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위엄, 그리고 얼로즈 온라인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 는 전 세계 수천만의 유저를 보유하고 있는 가장 성공한 MMORPG 중 하나이다. ‘와우’ 의 성공 이후 많은 MMORPG 업체들이 다양한 퀘스트와 인스턴스 던전, 레이드 등의 인기 시스템을 벤치마킹했고,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MMORPG들의 특징이 없어져 간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 와웅!

그러나 그 모든 게임보다도 ‘와우’ 를 닮은 게임이 등장했다. 바로 ‘얼로즈 온라인’ 이다.

러시아의 유명 개발사 아스트롬 니발이 제작한 ‘얼로즈 온라인’ 은 ‘러시아판 와우’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캐릭터 디자인이나 스킬 이펙트, 아이템 등의 인터페이스, 배경 분위기 등이 ‘와우’ 와 흡사하다. 약간 닮은 정도가 아니다. 두 게임의 스크린샷을 무작위로 섞어 놓고 스크롤을 넘기다 보면 거의 위화감이 없다.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다.


▲ 퀴즈! 위 4개의 스크린샷 중 '와우' 스샷은 몇 번째일까요?

물론 ‘와우’ 는 MMORPG의 원조격인 게임이 아니며, 이전 게임들에서 성공한 요소들을 성공적으로 모아 놓은 대표 사례 중 하나이다. ‘얼로즈 온라인’ 또한 그런 맥락에서 보면 기존의 인기 요소에 98년부터 이어져 온 ‘얼로즈’ 만의 세계관, 스탯과 특성을 투자해가며 캐릭터를 육성하는 방법 등 자신들만의 고유 요소를 섞어 놓은 지극히 일반적인 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얼로즈 온라인’ 의 게임 분위기는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아니, 새로운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적응되는 게 문제다. ‘얼로즈 온라인’ 제작진이 과연 ‘와우’ 를 의식하지 않고 게임을 만들었는데 아주 우연히 이런 느낌의 게임이 완성되었을까? 물론 저런 스타일의 디자인이 ‘와우’ 고유의 것은 아니긴 하지만... 뭐, 판단은 유저들의 몫이다.

횡스크롤 액션 열풍의 주역 던전앤파이터, 그리고 명장삼국과 고스트파이터

90년대 동네 오락실의 3대 인기 장르는 대전 액션, 슈팅, 그리고 횡스크롤 액션 게임이었다. 2005년 출시된 ‘던전앤파이터(이하 던파)’ 는 횡스크롤 평면 액션(횡스크롤이면서 좌우 뿐 아니라 상하로의 이동도 가능한 게임) 특유의 재미를 온라인에서 구현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 횡스크롤 액션의 재미를 온라인으로 옮겨 온 '던파'

그런데 최근, ‘던파’ 와 너무나도 흡사해 보이는 게임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등장했다. 바로 ‘명장삼국’ 과 ‘고스트파이터’ 이다. 이 두 게임은 중국에서 개발되어 한국에 역수입되었다는 공통적 특징이 있다. 뿐만 아니라 화면 구성, 각종 인터페이스, 게임 시스템, 캐릭터 모션, 이펙트 등이 ‘던파’ 와 거의 흡사해 중국 현지 공개 때부터 국내 유저들의 원성이 높았다. 차이점이라면 캐릭터 디자인 등이 다르다는 점, 그리고 ‘명장삼국’ 의 경우 삼국지 풍의 배경을, ‘고스트파이터’ 는 다양한 시대를 섞어 놓은 퓨전 형식의 배경을 채용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 '명장삼국' 과 '고스트파이터' 스크린샷

사실 ‘던파’ 도 서비스 초기부터 고전 인기게임인 ‘던전앤드래곤’ 과 비슷하다는 소리를 들어 온 게임이다. 그러나 콘솔에서나 느낄 수 있던 액션 쾌감을 온라인으로, 그것도 더욱 업그레이드 된 버전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던전앤드래곤’ 과 차별화되는 요소였다(비슷한 예로 넥슨의 ‘카트라이더’ 나 ‘크레이지 아케이드’ 등이 있다).

사실 어디까지가 벤치마킹이고 어디까지가 모방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 ‘던파’ 도 모방 게임의 범위에 들어간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명장삼국’ 이나 ‘고스트파이터’ 도 각자만의 매력을 가진 새로운 게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기존 인기작에서 스킨만 살짝 바꾼 게임을 두고 ‘벤치마킹’ 이라고 부르진 않았으면 좋겠다. ‘벤치마킹’ 이라는 단어가 더러워지니까. 이 두 게임 또한 국내에서 서비스를 계획(혹은 진행) 중이니 관심 있는 게이머라면 직접 판단해보도록 하자.


▲ 사실 '던파' 뒤에는 '던전앤드래곤' 이 있었다

그 외에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가진 게임들…

국내 온라인 게임들도 이러한 논란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피규어를 주제로 한 TPS ‘해브 온라인’ 은 무기 특성과 아기자기한 디자인 등이 밸브의 ‘팀 포트리스 2’ 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국내와 해외 등지에서 화제에 오른 적이 있으며, 웹젠의 FPS ‘배터리’ 는 액티비전의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와 흡사한 설정으로 ‘조선 워페어’ 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한편, JCE가 개발 중인 공간 초월 FPS ‘게이트(GATE)’ 는 공간을 연결하는 ‘게이트’ 의 모양과 특징이 밸브의 퍼즐 FPS ‘포탈’ 에 나오는 차원 포탈과 흡사한 탓에 출시 이전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게임들이 과연 유명 게임의 모방일까, 아니면 단순한 벤치마킹일까? 일단 개발진들은 모방 여부에 대해 부정하고 있으며, 진위 여부는 필자가 개발진이 아니기 때문에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 해브 온라인(위)과 팀 포트리스 2(아래)
그래픽적인 부분과 클래스 시스템 등이 비슷하다는 평을 받았다



▲ 배터리(위)와 모던워페어(아래)
헬기 소환 등 특색 시스템이 비슷하다는 평을 받았다



▲ 게이트(위)와 포탈(아래)
공간 이동이라는 독특한 설정과 구멍의 모양 등이 닮았다는 평을 받았다

어차피 모방작은 원작의 재미를 따라갈 수 없다. 유명한 명화를 정교하게 베낀 모작에서는 열정이 느껴지지 않으며, 명곡의 유명 멜로디를 베껴 작곡한 노래는 결국 아류작 취급을 받을 뿐이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기존 유명 게임을 베껴 만든 게임은 금방 한계에 부딪히고 매의 눈을 가진 유저들에게 비난받지만, 과거에 성공한 게임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후 재해석한 게임은 오히려 원작을 뛰어넘는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자신이 표절의 직접적 대상이 아니라면 이러한 논란은 쿨~하게 웃어넘기는 게 상책이다. 모방이건 벤치마킹이건 게임이 재미없다면 외면받는 것이 당연하고, 재미있으면 논란 여부와 상관 없이 흥행하기 마련이니까.

마지막으로 세계적인 밴드 오아시스의 리더 노엘 갤러거가 코카콜라로부터 표절 건으로 고소당했을 때 내뱉은 쿨한 명언을 감상하며 끝맺도록 하겠다.

“자, 이제 펩시를 마시자.”


▲ 자, 이제 이 분처럼 쿨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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