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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앙의 `블소` 스토리 (상), 복수는 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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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앤소울’ 이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을 넘겼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보니 만렙 캐릭터들이 판을 치고 돌아다니고, 포화란을 잡는다 어쩐다 하며 각자의 모험을 즐기고 있더군요. 그런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블소’ 의 메인 스트림을 잊어버린 채 단순 노가다에 심취해있었습니다. 실제로 제 주변의 한 친구에게 ‘블소’ 의 스토리를 묻자 ‘주인공이 홍문파에서 나와서 모험을 하는데 진서연이 나쁘다’ 라는 두루뭉실한 내용만을 이해하고 있더군요.

사실 ‘블소’ 는 온라인게임 중에서도 스토리텔링이 상당히 잘 구현된 게임입니다. 굳이 홈페이지에서 배경 스토리를 읽어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홍문파의 복수’ 라는 사명을 깨닫게 되며, 몇몇 영상들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의 스토리 이해가 가능하죠. 그러나, 주인공을 향해 퍼부어지는 수많은 퀘스트들을 일일히 읽어가며 진행하면 메인 스토리를 놓치기 쉽고, 그렇다고 모든 걸 안 읽다 보면 그게 습관이 되어버립니다.


▲ 좌충우돌 린족 꼬맹이, 크앙과 함께 '블소' 세계로 떠나 봅시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타파하고자, 게임메카에서는 ‘블소’ 의 메인 스토리를 총정리 해 보는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유저 모두의 분신을 아우르는 오리지널 ‘블소’ 의 주인공이 아니라, 때로는 경박하고 유치한 상꼬맹이 ‘크앙’ 의 시점에서 진행됩니다. 원활한 스토리 진행을 위해 대부분의 서브 스토리를 포함한 일부 씬은 과감히 삭제/변형했으며, 새롭게 재해석한 장면도 상당수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블소’ 의 중심축이 되는 스토리는 모두 담고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다만, 한정된 지면으로 인해 보다 자세한 스토리는 각 에피소드 마지막에 링크된 '무삭제 풀버전 바로가기' 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게임을 해 보시는 게 베스트입니다. 그럼, 출발해 볼까요?


한밤중에도 28도를 넘나드는 열대야 탓에, 나 크앙은 밤새 뒤척이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냉혈귀라도 안고 자면 조금이라도 시원해 질 것 같은데, 우째 이 방에는 선풍기는커녕 에어컨도 없다. 심지어 방문까지 활짝 열어젖혀져 있어 밤새 모기가 발등을 물어뜯었다.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차라리 온몸을 물어라! 자포자기한 상태로 옷을 훌훌 벗어 제꼈더니 그제서야 살살 잠이 왔다.

“막내야, 어서 일어나!”
“……”
“뭐하는거야 대체!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구!”
“방학… 이잖아요…”

겨우 잠들었는데 누가 날 깨우는 거야? 감히 잠자는 크앙을 건드리다니, 모든 것을 파. 괘. 한. 다… 는 개뿔. 온화하던 목소리가 점점 무서워지고 있다. 더 자다가는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크앙 하면 생존력과 빌붙기, 줄타기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는가. 퉁퉁 부은 눈을 어렵사리 뜨니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갈색 피부에 백색 머리, 새침한 눈매의 여성, 음… 엄마는 아닌데?

기억났다. 이 곳은 ‘블소’ 의 세계. 그리고 저 누나는 나와 같은 방을 쓰는 홍문파 넷째 제자인 진영 사저였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 마음씨 좋아 보이는 린족 할아버지를 따라 이 곳 무일봉으로 왔었다. 무술을 가르쳐준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우째 잡일만 시킨다. 내 바로 위의 화중 사형에게 듣자 하니 막내는 기본 2년 동안 허드렛일을 하며 기초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병역기간 축소정책(?)의 일환으로 1년 6개월로 줄었댄다. 그나저나 린족이라고는 하지만 크앙도 어엿한 남자인데, 진영 사저와 한 방을 쓰게 하다니… 아무래도 남성으로 느껴지지조차 않나 보다. 다람쥐 꼬리랑 귀 달고 있다고 이렇게 무시하다니, 언젠가 내 남성다운 매력을……

“빨리 나와, 사형들 깨우러 가야지.”


▲ 우째 나와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진영 사저, 그래도 목욕은 같이 하지 않습니다

아침 시간은 꽤나 정신없이 흘러갔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저 멀리 절벽에서 새나 날리며 궁상을 떨고 있던 둘째 무성 사형을 데려와 조회를 끝마치고 나니 대충 아침 일과가 끝났다. 내 앞에 서 있는 저 할아버지는 이 곳 홍문파를 이끄는 홍석근 사부님이다. 우째 쁘띠샤방해서 힘 하나 못 쓰게 생겼지만, 이래봬도 천하사절이라 불리우는 최고 고수 4인방 중의 일원인 ‘역왕’ 이라고 한다. 사실 조금 뻥 같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사부님에게 홍문파 무공 수련서를 전수받았다. 드디어 홍문파의 정식 제자가 된 것이다. 수련장으로 내려와 사형들의 축하를 받은 뒤, 영묵 사형과 함께 나무인형을 때리며 열화장과 충격파 등의 기본기를 익혔다. 처음 손에 쥐어보는 기공패. 덕분에 초반에는 약간 사용이 어려웠지만, 곧 내 몸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건전지도 없는 주제에 직립보행에 무술까지 써 가며 움직이는 나무인형을 때려 부수다 보니 어느새 하루 일과가 거의 끝나갔다. 저 멀리서 영묵 대사형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대사형, 오늘 저녁은 오징어덮밥이죠?

“자, 이곳이 홍문파 정식 제자의 마지막 관문인 수련의 동굴이다. 이곳에서 오늘 배운 무공을 마음껏 펼쳐 보거라.”

오징어덮밥은 개뿔! 아니, 밥은 주고 뭘 시키든 말든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알고 보니 홍문파, 상당히 스파르타식 교육을 시키는 곳이었구나. 꼬르륵대는 배를 안고 들어간 동굴 안에는 연무장에서 본 나무인형 몇 개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사람 같이 움직이는데, 설마 안에 사람이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자, 간다! 퓽퓽퓽퓽

“네가 홍문파의 새 제자냐?”
“응?”

나무인형을 빠개고 있는 사이,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늘 아침에 새 날리던 아저씨 목소린데? 나름 암살자처럼 보이려고 복면을 쓰고 있긴 하지만 남자치고 길고 검은 생머리, 야리야리한 얼굴 생김새 등을 보아하니 이건 100% 무성 사형이다. 하긴 이 무일봉에 외부인이 들락거리는 것도 아니고, 연무장에서 고작 100미터 떨어진 곳에 암살자가 있을 리도 없지 않은가?


▲ 아무리 봐도 무성 사형이잖아요...

그렇지만 크앙은 눈치가 빠른 꼬맹이다. 저렇게 대놓고 ‘속아주세요’ 라며 분장하고 나온 둘째 사형에게 ‘무성 사형? 여기서 뭐 하는 거에요?’ 라고 물어봐서 분위기를 깰 수는 없지 않은가? 나름 ‘쿠키요미’ 에서 80점 맞았다구! 무성 사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가볍게 화련장을 하나 날려 줬다. 정통으로 맞으면 장난이 장난으로 안 끝날 것 같아서 살짝 발 아래 땅바닥에 명중시키는 것도 잊지 않고.

투닥! 쿵! 빠지직!!!!

첫 번째 효과음은 번개처럼 달려온 무성 사형이 내 발을 거는 소리, 두 번째는 발이 걸려 넘어지고 있는 조그마한 내 몸 위로 커다란 무성 사형이 올라타며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마지막은… 무려 신장 180cm의 성인 남성이 겨우 100cm나 될까 말까 한 막내의 가늘고 여린 팔을 거침없이 꺾어버리는 끔찍한 소리였다. 맙소사!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내 팔! 마이 암! 이런 미친 사형!”
“이제 운기조식을 해서 부활해 보거라.”
“운기조식이건 뭐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막내 팔을 이렇게 불구를 만들어 놔? 우아아아악!”

그러나 너무 아파서였는지, 내 비명은 입 속을 맴돌 뿐이었다. 할 수 없이 시키는 대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아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팔 부러져 본 경험 있는 사람은 내 맘 알거다. 눈물을 훌쩍이며 홍문파에 입문해 처음으로 배운 운기조식을 시행하자 아파 죽겠던 팔이 살살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자 저 미친 무성 사형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하하하! 막내야, 제법이로구나. 이것이 홍문파의 마지막 통과 의례란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는 상황. 관절 잘못 꺾다가 영원히 불구가 될 수도 있는데… 아까 팔이 230도 가까이 휘어졌단 말이야! 21세기에 아직도 이런 구타 신고식이 남아 있다니! 그러고는 던져주는 것이 고작 만두 하나? 이거 먹고 회복되겠냐! 어? 회복되네? 뭔가 신기한 세계다. 저녁도 못 먹은 터라 만두를 꾸역꾸역 먹고 있는데, 무성 사형은 일이 있다며 먼저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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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통만한 만두 하나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후 동굴을 나서니 어느새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리고…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경악했다. 온 몸이 검붉은 색으로 뒤덮여 있는 괴인(怪人)들. 아니, 인간이라 하기에도 어폐가 있는 소환귀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화중 사형과 무성 사형이 힘겹게 그들을 막고 있었다.

“이… 이것들은 대체 뭐야? 끝도 없이 나오잖아!”
“막내야, 여긴 우리들이 맡을 테니 어서 위로 올라가 보거라!”

“네.. 네!”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지만, 이내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생각 같아서는 부족한 힘이나마 돕고 싶었지만, 괴물들이 계속 쏟아져 나와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무성 사형과 화중 사형 정도라면 쉽게 밀리진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사형들을 뒤로 하고 본채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니, 셋째 길홍 사형의 모습이 보였다.

“진…서연….”

털썩

내 바로 앞에서 쓰러진 길홍 사형의 등에는 시퍼런 칼날이 꽂혀 있었다. 급히 맥을 짚어보았지만 맥이 뛰질 않았다. 홍문파의 제자 한 명이 어이없이 살해당한 것이다. 그러나 슬퍼할 틈도 없었다. 본채 쪽을 보니 세 쌍의 인영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거대한 괴인과 맞서 싸우는 영묵 대사형, 뱀가죽 옷을 입은 여자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진영 사저. 그리고 지붕 위에서 한 여자와 전투를 벌이는 홍석근 사부가 보였다.


▲ 홍문파를 습격한 3인의 괴한

순간, 뱀가죽 여자와 싸우고 있던 진영 사저가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길홍 사형을 발견했다.

“아, 길홍 사형!”
“진영 사저! 뒤를 봐요!”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전투에서 한 순간의 방심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진영 사저와 싸우던 뱀 가죽 옷의 여자는 진영 사저의 빈 틈을 노려 옆구리에 치명상을 입혔고, 가슴에 칼을 꽂았다. 진영 사저의 부릅뜬 눈이 서서히 감겼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사형 역시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본 사람 중 가장 거대하고 웅대했던 영묵 대사형이었지만, 그보다 두 배는 큰 괴력의 거인 앞에서는 그의 괴력도 통하지 않았다. 거인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얻어맞고 수십 미터를 굴러온 대사형의 입에서 붉은 피가 뿜어졌다. 내장 조각까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살아나긴 틀린 것 같다. 피로 물든 대사형과 내 눈이 마주쳤다.

“막내야… 피해라… 어서!”
“이… 이건 꿈이야. 갑자기 이게 무슨…”


▲ 누나처럼 나를 돌봐 주던 진영 사저의 죽음

나를 누나처럼 보살펴주던 진영 사저가 쓰러지고, 태산처럼 한없이 거대해 보이던 대사형의 고개가 떨궈졌다. 진영 사저와 영묵 대사형을 상대하던 의문의 남녀는 곧장 홍석근 사부에게 달려갔다. 아무리 사부님의 무공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3대 1의 협공을 당하기는 힘들었다. 사부를 도와야 했다.

그러나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형들을 저렇게 무참히 짓밟은 괴물들에게 내 힘이 통할까? 머뭇거리던 중, 아까 보았던 소환귀들이 땅에서 솟아나와 길을 막았다. 나를 덮쳐 오는 소환귀들을 보자 머뭇거림이 사라졌다. 있는 힘을 다해 불꽃을 쏟아내고 충격파를 터뜨리자 눈 앞에 보이는 소환귀들이 하나 둘 소멸되어 갔다. 그러나 마지막 소환귀를 처치할 때 쯤, 옆에 위치한 연무장에서 무언가가 콰앙 하며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만신창이가 된 사부님이었다.

다행히 사부님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3인의 합동 공격으로 인해 몸이 많이 상해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해 보였다. 분노에 몸이 떨렸지만, 사부님을 부축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사형과 진영 사저도 당해내지 못 한 인물들, 거기에 사부님마저 이렇게 무참히 쓰러뜨린 그들에게 내가 덤벼 봐야 모닥불에 덤벼드는 나방 꼴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 흉수의 리더, 진서연

그러나 간신히 붙잡고 있던 머릿속 이성의 끈은 우리 앞으로 느긋하게 걸어온 한 명의 인물로 인해 산산조각났다. 홍문파의 도복을 입고 이쪽을 향해 선 긴 머리칼의 사내. 바로 저 아래에서 소환귀들과 싸우고 있어야 할 둘째 무성 사형이었다! 말도 안 돼!

“콜록.. 무성아, 설마… 네가?”
“사부님, 실망입니다. 홍문신공의 고수가 겨우 이 정도 수준이었습니까? 아, 물론 사부님의 탕약에 제가 약간의 수를 부렸지만, 왠지 괜한 짓을 한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사부님이 일어섰다. 먼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의 형태가 푸른 빛을 띈 검으로 변했다. 이윽고 크앙만큼 작던 홍 사부의 몸집이 점차 커져 거대한 곤족 남성의 모습으로 변했다. 역왕 홍석근의 진가가 드러난 것이다. 진서연의 양 옆에 서 있던 덩치(거거붕)와 뱀가죽옷 여자(유란), 심지어 진서연 역시 맥을 못추고 쓰러졌다. 기공파 하나로 무일봉의 봉우리 하나를 날려버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깨달았다. 천하사절의 한 사람이자 역왕이라는 칭호가 어째서 조그마한 할아버지에게 붙을 수 있었는지. 그러나 그 순간, 주변에서 강한 압박감이 느껴지며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 귀요미 사부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다니!

“홍석근, 하나밖에 남지 않은 제자다. 살리고 싶다면, 귀천검을 내놓으실까?”

어느 새, 진서연 일당이 나를 둘러싼 채 사부님을 협박하고 있었다. 잠시 사부의 무위에 취해 있는 틈에, 인질로 잡혀버린 것이다.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던 사부님은 기공파를 해제한 후 귀천검을 진서연에게 건넸다. 아까 그 공격이 마지막 힘이었는지, 모습 또한 어느새 조그마한 린족 할아버지로 돌아와 있었다. 다 이긴 싸움에서, 그것도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걸림돌이 되다니!

“약속대로… 막내를 풀어줘라…”
“…흠”

순간 몸이 가벼워졌다. 말문도 트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진서연 일당도 당장 나를 해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곧바로 저 멀리 보이는 사부를 향해 뛰었다. 그러나 채 다가가기도 전, 진서연이 들고 있는 귀천검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사부님을 덮쳤다. 마기가 뿜어내는 기운은 열 보도 넘게 떨어져 있는 내게도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공중에 떠서 괴로워하는 홍석근 사부의 모습에서는 방금 전 천지를 호령하던 역왕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그러지는 생명의 기운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안 돼!”

피를 토하는 절규에도 불구하고, 사부님의 육신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믿을 수 없었다. 이윽고 마기가 사그라든 곳으로 달려가봤지만, 홍 사부가 입고 있던 옷가지만이 주인을 잃은 채 나뒹굴고 있을 뿐이엇다. 역왕 홍석근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어버린 것이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투둑 하고 끊겼다.

그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성을 잃고 진서연에게 덤벼들었지만, 내 공격은 진서연의 소매 끝도 건드리지 못했다. 애초에 소매가 없는 옷이던가? 어쨌든 진서연의 검에 맞고 절벽으로 떨어지며 수많은 추억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홍문파에서의 즐거웠던 추억, 정감 넘치던 사형들, 사부님의 놀랄 만한 무위와 죽음… 그리고 곧 닥칠 내 죽음까지.


▲ 홍문파에서 보냈던 즐거운 추억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이것이 죽기 직전 떠오른다는 인생의 주마등인가?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난 후, 육신이 검고 차가운 물 속으로 침잠되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진서연… 그녀를… 그녀를… 막아주세요.’ 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마도 환청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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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신이 드세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디에 누워있는거지? 분명 진서연에게 당해 천해절벽 아래 바다로 떨어졌는데? 평소 저혈압이라 아침마다 제정신이 아니지만, 너무 큰 일을 겪은 직후라 머릿속 안개가 빠르게 걷혔다. 눈을 뜨고 일어나자 태어나서 여태껏 본 어떤 여성보다도 아름다운 미녀가 시야에 들어온다. 누나처럼 여겼던 진영 사저보다 조금 더 예쁘다.


▲ 예... 예쁜 누나다! 진영 사저보다 좀 더 예뻐...

 “여, 여긴 어디죠?”
“소란 때문에 깨셨군요? 1주일만에 일어나셨어요. 여긴 대나무 마을이에요. 바다에 빠진 소협을 저희 아저씨께서 구해 오셨답니다.”
“아저씨라구요?”
“도 천자 풍자 성함을 쓰시는 분이에요. 저희 대나무 마을의 자경단장을 맡고 계시죠. 소협과 같은 문파였다고 하더군요. 아, 오래 전에 무일봉을 떠나셔서 소협은 잘 모르실 거에요. 지금 충각단이 마을을 습격해와서 해변에 나가 계세요. 무사하셔야 할텐데…”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바깥에서 희미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병장기가 부딪히고 포성 소리까지 간간히 울려퍼지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 틀림없다. 그나저나 진서연에게 입은 상처가 심상치 않다. 치료가 좋았던 덕인지 상처는 상당수 아물었지만, 상처를 시점으로 왠지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전체적으로 내 몸 같지 않은 느낌이다.

밖으로 나와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해변가를 보니 독보적인 우위를 뽐내는 무인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대와 실력을 보아하니, 저 사람이 아까 예쁜 누나가 말하던 도천풍 단장임이 틀림없으리라. 그의 무력에 놀란 충각단들은 이내 물러가기 시작했고, 상황을 대충 정리한 도천풍 단장은 나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를 따라 마을 가운데에 위치한 집으로 들어가니 아까 나를 간호해주던 예쁜 누나가 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남소유. 도천풍이 어릴 때부터 키웠다는데, 가히 절세미녀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도천풍은 앞서 들은 대로 내 대사형 뻘이었다. 십수년 전, 홍석근 사부에게 무술을 사사받은 후 세상에 나왔으나, 당시 세상은 무의 길만을 걸어가기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들어간 운국 군대는 부정부패와 무능이 어우러져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기만 했다고 한다. 이에 실망한 도천풍은 결국 아들 도단하와 어디선가 주워 온 아기 남소유를 데리고 낙향했다. 그러던 와중 혼란한 세상을 대변하듯 충각단이라는 도적 단체가 대나무 마을을 노리기 시작했고, 결국 도천풍은 마을을 지키기 위한 자경단을 조직하고 이에 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 홍문파의 직전 제자, 도천풍 단장

이윽고 도천풍에게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일주일 전, 무일봉에 불길이 솟아 태풍을 뚫고 가 보니 이미 홍문파는 폐허가 되어 있었고 바다에 떠다니던 나만 구출해 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도천풍 역시 진서연의 행보나 목적 등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홍문파의 제자로서 복수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나무 마을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도천풍의 생각은 충분히 이해됐다. 그만큼 대나무 마을의 상황은 급박했고, 도천풍마저 이 곳을 떠난다면 무일봉의 비극과는 비교도 안 될 살육극이 펼쳐질 것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간에 i기지 않는 내가 이 곳을 도와줘야 할 판이었다. 진서연의 행방을 찾을 때까지 이 곳에서 자경단의 일을 도우며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는 것이 어떠냐는 도 단장님의 말에, 대나무 마을에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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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단의 일을 도우며 대나무 마을과 그 근처를 돌아다닌 지 어느새 2주 째. 대나무 마을 자경단을 도와 각종 임무를 수행했지만, 정작 진서연 일당에 대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자경단원 중 첩자가 있다는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자경단에서 운반하던 유황을 도둑맞은 데 이어 내부 정보가 충각단과 흑룡채 등에 줄줄 새고 있다는 것이 수 차례에 걸쳐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나무 마을에서 만난 사람 모두가 제각기 의견이 달라 확실한 심증은 없다. 그러나 첩자는 분명 존재하며, 그로 인해 머지않아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러던 중, 한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 나에게 올 서신이 없을 텐데…

‘네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라고 하는 놈이냐? 자신이 있다면 메마른 우물로 혼자 와라.’

편지에는 분명 ‘홍문파’ 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내가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와 도천풍 단장, 그리고 그 날 무일봉에 있었던 인물들밖에 없다. 그 중 사부와 사형 사제들은 전멸했으니 말이다. 생각할 틈도 없이 편지에 써 있는 장소에 도착하자 의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왔구나!”

저 멀리서 복면을 쓴 조그마한 인영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체구로 봐서 린족 같은데, 의아한 점은 목소리도 굉장히 익숙하다는 것이다. 이는 복면인과의 전투 중에 더욱 확실히 느껴졌다. 초식 자체가 익숙해도 너무 익숙했다.

“헤헷, 제법인데? 막내야, 아직도 모르겠니?

이 목소리는…? 설마! 복면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이 벗겨지자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항상 밝고 홍조를 띄고 있는 모습. 바로 홍문파에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넷째 사형 화중이었다.


▲ 화... 화중 사형이 살아 있었다

"화... 화중 사형!"

화중 사형의 얼굴을 본 순간 내 안에 있던 분노와 증오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경공보다 빠르게, 전신보보다 순식간에 화중 사형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럴 때는 내가 거대한 곤족이 아니라 조그마한 체구의 린족이라는 것이 천만 다행이다. 만약 린족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화중 사형의 품에 안기지 못했을 테니까.

“헤헷, 내가 얼마나 고생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알아? 여기까지 온 나의 무용담을 설명하려면 사흘 날밤을 새도 모자랄 거다.”

쉴새 없이 흐르는 눈물 너머로 티없이 환하게 웃고 있는 화중 사형의 모습을 보자 팽팽했던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이후 들은 화중 사형의 고생담은 상상 이상이었다. 소환귀들에게 밀려 절벽으로 떨어졌지만 나뭇가지를 잡고 매달려 겨우 살아난 후 홍문파의 후예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화중 사형과의 만남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며칠에 한 번씩 화중 사형은 나를 불러내 다양한 합격기와 새로운 무공,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에서부터 각종 꼼수까지 다양한 무공을 전수해 줬다. 단언컨대 화중 사형과 함께 한 시간은 무일봉을 나온 후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날이 갈수록 나빠지는 화중 사형의 안색이 조금 꺼림칙했을 뿐이다.


▲ 아니, 린족 꼬마애가 덜덜 떨면서 노숙하고 있는데 바라만 보는 자경단은 뭐야!

그리고, 이별의 날은 갑자기 찾아왔다. 그 날은 흑룡채 본거지 뒤편의 비밀 수련장에서 나무인형을 열심히 때려 가며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흑룡채 놈들이 비밀 수련장의 존재를 눈치챘고, 그들을 무찌르며 동굴을 나가게 되었다. 흑룡채 정예병들을 대부분 쓸어버리고, 잡병들이 도망가며 전투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 갑자기 화중 사형이 멈춰섰다. 뭔가 아파 보이던데, 흑룡채와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은 건가?

“헤헤… 막내야, 제법 잘 싸우던데? 이제 막내라고 놀리지도 못하겠어.”

순간 화중 사형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화중 사형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고,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들어 보였다. 설마…

“화중 사형! 역시, 어딘가 부상이… 설마 아까 흑룡채 놈들과 싸우다가…”
“설마, 이 몸이 그런 녀석들에게 당할 리 없잖아. 이… 이건… 쿨럭, 무일봉에서… 놈들에게 당했어. 탁기가… 온몸에 퍼지고 있어. 그래도… 다행이다. 죽기 전에 널 만나서…”
“주.. 죽으면 안 돼요, 사형!”
“너와 함께 더 있고 싶은데, 더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고 싶었는데… 정말 아쉽다. 헤헤…”

트레이드마크인 배시시한 웃음을 억지로 짓는 사형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탁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 생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듯한 어둡고 짙은 기운. 어떻게, 어떻게 하면 저 탁기를 없앨 수 있지? 방황하는 사이 이별은 다가왔다.

“안…녕… 막내야.”


▲ 탁기에 오염되어 생을 마감하고 마는 화중 사형

그리고 화중 사형은 눈을 감았다. 이윽고 혼 같은 게 몸에서 빠져나오더니 이내 푸른 빛으로 변해 하늘로 떠올랐다. 이제는 ‘하하하, 왔구나!’ 라며 장난스럽게 등장하던 모습도, 직접 만든 나무인형을 이용한 가르침도, 만두 먹다 체해서 등을 두드려 주는 등의 추억도 더 이상 만나볼 수 없다. 

이제 진서연을 죽여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마지막 남은 화중 사형마저 앗아간 철천지원수! 나는 다짐했다. 그녀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설령 악마에게도 혼이라도 팔 수 있다고. 사실 이 때는 몰랐다. 단순한 다짐에 불과했던 이 말이 얼마 안 가 실제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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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중 사형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나니, 일상 자체가 무의미해 진 느낌이었다. 녹명촌에서 나를 유혹하는 수많은 채집/제작단도, 좋은 보패와 무기도, 예쁜 옷도, 맛있는 음식도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녹명촌에서 우연히 만난 독초거사에게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홍문파가 진서연 일당의 습격을 받아 멸문했다는 사실은 들었다. 그나저나, 그런 묵화의 상처를 입고도 이 정도까지 움직이다니, 혈맥이 아직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구나. 그렇지만 이대로 혈맥이 막혀버리면 언젠가는 죽어. 죽는다고.”
“그럼 어떻게…”
“저 수련계곡 위로 올라가 수련의 동굴로 한번 가 보거라. 이런 종류의 상처는 의원이 아니라 상승무공을 지닌 고수만이 치유할 수 있어. 마침 널 도와줄 사람들이 저 위에 있구나.”


▲ 팔부기재를 소개(?)해 준 녹명촌의 기인, 독초거사

영감님이 시키는 대로 수련계곡을 지나 동굴에 들어섰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우르릉 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멀쩡했던 동굴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살아야募募 의지 하에 최대한 벗어나려 애를 썼으나, 발디딜 공간이 없었다. 크앙은 무기력하게 뚫린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이 만들어낸 기연이었다. 동굴에서 떨어진 곳에는 팔부기재라 불리는 인물들이 점괘에 따라 내가 나타날 것을 알고서 일주일 째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의 내공 주입으로 인해 혈도를 콱 막고 있던 묵화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

팔부기재는 무림맹과 혼천교에서 뽑힌 최고의 인재들로, 마황의 발호를 막기 위해 세력 간의 다툼을 잠시 잊고 손을 잡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세상을 탁기로 물들이려는 마황이 있었고, 그와 맞서 싸운 네 명의 고수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마황을 막은 고수들을 일컬어 ‘천하사절’ 이라 불렀는데, 현대의 천하사절은 검선 비월, 무신 천진권, 환귀 익산운, 그리고 내 사부이자 홍문파의 장문인인 역왕 홍석근이다. 그러나 천하사절은 몇 년 전부터 자취를 감췄고, 이들을 찾기 위해 무림맹과 혼천교에서 파견된 무림고수 집단 ‘팔부기재’ 가 결성되었다는 것이다.


▲ 내 혈도를 막고 있는 묵화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있는 팔부기재 멤버들
이들 사이에도 왕따가 존재하더군...

그러나 수소문 끝에 찾아온 역왕 홍석근 사부는 이미 진서연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고, 모두가 낙담하고 떠나려는 와중, 팔부기재에서 점술과 도술을 담당하는 감마등에 의해 살아남은 홍석근 사부의 제자가 묵화의 상처를 입고 이 곳에 나타난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마황에 대항할 그릇이라는 것도. 잠깐, 그거, 나 아냐?

“진서연 일당의 행적은 우리도 찾고 있다. 정보를 입수하면 너에게도 알려주도록 하지. 그러니 그때까지 실력을 키우도록. 묵화의 상처를 이겨낼 수 있도록 말이다.”
“네, 네!”

그렇게 팔부기재와의 짧은 만남이 끝났다. 훗날 추억해 보면, 이것이 팔부기재 전원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훗날 그들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해체되고, 결국 혼천교와 무림맹으로 다시 나뉘게 된다. 어쨌든 그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용맥을 자유롭게 탈 수 있고, 각종 상승 무공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역시 충분한 기연이 아닐 수 없다.

수련계곡을 나온 나는 팔부기재의 말대로 실력을 키우며 진서연의 행적을 기다렸다. 아니,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이런 존슨 같은 세상!

[5장 무삭제 풀버전 바로가기]


 

“뭐, 범박?”
“네. 제가 똑똑히 봤어요. 범. 박. 범박 아저씨였어요.”

대나무 마을 자경단의 일을 돕다가 우연히 당도한 송림사. 그 곳에서 이것저것을 수소문하던 중에 송림사의 동자승 동동에게서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대나무 마을 자경단의 일원인 범박이 야심한 밤 충각단과 내통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어쩐지 도천풍의 서신이 들어 있는 중요한 봇짐을 잃어버리고 다 잡은 충각단 간부 은광삼을 놓치기까지 하더니… 그러고 보니 내가 눈을 뜬 날 벌어진 대나무 마을 습격과 유황 탈취사건, 심지어 얼마 전 일어난 주술사 나추옹이 벌인 녹명촌 강시 습격 등이 모두 범박의 첩보로 인해 일어난 것 아닌가.

배신자 범박은 이 사실이 들키자 마자 도주했지만, 대나무 마을 자경단의 정보망에 걸려 해안동굴 안에 숨어 있다가 딱 걸렸다. 나는 범박을 처단하려 했지만, 궁지에 몰린 범박이 내뱉은 정보로 인해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바로 충각단 지부장 은광일이 도천풍 단장 집의 절세미녀 남소유를 노리고 있으며, 이를 곧 실행에 옮길 계획이라는 것이다. 나는 급히 이 소식을 대나무 마을 자경단에 전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이미 충각단의 습격으로 인해 소유 누나는 납치된 후였다. 나는 소유 누나를 구하기 위해 충각단 남해함대 지부로 잠입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유 누나가 잡혀 있다는 배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이윽고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따라가자 소유 누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잡혀서 고초를 겪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충각단 남해함대 지부장 은광일의 동생 은광삼과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와중, 소유 누나가 날 발견했다.

“…… 아아악~ 살려줘요!”
“어… 어?”
“저놈이 절 희롱하려 했어요. 소협, 저 자를 해치워주세요.”


▲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은광삼과 잘 놀던 남소유, 그녀의 이중적 태도가 의심스럽다

소유 누나가 나를 향해 달려와 안겼다. 아니, 내 키가 훨씬 작으니 나를 안았다고 봐야 하나? 얼굴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지만, 소유 누나의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상황이 심히 의심스럽다. 은광삼 역시 살짝 당황한 것 같고, 아까의 모습도 희롱당하는 것 치고는 너무 자연스럽지 않았나. 어쨌건, 은광삼은 나를 향해 달려왔고, 격투 끝에 은광삼을 처치할 수 있었다.

“소협~ 대단하세요!”
“… 정말 잡혀 있던 거, 맞아요?”
“저.. 정말이죠. 제가 다른 마음을 품었을 리 없잖아요.”

믿고 싶다. 믿어주면 아까처럼 포근하게 안아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말하고 있는 남소유의 눈빛은 이것이 진실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아까 은광삼과 놀아나던 모습이 훨~씬 자연스럽다. 거기에, 방금 전 은광삼에게 말한 ‘형수님’ 이라는 단어로 보아 은광일과 모종의 거래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남소유를 다그쳤다. 아니, 다그치려고 했다. 그러나 내 뒤쪽에서 느껴진 인기척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윤기가 흐르는 검은 뱀가죽 타이즈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

“역시 살아있었군, 홍문파 애송이.”
“유… 유란!?”

그렇다. 그녀는 진서연의 수하이자 진영 사저를 시해한 장본인, 유란이었다. 그토록 찾아다니던 원수! 내 실력이 어찌 되었든, 저 자를 그냥 둘 순 없다. 유난히 유란을 겁내고 있던 남소유는 급기야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고, 유란도 그 뒤를 따라 경공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남소유를 i아가던 유란을 향해 기공파를 날렸다. 내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을 막은 유란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 미녀인데다 노출도도 높은 복장으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눈에 받을 만한 매력의 소유자인 유란이지만, 내 눈에는 징그러운 한 마리 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 네가 정말 내 상대가 된다고 생각해?”
“너… 용서하지 않겠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솔직히 말해 유란에게 나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으나, 유란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화중 사형에게 배운 합격기와 필살기는 유란의 잔상만을 겨우 i는 수준이었고, 제압당했을 때의 반격기 역시 써먹을 틈조차 없었다. 철천지원수를 앞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바닥에 누워 고통에 신음하는 것 뿐이었다.


▲ 진서연 일당이자 진영 사저의 원수, 유란

유란은 ‘진서연 님의 당부 때문에 널 죽이지 않겠다’ 라는 말을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수치심과 패배감이 온 몸을 휘감았지만, 운기조식을 통해 기력을 회복시키고 나니 비로소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복수를 위해서는 실력을 더욱 키워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보다는 대나무 마을로 가는 것이 급하다. 남소유가 탈출한 이상, 은광일이 어떻게 나올 지 모른다. 나는 급히 대나무 마을로의 축지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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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당도한 대나무 마을 입구. 그러나 그곳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옥이었다. 하늘을 덮으며 날아온 수천 개의 불화살은 마을 전체를 화염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었다. 불 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충각단원들이 개미떼처럼 대나무 마을을 습격하고 있었다. 평소의 습격에서는 해안 방어선에 밀려 마을 안으로 발도 붙이지 못하던 충각단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자경단원들이 불을 끄느라 잠시 경계를 늦춘 사이, 대포를 퍼부으며 순식간에 마을로 들어와 양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랴부랴 무기를 가지고 나온 자경단에 비해, 애초에 전투 준비를 하고 들어온 충각단은 수적, 질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경단원들이 하나둘씩 총칼에 쓰러지고 있었다. 다행히 본신의 실력은 자경단원들이 한 수 위였지만, 전투의 기세가 충각단으로 기운 지금은 그 실력을 100%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 충각단에 의해 습격당하고 있는 대나무 마을의 모습

그 순간, 충각단 남해함대 전초기지에서 만났던 대나무 마을 자경단의 고붕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아이고~ 대협. 걱정 많이 했습니다요. 구하러 간 대협은 오질 않고 소유 아씨만 돌아오셔서 말이죠. 네~”
“남소유? 맞다! 지금 남소유 어딨죠?”
“아, 글쎄요… 아까 촌장님과 의원 옆 등대길로 올라가던 것 같던데… 그러고 보니 거길 왜… 아! 대협~”

남소유가 정말 충각단과 내통하고 있다면 촌장이 위험하다. 아니, 어쩌면 촌장도 충각단과 내통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을 놓칠 순 없다. 길을 가로막는 충각단원들의 눈썹에 조그마한 열화장을 하나씩 날려주며 의원 옆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고 있는데, 위쪽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다.

“소유, 이제 둘이 떠나자고. 이 정도 챙겼으면 이제 둘이 잘 먹고 살 수 있어.”
“흥, 몰라요. 호강시켜 준다고 해 놓고 고작 이거에요? 정말 실망이야. 누구는 운국 황후 부럽지 않게 호강시켜주겠다고 했는데.”

역시나! 내통자는 범박 한 명만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사태를 벌이러면 단순한 정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철저한 계략에 맞춘 내부에서의 찬동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범박의 경우 최선을 다해 자경단의 각종 정보를 유출시켰다고는 하나, 정작 자경단 내부에서의 영향력은 적었다. 충각단 남해함대 지부장 은광일이 남소유를 차지하기 위해 대나무 마을을 공격했듯, 촌장 역시 남소유와 개인적인 부귀영화를 위해 자신의 마을을 충각단에게 팔아넘긴 것이다. 저 가증스러운 모습이라니. 구역질이 난다.

남소유와 촌장이 티격태격 하고 있는 사이, 저 뒤편에서 은광일이 나타났다. 대나무 마을을 불태운 주요 인물 3인방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저 셋을 일망타진해야 할 텐데… 어떻게 도망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쩍 하는 빛과 함께 은광일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촌장의 옆구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촌장은 순간적으로 멍해 있었지만, 이내 통증을 느끼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은광일의 배신,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부귀영화에 마음을 뺏겨 철저히 이용당했던 촌장은 은광일의 발길질 한 방에 불타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자신의 영화를 위해 마을을 불태우는 일에 앞장섰던 촌장의 허망한 최후였다. 그러나 난, 최후까지 놓지 않았던 남소유에 대한 신뢰의 끈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더욱 가슴아팠다.

“뭐야, 왜 이제 나타나~ 내가 저 늙은이를 따라 가버렸으면 좋겠어?
“그럴 리가 있나, 우리 이쁜이 덕분에 이렇게 마을을 점령하는 큰 공을 세웠는데. 이걸로 난 함대장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야. 하하하!”
“운국 황후 못지 않게 해주겠다는 말, 꼭 지켜.”


▲ 알고 보니 은광일과 내통하고 있었던 남소유
얼굴 값을 이런 식으로 하다니!

이제 확실해졌다. 남소유는 부귀영화를 위해 은광일과 손을 잡았고, 자신에게 연심을 품고 있던 촌장을 이용해 충각단에 마을을 팔아넘겼다. 그러고서는 도천풍 단장의 신용을 이용해서 우리 모두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여자는 착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자신의 허영심을 채워줄 남자를 찾아다니는 요녀였다. 순간 남소유가 나를 발견했고, 은광일 역시 검을 뽑았다. 사실, 은광일은 나보다 더 고수다. 그러나 저 자세를 보라. 남소유에게 멋져 보이려고 폼이나 재고 있다. 말 그대로 빈틈 투성이였다. 나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크윽… 젠장, 방심했군.”
“뭐하는 거야! 제대로 안 해?”

그러나 한 번 내 쪽으로 기울어진 승세는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고, 마침내 은광일은 더 이상 안되겠다 싶었는지 절벽 아래서 날아온 커다란 연에 매달려 도망쳤다. 남소유와 함께 말이다. 비록 은광일의 목을 따진 못했지만, 도망가고 있는 지부장의 모습을 본 충각단원들은 급속히 사기를 잃었다. 여기에 도단하의 치료를 마친 도천풍 단장과 내가 가세하면서 전장은 급속도로 정리되었다.

“고맙네, 크앙. 자네 덕분에 마을을 지킬 수 있었네.”

전투가 끝난 후. 도천풍 단장과 나는 도단하 공자의 침상머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남소유를 어려서부터 돌봐 온 도천풍이었기에 그녀의 배신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을 터인데, 현실은 마냥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불타버린 마을도 재건해야 하고, 충각단의 재습격에 대비해 자경단원의 모집과 훈련에도 전념해야 한다. 정신을 잃고 신음하는 도단하는 여전히 꿈 속에서 ‘소유야…’ 를 외치고 있는데, 아들에게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역시 고민거리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좋은 소식이 있네. 자네가 찾고 있는 진서연의 행방이 포착되었네.”
“에이 뭘요, 괜찮습니…… 네? 진서연이요?”
“그래, 저 멀리 대사막에서 그녀의 행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네. 좀 먼 곳이라 걸어가기는 뭐하고, 용맥을 새로 뚫어놨으니 밖으로 나가 보게. 축지술사 안두매라는 사람이 있는데, 내 그에게 그 곳으로의 이동을 부탁해 놨네.”
“가, 감사합니다. 지금 즉시 떠나야겠어요.”
“사람 참 급하긴. 가겠다니 말리지는 않겠네. 아, 대사막의 토문진으로 가면 한시랑이라는 장군이 있을 것이네. 그에게 안부 좀 전해주게나.”
“네, 감사합니다. 언젠가 복수를 끝마치고 다시 찾아올게요.”

마음이 급해졌다. 유란이나 거거붕 같은 곁가지가 아닌 진정한 흉수 진서연에 대한 단서를 최초로 포착했기에 더욱 그랬다. 막 경공을 사용해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도천풍 단장이 내게 말을 건넸다.

“자네, 복수도 좋지만 그를 뒷받침할 실력이 없다면 결코 뜻을 이룰 수 없다네.”
“…… 알고 있어요. 힘을 기르고 말 거에요.”
“이제 홍문파는 우리 둘만 남았네. 부디 몸조심하고 홍문의 뜻을 잃지 말게나.”


▲ 아직도 남소유의 배신이 믿겨지지 않아 보이는 도천풍 단장

사실 이 때는 이 인사를 그냥 넘겨 들었다. 유란과의 싸움으로 인해 나 자신의 모자람을 뼛 속 깊이 느꼈기에, 단순히 실력을 키우라는 뜻으로만 들렸다. 그러나 훗날, 도천풍의 이 인사가 단순히 힘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도 단장의 집을 나서니, 저 멀리서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주술진을 그려놓고 나를 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도천풍 단장이 말하던 축지술사인 것 같다. 저 봐,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잖아?

“소협이 크앙이시군요.”
“네, 크앙입니다.”
“하하. 대사막까지는 먼 길입니다. 용맥을 탈 준비는 되셨는지요?”
“네!”
“그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용맥을 여는 주술진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이윽고 하늘로 솟는 힘에 이끌려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용맥의 기운을 느끼며 잠시 뒤를 돌아보니, 아름다운 해안과 부지런히 재건되는 대나무 마을, 그리고 바다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무일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복수를 끝내고 나면 꼭 한번 다시 들를 생각이다.

그렇게 진서연의 행방을 i는 모험의 무대는 대사막으로 옮겨졌다. 과연 이 곳에서는 어떤 모험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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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앤소울'은 '아이온'에 이은 엔씨소프트의 신작 MMORPG로, 동양의 멋과 세계관을 녹여낸 무협 게임이다. 질주와 경공, 활강, 강화 등으로 극대화된 액션과 아트 디렉터 김형태가 창조한 매력적인 캐릭터를...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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