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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앙의 ‘블소’ 스토리 (하), 실리와 도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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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앙의 ‘블소’ 스토리 (하), 실리와 도리 사이

‘블레이드앤소울’ 이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을 넘겼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보니 만렙 캐릭터들이 판을 치고 돌아다니고, 포화란을 잡는다 어쩐다 하며 각자의 모험을 즐기고 있더군요. 그런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블소’ 의 메인 스트림을 잊어버린 채 단순 노가다에 심취해있었습니다. 실제로 제 주변의 한 친구에게 ‘블소’ 의 스토리를 묻자 ‘주인공이 홍문파에서 나와서 모험을 하는데 진서연이 나쁘다’ 라는 두루뭉실한 내용만을 이해하고 있더군요.

사실 ‘블소’ 는 온라인게임 중에서도 스토리텔링이 상당히 잘 구현된 게임입니다. 굳이 홈페이지에서 배경 스토리를 읽어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홍문파의 복수’ 라는 사명을 깨닫게 되며, 몇몇 영상들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의 스토리 이해가 가능하죠. 그러나, 주인공을 향해 퍼부어지는 수많은 퀘스트들을 일일히 읽어가며 진행하면 메인 스토리를 놓치기 쉽고, 그렇다고 모든 걸 안 읽다 보면 그게 습관이 되어버립니다.


▲ 좌충우돌 린족 꼬맹이, 크앙과 함께 '블소' 세계로 떠나 봅시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타파하고자, 게임메카에서는 ‘블소’ 의 메인 스토리를 총정리 해 보는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유저 모두의 분신을 아우르는 오리지널 ‘블소’ 의 주인공이 아니라, 때로는 경박하고 유치한 상꼬맹이 ‘크앙’ 의 시점에서 진행됩니다. 원활한 스토리 진행을 위해 대부분의 서브 스토리를 포함한 일부 씬은 과감히 삭제/변형했으며, 새롭게 재해석한 장면도 상당수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블소’ 의 중심축이 되는 스토리는 모두 담고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출발해 볼까요?


도천풍 단장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진서연 일당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대사막의 운대륙군 장군 한시랑의 곁으로 향했다. 걸어갔다면 족히 한 달은 걸릴 텐데, 다행히도 독초거사에게 배운 용맥 타기를 이용해 한순간에 이동할 수 있었다. 아, 솔직히 한순간은 아니다. 넓디 넓은 제룡림 지역 한쪽 구석탱이에서 저 멀리 대사막 지역까지 한 번에 가는 게 순식간이라면 그게 더 이상하지. 도착하니 왠지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누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옷을 보니 성군당에서 일하는 무당 같은데…?

“음? 자넨 누구지?”

“그게… 전 크앙이라고 하는데요. 도천풍 단장님의 소개로 한시랑 장군을…”

“미안하네만, 한시랑 장군은 지금 독에 중독되어 위독한 상태네.”

“네? 그게 무슨…”

“밖에서 들리는 병장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사마교가 마을을 습격했네. 한시랑 장군도 그들을 막다가 환영초에 중독되었다네.”

이게 무슨 소리야? 우째 내가 정신을 차린 새로운 곳은 죄다 싸움판에 휘말려 있는거지? 대나무 마을에서도 정신 차리자마자 해안가 전투에 참여해야 했는데, 어째 오늘도 그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이곳 사람들은 자길 찾아온 손님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 시키는 이상한 문화를 존중하니까.

결국 나는 한시랑 장군에게는 말 한마디 못 붙여본 채 마을을 습격하고 있는 사마교 무리들과 맞서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아수라장이었다. 성군당 소속으로 보이는 몇몇 무당들이 열심히 기공을 날리고는 있으나 오래 버티긴 힘들어 보인다. 보아하니 사마교라는 것들은 혼천교처럼 힘으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 종교집단인 듯 하다. 그러나 마을을 습격하고 민간인을 죽이는 것을 보아하니 종교보다는 세력 확장과 사리사욕 챙기기에 겨를이 없는 놈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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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톨이 마을을 지키는 한시랑 장군(우)과 백무(좌)

“공격하라! 교주님을 위해 저들을 죽여라!”

나를 향해 일제히 달려오는 사마교도들을 쓰러뜨리니 품 안에서 뭔가 조그마한 병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나왔다. 환영초 해독제. 이것만 있으면 환영초에 중독된 한시랑 장군을 구할 수 있다. 나는 계속해서 사마교도들을 해치웠다. 그때였다.

“으드득… 이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날뛰는 거냐!”

“응? 이 영감은 누구야?”

슬슬 처치한 사마교도의 수를 세기도 귀찮아질 무렵, 깡마른 할아범 한 명이 나를 향해 일갈의 호통을 날렸다. 번쩍번쩍한 옷을 보아하니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교리를 바꾸고, 교도들의 돈을 갈취하고, 커다란 회당을 짓고, 가끔 여교도들 성추행도 해 주고, 그러다가 꼬리 잡히면 아파트 고층에서 모기장 뚫고 뛰어내리고… 그런 짓이나 일삼을 것 같은 노인네였다. 한마디로 사마교인지 뭔기 하는 구더기들의 교주, 혹은 그와 맞먹는 고위 간부일 것 같다는 얘기지!

“교도님, 저 놈입니다! 저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꼬맹이가…”

“닥쳐라! 겨우 저런 꼬마 하나 해치우지 못하는 꼴이라니… 내 본산지로 돌아가 경을 칠…… 크헉!”

좋았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영 사저는 ‘선빵은 필승이다’ 라고 가르쳐줬고 나는 그걸 충실히 이행할 뿐이다. 나보다 한 수 위인 은광일을 쉽게 이긴 것도 이것 때문이라니까? 그러므로 내가 방금 저 사마교도 영감의 회음혈… 쉽게 말해 똥침에 가까운 위치에 화련장을 날린 것은 결코 비겁한 행동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적을 앞에 두고 방심하는 게 잘못이라고.

“크아아악! 이런, 이런 비겁한……. 크허으어억!”

“교… 교주님!”

“으갸갸갸갸… 우구구구…”

“안 되겠다. 상태가 심각해! 어서 분타로 모셔!”

“이 비겁한 놈. 치루를 앓고 계신 교주님의 뒤를 치다니!”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악독한 짓을!”

“악마다! 저놈은 악마가 틀림없어!”

저 놈들… 뭐라는 거야? 교주가 쓰러지자 사마교도들이 일거에 퇴각하기 시작했다. 역시 기습공격은 효과적이다. 이 공격이 진서연에게도 통하면 좋을 텐데… 전투가 끝난 후 사방에 널린 시체들을 뒤져보니 아까 발견한 환영초 해독제(+약간의 돈)를 대거 획득할 수 있었다. 얼른 한시랑 장군에게 먹여야지!

“으…음… 사, 사마교도들은?”

“한 장군, 정신이 드세요?”

독기운을 몰아내긴 커녕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에도 바빠 보였던 한시랑 장군. 그러나 내가 구해온 해독제를 먹더니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듣자하니 환영초라는 풀은 환각성 마약 성분이 짙기 때문에 중독이 심하거나 오랜 기간 복용할 경우 부모형제도 몰라볼 뿐 아니라 감각까지 없어지는 광인이 된다고 한다.

해독제를 먹고 정신을 차린 한시랑 장군에게 나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홍문파를 습격한 진서연 일당의 만행, 제룡림에서 도천풍 단장을 도와 충각단을 해치운 일, 그리고 이 곳 대사막 지역에서 진서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곳으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 더불어 아까 사마교 교주의 약점은 똥침이라는 사실까지… 다만, 한시랑 장군에게 내가 원하는 답은 듣지 못했다. 도천풍 단장이 전해받은 소식은 한시랑 장군의 부하 봉찬이 알고 있는데, 이번 전투로 인해 그 역시 환영초에 중독되어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겨우 잡은 진서연에 대한 단서인데 이 곳에서 또다시 발목이 묶이는 것 같아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은 상황, 그 지푸라기가 천천히 끌어올려진다고 투덜댈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니까.

일단 시간도 붕 뜨겠다, 사마교로 인해 고생하는 한시랑 장군과 주변인들이 안쓰럽기도 하겠다. 그런 연유로 나는 당분간 이 곳의 일을 돕기로 했다. 그러면서 느낀 건데, 여기서 처음 만난 한시랑 장군과 백무, 둘 사이의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둘이 서로 좋아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어째 애정표현이 전~혀 없다. 서로 대화할 때도 딱딱한 어투로, 밥 먹을 때도 따로, 심지어 환영초 해독을 도와준 백무에 대한 감사인사도 어물쩡 넘긴다. 어째 둘 다 쑥맥인 것 같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자칭 연애 고수라던 화중 사형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여러 가지 어드바이스를 해줬을 텐데, 아쉽다.

그나저나, 이 곳에 와서 처음 만나본 운국 조정의 부정부패는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다.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아랫물을 보면 윗물을 알 수 있다 했던가. 중앙군을 이끌고 있는 거만하에게 원군을 요청하러 갔더니, 이것저것 시켜먹고서는 꼴랑 한 명의 원군만을 소개시켜줬다. 아니, 그것도 사실 원군이 아니었다. 거만하가 소개시켜준 사람은 가출한 딸을 찾아나선 길동이라는 아저씨인데, 그 역시 거만하에게 딸을 찾아줄 것을 부탁하러 왔다가 이리저리 부려먹히는 중이라고 한다. 불쌍한 길동 아저씨, 얼마나 고생했으면 볼 살이 저렇게 빠졌어! 저런 사람에게 원군 역할을 해 달라는 건 벼룩에게 간을 달라는 것보다도 더 인면수심, 후안무치, 파렴치한, 아전인수격인 행위다.

“음… 이곳인가?”

길동과 헤어진 내 앞에는 커다란 동굴이 입을 쫙 벌리고 있다. 내가 이 곳으로 찾아온 이유는 사마교 놈들이 마을 처녀들을 죄다 납치해 갔기 때문에, 이를 구출하려는 목적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의문의 여자에게 해를 당한다는 점괘가 나왔다나? 뭐야, 그럼 동쪽에서 온 사람에게 해를 당한다고 나왔으면 동쪽 풍제국을 향해 전쟁이라도 일으키겠네? 것 참!

마을 총각들의 희망(?)인 마을 처녀들을 죄다 잡아간 곳 치고 이 곳의 경비는 꽤나 약했다. 아니, 나 혼자였으면 다소 버거웠을 지도 모른다. 비교적 약한 놈들이긴 하지만 쪽수가 워낙 많아야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쉽게 뚫고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내 옆에 있는 무서운 아줌마…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해라. 거의 다 온 것 같군.”

“네… 네!”

정정한다. 아줌마가 아니라 예쁜 누나다. 지금의 정정은 결코 무서워서가 아니다. 자세히 보면 차갑고 무서운 눈빛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예쁘기도 하고… 아무튼 이 누나는 자칭 낭인무사라고 하는 최진아 누나다. 이 곳에 보관되어 있는 의문의 비밀 장부를 빼앗으러 왔다고 하는데… 낭인무사 치고는 왠지 행동과 말투에 절도가 있는 것이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 아까도 동시에 덤벼드는 4인의 사마교도를 칼질 한 번으로 물리쳤으니까.

<마영강군이 사마교와 결탁했다. 무신전은 마영강에게 넘어갔다>

동굴 구석에서 찾아낸 비밀 장부에는 숫자가 아닌 수상쩍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실 운제국군의 비리를 몇 번 봐왔기에, 마영강이니 뭐니 하는 군대가 사마교와 결탁하고 있다는 소식은 크게 놀랄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무신전이니 뭐니 하는 건 관심 밖이고. 그렇지만 최진아라는 저 낭인 무사 누나는 그 장부를 읽고 표정이 굳어졌다. 안 그래도 무뚝뚝한 얼굴이 이제 숫제 귀신도 잡아먹을 냉기를 뿜어댄다. 장담컨대, 저 표정에서 나오는 냉기가 내 한빙면장보다 차가울 것이 틀림없다. 내 전재산과 오른손목을 걸지.

비밀장부를 손에 넣은 자칭 낭인무사 최진아 누나가 떠나가고, 주변을 둘러보니 개미집 같은 구조로 지어진 감옥이 보였다. 그 안에는 잡혀온 마을 처녀들이 앉아 있었다.

“자, 나오세요~”

“흑흑, 대협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자자,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지만 원하시는 분은 제게 간략한 사례라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볼에 뽀뽀 같은거 좋아하구요, 포옹 더욱 좋아합…”

휑~

세상 인심 하고는! 이게 뭐야, 환영초에 중독돼서 죽을 뻔 하던 거 살려줬더니 고맙다는 인사만 딸랑 하고 도망가? 아니, 영화 보면 미녀 구해준 주인공들에게는 키스 세례는 기본이요, 심하면 영화를 청소년이용불가로 만들기까지 하던데! 왜 나만~!

“헤헤~ 제법인데?”

“엉?”

“아, 오해하진 마. 난 여기 납치당한 게 아니거든? 사마교의 보물을 탈취하기 위해 위장 잠입해 있었을 뿐이야.”

허탈해하고 있는 차에 감옥 안쪽에서 누나… 라고 하기엔 약간 어려 보이는 여자애가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어째 무장 해제까지 당하고 환영초 연기 속에 누워 있던 몰골로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데… 어쨌든 자신의 이름을 소연화라고 밝힌 이 아이는 두더지를 연상케 하는 장갑과 고글을 끼고 있는 것이 얼마 전 목격한 길동 아저씨와 상당히 닮았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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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어린데도 대담한 옷을 입고 있는 소연화

“흥, 고맙다는 인사라도 듣고 싶은 거야? 꿈 깨셔~! 너 때문에 계획을 다 망쳤다구!”

“고맙다는 인사는 듣기보다 느끼고 싶은…”

그녀 역시 내 기대를 산산이 배신하고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아쉽다. 의외로 대담한 옷을 입고 있길래 약간은 기대했는데…

그리고 한시랑군 막사로 귀환한 내 귀에 봉찬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대사막을 찾게 된 이유, 그 단서를 쥐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음에도 사마교의 습격으로 환영초에 중독되어 무의식 중에 놓여 있던 한시랑의 부하 봉찬이 깨어났다는 것이다. 대사막에 들어온 이래 최고의 속도, 마치 초원을 뛰어다니며 치타를 잡아먹는 우사인 볼트를 연상시키는 빠르기로 나는 한시랑군 막사를 향해 달렸다.


“그러니까, 저기 북쪽 근처에서 탁기에 물든 시체가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어떤 여인이 사마교 교주를 찾고 있다는 서찰도…”

열흘 만에 깨어난 봉찬은 상당히 귀한 소식을 전해줬다. 사부님과 화중 사형을 죽인 탁기. 그 탁기에 물든 시체가 떼거지로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팔부기재에게 듣기로는, 탁기란 마황이 살고 있는 세계인 마계의 기운. 간혹 새어나오는 경우가 없진 않다. 그러나 이처럼 대량으로 탁기에 물든 시체가 발견된다면 이를 이용하는 존재가 관여했을 확률이 높다. 바로 진서연 같은 인물 말이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봉찬의 말대로 무녀의 암자 부근에는 탁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픽픽 죽어나가고 있었고, 거기서 나온 소환귀들이 다시 사람들을 덮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탁기의 정체는 진서연이 아니었다. 마계와 연결된 동굴을 봉인하고 있던 봉인석이 깨지면서 탁기가 동굴 바깥으로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자연재해를 살인사건이라고 착각해서 대규모 경찰병력을 동원한 꼴이다.

어쨌든, 무녀의 암자 건은 결국 허탕이었다. 무녀들을 도와 재봉인을 하자 새어나오던 탁기가 눈에 띄게 옅어져 버린 것이다. 이로써 이번 탁기 사건은 진서연과 연관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진서연이 관여했다면 이렇게 쉽게 처리하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낱 같은 단서를 i아 대사막까지 왔건만, 이제 그 단서마저도 끊겨 버린 것이다.

결국 방향을 잃은 나는 치유의 샘 근처에 있다는 한시랑 장군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근처에 있다 보면 다른 단서가 포착될 지도 모르고, 할 일도 없고… 그렇게 찾아간 한시랑군은 말 그대로 전쟁 전야였다.

“거기 창은 이쪽으로 날라라. 부관, 정찰조 2개 분대를 편성해 주변을 탐색하게.”

“한시랑 장군?”

“아, 크앙인가. 마침 잘 왔군.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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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보기에는 여자 꽤나 울릴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런 쑥맥이 따로 없다!

날 보고 눈빛을 빛내는 한시랑 장군. 그리고 그 옆에는… 뭔가에 중독되어 있는 것 같은 여자가 괴로워하며 누워 있었다.

“이 여인은 운국 조정에서 나온 감찰관이라고 하네. 세상을 어지럽히는 환영초의 생산지를 찾다가 이 곳까지 오게 되었지. 사마교도들의 습격으로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지만 심한 중독 상태에 빠졌네. 뭐, 그 덕분에 우리도 사마교의 본거지를 대충 추정할 수 있게 되었지.”

“고O요?”

“그래서 일단 감찰관의 호패를 이용해 원군을 요청해 놨네. 그 동안 원군 지원을 거절해오던 놈들도 감찰 호패 앞에서는 꼼짝 못하겠지. 그리고, 원군과 함께 총 공격을 가하기 전에 저 여인의 상관인 감찰대장을 구해 놓아야 하네.”

언제나 그렇듯이 임무(?)를 받아 한시랑 장군의 막사를 나서고 있는데, 쓰러져 있던 여인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진아… 최진아 님을 구해주세요…’

최진아? 얼마 전 사마교 습격 작전에서 우연히 만나 비밀 장부를 가지고 유유히 사라졌던 눈매 매서운 누나? 그 누나가 운국 조정에서 파견나온 감찰대장이었다고? 어쩐지 비밀 장부나 노리는 낭인무사 치고는 행동이 딱딱하다 했어.

결과적으로, 그 여인의 걱정은 기우였다. 내가 사마교 비밀 환영초밭에 도달했을 때, 감찰대장 최진아는 이미 주변 사마교도들을 싸그리 해치운 뒤였다. 예전에 낭인무사인 척 할 때도 엄청나게 강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예 최진아무쌍이다. 주변 사마교도들이 허수아비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오히려 이 곳의 교도들은 예전 외톨이 마을을 습격했던 놈들보다도 훨씬 강했다. 걔네가 그냥 커피였다면… 얘네는… 흠흠

“아, 자네로군. 저번에는 신세 많았네.”

최진아 누나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순간 깜짝 놀랐다. 예전과는 눈빛이 달라! 낭인무사 연기할 때는 그렇게 말투도 딱딱하고 눈빛도 매서웠는데, 지금은 군대용 말투이긴 하지만 꽤나 정감도 넘쳐! 무엇보다 눈빛이 상냥해졌어! 뭐야, 저 누나. 무섭… 다기보단 그냥 연기를 못 하는 거였나?

“사실 난 낭인무사가 아니라 운국 감찰대장이라네. 모종의 임무를 띄고 이 곳에 와 있지.”

“아, 그건 아까 치유의 샘에서 들었어요. 소현이라는 누나가…”

“그런가? 다행이군. 그렇다면 날 좀 도와주지 않겠나? 사례는 톡톡히 하겠네.”

“뭐, 할 일도 없었으니… 그렇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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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아 누나의 정체는 낭인무사가 아니라 운국 감찰대장

그렇게 나는 최진아 누나를 도와 환영초밭을 수색했다. 목표는 사마교와 내통하는 마영강군을 찾고, 거래 현장을 급습하는 것이다. 운이 따라줬는지 어렵지 않게 현장을 발견할 수 있었고, 사마교의 비밀장부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놈들도 참 어리숙한게, 이렇게 바깥이 떠들썩하면 이런 중요한 일(?)은 좀 미뤄도 되지 않나? 굳이 오늘 거래하려고 하니까 이렇게 걸리는 거라고.

“이제 일 다 끝나신 건가요?”

“아니, 끝이 아니네. 사실 환영초 밀반입 수사 외에도 태후마마로부터 명령받은 또 하나의 비밀 임무가 있기 때문이네.”

역시! 이정도의 캐릭터를 가진 누나가 단순한 경찰업무만 수행할 리가 없지! 진아 누나의 말에 의하면, 운국 황실에서는 옛날에 멸망한 나류국의 보물이었던 무신반, 그리고 무신의 비보가 어디 있는지 적힌 두루마리 무신전을 보관 중이었다고 한다. 무신반은 천하사절 중 하나인 무신의 후예를 찾을 수 있는 일종의 나침반이며, 무신전은 고대어로 쓰여 있는 문서다. 무신의 후예가 무신전에 적혀 있는 곳으로 가면 무신의 비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국 조정의 관료였던 귀환(현 사마교 교주)이 이 두 보물을 빼돌려 달아났다. 운국의 실정을 쥐고 있는 태후는 분노하여 최진아에게 보물 탈취 임무를 하달했고, 이에 사마교주의 행방을 찾아 이 곳까지 잠입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환영초 일은 겸사겸사고… 여기까지 듣고 있는데, 순간 동굴 밖에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한시랑군이 이곳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 같군. 이 틈을 타 사마교의 본거지를 찾도록 하지.”

“아, 저도 도울게요.”

그 와중 한시랑군이 환영초 재배지를 덮쳤다. 환영초 재배지를 새카맣게 뒤덮은 한시랑군. 그들에 의해 어렵지 않게 사마교의 본거지가 확인되었다. 나는 곧바로 본거지 내부로 잠입했다. 그 곳은 상당히 깊었다. 몇 층이나 내려갔을까… 바로 앞쪽에서 누군가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백무였다. 한시랑과는 달리 성군당의 독자적 루트로 이 곳을 찾아낸 백무는 망자들의 넋을 위로해주기 위해 홀로 남아 귀신들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홀로 싸우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내가 급히 도와주러 갔지만, 이미 백무는 등 뒤에서 가해진 치명타로 인해 바닥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배… 백무! 백무!!!”

그 순간, 뒤쪽에서 한시랑 장군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가로막는 소환귀들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백무를 안아드는 한시랑. 그러나 백무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언제나 늠름하던 한시랑 장군,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불쌍한 한 남자일 뿐이었다. 남자는 칼을 휘두를 줄만 알았고, 여자는 생과 사 사이에서 귀신들을 상대했다. 사람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데는 서로가 서툴렀다. 그들의 애달픈 사랑은 이렇게 비극을 맞이했다.

한시랑 장군이 백무의 시신을 수습하는 사이, 나는 교주를 찾아 더 아래로 내려갔다. 뭐, 보물을 찾아 간 것은 아니고, 사마교에 대한 악감정이 다분히 작용한 것이다. 한시랑 장군의 부탁을 외면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별 기대 없이 내려간 사마교 교주실. 그 곳에서는 상상도 못 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무신반을 내놔라.”

“어… 없다! 그런 건! 아니, 있어도 못… 크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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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서연, 예상치 못 한 곳에서 만났다!

얼마 전 나에게 혼쭐이 난 사마교 교주가 눈 앞에서 탁기에 물들어 미이라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여인은… 다름아닌 진. 서. 연! 드디어 사부님의 원수를 찾았다! 그러나 진서연을 향해 일장을 날리려는 순간, 그녀에게 입은 묵화의 상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서연의 기운에 반응하듯 묵화의 상처는 내 기혈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한 기세로 날뛰었고, 결국 난 원수를 눈앞에 둔 채 바닥에 엎드려 고통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빈정대는 놈은… 홍문파를 배신하고 사부, 사형, 사제들을 팔아넘긴 무성. 무성이었다.

“놀랍군, 네가 아직 살아있다니. 그렇지만 이것도 이제 끝이다. 잘 가라, 우리 막내!”

“살려둬라.”

진서연의 비웃음 가득한 시선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무성에게 나를 살려두라고 명령했다. 나는 진서연을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원수로 생각하는데, 진서연에게 나는 그저 흥미로운 대상일 뿐이라는 것인가? 치욕이 온 몸을 휘감았다. 진서연 일당은 이내 사마교주에게서 챙긴 무신반을 가지고 사라졌고, 나는 혼자 남겨져 한시랑군이 올 때 까지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다.


사마교는 괴멸되었지만, 그 와중에서 벌어진 백무의 죽음은 한시랑 장군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사모하던 여인의 죽음을 견디지 못한 한시랑 장군은 술에 절은 폐인이 되어버렸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한시랑 장군을 보며 나 역시 많은 것을 느꼈다. 홍문파를 멸문시킨 원수 진서연을 마침내 대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서연이 심어 놓은 묵화의 상처 때문에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힘없이 주저앉아야만 했던 현실이 너무나도 힘겨웠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열사지대에 있는 마을 유가촌에 뛰어난 명의 백운이 존재하며, 그를 통해서라면 진서연이 심어 놓은 묵화의 상처를 치료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이 들려왔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실력을 키워도 진서연을 처단할 수 없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곧바로 열사지대의 유가촌으로 향했다.

“아니, 왠 송장이 걸어다니지?”

“저… 저기…”

“이놈아! 몸이 그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둬? 에잉, 쯧쯧쯧…”

송장이라니? 여기서 말하는 송장은 택배송장 아니다. 절사명의라고 불리우는 백운은 나를 보자마자 꾸중을 내렸다. 내 몸 상태가 그렇게 심각했나? 독초거사도 그런 말 하던데… 백운이 지어준 약을 먹긴 했지만 결국 완전한 치료를 위해서는 상승무공을 익혀서 내공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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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분명 사람인데 시체가 걸어다닌다네?

“허, 네가 홍문파라고? 그럼 유성을 알겠구나. 유가촌을 떠나며 무성으로 이름을 바꾼 유성 말이다.”

“무… 무성이요?”

백운과의 대화 도중, 홍문파를 배신한 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곳 유가촌이 무성의 고향이었다는 것이다. 이윽고 배신자 무성의 집에서 무성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열사지대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마영강 장군이 혼사를 앞둔 무성의 여동생에게 눈독을 들였고, 이를 거부하던 무성의 여동생과 그 약혼자는 물론 그 가족 모두가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니 무공에 대해 그토록 집착을 보이던 무성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긴 했지만, 어찌됐든 사문을 배신한 행동은 용서할 수 없다.

아무튼 무성의 집에서도 진서연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홍문파를 떠난 이후 이 곳에 한 번도 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유가촌과의 인연을 끊은 듯 하다. 미령이라는 착한 아가씨도 기다리고 있건만…

그런데, 유가촌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년 전 처형되었다는 무성 부모의 시신은 마을 어귀에서 묻히지도 않은 채 백골이 되어 있었다. 풍장이라고 말하기에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은 곳이다. 주민들은 뭔가 풀이 죽어 있거나, 혹은 기세가 등등한 사람들로 양분되어 있다. 마영강군의 지배 하에 길들여진 탓이다. 마영강군에 잡혀가지 않기 위해서라면 이웃끼리도 서로 헐뜯고, 마영강군에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그들보다 잔학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마영강군에 끌려간 무성의 소꿉친구 미령은 단순히 내 손에 의해 구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는다. 단순히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자신들에게 피해가 올까 봐서 자신들보다 훨씬 어린 여자아이를 개 패듯이 구타한 것이다. 그 광경을 보던 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고, 살수를 뻗치려는 순간 백운 의원님의 호통으로 정신을 차렸다.

“심마에 빠지면 안돼! 넌 지금 묵화의 상처로 기혈이 엉망인 상태란 말이다! 우물물이라도 끼얹고 정신을 차리거라!”

그러나 미령 폭행 사건으로 마음 속에 생겨난 심마는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일그러져 보이는 풍경 속, 방금 미령을 구타하다 i겨난 유가촌 사람들이 나를 향해 비난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고개를 들어 그들의 얼굴을 봤다. 그 순간, 내 눈 앞에 비친 것은 유가촌 주민들이 아니라 그 날 홍문파에 나타났던 악귀들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죽은 사형들과 사저도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나 저들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환상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광경. 이것은 내 머릿 속에서 그려낸 환상일까? 아니면…

“뭘 망설이느냐. 저들이 지금 네 사부를 욕보이고 있지 않느냐?”

“진… 서연?”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러나 차마 대적할 수 없었던 진서연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 귀에 진서연의 속삭임이 들렸다.

“얼마나 추악한 모습들인가… 저들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

“죽여, 죽여라. 저 쓰레기들을 없애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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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 속에서도 나를 괴롭히는 진서연

진서연에 대한 분노와 유가촌 주민들에 대한 배신감. 이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나는 정신을 반쯤 놓은 채 내 앞을 가로막는 소환귀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한창 달아오른 묵화의 상처가 기승을 부렸으나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감기 전, 홍석근 사부님이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는 환영이 보였다. 아니, 지금껏 내가 본 모든 것이 환영이었다.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떠 보니 백운 의원님의 모습이 보였다. 듣자하니 결국 내가 심마에 빠져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소환귀로 보였던 존재들은 죄다 유가촌 마을 사람들이었고, 사형 사저들의 모습이나 진서연 등은 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던 악몽과 복수심의 파편이었다.

결국 나는 유가촌을 떠나 마영강군의 기지로 향했다. 끔찍한 학살을 저지른 내가 유가촌 사람들을 볼 낯도 없었거니와, 나를 향해 적의를 발산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도 보기 싫었다. 더군다나, 미령 폭행사건과 같은 일을 막기 위해서는 내가 마영강군에게 자진 출두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더 큰 학살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으하하하, 잘 왔다! 나약한 것들은 죽어도 싸지! 지금 나에겐 너 같은 인재가 필요해!”

“……”

유가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마영강군 막사로 갔더니, 의외의 환대를 받았다. 마영강의 첫인상은 매우 좋지 않았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사막의 열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노출되어 있는 부하들과는 달리 편안한 막사에서 미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호화로운 장신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꼴이라니. 거기다가, 자신의 부하들을 죽이고 자신이 관리하는 마을 사람들까지 학살한 인물을 이렇게 쉽게 용서하는 점만 봐도 공정함이나 청렴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 같았다. 애초에 마을 사람들 잡아다가 노역 시키고 수 틀리면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다는 말에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내게 자진해서 온 것을 보니 유가촌 사람들을 살리고 싶나 보군. 그렇다면 나를 도와 무신의 비보를 찾아라.”

역시나. 마영강에게는 결국 유가촌 사람들을 인질로 나를 부려먹으려는 꿍꿍이가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의 갑은 마영강이고, 나는 을이니까. 그가 원하는 무신의 비보는 천하사절 중 하나인 무신 천진권이 자신의 몸을 바쳐 마황과 함께 봉인되기 전, 자신의 신공을 담은 절세무공이라고 한다. 아마도 마영강은 그 무공을 손에 넣어 천하를 재패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봐도 황제가 될 그릇은 아닌데…

아무튼 마영강은 사마교 교주로부터 환영초 밀거래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무신전의 위치가 적힌 두루마리를 손에 넣었지만, 이미 누군가에 의해 무신전이 탈취당한 것을 알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에 나는 마영강의 지시에 따라 그가 고용했다는 현상금 사냥꾼을 만나 무신전을 가져간 범인(?)을 찾기 위해 보물사냥꾼 야영지로 향했다. 현상금 사냥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눈에 딱 띄는 사람을 찾으면 된다고 했는데, 지금 내 눈에는 한 사람밖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꼭 가려야 할 곳만 겨우 가린… 너무나도 파격적인 옷을 입은 여인이 바위 위에서 사막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아마도 저 여자가 강호 최고의 격사이자 현재 마영강에게 고용되어 있는 진소아…겠지?

“넌 누구냐!”

“아… 전 무신전을 찾는 일을 도우러…”

“흥, 마영강의 졸개인가. 그럼 잔말 말고 내 일이나 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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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저기, 그거 속옷 아닌가요? 미모의 여격사 진소아

결국 진소아의 페이스에 말려든 나는 무신전을 가져간 것이 황풍단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현재 황풍단은 황사단과 풍사단 두 개로 갈라져 있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무신전 절반을 차지하려고 피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결국 양패구상 중에 있던 황풍단은 나와 진소아의 침입을 막지 못했고, 결국 손쉽게 무신전이 보관되어 있는 보물상자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흠, 우리가 한 발 늦었군.”

“이건…연꽃?”

풍사굴과 황사굴(두 동굴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깊은 곳에서 찾아낸 보물상자에는 무신전이 아니라 연꽃잎만이 팔랑거리며 우리를 맞이했다. 진소아의 말을 들어보니 연꽃은 녹림도의 소두령 소연화의 상징이라고 한다. 예전 사마교 소굴에서 구해준 바로 그녀 말이다. 그리고… 난 바로 아까 그녀를 마주친 적이 있다. 이 곳 황사굴로 들어오던 와중, 뭔가 서둘러 뛰쳐나가는 모습이었다. 뭘 손에 넣었다고 좋아라 하드만, 그게 그거였나? 결국 땅에 묻혀 있던 무신전은 마영강이 캐내다가 황풍단에게 도둑맞고, 그걸 다시 소연화에게 도둑맞은 것이다.

아, 전투를 벌이던 도중 진소아와의 관계도 상당히 개선되었다. 내가 쓰는 홍문파의 무공을 진소아가 알아본 것이다. 알고 보니 진소아는 소싯적(지금도 은데?) 홍석근 사부님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다고 한다. 내 사연을 들은 진소아는 나를 마영강의 수하라고 오해한 데서 비롯된 은근한 적개심을 버리고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해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옷이나 제대로 입고 다녔으면 좋겠다만… 덥다는데 어쩔 거야?

나는 진소아와 헤어져 소연화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그 와중, 그믐달 호수에서 우연히 에전에 만났던 길동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사실 소연화는 길동 아저씨의 딸이 아니었고, 녹림도 두목의 딸이었다. 불쌍한 길동 아저씨는 혼자 뛰쳐나간 소연화를 찾기 위해 이 곳까지 왔지만, 결국 땀을 너무 흘려 탈진한 채 쓰러져 있었다는 것이다. 길동은 그 와중에도 소연화의 안전을 부탁하며 자신과 소연화가 나눠가지고 있던 무신전의 반쪽을 내게 건넸다. 뭔가 불쌍해도 한참 불쌍한 아저씨다.

결국 나는 토문객잔으로 향했다. 소연화가 그 곳에 묵고 있기 때문이다. 무신전의 나머지 반쪽을 찾아야 하기도 하고 길동 아저씨의 부탁도 있는 데다, 진소아도 그 곳에 머물러 있다.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토문객잔은 여행자들의 오아시스 같은 곳으로, 최고의 시설과 요리, 서비스로 유명한 객잔이다.

처음 찾아간 토문객잔. 그 안에서는 엄청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두 명의 여자가 죽기살기로 싸우며 객잔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 중 한 명이 내가 알고 있는, 진소아였던 것이다. 나머지 한 명은 잘 모르겠지만, 주변의 말을 듣자하니 혈풍사막을 주름잡는 오락당 당주인 당여월이라고 한다. 둘 다 치명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무림인인데다 성격이 정반대라 항상 저렇게 싸우곤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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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막 한가운데서 객잔을 운영하는 실력자 예하랑

“그만, 두 분. 마음 가라앉히세요. 두 분을 위해 따로 별실을 준비해뒀으니 안으로 드시지요. 객잔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지 마시구요!”

싸움이 절정에 달하며 슬슬 객잔에서 객잔의 모습이 사라져갈 무렵, 둘 사이에 나타난 여인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둘의 싸움을 한 번에 진정시켰다. 그녀가 나타남과 동시에 뒤쪽 여자애들에게서 들려 온 비명(환호?) 소리로 인해 그녀가 이 곳의 주인인 예하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험한 곳에서 객잔을 운영할 만큼의 무공 실력도 함께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저 둘의 싸움을 말리려면 그 정도는 돼야지.

예하랑의 능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연화를 만나 어찌저찌 동업을 하기로 약속하고 무신전을 맞춰 보았지만 고대 언어로 쓰여져 있어 해석조차 못 하던 터에 예하랑의 도움을 받은 것. 무공 뛰어나, 미모도 뛰어나, 거대 객잔까지 운영해, 거기다 고대어에도 능통하다니. 이 누나, 무섭다. 어쨌든, 예하랑의 도움으로 인해 해석한 무신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무신삼원로는 나류국 대장군인 천진권에게 신공을 부여하고 마황과 싸우라는 신탁을 내렸다. 무신은 자기가 죽기 전, 나류국왕의 무덤에 신공을 담은 무신의 비보를 넣어두겠다고 말했다. 무신이 죽은 후 나류국 왕릉은 무신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무신릉으로 가려는 자는 나류사원에 있는 무신삼원로 백운선사를 먼저 만나라>

음… 결론은 천진권에게 무신의 신공을 부여한 게 무신삼원로라는 신선(?)들이고, 무신의 비보를 얻기 위해서는 나류사원에 있는 백운선사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나류사원은 과거 나류국의 병사였던 수많은 망령들이 가득한 곳으로, 함부로 들어갈 곳이 못 된다. 이 말을 들은 동업자(?) 소연화는 방금 아래층에서 진소아와 싸우던 오락당 당주 당여월에게 미끼를 던진다. 무신의 비보가 나류사원에 있다는 애기를 흘려 오락당이 대신 나류사원의 망령들과 싸우게 하고, 그 틈을 타 우리가 무신의 비보를 꿀꺽하자는 것이다. 내 참, 어린 여자애 주제에 잔머리가… 훌륭하다!

결국 소연화의 계획은 보기좋게 성공했다. ‘우리가 누구! 오락당!’ 을 외치며 우렁차게 나류사원에 입성한 당여월과 오락당 당원들이 나류사원의 망령들과 싸우는 사이, 나와 소연화는 옆길을 통해 살금살금 나류사원 깊은 곳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당여월의 라이벌(?)인 진소아의 어드바이스도 한 몫을 했다. 정말 견원지간이 아닐 수 없다. 진소아가 개, 당여월이 고양이. 그러자 저 멀리 한 노인이 나타났다. 저 노인이 바로 무신전에 쓰여 있던 무신삼원로 중 한 명인 백운선사… 아니, 유가촌 백운 의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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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쾌 상쾌 통쾌한 오락당과 그 당주 당여월

“허허허, 그래. 내가 바로 백운선사다. 유가촌에서는 사정이 있어 정체를 밝힐 수 없었지.”

“아… 그나저나, 무신의 비보는 어디 있죠?”

“네가 무신의 비보를 찾는 이유는 유가촌 사람들을 위해서냐? 아니면… 그를 이용해 묵화의 상처를 치유하고 진서연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냐?”

“……”

사실 평범한(?) 무인이었던 천진권을 천하사절 중 하나인 무신으로 만들었다는 무신의 비보에 대해 들었을 때, 그 힘에 대한 열망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다. 시작은 유가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마영강의 의뢰를 따른 것이었지만, 무신의 비보라는 엄청난 것을 두고 욕심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 때문에 나는 백운선사의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쯧쯧쯧… 그러나 어쩌겠느냐. 선택은 너의 몫인 것을. 무신의 비보를 찾기 전, 네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길 바란다.”

“네…”

“그럼 무신의 비보에 대한 힌트를 주마.”

<쌍조를 얻은 자가 무신의 날개를 달고 무신이 잠든 곳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하지만 무신의 피만이 그 날개를 숨쉬게 하리라…>

백운선사가 전해준 무신의 비보의 행방은 다음과 같다. 뭔가 점점 더 수수께끼처럼 꼬여 가는 느낌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소연화 역시 고개를 까딱이더니 뭔가 알아봐야겠다고 토문객잔으로 향했다. 나도 더 이상 여기 있어봐야 뭔가 나올 것 같진 않으니… 슬슬 토문객잔으로 돌아가 봐야겠다. 그나저나, 저기서 아직도 싸우고 있는 당여월과 오락당은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백운선사가 전해준 수수께끼 같은 말은 능력자 예하랑조차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난해했다. 뭔가 지명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쌍조의 날개? 무신이 잠든 곳? 그게 어디야? 골머리만 아프다. 진소아가 나류국에 대해서는 석굴의 무영단이라는 비밀 집단이 잘 알고 있을 거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무영단 역시 쌍조의 날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끅! 어서 오세요~ 헤헤~”

“엥?”

“왜 이렇게 늦었어요~ 기다리다 소아가 먼저 시작했어요~ 끅!”

“괘… 괜찮아요?”

무영단에서 허탕을 치고 토문객잔으로 돌아오니 진소아 누나가 혼자 남아 술을 마시고 있었… 는데 저 누나 왜 저래? 평소에는 옷이나 훌러덩 훌러덩덩 벗고 다니면서도 어떻게든 무게 잡으려고 하더니, 술 한 잔 마셨다고 급 귀여워졌다. 술 마시면 귀여워진다니, 뭔가 큰 비밀을 손에 넣은 기분이다. 그나저나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 계산서가 길어…… 응? 이건 계산서가 아니잖아? 마치 계산서마냥 진소아의 술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는 예하랑의 호출 편지였다. 안 그래도 예하랑에게 쌍조의 날개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했는데, 설마 뭔가를 알아낸 건가?

예하랑의 방으로 가 보니, 왠지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저쪽은 소연화고… 이쪽은… 길동 아저씨잖아?

“아이고~ 대협. 우리 소연화 아씨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요~”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요~ 아씨를 도와드리려 왔죠. 이래서! 아씨는 제가 없으면 안 된다~ 이겁니다요!”

“어? 길동, 뭔가 알고 있어? 응? 응?”

“케… 켁켁! 그러니까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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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연화 아씨가 난감할 땐 언제든 나타나는 제가 바로 길동입니다요

백운선사가 말한 쌍조란 은조패와 금조패를 말하는 것이며, 무신의 날개란 천조를 가리킨다. 은조와 금조, 천조는 무신의 영수인데, 무신이 죽고 나서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즉, 금조와 은조를 얻으면 천조를 타고 무신릉으로 갈 수 있으며, 무신의 피를 무신릉에 흘려넣으면 비로소 무신의 비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뭐가 이리 복잡해?

 유서를 통해 은조패의 행방을 알게 되었고, 그림자 납골당에서 은사조장 은학을 처치하고 은조패를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납골당 안에서 만난 건, 도기방 총타 위에서 영아초를 재배하던 술주정뱅이 적운이었다. 백운선사와 마찬가지로 무신삼원로 중의 한 명이었던 적운선사는, 나에게 홍문신공이라는 훌륭한 무공을 전수받고 또다시 무신의 비보를 노리는 것이 욕심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백운선사에 이은 두 번째 질문. 과연 내가 무신의 비보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러나 태평하게 고민할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은조패를 손에 넣었다고 소연화에게 말하기 위해 토문객잔에 들어선 순간,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원수 중 하나인 무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무성과 맞서 싸우는 도중, 토문객잔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항상 등장하는 예하랑이 나타나 무성을 공격하고, 결국 무성은 소연화를 납치하지 못한 채 달아난다. 젠장. 뭔 수를 썼길래 저렇게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거야?

이상한 점은 무성이 떨어뜨린 무신반의 방향이었다. 무신의 후예를 가르켜야 할 무신반이 소연화 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소연화가 무신의 후예? 아니면, 단지 무신의 후예가 있는 방향에 우연히 소연화가 서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예하랑은 전자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소연화를 보호해 주겠다고 자청했으니 말이다. 현재 살아있는 무신의 후예라면 예사랑의 딸이자 예하랑이 목숨을 바쳐 지켜내야 할 조카밖에 없으니,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잡아보려는 거겠지?

아무튼, 이제 금조패만 남았다. 또다시 길동의 어드바이스에 의하면, 금조패는 수인족인 회랑족이 제작했다고 한다. 망설일 틈도 없이 나는 회랑족 마을로 향했다. 인간을 경게하는 회랑족인지라 처음엔 친해지기가 약간 껄끄러웠지만, 족장 휘고와 선인인 격물선사는 다행히 나를 따뜻하게(비교적) 맞아주었다. 나는 일단 금조패보다 무신의 후에를 먼저 찾아야 한다는 격물선사의 지시대로 재료를 모아 새로운 무신반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원조 무신반은 사마교주가 가지고 있다가 진서연에게 빼앗겼으니, 새롭게 만드는 것 밖에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 새로운 무신반이 무사히 제작되긴 했는데… 우째 바늘이 부르르 떨면서 두 곳을 동시에 가르키고 있는 거지?

“에잉… 이 바늘이 미쳤나?”

“음… 오랜만에 만드셔서 실수하신 것 아닌가요?”

“그럴 리가! 어… 어엇!”

쩌정

두 곳을 향해 요동치던 무신반의 바늘이 흔들림을 이기지 못하고 깨져버렸다. 무신반이 가리키던 곳은 마영강군 경비대와 오락당 암굴. 과연 이 둘 중 어느 곳에 무신의 후예가 있는 것일까? 그러던 중, 진소아 누나에게서 소연화가 마영강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만, 무신반이 가리키던 한 지점이 분명 마영강군 경비대… 였지?

일단 소연화는 진소아 누나에게 맡기고, 나는 오락당 암굴을 향해 갔다. 그 곳 역시 무신반이 가리키던 지점이었기 때문인데다, 마침 길동이 그 곳에 잡혀 있다는 애기까지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달한 오락당 암굴에서는 오락당 당주 당여월과 길동이 뭔가 거래를 하고 있었다. 소연화를 구해준다면 은조패를 넘기겠다는 내용이었다. 길동의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은조패나 무신의 비보 따위가 아닌 소연화일 테니까…

어쨌든, 길동의 말대로 나와 당여월은 소연화를 구하기 위해 도굴암시장에 있는 마영강에게 향했다. 그러나 눈치빠른 마영강은 이미 소연화에게서 은조패를 빼앗고 다른 곳을 향해 이송시켜 놓았다. 서둘러 소연화를 구출하고 은조패를 빼앗아야 하는데…

“서… 서둘러 소연화 아씨를 구해주십시오. 진서연의 부하가 아가씨를 잡아가려고 합니다요~ 어서요!”

“그래. 빨리 구해야… 가만, 지금 진서연이라고 했나?”

이상한 일이었다. 단순히 소연화의 심복일 뿐인 길동이 진서연을 알고 있다니? 순간 길동에 대한 의구심이 솟아올랐다. 그 동안 너무나도 어리숙한 모습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는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니?

“멍청아, 빨리 가지 못 해! 소연화가 진서연의 손에 넘어가면 끝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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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무서워진 길동, 뭔가 비밀이 있는 캐릭터 같다

“아, 알았어.”

갑자기 호통을 치는 길동. 나는 깜짝 놀라 길동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일단 지금은 소연화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겠지. 그나저나 길동, 저 인간도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정체가 뭘까? 그러나, 의문을 품을 틈도 없이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길동의 지시대로 소연화를 구하기 위해 있는 힘껏 달리고 있으니, 저 멀리 소연화를 들쳐업고 가는 한 남자가 보였다. 지난 번, 토문객잔에서 예하랑에게 당해 도망쳤던 배신자 무성이다.

“무!! 성!!”

“어이쿠, 이게 누구야? 우리 귀여운 막내 제자 아니신가?”

“닥치고 소연화를 내려놔! 그리고, 널 없애버리겠다!”

“응? 하하하하! 사부를 닮아 멍청하긴 하군. 넌 아직도 이 아이가 누군지 모르는 거냐?”

“…뭐?”

“소연화, 이 아이가 바로 무신의 후예다! 무신의 비보를 얻기 위한 필수 인물이지!”

“!!”

그렇다. 무신반이 가리키던 인물은 바로 소연화였다. 더불어 예하랑의 조카이자 무신 천진권의 마지막 후예이기도 했다. 그래서 진서연과 무성이 소연화를 납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이고. 소연화를 되찾으려면 마영강이 빼앗아간 은조패와 아직 찾지 못 한 금조패를 가지고 무신의 날개로 오라는 말을 남긴 무성은 예전 토문객잔에서 그랬다시피 공간이동을 통해 사라졌다. 저 수법, 대체 뭐야?

이어진 상황은 난장판, 그 자체였다. 마영강이 소연화에게서 빼앗은 은조패는 오락당 당주 당여월이 훔쳐 달아났고, 진소아는 그 뒤를 i아 사라졌다. 오락당은 당여월의 부하 탕홍이라는 놈의 손에 의해 분열되었고, 토문객잔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진소아와 예전에 약속해 두었던 집결장소인 큰뼈 초소로 향했다.

이후 서로 싸우다 골면족에게 붙잡힌 진소아와 당여월을 구출하고, 무영단의 금사조장 금녕을 해치워 금조패를 획득했다. 은조패 획득 시와 같이, 이번에도 무신삼원로 중 한 명이 등장했는데, 그의 정체는 외톨이 마을에서 술에 절어 페인이 되어가는 한시랑 장군 옆에서 내게 적운선사의 위치를 알려 준 거지 노인 청운이었다. 그는 이제 두 개의 패를 다 모았으니 무신의 후예가 잡혀 있는 무신의 날개로 가자고 한다. 무신의 날개… 라는 지명이 실제로 있었다니!

은조패와 금조패를 들고 예하랑, 진소아, 당여월과 헤어져 무신의 날개로 향했다. 무신의 날개는 거대한 새 모양의 석상이 서 있는 유적지였고, 그 곳 중앙에는 초점 없는 눈의 소연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조금 과하게 쾌활했던 소연화의 모습이 아닌, 뭔가 세뇌된 듯한 표정. 왠지 꺼림칙하다. 그녀는 나에게 은조패와 금조패를 달라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무성의 모습은 없었지만, 솔직히 지금 상태의 그녀는 약간 불안하다. 그렇다 해도 여기까지 와서 무신의 후예인 소연화의 도움 없이 무신의 비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나는 패들을 넘겼다.

은조패와 금조패를 건네받은 소연화는 나에게 건네받은 패들을 석상에 끼웠다. 그 순간, 수백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을 것 같은 거대한 새 석상의 눈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새, 신조가 곧 날아올랐다. <무신의 날개가 무신이 잠든 곳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라는 백운선사의 말이 떠올랐다. 나와 소연화는 신조의 등에 올라타 하늘로 이륙했다. 무신릉을 향해서… 그 때는 미처 몰랐지만, 배신자 무성 역시 새의 꼬리에 매달려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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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채... 아니, 산채만한 새가 움직이는 걸 봤는가?

쿠오오오

분명 새가 날아가는 것이건만, 워낙 거대한 물체이기에 무슨 운석 낙하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신조는 인적이 드문 산 속 공터의 유적 앞에 이르렀다. 우리를 내려준 신조는 다시 아까의 석상 형태로 돌아갔다. 그리고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무신릉의 실체가 드러났다. 세월의 풍파를 겪었지만 뭔가 웅대한 기운이 느껴지는 유적. 그 무신릉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고 있을 때…

“어?”

갑자기 복부에 커다란 통증이 느껴졌다. 아래를 쳐다 보니 내 조그마한 배를 단검 하나가 꿰뚫고 있었다. 칼날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탁기에 물든 검 같다. 검붉은 피가 울컥대며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뒤늦게 척추를 관통하는 통증이 닥쳐왔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바닥을 구르며 위를 바라보니 아까부터 낌새가 이상하던 소연화가 눈에서 하얀 빛을 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동안 수고했다, 막내야.”

“크… 크윽…”

소연화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이건만, 들려오는 음성은 배신자 무성의 목소리였다. 이윽고 소연화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무성. 무성! 머릿 속 분노는 피를 끓게 할 정도로 뜨거웠지만, 몸은 점점 차가워져 갔다. 문득 바닥을 보니 주변 바닥 1미터 가량이 내 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신이 아득하고 통증마저 점차 희미해져 갔다. 무성의 비웃음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이대로 끝인건가…

<크앙의 ‘블소’ 스토리, 完 ~그동안 사랑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안 돼!”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진서연도 아니고 저깟 배신자… 도 아니고 그 놈이 조정하는 꼭두각시 소연화에게 죽다니! 그 순간, 어디선가 ‘눈을 뜨세요, 용사여’ 비스무레한 소리와 함께 몸에 온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살포시 눈을 떠 보니 뭔가 선녀 같은 여인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왠지 홍문파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들리던 목소리하고 비슷한데, 착각인가?

“정신이 들었나?”

잉? 이게 왠 할아버지 목소리? 그새 정신을 다시 잃었나 보다. 눈을 떠 보니 앞서 차례차례 만났던 무신삼원로가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안 죽었네? 어느새 배를 꿰뚫고 있던 단검도 사라져 있고, 상처까지 다 나아 있었다. 아무래도 멍한 표정의 저 무신삼원로 할아버지들이 아니라 아까 얼핏 본 선녀가 나를 구해준 듯 한데…

그러나 몸을 추스릴 새도 없었다. 무신의 비보가 무성에게 넘어가면 소연화가 탁기로 인해 마물이 되어버린다는 말 때문이었다. 왠지 요즘들어 고민할 여유도, 의심할 여유도, 조금 쉴 여유도 없이 혹사당하는 듯한 느낌이다. 어쨌든, 무신삼원로와 함께 무신릉으로 들어간 나는 얼마 안 가 벚꽃과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정원에 도달했다. 천정이 돌로 되어 있는 걸 보아하니 지하인 것은 확실한데… 그러나 화원 가운데를 보니 소연화를 이용해 무신의 비보를 손에 넣기 일보직전인 무성의 모습이 있었다. 풍경을 감상할 새도 없이(제발 좀!) 앞을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현실에 약간 서글픔이 느껴졌다.

비보를 손에 넣으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를 받은 무성은 있는 힘을 다해 나에게 덤볐다. 배신자와의 결투. 홍문파에서 내 팔을 서슴없이 꺾어버리던 무성 사형과 싸운다는 사실에 약간 긴장이 되었지만, 그 걱정은 곧 나의 기우였음이 확인되었다. 홍문파의 비극 이후 몇 달, 짧은 시간이었지만 끊임없이 강함을 추구해 왔던 나와 진서연의 밑에서 음모나 꾸며가며 세월을 허비한 무성의 실력은 엇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한 수 위의 고수들과 싸워가며 여러 번의 기연을 겪은 내가 실전 경험에서는 더 뛰어났다. 머지않아 무성은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드디어 사부님의 원수를 갚을 차례다.

“사, 살려줘! 으아아아아!”

“후… 명계에 가면 사부님과 사형, 사제들에게 용서를 빌길 바래요.”

“막내, 막내야! 나다, 네 사형 무성이다. 제발, 제발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옛 정? 지금 엣 정이라고 했나요? 그렇게 정이 많은 사람이 사문 전체를 몰살시켰단 말이야? 너 같은 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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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너 같은 놈은...

내 손에 쥐고 있는 기공패에서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빨갛다 못해 시퍼런 빛으로 변해 가는 열화장, 이를 저 배신자 무성 놈의 목에 처박으면 사부님과 사형, 사저들의 원수를 갚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럴 때 유가촌 주민들의 모습이 보이는 거지? 멈칫할 때가 아닌데…

“그만 둬라. 복수도 좋지만 더 이상 피를 보는 것은 위험하다.”

“…”

순간 나타난 무신삼원로. 그 틈을 타 무성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공간이동을 통해 빠져나갔다. 사실 잠시의 망설임 역시 내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굳이 방해를 받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내 마음 속 약간의 나약함, 그리고 한때 홍문파에서 보냈던 즐거운 시간 등이 겹치면서 잠깐의 머뭇거림을 발생시킨 것이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 놓치다니…

“그나저나 소연화 이 아이는 너무나도 탁기에 깊이 물들었구나…”

“… 맞다! 소연화!”

무성에게 조종당한 시간이 조금 길어서였을까, 소연화의 몸에서는 탁기가 계속해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무신삼원로의 말에 따르면 무신의 비보를 소연화에게 사용한다면 어떻게든 탁기를 몰아낼 수 있지만, 이대로라면 탁기에 물들어 죽게 된다고 한다. 다만, 내가 겨우 찾아낸 무신의 비보이므로 복수를 위해 날 위해 쓴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단다. 왠지 은연중에 소연화를 구하라는 압박을 주는 듯 하다.

그러나, 난 무신삼원로와의 말과는 별개로 소연화를 살리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날 가르치다 죽어간 화중 사형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중 사형도 지금의 소연화와 같이 온 몸에서 탁기를 흘리다 죽어갔다. 내 눈 앞에서 이런 비극을 또 겪고 싶진 않았다. 아니, 지금 소연화를 살리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오랜 고생 끝에 찾아낸 무신의 비보. 천하를 호령할 수 있을 만한 내공과 초식은 결국 소연화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후회는 없었다. 무신삼원로는 ‘협과 의를 실천하는 길, 그것이 바로 홍석근 사부가 말하던 홍문의 길이다’ 라며 대견해 했지만, 사실 아까운 생각이 크게 들진 않았다. 무성을 꺾은 직후 나 자신의 노력으로도 어느 정도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무신의 비보는 원래 주인인 소연화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신의 비보가 사라지자 차츰 붕괴되어 가는 무신릉. 그 곳에 남아 하늘로 승천하겠다는 무심삼원로를 남겨둔 채 나와 소연화는 방금 전 떠나왔던 무신의 날개로 향했다. 집채만큼 큰 새를 타고…

이윽고 도착한 무신의 날개, 그런데 그 곳에는 엄청나게 지쳐 보이는 진소아, 당여월, 예하랑의 3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주변에는 마영강군의 것으로 보이는 무기와 옷가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희한한 것은 주변에 시체 하나 널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저기 보이는 내 인생 가장 강한 여자 Best 5 안의 세 누나(나머지 2인은 진서연과 유란)가 저 정도로 지쳤다면, 주변엔 그냥 수백 단위의 적군이 널부러져 있어야 정상일텐데 말이다.

이윽고 진소아 누나에게 들은 이 곳에서 있었던 일은 충격적이었다. 우리를 뒤쫓아 온 마영강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 상처를 입은 무성(나에게 패한)이 이 곳으로 순간이동해 왔고, 뒤이어 검은 깃털 옷을 입은 여인, 진서연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진서연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기며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없앴고, 온갖 행패를 다 부리며 설쳐대던 마영강 역시 진서연의 손짓 한 방에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무성은 진서연에게 이것저것 변명하더니 곧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고. 아마도 진서연의 허락 없이 무신반을 훔쳐 갔다가 무신의 비보도 얻지 못하고 i겨온 데에 따른 벌을 받는 듯 하다. 쌤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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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사욕이나 챙기려 드는 무능한 마영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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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이지만 그 강함의 끝을 알 수 없는 진서연의 전투
결과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니 마영강군의 전멸

어찌됐든, 진서연의 공격에서 겨우 몸을 피한 3인방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마영강과 그 수뇌부는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몰살당했다는 것이 결론이다. 진서연을 놓친 것은 아쉽지만 묵화의 상처도 이겨내지 못한 내가 덤빈다고 해도 사마교 본산지에서의 그 꼴밖에 나지 않을테고… 일단은 상승무공을 익혀 묵화의 상처를 이겨내는 일이 급하다. 그런데, 나름 기대했던 무신의 비보가 없어진 지금… 어디로 가야 상승무공을 익힐 수 있으려나…?

“아, 소협. 마침 잘 오셨습니다.”

술 먹으면 귀여워지는 ‘술귀’ 진소아 누나의 모습이라도 보려고 토문객잔을 방문했는데, 어째 낮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같은 린족 남자애 목소리임에도 유난히 체면을 차리는 이 말투는…?

“어라? 팔부기재에서 팀의 점술을 책임지신다는… 감마등 님?”

“하하, 기억하시는군요. 소협께 드릴 말씀이 있어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이 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흑풍술사 감마등이 꺼낸 말은 다음과 같았다. 감마등은 팔부기재가 찾아 헤매던 천하사절 중 환귀 익산운이 수월평원에 나타난다는 점괘를 냈다. 하지만 이미 팔부기재는 감마등의 점괘를 잘 믿지 않았고, 그마저도 자신들의 문파와 세력의 일에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 묵화의 상처를 다스릴 만한 그릇을 찾고 있는 나에게 환귀 익산운을 소개해… 이게 말이 소개지 그냥 나한테 귀찮은 일 시키는 거잖아!

그래도, 내 사부님과 같은 천하사절인 익산운이라면 묵화의 상처를 낫게 할 만한 비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 감마등은 머나먼 수월평원, 풍제국의 영토까지 가는 용맥을 뚫어 놓은 상태였다. 솔직히 팔부기재라고 해도 잘 믿음이 안 가는 건 사실이지만, 용맥 정도는 맞게 뚫어 놨겠지? 감마등의 용맥에 몸을 실은 나는 환귀 익산운이 있다는 수월평원을 향해 발길을 내딛었다.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욱 험난한 모험, 그리고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만남이라는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 소연화를 따라다니는 길동의 정체는 바로 무신 천진권이었다


“아이고… 어지러워~”

감마등이 뚫어 놓은 용맥을 타다 보니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예전에 제룡림에서 대사막으로 넘어올 때도 긴 용맥을 타고 왔지만, 지금처럼 어지럽게 꼬여 있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용맥이란 해당 목적지까지 장애물을 피해 최단거리로 이동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째 이번 용맥은 360도 회전을 2초에 한번씩 하는 게 영 이상하다. 아이고~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 모를 어지러움이 끝나고, 내가 도착한 곳은… 예전 대나무 마을에서의 전투보다도, 외톨이 마을에서의 전투보다도 더욱 심각한 전장이었다. 왜 난 항상 장거리 이동만 하면 싸우는 곳에 떨어질까? 심각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이번 전장이 양 세력 간의 다툼이라기 보다는 한 쪽의 일방적인 학살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나와 같이 키가 작고 동물 귀를 단 린족들이 이리저리 도망치고 있었고,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었다. 몇몇 린족들이 기공을 통해 반격을 해 보았지만, 결국 하나둘 병사들의 칼 앞에 쓰러져갔다.

죽어가는 사람은 민간인, 죽이는 사람은 군인. 누가 봐도 선악의 구분은 자명했다. 린족들을 도와 군인들을 처치하고 있는데, 마을의 주술사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랜다. 용맥이 꼬여 16년 전의 과거로 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엔 사부님도 살아 있고, 무성도 어린 아이란 말인가? 그러나 곧 생각을 접었다. 내가 과거를 바꾼다고 해도 내가 온 현재는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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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왠지 모르게 홍 사부를 닮은 영린촌 촌장 유태월

결국 나는 마을에서 살아남은 린족들과 함께 영린봉의 봉우리로 올랐다. 내가 살던 세계로 가기 위한 용맥을 열기 위해서. 그리고, 용맥이 거의 다 열린 순간, 영린봉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내 가슴에 있던 묵화의 상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기운은… 설마?

“음? 어째서 네놈에게 묵화의 상처가 있는 거지? 난 너를 처음 보는데?”

“큭… 지, 진…서…연…?”

“그렇군. 너는 미래에서 온, 먼 훗날 나와 만날 운명을 가진 자로군. 후후, 재미있는데?”

영린봉에 나타난 진서연은 한 눈에 나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16년 전임에도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똑 같은 것은 건족의 특성이라고 치더라도, 그 잔혹함과 냉정함 또한 전혀 다르지 않았다. 비록 지금의 진서연은 내 사부를 해치지 않은 상태이지만, 이 곳에 모인 영린족 주민들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해치우는 모습은 마치 악귀 같았다.

“어디, 하늘이 대체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도록 하겠다.”

예전… 아니 미래에서처럼, 진서연은 이번에도 나를 순순히 놔 주었다. 홍문파의 일까지 합하면 벌써 세 번째, 충각단 남해함대지부에서 유란에게 죽을 뻔 한 것까지 합하면 네 번이나 나를 죽이지 않고 놓아준 것이다. 마치 곤충채집 중인 아이의 변덕으로 간신히 살아난 벌레 같은 느낌. 그러나 실제로 진서연과 나의 실력 차는 그 정도일 지도 모른다. 일단 지금은 현실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환귀 익산운을 만나 묵화의 상처를 없애고, 실력을 키워 진서연을 없애자.

나는 비틀거리며 영린족 주술사들이 목숨을 바쳐 바로잡은 용맥 위로 올라섰다. 용맥의 기운으로 몸이 두둥실 떠오름과 동시에 눈이 감겼다. 눈을 감으며 난 계속해서 복수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 때는 미처 몰랐다. 이 복수를 위한 집착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게 될 것인지에 대해…

정신을 차려 보니 16년 전 영린족 마을에서 만났던 촌장이 나를 반겼다. 묘하게 사부님을 닮은 터라 잘 기억하고 있다. 촌장이 나를 보고 16년 전 우리 마을을 구해 주셨던 대협과 닮았다는 얘기를 꺼내는 것으로 보아 이번엔 제대로 된 시간대로 돌아왔나 보다. 그나저나, 용맥의 뒤틀림을 이용해 과거, 혹은 미래로 갈 수 있다는 것은 꽤나 신기한데? 특허라도 내 봐?

16년 전에도 그랬지만, 영린족의 현실은 지금도 그닥 좋지만은 않았다. 풍제국군의 습격과 지배로 인해 이미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져 있었고, 제국군의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영석 광산에 끌려가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하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영린족 마을을 살펴본 결과 일부는 이러한 삶에 적응했고, 일부는 대항을 진행 중이며, 극히 일부는 그러한 일들을 제국군에게 일러바치는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16년 전 과거에서 내가 구해 준 아기 일심이가 어엿한 소년이 되어 마을의 대소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

다행히 영린촌에서는 내가 찾고 있던 환귀 익산운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다. 촌장 유태월이 익산운이 사는 집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의외로 쉽게 찾아간 익산운의 집. 그 곳에는 왠지 장난기 많은 할아버지처럼 생긴 조그마한 린족 노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우리 홍석근 사부와 함께 천하사절로 불렸던 환귀 익산운이었다. 나와 같이 용맥을 타고 온 일심이는 익산운을 향해 종족의 배신자라며 화를 냈지만, 나는 어떻게든 묵화의 상처를 치유해야만 했기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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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왠지 장난끼 많은 할아버지처럼 생겼지만 이래봬도 천하사절, 환귀 익산운

익산운의 집에는 나 말고도 먼저 온 손님… 이라기엔 좀 그런 환자 한 명이 있었다. 붉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었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익산운과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눈 깜짝할 새에 자리를 비운다. 거 참 성격 급하네.

“아마도 그녀는 제국군 집결지로 갔을 것이다. 어서 가서 그 아이를 구해 오거라.”

“…네?”

“그 아이와 너는 비슷하다. 아마 너와도 깊은 인연이 있을 것이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익산운의 말이 약간 뜬금없긴 했지만, 어쨌건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반강제적으로 붉은 면사의 여인이 향했다는 제국군 집결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제국군 집결지에서 어렵지 않게 그녀를 찾을 수 있었고, 그녀를 도와 주변의 제국군들을 상대했다. 그때였다.

“으… 으윽… 묵화…의 상처가…”

“이 놈,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과거에서 진서연을 만나 벌어진 묵화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서일까. 격한 무공을 구사하자 가슴에 있던 묵화의 상처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때맞춰 등장한 익산운 할아범이 아니었다면 아마 붉은 면사의 여인과 나는 이 곳에서 생을 마감했을 지도 모른다.

“묵화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내공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기엔 네 그릇이 너무 작구나.”

“그릇 작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네요.”

“나쯤 되면 그런 것들도 한 눈에 보이기 마련이지.”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죠?”

“나와 함께 수월평원의 영수들을 만나자꾸나. 그들에게서 영기를 주입받는다면 상승무공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을 만큼 그릇을 키울 수 있을 게야.”

“그러지 말고, 환귀시잖아요? 직접 저에게 영기를 주입해주시면…”

“예끼, 이 녀석아. 나는 예전에 깊은 내상을 입은 터라 그럴 만한 내공이 없어.”

왠지 뻥 같지만, 그렇다니 그렇게 믿어줘야지. 이리하여 수월평원에서의 내 여정은 시작되었다. 환귀 익산운과 함께 말이다. 아 참, 내가 구해준 붉은 면사의 여인은 자신의 이름이 신혜임을 밝히며, 경천맹주의 대리인으로써 각종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경천패를 나에게 건네줬다. 익산운과 대화하는 걸 보니 날 믿을 수 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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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운에 집에 누워 있는 붉은 두건의 신혜
앞으로 이 여자와 어떤 인연이 얽히게 될 지...

이쯤에서 수월평원 지역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자면, 제룡림이나 대사막 지역과는 달리 이 곳은 풍제국의 영토다. 풍제국은 운국 대장군이었던 군마염 황제가 독립해 세운 나라로, 아직까지 민심을 확실히 얻지 못한 데다 운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매우 피폐한 상태다. 이에 나라를 좀먹는 것이 제국군이라며 일어선 집단이 바로 경천맹이다. 지금 저 신혜라는 아가씨가 건네준 경천패는 그 경천맹의 맹주 권한을 상징하는 패로, 이것을 내게 건네준 의미는 제국군과 대항하기 위해 수월평원의 영수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경천맹과 동맹을 맺어달라는 것이다.

사실 풍제국과는 별 인연이 없는 터라 이런 일까지 적극적으로 돕고 싶지는 않지만, 어차피 익산운의 명령(?) 때문에 수월평원의 영수들을 만나야 하지 않는가. 권력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젬병이지만, 어찌됐든 익산운의 눈도 있고 해서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하여, 영수들의 정기를 얻음과 동시에 그들의 세력을 경천맹으로 끌어들이는, 수월평원에서의 대장정이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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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면, 이 여행에 있어 내 최대의 실수는 경천맹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각 지역에 위치한 영수들은 의외로 내게 호의적으로 영기를 내줬다. 그러나 그 배후의 이종족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들이 아니었다. 살 대로 산 영수들은 내 입장을 이해하고 흔쾌히 영기를 나눠준 반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이 남은 종족의 실제 지도자들은 인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반기를 든 것이다.

첫 번로 찾아간 곳은 늑대의 부족으로 알려진 앙시족. 뭐, 늑대라고 해도 인간의 모습에 늑대 귀가 붙어 있는 정도이긴 하지만… 이건 그냥 키 큰 린족 아닌가? 향후 만나는 이종족들에 비하면 심히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앙시족의 경우 검은늑대와 푸른늑대 두 부족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는 데다, 둘 다 인간족에게 크게 데인 적이 있는 터라 쉽사리 동맹을 맺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푸른늑대의 부족장 높새바람을 구하고, 검은늑대를 도와 봉인에서 풀려난 흑신시를 재봉인하고 나니 그제서야 그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말은 쉽지만 꽤나 험난한 과정이었고, 그렇게 흑신시의 영기와 앙시족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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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시족 푸른늑대의 수장이 된 하늬바람, 적극적인 도움을 약속했다

두 번째 목적지는 풍저회, 그리고 돼지(豚) 종족인 홍돈족의 영수 홍노돈이었다. 아쉽게도 풍저회의 경우 회주의 변심으로 인해 경천맹과의 동맹을 맺지 못했지만, 홍돈족의 영수 홍노돈은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며 자신이 천 년 동안 모아온 내력을 모두 나에게 건네준다. 그 와중에서 경천맹에게 지대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명의 한윤수를 구하러 갔는데, 충각단 지부에서 만난 그가 치료하고 있던 사람은 다름아닌 대나무 마을에서 악연으로 나와 얽힌 자, 은광일이었다.

“은광일… 네가 왜 여기 누워있지?”

“크으… 남소유 이 나쁜 계집애… 지금이라도 돌아와… 남소유…”

“……쩝.”

은광일에게 들은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 날 범박의 도움으로 대나무 마을에서 도망친 은광일은 남소유와 함께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진서연에 의해 남소유를 도둑맞은 것도 모자라 커다란 상처까지 입었다는 것이다. 상태가 심각해서인지 나조차 못 알아보는 은광일, 그 모습에서 약간의 동정마저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아무튼, 진서연은 왜 남소유를 납치해 갔을까? 솔직히 남소유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도천풍이 어디선가 주워 왔다고는 하지만 그 출신이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데다, 충각단 남해함대지부에서 유란이 남긴 ‘지 어미랑 꼭 닮았군’ 이라는 말 등으로 미루어 보면 뭔가 출생의 비밀이 숨어 있음이 틀림없다. 그나저나 진서연이 남소유를 납치다면 시기상으로 볼 때 사마교주에게서 무신반을 빼앗아가기 전 일일텐데… 지금으로써는 진서연의 의도를 짐작하기에 필요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그저 그녀의 행적을 따라가기에도 바쁠 정도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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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껏 도망쳐 놓고 이 꼴이 뭐람!

그러던 와중, 경천맹주가 제국군에 사로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경천맹주가 없다면 경천맹은 와해될 테고, 지금 내가 맺고 있는 동맹도 휴지조각기 될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경천맹주를 구하러 출동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잡혀간 인물은 경천맹주와 똑같이 생긴 그림자 호위무사로, 진짜 맹주는 어디에 있는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어찌됐든, 내 목적은 동맹보다는 영기다. 다음 목표는 개구리(蛙) 종족인 수와족과 도마뱀(?) 종족인 악교족이다. 그나마 수와족의 경우 반란 세력을 물리치고 수와족장의 영기를 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악교족은 전사로서의 시험까지 거쳤는데도 쉽게 영기를 주지 않았다. 이유는 악교족의 수장인 악교노장들이 저 멀리 귀도시에 가 있기 때문. 결국 악교노장들로부터 영기를 받고 악교족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나는 귀도시로 떠났다. 누가 뭐라 하든 악교족은 수월평원의 이종족 중 최고의 전투 종족 아닌가. 내게도 경천맹에게도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 자명하다.

그리하여 나는 귀도시로 떠났다. 이름만 들어도 뭔가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귀도시. 그 곳으로 향한다고 생각하자 왠지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이 소름의 원인이 단순히 귀신을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조금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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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귀도시는 원래 고도시라는 이름의 번화한 도시였다. 이 곳은 운제국 황제의 형제인 섭광이 통치하고 있던 곳이었으나, 어느 날 의문의 변고로 인해 도시 전체가 탁기에 휩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건으로 인해 이 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모두 피난을 갔고, 미처 피하지 못 한 주민들은 악귀가 되어버렸다. 이후 이 곳은 고도시라는 이름 대신 귀도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다.

귀도시에서 만난 악교족의 지도자 악교노장들은 도시를 정화시키고 탁기의 근원을 막는 것이 급하다며, 내게 도움을 요청한다. 사실, 위에서도 각종 이종족들의 정기를 얻는 과정을 쉽게 묘사했지만, 그 와중에 내가 처치한 동물이나 반란군이 수백이요, 구해온 물건들이 수천이다. 아무래도 이 동네 이종족들은 ‘기브 앤 테이크’ 하나만큼은 확실히 지키는 것 같다. 동맹 하나 맺어주는 걸 핑계로 이렇게까지 사람을 부려먹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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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산함이 피부로 느껴지는 귀도시의 전경

어쨌든, 귀도시에서의 기억은 상당히 끔찍했다. 살아있는 것이 아닌 강시, 해골은 물론, 사람을 통채로 번데기로 만들어 즙을 빨아먹는 거대 거미가 지붕 위에서 습격하고, 땅 속에서는 맹독을 품은 거대 전갈이 시시때때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붕 위에는 피를 빨아먹는 흡혈박쥐들까지 우글거렸다.

그러던 중, 악교족의 지도자 악교천왕과 함께 들어간 비명의 피난처에서 한 망령을 만나게 된다. 그는 과거 운국 대장군이었던 도융. 30여년전 고도시에 일어난 참사에서 주군도, 공주도, 백성들도, 자신의 부인도 지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지금까지 망령이 되어 이승을 떠돌고 있는 존재였다. 왠지 불쌍하지만, 이미 과거에 벌어진 일을 내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그 때 옆에 있던 수와천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 자네라면 30년 전 이 도시에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네.”

“뭐라구요?”

“묵화의 상처로 인해 기혈이 뒤틀린, 원래는 죽었어야 하는 몸인 자네가 이렇게 살아서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자네라면 도융의 한으로 이어진 용맥을 타고 30년 전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네.”

“네…?”

이거, 얼마 전에도 과거로 돌아갔는데 또 과거로? 원래 시간이동이라는 게 이렇게 쉬웠나요? 그나저나, 이 도시에 닥친 일은 나도 알고 싶었다. 대체 이 도시를 감싸고 있는 탁기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만 악교족의 협력도 구하고 묵화의 상처를 치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30년 전, 귀도시가 고도시로 불리웠던 시대로 넘어갔다.

30년 전의 고도시, 그 곳은 지옥이었다. 탁기에 물든 사람들이 광인이 되어 날뛰고, 곧이어 악귀로 변했다. 병사들은 악귀로 변하기 전의 주민들의 목숨을 어쩔 수 없이 끊었고, 그 와중 도융 장군 역시 자신의 부인을 비롯한 수많은 주민들을 눈물을 머금고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이 모든 원흉은 고도시를 다스리던 군주 섭광에 의한 것이었다. 섭광은 자신의 동생이 황제가 된 것에 앙심을 품고 하늘의 힘을 빌려 자신이 황제 자리에 오르려 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희생시켜가며 천명제를 지냈지만, 결국 마계의 통로만 열고 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꼬드긴 장본인은 진서연의 부하가 되기 전의 기생 모습을 하고 있는 유란이었다.

결국 천명제로 인해 고도시는 마물의 소굴이 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수월평원의 영수들. 그리고 천하사절이 등장한다. 물론 그 중에는 내 사부님인 역왕 홍석근도 끼어 있었다. 언제나 인자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던 사부님의 모습. 그러나 사부님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단지 ‘살아줘서 고맙소…’ 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사부님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기 문에 어찌 할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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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부님을 만났지만, 아쉽게도 날 못 알아 보신다

그리고 나는 천하사절의 무위를 직접 견식하게 된다. 무신 천진권, 검선 비월, 환귀 익산운의 힘도 막강했지만, 역왕 홍석근의 힘은 그 중에서도 압권이었다. 기공파 한 번으로 도시 위에 솟아있는 거대한 산에 통째로 구멍을 뚫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천하사절의 가세로 인해 사람들을 덮쳐오던 마물들의 행진이 차츰 잦아졌다. 그리고, 페허가 된 귀도시에서 정신을 잃은 한 여자아이가 발견된다.

“흠… 이런, 이런. 탁기가 이미 온 몸에 퍼졌구만. 이거, 마물이 되기 전에 얼른 명계로 보내주는 편이…”

익산운의 냉정하면서도 합리적인 판단. 그러나 뒤에서 지켜보던 검선 비월이 다가와 그 아이에게 기공을 주입해 준다. 그러고 보니 저 검선이라는 여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익산운은 그런다고 탁기가 치유되진 않는다고 했지만, 검선은 내공 주입을 멈추지 않았다.

“깨어났니? 다행이구나. 이름은?”

“진… 진서연…”

서… 설마, 저 아이가 진서연? 그러나 16년 전의 진서연과는 달리, 지금의 저 아이는 탁기에 오염된 힘 없는 아이에 불과했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저 아이가 홍석근 사부를…? 대체 검선이라는 저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그 순간 도융 장군과의 연결고리가 끊겼다. 물어볼 것이 태산 같았지만, 30년 전의 세계로부터 조금씩 멀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빡할 사이, 어느 새 나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도융 장군이 성불하고 귀도시의 탁기를 막기 위해 발버둥치던 그 곳으로…

우연치 않게 목격한 진서연의 과거. 그러나 아직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 천하사절 중 하나인 검선 비월이 진서연을 거두어갔고, 모종의 일로 인해 진서연이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중간의 연결고리가 텅 빈 느낌이다. 다만, 한가지 확실해진 것은 홍문파 절벽에서 떨어지고 소연화에게 배를 찔려 죽을 뻔한 나를 두 번이나 구해준 것이 아무래도 검선 같다는 것… 근데, 검선은 죽었던 것이 아니었나? 뭔가 풀릴 듯 하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의 고리. 진실을 알고 나면 진서연에 대한 약점이나 상대할 방법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 듯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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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일에 가려져 있던 진서연의 과거가 최초로 공개되는 순간!

어쨌든 귀도시의 마기를 상당수 정화시킨 데 성공한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악교노장들에게 향했다. 비명의 피난처 구석의 비밀 공간에서 발견한 천지마명록(천명제에 쓰였던 책자)을 가지고 말이다. 참고로 천지마명록에는 30년 전의 천명제가 실패한 이유, 그리고 진서연이 나를 살려둔 이유가 대략적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그 문구는 다음과 같다.

<천명제를 지내는 자여. 경고하노니 하늘에 검은 꽃이 필 때는 천명제를 지내지 말지어다. 또한, 귀천검이 어둠의 손에 떨어지고 어둠을 담을 그릇이 있을 때 역시 천명제를 지내지 말지어다>

이 문서에 의하면 30년 전의 천명제는 하늘에 검은 꽃이 필 때 치뤄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귀천검과 어둠을 담을 그릇이 빠져 있어 이 정도(?)의 피해로 그친 듯 하다. 그러나 지금, 귀천검은 홍석근 사부에게서 진서연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릇. 진서연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말했던 그릇. 설마, 그녀가 날 살려둔 까닭이 어둠을 담을 그릇으로 써먹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

아무튼 악교노장들은 내 노고에 감사한다며 영기를 나누어주었다. 다만, 악교족의 적극적인 동맹에 대해서는 아직 확답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악교족 내부의 사정도 꽤나 복잡한 모양이었다. 힘을 숭상하다 보니 계속해서 새로운 신진 세력들이 솟아오르는 것 때문인 듯 하다. 아무튼, 나는 한동안 헤어져 있었던 환귀 익산운을 만나 앞으로의 일을 얘기했다. 이제 남은 것은 원숭이의 왕 낙원대성의 영기 뿐.

그렇게 한참 익산운과 원숭이의 숲으로 가는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던 중, 예고 하나 없이 우리의 뒤쪽에서 공간의 문이 열리더니 유란이 나타났다. 어떤 일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다. 이제 더 이상 예전 충각단 남해지부에서 힘없이 당하던 약한 내가 아니다. 수월평원 영수들의 영기를 충만히 받은 데다 옆에는 천하사절인 환귀 익산운까지 있다. 그래서일까, 그토록 강해 보였던 유란은 우리 둘의 합공에 계속 밀리기만 했다.

“호호호, 제법인걸? 홍문파 애송이. 많이 늘었어.”

“흥, 과연 제법 정도일까?”

“아이~ 흥분하지 마~ 아 참, 익산운? 혹시 당신, 아들이 있다는 거 알고 있어?”

“뭐, 뭐라고?”

“호호호, 지금 우리가 당신 아들을 데리고 있거든? 살리고 싶으면 영린촌으로 와. 기다리고 있을게~”

“자… 잠깐!”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긴 채, 유란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익산운을 흘낏 쳐다보니 새파랗게 질린 표정을 짓고 있다. ‘아들? 그럴 리 없어… 서.. 설마…’ 라며 중얼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정말로 아들이 있는 지 몰랐나 보다. 어쩐지 젊었을 적에 꽤나 놀았을 것 같더라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아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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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는 마지막 남은 영기를 얻기 위해 살짝 패닉에 빠져 있는 익산운을 데리고 낙원대성에게 향했다. 원숭이의 숲 깊숙한 곳의 낙원사원에 있던 낙원대성은 사정을 듣고 흔쾌히(물론 여기서의 흔쾌히라는 말은 귀도시 같은 힘든 곳에 비교해서) 영기를 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원숭이 낙원족의 경천맹 동맹 여부는 불투명했다. 경천맹 자체에서도 서로를 못 믿는데, 하물며 이종족에게 그것을 강요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낙원대성을 끝으로 수월평원에 존재하는 영수들의 영기는 다 모았다. 덕분에 묵화의 상처를 몰아내기 위한 상승무공을 배울 정도의 그릇이 어느 정도 구현되었다. 단지, 홍문신공의 오의를 배우지 못한 터라 그 그릇을 채우지 못했다는 것이 고민거리로 남았다. 앞으로의 여행은 내 그릇을 채울 만한 힘을 얻기 위한 여정이 될 것 같다.

그러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게 경천패를 맡긴 붉은 복면 아가씨 신혜의 부탁을 끝마칠 차례다. 이종족들을 차례차례 만나 몇몇 종족에게는 동맹의 확답도 들었으니, 이 정도면 경천맹주에게도 어느 정도 체면이 설 것 같다. 사실, 처음에는 살짝 귀찮았지만, 수월평원 곳곳에서 벌어지는 제국군의 만행을 보고 있자니 어느샌가 나도 적극적이 된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경천맹 본거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예전에 익산운의 집에서 만난 붉은 복면 아가씨 신혜가 나를 맞이했다. 알고 보니 그녀가 바로 경천맹의 맹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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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녀의 정체는 풍제국의 공주이자 경천맹주인 군마혜

그러나 내 활약에도 불구하고, 경천맹은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계속해서 위기에 처한다. 계속해서 발견되는 배신자들은 맹주와 나를 함정 속으로 조금씩 밀어넣기 시작하고, 결국 나는 맹주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기습을 당해 그들의 소굴로 잡혀들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신자 무리의 정점에 경천맹의 부맹주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경천맹주가 사실은 풍제국의 공주 군마혜라는 사실도… 배신자들은 맹주가 자신들을 속인 데에 대한 복수라고 하는데, 경천맹주가 풍제국 공주라서 배신을 했다면 어째서 풍제국과 손을 잡는 건지… 아무리 봐도 사리사욕을 위한 빌붙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경천맹의 세력이 강했더라도 이들이 배신을 했을까? 마치 무성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갇혀있는 제국군 본거지에 불길이 치솟는다. 나무로 높게 쌓아놓은 방벽 위로 수많은 사람들, 아니 이종족들이 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앙시족, 수와족은 물론 악교족과 낙원족 등 내가 방문했던 거의 모든 곳의 이종족들이 드디어 경천맹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발이 부르트면서도 그들을 설득하러 돌아다녔던 일이 결코 헛된 게 아니었다.

“소협, 어서 나오세요.”

“고맙습니다.”

철창 문을 열어준 것은 앙시족 푸른늑대를 이끄는 하늬바람이었다. 이종족들에 경천맹 본진까지 합류한 기습에 제국군들은 당황하기 바빴고, 그 틈을 타 배신자들도 처단할 수 있었다. 한 번 경천맹쪽으로 기운 전세는 계속해서 가파라져 갔고, 나는 앞서 귀도시에서 만났던 유란과의 결전을 위해 영린봉으로 향했다. 익산운과 함께 말이다.

영린봉 꼭대기에는 예상대로 유란이 서 있었다. 다만, 그녀가 잡고 있다는 익산운의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유란 혼자였다. 그러나 상황은 우리 쪽이 훨씬 유리했다. 귀도시에서 나와 익산운의 협공을 이기지 못 했던 유란, 그러나 지금은 군마혜와 그의 호위무사인 정하도까지 가세했다. 그러니까 ‘크앙+익산운>유란’ 인데, 좌변에 ‘군마혜+정하도’ 라는 막강한 플러스 요소가 더해진 것이다. 절대 질 리가 없…

쿠구구구구

순간, 유란의 몸이 검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10m는 되는 그림자로 변신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제껏 본 적 없는 검은 전갈. 그리고 그 가운데 붙어 있는 유란의 상체였다. 결국 인간의 탈을 벗어버린 것인가?

“하하하하, 너희들을 세상에서 지워주마!”

“크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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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마왕으로 변신한 유란, 거거붕과는 달리 미모(?)를 유지하고 있어 다행이다

마계의 전갈 길마왕으로 변신한 유란은 막강했다. 빠르고 치명적인 공격도 공격이었지만, 무엇보다 딱딱한 겉껍질 탓에 웬만한 공격은 들어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귀 익산운의 막강한 기공은 길마왕으로 변한 유란보다도 한수 위였다. 소환귀들을 상대로 대활약을 펼치던 30년 전 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천하사절의 자리를 도박으로 딴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이윽고 4인의 합공을 견디지 못 한 유란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변신이 풀리자 유란의 알몸이 백일하에 드러났… 푸웁! 어… 어쨌든 우리가 이겼다. 그리고 승리의 주역, 익산운이 유란에게 달려갔다. 귀도시에서 유란이 언급한, 그의 아들을 찾기 위해서인 듯 했다.

“내 아들, 내 아들은 어디 있나!”

“뒤… 조심해?”

분명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야릇한 미소를 띄고 있는 유란. 저건, 뭔가 신의 한 수가 남아 있는 표정인데? 순간, 작은 그림자가 익산운을 향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저, 저 아이는… 17년 전 내가 영린촌에서 구해준 영린촌의 일심? 겨우 정체를 파악할 무렵, 일심은 익산운의 품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세상이 조용해졌다. 익산운의 복부에 꽃혀 있는 묵빛의 단검,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익산운…

“이… 일심아…”

“익산운, 이 배신자! 엄마의 원수! 영린족을 대신해 널 처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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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현실, 비록 몰랐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충격에 빠져 있는 순간, 제단 위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서연, 이 모든 것이 진서연의 음모였단 말인가? 익산운을 죽이기 위한?

“어떤가. 하늘의 도가 무너지는 것을 직접 본 소감이. 자식이 부모를 죽인다. 썩어빠진 세상에서 흔한 일이지.”

진서연의 등장과 함께, 익산운에게 꽃혀 있던 단검이 노란 빛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진서연이 검을 잡자, 기껏해야 다섯 치(15cm) 정도의 길이였던 단검이 푸른 빛을 띈 장검으로 변했다. 서, 설마… 홍석근 사부님이 가지고 계시던 귀천검?

몸에 꽃혀 있던 단검이 귀천검으로 변하며 몸 내부에 커다란 타격을 주자, 익산운도 버틸 수 없었다. 커다란 충격에 몸을 부르르 떤 익산운은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일심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향해 손을 뻗은 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천하사절 환귀 익산운의 허망한 최후였다. 치명타를 먹인 것은 그의 숨겨진 아들, 일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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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눈 앞에서 펼쳐지는 기막힌 광경에 반응할 수 없었다. 일심에 대한 분노도, 익산운에 대한 걱정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진서연의 모습을 본 순간, 어느 정도 나은 줄 알았던 묵화의 상처가 다시 내 몸 구석구석을 후벼파기 시작한 것이다.

묵화의 상처에 괴로워하던 내 귀에 일심과 진서연의 대화가 들려왔다. 익산운을 죽인 대가로 영린족의 자유를 약속하는 진서연. 그것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것인가! 진서연이 그런 약속을 지킬 리가 만무하잖아! 일심 이 바보 같은…

“막내야, 어둠에 굴복해선 안 된다.”

“사… 사부님?”

어디선가 환청이 들려 왔다. 환청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묵화의 상처가 조금씩 잠잠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진서연 앞에서 발병한 묵화의 상처가 그 자리에서 진정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수월평원의 영수들에게 모은 영기로 인한 효과인 듯 하다. 나는 급히 몸을 추스렸다.

“공주님, 놀이는 끝났습니다. 이제 그만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진 태사,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그래. 네 뜻대로는 되지 않는다. 진서연!”

“흠, 묵화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다니. 제법이군.”

진서연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듯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군마혜와 호위무사 정하도. 그리고 나는 진서연의 일격조차 당해내지 못하고 땅바닥을 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유란을 이겼다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건만, 진서연은 묵화의 상처만 이겨낸다고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손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실망이구나, 계속 기회를 줬는데도 이 정도라니…”

“이… 이익!”

“너에게 한 때 기대를 걸었건만, 아무래도 넌 그릇이 아니었나 보구나. 명계에 가서 홍 사부에게 안부나 전해줘라.”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데, 진서연이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애써 눈을 떠 보니 진서연의 부하 거거붕이 군마혜를 어깨에 메고 공간이동을 하고 있었다. 진서연은… 이번에도 날 죽이지 않고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겨우 다스렸던 묵화의 상처가 전에 없는 강도로 내 몸을 침식해 들어왔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진서연에게 복수하고 싶은가?”

염라…대왕인가? 그런 것 치고는 몸의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하다. 내 몸이 닿아 있는 돌바닥, 추적추적 내리는 비. 아무리 봐도 저승은 아니다.

“소개가 늦었군. 난 자네 사부와 같은 천하사절 중 하나인 무신일세.”

무… 무신? 무신 천진권? 오래 전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마황을 봉인하며 자취를 감췄다는 무신이 내 눈 앞에 나타나다니… 그러나 묵화의 상처가 주는 고통은 오래 생각할 여유 따위는 주지 않았다.

:그나저나, 진서연에게 복수하고 싶은가?

“다… 당연… 하잖아…”

“그렇다면 나와 손을 잡자. 그리고 마도의 길을 가자. 그것만이 진서연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길이다.”

“마… 마도건 뭐건…”

“음?”

“마도건 뭐건 따르겠어. 진서연…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후후, 훌륭한 선택이다. 홍문파의 마지막 제자, 크앙이여.”

순간, 무신 천진권의 기가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난 기운의 내공이 혈도를 타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넌 홍문의 길을 버리고 마도의 길을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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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홍문의 길을 버리고 마도를 종용하는 무신 천진권

혈도에 쌓여 있던 탁기, 그리고 묵화의 상처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닥쳐온 것은 막혀 있던 혈도가 강제로 뚫리는 고통,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지독한 통증이었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몸부림쳤다.

“그리고, 나와 함께 복수하는 거다!”

그 말과 함께 내 정신은 아득한 심연 속으로 떨어졌다. 무신 천진권의 말이 저 멀리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홍문신공의 정신… 그것만으로는 진서연을 이길 수 없다. 마도면 어떻고, 천도면 어떤가. 진서연을 이길 수만 있다면 설령 악마에게라도 혼을 팔 수 있다…

“으… 으음…”

얼마나 잤을까? 몸이 엄청나게 찌뿌둥하면서도 전투에서 입은 내상의 고통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꽤나 오랜 시간 누워있었던 것 같다. 눈을 뜨려고 하는데 왠 눈꼽이 잔뜩 끼어서 눈꺼풀이 떠지지가 않는다. 눈을 비벼 보니 무슨 코딱지 비슷한 게 툭 하니 떨어지는데, 이게 대체 뭐야! 겨우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니 왠 예쁜 아가씨가 서 있다. 화려한 옷차림을 보니 기생 같은데… 시선을 조금만 위로 올려 볼….

“호호호, 놀라긴?”

헉! 유… 유란? 유란이다! 진서연의 부하이자 길마왕으로 변신해서 나와 싸우던 유란이 기생 차림을 하고 내 옆에 서 있다.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여우 같은 얼굴을 한 대 날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듣자 하니 유란은 진서연과 갈라선 듯 하다. 아니, 애초부터 진서연에게 붙은 것 자체가 연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내 마음 속 유란에 대한 증오심은 진서연 ‘일당’ 에 대한 그것보다 조금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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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수 중 하나인 유란이지만, 지금 당장은 강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 본격적으로 마도의 길을 걸어갈 준비는 되었어?”

이어지는 유란의 물음. 난 두고 볼 것도 없이 대답했다. 진영 사저를 죽이고 진서연의 옆에서 수많은 악행을 일삼은 유란과 손을 잡는 것이 죽기보다 싫긴 했지만, 그보다는 진서연을 향한 복수가 우선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게, 나는 홍문신공의 가르침을 버렸다. 내게 남은 길은 오직 마도뿐. 옳지 못한 방법일지라도, 강해질 수만 있다면…  지금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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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온라인
장르
MMORPG
제작사
엔씨소프트
게임소개
'블레이드앤소울'은 '아이온'에 이은 엔씨소프트의 신작 MMORPG로, 동양의 멋과 세계관을 녹여낸 무협 게임이다. 질주와 경공, 활강, 강화 등으로 극대화된 액션과 아트 디렉터 김형태가 창조한 매력적인 캐릭터를...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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