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흑룡의 해가 밝은 올해 필자는 30대가 되었고 얼마 전 간만에 불알친구들을 만나 신년회를 가졌다. 서로의 일에 치여 얼굴 본지 수 개월이 지나서일까, 할 이야기가 참 많았다. 연애부터 결혼, 부모님의 안부로 시작된 화제가 정치를 넘어 재태크와 주식까지 나아갔으니 말이다. 이 정도 상황까지 오면 게임기자로 일하고 있는 필자는 갑자기 침묵에 빠진다. 비단 이 날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그런 편이다. 아무래도 주 관심사가 게임이다 보니 다른 분야에 신경 쓸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 물론 여자 이야기는 빼고. 한창 유망주에 대한 토론으로 목청이 높아질 무렵 한 친구 녀석이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야. 그거 아냐? 디아블로 새로 나온다던데, 우리 그거 한창 재미있게 했었잖아. 기억 안나?”
순간, 친구들의 시선이 필자에게 쏟아졌고, 아는 내용이 화두가 된 필자는 신나게 디아블로3에 대해 떠들어댔다. 얼마나 이야기를 했는지 목이 말라갈 무렵, 문득 의아해졌다. 이는 20살 이후 게임은 손도 대지 않던 몇몇 지인들마저 이야기를 경청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게임을 시작하기에는 슬프지만 손도, 센스도 굳어버린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 요인은 과연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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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크린샷에서 묘한 반가움을 느낀다면 당신은 훌륭한 올드비다
핫치토 방송을 통해 드러난 올드비들의 디아블로 사랑
디아블로3의 첫 번째 테스트인 ‘패밀리 앤 프랜드 테스트’가 시작되자 세계 각지에 숨어있던 디아블로팬들은 열광을 시작했으며,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나라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컴퓨터를 켰지만 가엽게도 올드비 중 일부는 검색 능력에 한계를 보였으며, 가까스로 관련 영상을 찾아내도 언어라는 원초적인 장벽에 가로막혀 좌절한 이들도 종종 나타났다. 그러던 중 한 명의 영웅이 등장했으니 바로 디아블로3의 테스트 영상을 무려 ‘한국어’로 방송한 핫치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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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치토의
디아블로3 F&F 테스트 방송
이미지를 클릭하면 영상 모음집을 볼 수 있습니다
핫치토의 방송 통계를 살펴보면 유독 3, 40대의 방문 기록이 높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같은 블리자드 게임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 ‘스타크래프트’와 비교하면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WOW와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1, 20대의 시청자 비중이 높은 반면 디아블로3 영상은 30대를 넘어 4, 50대까지 나아갔으니 말이다. 영상의 반응은 상당했으며 각종 매체에서는 이를 톱기사로 다루는 등 후속 콘텐츠 생산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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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자드 게임의 유튜브 방송 통계 비교
이 같은 결과는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올드비들의 마우스를 쉴새 없이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답은 뻔하지만 의외로 쉽게 나온다. 바로 ‘추억’. 즐거웠던, 그리고 어느 하나에 열중했던 것에 대한 쉽게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다.
작대기 하나만 있으면 빙빙 돌며 즐거워했더랬죠
산양문적(山陽聞笛), ‘피리소리를 듣고 옛날 생각을 한다’라는 뜻의 사자성어다.
2000년 6월로 잠시 돌아가보자. 학창시절 반에서 ‘게임 좀 한다’ 싶은 친구, 혹은 무리에게 길다란 작대기 하나를 던져주면 십중팔구 빙빙 돌며 함성을 외치기 일쑤였다. 간혹 전방을 향해 작대기를 던지는 녀석도 있었지만 오늘은 넘어가도록 하자. 본론으로 들어가 이 같은 기현상의 주 원인은 바로 ‘디아블로2’, 첫 번째 타이틀 이후 3년 만에 돌아온 악마의 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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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다시 보는 대륙의 흔한 `휠윈드` 청소 시스템
디아블로2 출시 이전까지 PC방을 주름잡았던 게임은 바람의 나라, 리니지와 같은 초기 MMORPG와 스타크래프트 정도였다. 헌데, 갑자기 모니터 속의 야만스러운 녀석이 어지러운 것도 모르고 대차게 회전을 시작하자 이를 바라보던 게이머들의 눈도, 우뇌도, 좌뇌도 덩달아 돌아가 버렸다. 당시 온라인 게임치곤 상당히 수려한 그래픽,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속도감은 면역력이 부족한 십대의 마음으로는 저항이 불가능했을 정도. 마치, 발라드와 트롯트가 지배했던 가요계에 ‘랩’으로 무장한 서태지의 출현과도 같았달까? 그가 ‘연예 대통령’이었다면 디아블로2는 ‘게임 대통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 서태지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라면 주변에 있는 이모, 고모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아마 답변을 듣기 전 애수에 빠진 소녀의 눈망울을 볼 수 있을 텐데 너무 대놓고 놀라진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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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블로 시리즈의 대표 캐릭터라면 역시 바바리안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필자는 이 당시 처음으로 새벽 5시 30분에 집을 나와 학교가 아닌 PC방으로 간 적이 있었다. 이유? 당연한 것 아닌가, 디아블로2를 하기 위해서였지. 이때는 특히 플레이가 조심스러워진다. 등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메피스토가 눈 앞에 있으면 지각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헌데 이상하게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면 ‘이번 메피스토는 조단링을 떨굴 것 같아.’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분명 몇 분 뒤 학생주임의 몽둥이찜질이 있을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는 비단, 필자의 경험만이 아닐 것이다. 부정하지들 마라. 필자 옆에서 학교를 향해 전력으로 달리던 녀석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이 같은 디아블로2의 부작용(?)과 후유증은 생각보다 길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했어도 주변에 휠윈드를 돌며 `살색 아이템`을 줍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WOW’, ‘리니지2’, ‘아이온’ 등 신작 게임이 계속 출시되자 전체적인 이용자는 많이 줄었지만, 적어도 마음속의 악마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잠시 기억에서 사라졌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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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장에 가면 어쩜 그리 `랜스`스러운(?) 것들이 널려 있는지...
“그 당시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
다시 현재로 돌아와 2012년 1월 4일, 필자는 특별한 만남을 위해 업무 종료 후 급하게 회사를 나섰다. 추운 날씨를 뚫고 부랴부랴 발걸음을 옮긴 것은 모처의 PC방. 15년간 한 장소에서 계속 가게를 운영한 사장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필자는 이 곳에서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대부분을 보냈기에 사장님과는 안면을 텄고, 아직까지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오랜만에 찾은 PC방은 한적했다. 10년 전 추억에 의하면 저쪽 구석에는 매일 재떨이를 2~3번씩 비우던 골초 아저씨가, 입구 바로 앞에는 여자친구의 연락을 받으면 바로 나갈 수 있도록 준비했던 동네 형이, 그리고 안쪽 10자리는 필자의 친구들이 차지해 디아블로2를 함께 즐겼었다. 하지만, 그날 찾은 PC방에서 디아블로를 플레이하는 사람은 없었다. 뭐,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만큼 시간이 흘렀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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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대만 유명 PC방의 실내모습. 10년 전 기억 속의 PC방은 이것보다 훨씬 어두웠지
아마
각설하고, 몇 년 만에 얼굴을 맞댄 사장님은 “어이구, 그 사고뭉치 녀석이 기자가 되었어? 저 짝 구석에 해킹 프로그램 깔아놓아서 내가 너희 어머니한테 전화했던게 엊그저께 같은데. 세상 참 모를일이야.”라는 다소 낮 뜨거운 인사와 함께 필자를 반겼다. 머쓱하게 목례를 하고 자리를 옮겨 그간 어떻게 지냈는 지 회포를 좀 풀어볼까 했는데, 아뿔사. 곧바로 속사포와 같은 질문세례가 날라왔다.
“디아블로3는 언제 나온다니?”
“거 나온다 나온다 감질나게만 하는데 기자인 너는 언제인지 확실히 알고 있지? 그렇지?”
“그거 PC방 서비스는 이상하게 하지 않겠지?”
40대가 꺾인 사장님의 눈은 어느새 기대로 가득 찬 소년의 것으로 바뀌었다.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 답변을 하는 도중 근처에서 다른 게임을 하던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더니 어느 샌가 자리를 잡고 필자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신기한 점은 이들 모두 어느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 알고 보니 모두 디아블로2에 한창 빠졌던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그 중 한 명은 게임에 너무 빠진 나머지 당시 운영하던 식당의 일은 뒷전으로 했고, 그 결과 부인과 크게 싸우고 이혼 직전까지 갔었다고 해 좌중의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그 외에도 게임에 열중하다 밥을 태운 것부터 잠이 모자라 회사에서 꾸벅꾸벅 참새마냥 졸았다는 등 자신만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한껏 대화 분위기를 달궜다. 그러던 중,
“근데 왜 게임이 아직 안나오는거니? 무슨 문제라도 있는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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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저희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갑작스러운 사장님의 질문에 당황했다. 이에 대한 답을 필자 역시 시원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의 문제와 함께 ‘현금 경매장’이라는 논란의 콘텐츠가 있으며, 그 어디에서도 확실한 답변을 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레 말을 열었다.
“괜찮어. 뭐 내가 죽기 전에는 나오겠지. 그만큼 나오는 게 늦어진다는 건 보완할 점도 있다는 것이고, 또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뭐… 좀 빨리 나오면 가게 매출도 좀 늘어 마누라한테 큰소리 빵빵치며 고기반찬 좀 얻어 먹을 수 있을 텐데, 그게 좀 아쉽긴 하네. 헛헛”
서툰 필자의 설명에 사장님은 담담히 대답했고 동석했던 다른 사람들도 이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곤 디아블로2에서 자신들이 획득했던 아이템 자랑들을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대화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아이템에서 PVP로, PVP에서 캐릭터 논의로, 그리고 다시 아이템 이야기로... 밤이라도 샐 기세였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술 한 잔 안마시고 이 만큼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을까. 마치 10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 학창시절엔 친구들과 아무것도 안하고 이야기만 해도 마냥 즐거웠다는 것.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었지만 하나의 추억을 공유했기에 친구가 되었다. 그 만큼 디아블로라는 추억은 무엇보다도 강렬한 것이 아닐까.
이제 곧, 만나러 오겠죠.
올해는 1월부터 실망이 연달아 찾아왔다. 바로 많은 이들이 통과할 것이라 생각했던 디아블로3의 국내 심의가 두 번이나 연속으로 보류된 것 말이다. 논의 안건에 상정조차 안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지난 6일에 진행된 등급 심의에서 포커, 고스톱, 섯다 등의 도박류 게임이 통과한 것에 유저들은 의아함과 분노를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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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과 공포의 심의 결과
필자도 결과를 확인한 후 허무함이 몰려왔다. 기대를 했던 만큼 실망도 컸기에 한 동안 의미 없이 애꿎은 키보드와 마우스만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나올 거, 조금 더 기다리면 어때?’라는 올드비들의 여유를 말이다.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친구인데 몇 일, 혹은 몇 달 약속 시간이 미뤄진다고 반가움이 줄진 않을 것이다. 느긋해지자. 그리고 이제 곧 만나러 올 ‘그 녀석’과 어떻게, 얼마나 즐겁고 긴 시간을 보낼지를 기대하다 보면 어느 샌가 우리의 등 뒤를 와락 안으며 찾아올 것이다. 한 마디 말과 함께 말이다. ‘짜식. 반갑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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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나 왔어`라는 말을 기다려봅시다. 느긋하게
글: 게임메카 허진석 기자 (쌀밥군, riceboy@gamemec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