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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으로 보는 PC의 역사

글 : PC LINE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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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는 유저의 상당수가 ‘게임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꼽는다. 언젠가부터 ‘게임’은 컴퓨터를 통해 부수적으로 즐길 수 있는 옵션이 아니라 컴퓨터의 존재 이유가 되어가고 있다.

컴퓨터 게임은 컴퓨터 자체의 역사와 그 맥을 함께한다. 컴퓨터의 역사는 곧 컴퓨터 게임의 역사인 것이다.

 

 

40s’ ~ 60s’ : 컴퓨터와 컴퓨터 게임의 시작

한 TV 방송국의 개그 프로그램 중, 홈쇼핑의 쇼호스트 역을 맡은 개그맨이 ‘이거, 게임 기능 됩니다’라며 엉뚱한 방법으로 제품을 갖고 노는 코너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개그맨의 바보스러움을 보여주는 코너였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란 무엇이든지 갖고 놀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코너이기도 했다. 초기의 컴퓨터 기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복잡하고 따분한 기계에 질린 그들에게, 복잡한 생각을 대신해 주는 컴퓨터는 굉장히 쓸 만한 장난감이었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는 1946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군사용으로 개발된 에니악(ENIAC)이다’라는 내용이 교과서에도 실려 있지만, 사실 세계 최초의 컴퓨터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1939년에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만든 ABC(아타나소프 베리 컴퓨터 - Atanasoff Berry Computer)는 미국 법원에서 세계 최초의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판결이 내려진 1973년 당시의 세계 정세가 다분히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독일의 콘라트 추제(Konrad Zuse)는 ABC보다 1년 앞선 1938년에 전기로 작동하는 기계식 컴퓨터인 Z1을 발명했었다고 뒤늦게 발표했지만, 이 컴퓨터는 2차 대전 중 폭격으로 소실되어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 최초의 컴퓨터들은 대부분 군사용으로 개발되었다.
2차 대전과 냉전 등으로 뒤숭숭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컴퓨터 게임이 무엇이었는지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1949년 MIT의 클라우드 셰넌(Claude Shannon)이 발명한 체스 기계가 컴퓨터 게임의 모태라는 주장이 있지만, 그 이전에 이미 몇몇 컴퓨터 기술자들이 컴퓨터가 제시한 숫자를 알아맞히는 형태의 게임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정답이라 할 수 없다.

 초기의 컴퓨터는 결과물을 천공 카드나 천공 테이프로 출력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현재와 같이 모니터를 통해 게임 화면을 볼 수 있는 비디오 게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비디오 게임은 1958년 브룩헤븐 연구소의 윌리 히깅보덤(Willy Higgingbotham)이 개발한 테니스 게임인 ‘Tennis for Two’이다. 이 게임은 연구소를 방문한 손님들을 위한 전시물로, 오실로스코프와 아날로그 컴퓨터, 그리고 몇 개의 버튼을 조합한 형태였다. 비록 점과 선 몇 개로 이루어진 단순한 게임이기는 했지만, 연구소를 방문한 손님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 Tennis for Two는 오실로스코프에 점과 선을
표시하는 간단한 테니스 게임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첫 번째 컴퓨터 게임은 1961년에 등장한 ‘스페이스워(Spacewar)’이다. MIT 대학 내에 설치된 ‘PDP-1’ 컴퓨터의 성능을 보여주기 위해 스티브 러셀(Steve Russel)과 친구들이 개발한 이 게임은, 두 명의 플레이어가 우주 공간에서 로켓을 조종하고 어뢰를 발사해 싸우는 게임이다. 히깅보덤이 만든 최초의 비디오 게임기가 테니스 게임 하나만을 위해 개발된 전자회로였다면, 스페이스워는 이미 만들어진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짜 넣은 최초의 게임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후 몇 명의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꾸준히 업그레이드되면서, 비디오 게임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들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적당한 공간과 테이블만 있으면
설치 할 수 있는 PDP-1은 ‘미니컴퓨터’라
 불리며 MIT 대학 곳곳에 설치되었다.
 


현재에도 스페이스워와 같은
로켓 조종 게임들이 미니 게임 형식으로
 출시되고 있다. 
 



PC 밖의 게임

비록 비디오 게임이 컴퓨터로부터 시작되기는 했지만, 70년대 후반에 ‘애플 II’라는 역사적인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까지 비디오 게임은 컴퓨터가 아닌 전용 게임기를 통해 발전해 왔다.

최초의 상업용 게임은 아타리(Atari)의 창립자인 놀란 부쉬넬(Nolan Bushnell)이 1971년에 만든 ‘컴퓨터 스페이스(Computer Space)’였다. 초기에는 미니컴퓨터에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넣도록 디자인되었으나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게임 전용 기계로 개발되었고, 결국 최초의 아케이드 게임기로 등극하게 되었다. 비록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놀란 부쉬넬은 이 게임에 힘입어 1972년 ‘퐁(Pong)’을 개발했다. 퐁 이후 아타리는 전 세계의 게임기 시장을 휩쓸며 1983년의 아타리 쇼크(Atari Shock)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게임 회사로 군림한다.


▲ ‘퐁’은 최초로 대중적인 인기를 모은 아케이드 게임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유저들의 입으로 회자되고 있다.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는 1972년에 마그나복스(Magnevox)의 랄프 베어(Ralph Bear)가 만든 ‘오디세이 홈 엔터테인먼트 시스템(Oddysey Home Entertainment System)’이다. 퐁과 비슷한 기본 게임이 내장되어 있고, 추가 카트리지와 TV 화면에 붙이는 셀로판지를 통해 12개의 다른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 오디세이와 같이 화면에 셀로판지를 붙이는 게임은
1~20년 전까지도 오락실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70s’ : PC와 PC 게임의 시작

1970년대는 컴퓨터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몇몇 대학이나 기업들의 전유물로만 알려져 있던 컴퓨터가 PC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이면서, 컴퓨터 역사에 오랫동안 이름을 남기게 될 ‘영웅’들이 등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퐁 이후로 아케이드 게임과 콘솔 게임 시장이 크게 활성화되었던 것에 비해 컴퓨터 게임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가장 큰 원인은 기계적인 한계였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동해야 하는 당시의 컴퓨터로서는 대용량의 게임을 저장하고 유통시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최초의 컴퓨터가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최초의 PC(Personal Computer), 즉 개인용 컴퓨터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다. PC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8년 HP의 ‘911A’라는 계산기의 광고였지만, 이 제품은 컴퓨터라기보다는 계산기에 가까웠다. 따라서 최초의 PC라는 영광은 1971년에 블랭켄베이커(John V. Blankenbaker)가 만든 ‘켄벡(Kenbak)-1’이 차지하게 되었다. 최초의 마이크로 프로세서인 인텔의 ‘4004’를 채택한 이 컴퓨터는 키보드나 모니터 없이 스위치를 통해 명령어를 입력하는 방식으로, 불과 256자만을 기억할 수 있었다.


▲켄벡-1은 750달러에 판매되었지만, 유지비가 수천 달러였기
때문에 상업적으로는 실패한 모델이었다
.

모니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972년에 MIT의 그레고리 욥(Gregory Yob)은 최초의 PC 게임인 ‘움퍼스(Wumpus)’를 만들어냈다. ‘움프’라고도 불리는 이 게임은 텍스트 기반의 어드벤처 게임으로, 사무용 메인프레임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지만 일반 PC에서도 즐길 수 있었다. 다섯 개의 화살로 무장하고 동굴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장애물을 극복해 움프스라는 생물을 찾는 내용이었다.


▲ IBM PC용으로 다시 제작한 움퍼스 게임이다. 국내에서도 하이텔
등의 텔넷을 통해  비슷한 방식의 게임이 유행했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PC는 1974년에 발매된 ‘알테어 8800(Altair 8800)’이었다. 이 컴퓨터는 퍼스널 컴퓨터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고안한 에드 로버츠(Ed Roberts)가 개발한 제품으로, 인텔의 8080 마이크로 프로세서와 256Byte 칩을 사용했다. 키보드나 모니터, 외부 저장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프로그래밍을 하려면 본체의 스위치를 조작해야 했다.

이듬해인 1975년에 하버드 대학생이었던 윌리엄 게이츠(William Gates)와 폴 앨런(Paul Allen)이 알테어 8800을 위한 프로그래밍 언어인 베이직(BASIC)을 개발했다. 베이직이 프로그래밍 언어의 대표주자로 앞서고 이를 기반으로 한 많은 게임들이 만들어지면서, 윌리엄 게이츠의 애칭인 빌(Bill) 게이츠라는 이름은 같은 해 그들이 설립한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라는 회사명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알테어 8800에 채택된 베이직 언어는
이후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본으로 자리잡는다.

현재의 PC처럼 모니터와 키보드, 저장장치를 갖춘 최초의 PC는 1977년에 만들어진 코모도(Commodore)의 ‘PET 2001’이었다. 이듬해 애플(Apple)에서 ‘애플 2(Apple II)’를 발표하기 전까지, 코모도의 PC는 시장에서 가장 높은 점유율을 유지했다.

같은 해, 데이브 레블링(Dave Lebling)과 마크 블랭크(Marc Blank)는 최초로 모니터 화면을 통해 즐길 수 있는 그래픽 기반의 PC 게임인 ‘조크(Zork)’를 만들었다. 1979년 인포콤(Inforcom)에서 정식으로 발매된 이 게임은, 화면에 표시된 미로를 벗어나는 단순한 방식이었지만 상당히 몰입도가 높은 게임이었다.


▲ 코모도의 컴퓨터가 모니터를 채택한 이후,
PC 기반의 게임이 속속 출시되기 시작했다.

1세대 컴퓨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애플의 ‘애플 1(Apple I)’이었다. 애플 1에 이어 곧바로 애플 2가 출시되면서, 8비트 컴퓨터라 불리는 2세대 컴퓨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MSX와 애플 2로 대표되는 2세대 컴퓨터들은 조용하던 PC 게임 시장을 단번에 뒤집을만한 힘을 갖고 있었다.

요즘은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는 유저의 상당수가 ‘게임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꼽는다. 언젠가부터 ‘게임’은 컴퓨터를 통해 부수적으로 즐길 수 있는 옵션이 아니라 컴퓨터의 존재 이유가 되어가고 있다.

컴퓨터 게임은 컴퓨터 자체의 역사와 그 맥을 함께한다. 컴퓨터의 역사는 곧 컴퓨터 게임의 역사인 것이다.

 

 

80s’초: 애플 II의 등장

1976년 HP의 연구원이었던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은 스티브 잡스(Steve Jobs)와 함께 자신의 집 차고에서 한 대의 컴퓨터를 만들어냈다. 179달러나 되는 인텔의 8080 칩 대신 MOS 테크놀러지의 20달러짜리 칩셋인 ‘6502’ 칩을 사용한 그들의 컴퓨터에는 ‘애플(Apple) I’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같은 해 그들은 ‘애플’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PC 시장에 뛰어들게 된다.

애플 1이 그 가능성을 인정받은 뒤, 1977년 4월 웨스트코스트 컴퓨터 페어에서 워즈니악은 ‘애플 II’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애플 II는 개발 단계에서부터 게임 기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TV나 모니터에 연결 가능한 컬러 디스플레이를 지원하고 기본으로 2개의 게임 패드까지 제공해, 가정에서 게임을 즐기기 위한 최적의 장비였다. 메모리를 추가로 64KB까지 설치할 수 있던 것도 큰 장점이었다.

▲ 애플 II는 이후에 애플 IIe, 애플 III, 맥킨토시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면서 현재까지 그 맥을 잇고 있다.

애플 II가 게임 시장을 장악하게 된 것은 저장장치의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플 2의 초기 제품은 카세트 테이프 드라이브를 저장장치로 채택했지만, 이듬해 플로피 디스크 저장장치인 디스크 II를 발표한 것이 인기의 시발점이었다. 국내에서 애플 II의 복제품이 돌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절이었다. 업자들이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 판매하기 시작했고, 플로피 디스크를 이용해 정품 게임을 대거 복제해 유통시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 문화가 시작된 때였다.

 

저장장치의 발달

PC 초기에 주로 쓰이던 저장장치는 카세트 테이프였다. 컴퓨터의 내장 메모리의 용량이 16KB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카세트 테이프는 수십 배 이상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장치였다. 그러나 속도가 무척 느리고 데이터를 순차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양한 데이터를 한꺼번에 넣을 수 없다는 점은 큰 불편함이었다.


초기의 컴퓨터는 대부분 카세트 테이프를 저장장치로 채택했다.
국내에 발매되었던 삼성의 SPC-1000 시리즈도 같았다.

플로피 디스크는 카세트 테이프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데이터의 전송 속도가 무척 빠른 데다, 원하는 데이터를 찾기 위해 미디어 전체를 읽어 들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복제가 쉽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최초의 플로피 디스크는 IBM에서 1971년에 개발한 8인치 메모리 디스크이다. 이듬해인 1972년 5.25인치 플로피 디스켓을 개발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유통된 것은 1976년의 일이었다. 그나마 장당 390달러라는 엄청난 가격이었기 때문에 시장성은 거의 없었다. 5.25인치 플로피 디스켓이 인기를 끈 것은 1981년 애플이 디스크2를 발매하면서부터였다. 3.5인치 디스켓은 1981년 소니가 개발했지만, IBM 컴퓨터가 인기를 끌게 된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시장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드 디스크는 더욱 놀라운 발명품이었다. 최초의 하드디스크는 시게이트가 1980년에 발표한 윈체스터였는데, 5.25인치의 크기로 5MB의 저장용량을 갖고 있었다. 지금이야 5MB가 대단할 것도 없는 용량이지만, 당시에는 말 그대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컴퓨터 롬의 용량이 최대 512KB였고, 플로피 디스크의 용량도 별다를 게 없던 시절이었다.

애플 II는 저장장치를 제외한 값이 1천298달러여서 모니터와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를 포함하고도 600달러 정도였던 경쟁 제품들에 비해 매우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플이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고해상도 컬러 그래픽과 뛰어난 확장성, 그리고 높은 시스템 안정성 때문이었다.

본체와 함께 제공되는 데모 테이프에는 브레이크 아웃(Breakout) 게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에 발매된 16KB 패키지에는 컬러 고해상도 그래픽 게임 스타트랙(STARTREK)이 포함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애플 II 용으로 발매된 최초의 PC 게임은 브레이크 아웃이었다. 애초에 워즈니악이 애플 II를 설계한 이유 중 하나가 이 게임을 구동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후문도 전해진다. 이전의 컴퓨터에도 게임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PC 게임의 역사는 애플 II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리진(Origin), 시에라(Sierra), 일렉트로닉 아츠(Electronic Arts), 액티비젼(Activision) 등 굴지의 업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게 이맘때였다.


아케이드 용이었던 ‘브레이크 아웃’은
현재의 애플을 만들어낸 공신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 로베르타 윌리엄스(Roberta Williams)와 켄(Ken) 윌리엄스 부부는 그래픽과 텍스트가 결합된 최초의 PC 게임인 ‘미스터리 하우스(Mystery House)’를 애플 2용으로 발표했다. 켄 윌리엄스가 운영하던 온라인 시스템즈(Online Systems)는 후에 시에라(Sierra)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PC 게임 업체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 1980년에 미스터리 하우스가 등장한 이후로
그래픽과 텍스트를 결합한 게임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애플 게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체가 바로 오리진이다. 1980년 당시 19세의 청년 리처드 개리엇(Richard Garriot)은 TRPG인 D&D(Dungeons & Dragons)에서 영감을 얻어 ‘아칼라베스(Akalabeth)’라는 게임을 만들었다. 얼마 뒤 그것을 기반으로 다시 제작한 애플 II용 RPG 게임에 ‘울티마 : 첫 번째 암흑시대(Ultima : The First Dark Age)’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울티마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RPG의 필수 요소들이 담겨있다. D&D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계급과 종족 구성, 방대한 게임 스케일, 다양한 아이템과 능력치 시스템이 그것이다. 이 중 4편인 ‘울티마 : 아바타의 모험(Ultima : The Quest of Avatar)’와 5편인 ‘울티마 : 운명의 전사들(Warriors of Destiny)’는 PC 게임의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명작이었다.


 애플 게임의 불후의 명작인 울티마 4이다.

브로더번드(Broderbund)에서는 ‘로드런너(Load Runner)’를 발매했다. 로드런너는 당시 유행하던 아케이드 게임들과 유사한 스타일이었지만, PC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다양한 패턴의 스테이지를 자랑했다. 게임 안에 자체적인 레벨 에디터 기능이 들어 있어, 최초로 플레이어가 스테이지를 만들어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사실 국내에는 브로더번드라는 회사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게임들은 익히 알려져 있다. 1985년 발매된 ‘가라데카’는 애플용 게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부드러운 움직임과 뛰어난 게임성의 액션 게임으로 유명했다. 가라데카의 그래픽은 후에 ‘페르시아의 왕자’로 이어져 IBM용 게임 시장의 한 축을 이루었다.


 로드런너는 애플 이외에도 다양한 기종에 맞게 컨버전되었다.


▲ 가라데카의 부드러운 움직임은
모션 캡처의 기법을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 남인환 씨가 울티마 시리즈에서 영감을 얻어 애플 II용으로 제작한
‘신검의 전설’은 국내 최초의 패키지 게임으로 이름을 남겼다.

 

 

80s’초: MSX의 등장

1983년,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와 일본 아스키는 MSX(MicroSoft eXtended)라는 이름의 PC 공통 규격을 만들었다. 80년대 초에는 수많은 업체들이 PC를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각 기종간의 호환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해당 기종에서 동작하는 소프트웨어를 전부 따로 구입해야만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MSX는 3.58MHZ로 작동하는 자일로그 Z80 프로세서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TI-99/4A나 TMS9918 그래픽 칩셋, 제너럴 인스트루먼트 AY-3-8912 사운드 칩셋을 기본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 규격은 가장 기본적인 칩셋과 바이오스만을 공통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생산되는 컴퓨터의 성능은 생산 업체의 재량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호환성이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였다. 게다가 MSX로 제안된 하드웨어의 성능 또한 문제였다. 40×24의 텍스트와 256×192 해상도의 16색 컬러는 당시의 다른 컴퓨터들과 비교해볼 때 상당히 낮은 수준의 그래픽이었던 것이다.


▲ MSX의 스펙으로 발매되는 PC는 대부분
게임을 위한 메가롬팩 슬롯을 달아 출시되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MSX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턱없이 낮은 수준 하드웨어 사양으로 인해 기존의 컴퓨터 제조업체들로부터는 외면당했지만, 새롭게 PC 시장에 뛰어들고자 하는 대형 가전업체들은 하드웨어 사양보다는 개발비 절감과 호환성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미 애플과 코모도를 중심으로 PC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던 미국에서는 별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시장에서 MSX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소니, 파나소닉, 산요 등의 일본 업체들은 물론, 국내에서도 삼성이나 금성, 대우 등의 가전업체들이 MSX를 기반으로 PC 시장에 진출하게 되었다.

MSX의 기본 사양은 아니었지만, MSX에서 처음 도입된 슬롯 형식의 메가롬팩 또한 MSX의 빠른 보급에 일조했다. 슬롯 타입의 저장장치를 컴퓨터에 채택한 발상은 획기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MSX 컴퓨터를 PC가 아닌 일종의 게임기로 인식시키는 데 한 몫 한 것이다. 실제로도 메가롬팩을 기반으로 한 게임들이 대거 발매되었다. 대우전자에서는 아예 MSX 게임 전용 콘솔인 제믹스를 발매하기도 했다.


▲ 대우에서 발매한 IQ-2000이다.
당시에는 ‘매우 비싼 게임기’라는 인식이 강했다.

 미국과 일본의 게임 시장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부터였다. MSX 컴퓨터들은 게임기와 비슷한 형태였기 때문에 조이스틱을 기본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슬롯 방식의 메가롬팩은 내장 메모리가 저장 용량의 대부분이어서, 데이터를 읽고 쓰기 위한 저장 공간이라기보다 롬에 저장된 데이터를 읽어 들이기 위한 게임팩으로의 기능에 충실했다. 반면에 미국에서 발매되는 PC에 있어 게임은 사실상 부가적인 기능에 불과했다. 플로피 디스크는 게임용 미디어가 아닌 대용량의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한 미디어였고, 따로 판매하기는 했지만 컴퓨터에 조이스틱을 끼워 주는 일도 거의 없었다.

 

MSX용으로 발매되는 게임들 또한 아케이드나 콘솔 게임을 그대로 컨버전한 작품들이 많았다. 따라서 MSX용 게임 시장에 뛰어든 업체들도 코나미나 타이토 등, 기존에 아케이드 게임을 만들던 업체들이 대부분이었다.


▲ 코나미의 대표적인 MSX용 게임인 ‘마성전설’이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컴퓨터를 구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 코나미의 ‘꿈의 대륙’이다. 코나미는 아케이드 게임
외에도 MSX 전용 게임들을 다수 발표했다.

▲ MSX로 발매된 게임들은 대부분 아케이드 게임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타이토의 ‘엘리베이터 액션’도 아케이드에서 이름을 날리던 게임이었다.

국내에서는 대우와 삼성, 금성이 주도적으로 MSX 스펙을 기반으로 한 PC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게임기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당시, PC는 게임기가 아닌 사무기기 혹은 교육기기로 선전되었다. MSX 스펙 자체가 외국에서 발매되던 PC보다는 성능이나 활용도 면에서 크게 뒤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업체들의 전략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대우는 IQ-1000 시리즈의 PC를 교육용으로 내세우고 게임 기능만을 떼어놓은 제믹스를 게임기로 선전한 반면, 삼성은 SPC-1000 시리즈를 교육용으로 선전했다. 당시 컴퓨터의 가격이 본체만 3~40만원대로 결코 싼 가격이 아니었음에도,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교육을 위해 컴퓨터를 구입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 삼성에서 SPC-1000의 소프트웨어를
선전하기 위해 만든 전단지다.
교육용 PC임을 강조하고 있다.

MSX는 1985년 게임기로서의 기능을 강화한 MSX2에 대한 스펙이 발표되고, 곧이어 마이크로소프트가 MSX에서 손을 떼면서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 MSX 터보 R의 스펙을 발표하는 등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고자 했으나, 이미 컴퓨터라기보다는 성능 좋은 게임기로 전락한 사람들의 인식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ps) 80년대 이후 내용은 후에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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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2004년 11월 23일
플랫폼
온라인
장르
MMORPG
제작사
블리자드
게임소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워크래프트' 세계관을 토대로 개발된 온라인게임이다. '워크래프트 3: 프로즌 쓰론'의 4년이 지난 후를 배경으로 삼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플레이어는 얼라이언스와 호드, 두 진...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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