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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국산 RPG의 선구자, 창세기전의 최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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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전'의 개발자, 소프트맥스 최연규 개발이사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한국 게임시장에서 최고 인기 장르는 RPG다. PC 패키지 시절부터 온라인, 모바일에 이르기까지 RPG는 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에만 해도 한국에서 RPG는 비주류 장르였다. 이전에도 '신검의 전설' 등의 국산 RPG가 소수 존재했으나,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려질 정도의 큰 흥행은 거두지 못했다. 대부분의 RPG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제작된 타이틀로 한글화 없이 직수입 판매되었기에, 외국어를 할 줄 아는(혹은 대사집을 구해 간신히 즐기는) 마니아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던 RPG가 대중화된 것은 1994~1995년,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소프트맥스의 '창세기전'이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면서부터다. 특히 '창세기전'은 플레이어의 시야를 극대화시킨 시뮬레이션 RPG(이하 SRPG) 장르를 채택해, 복수와 사랑 등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국가 간의 전쟁, 인류와 신의 대립 등 대하드라마 급의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연출했다. 또한, 평범한 지상전에서부터 해상, 공중, 우주까지 넘나드는 전투 무대, 화면을 가득 메우는 백 단위의 전투 유닛과 화려한 연출 등은 이제 막 걸음마 단계였던 국내 게임 개발자들에게 ‘한국에서도 이런 수준의 게임이 나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이처럼 한국 게임역사에 한 획을 그은 '창세기전' 시리즈는 대학을 휴학하고 게임 개발을 시작한 20대 청년의 손에서 탄생했다. 대한민국 1세대 게임개발자인 소프트맥스 최연규 개발이사는 '창세기전'의 아버지이자 한국형 RPG의 초석을 쌓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국내 게임업계의 부흥기를 이끈 선구자 중 한 명이다.

집안과 학교가 벌컥 뒤집힌 게임 개발 선언

최연규는 1973년 서울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80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국내에서 막 퍼지고 있던 오락실을 통해 자연히 게임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는 삼성과 삼보,금성(LG) 등 국내기업에 애플 수준의 컴퓨터를 개발하여 보급하는 정부주도의 교육용 컴퓨터 개발사업이 이루어질 때였는데, 이로 인해 국내 가정에 PC가 조금씩 보급되고, 컴퓨터학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최연규는 이러한 영향을 직접 받으며 자란 한국 게이머 1세대였다.

미국 성향의 애플 플랫폼과 일본 성향의 MSX 플랫폼이 양강 체제를 이루고 있던 80년대 중반, 최연규는 우연한 기회에 애플II 컴퓨터를 갖게 된다. 유치원과 피아노학원을 운영하셨던 어머니 덕에 그는 동생과 함께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동생이 피아노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내자 어머니가 PC를 사 주신 것. 당시 컴퓨터는 한 반에 한두 명 정도만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는데, 동생 덕분에 그는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빠르게 PC를 접할 수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받은 PC를 통해 최연규는 컴퓨터 롤플레잉게임(RPG)의 시초라 불리는 '울티마' 시리즈를 접했다. 이전까지 그는 게임이라면 오락실에서 동전을 넣고 짧은 시간 동안 즐기는 '갤러그'나 '올림픽' 같은 액션/슈팅 장르만 봐 왔다. 그러나 '울티마'는 만화나 소설 못지 않은 방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 속에서 펼쳐지는 모험을 통해 감동과 재미를 선사했고, 이는 이제껏 생각해 왔던 게임의 개념을 아득히 초월하는 것이었다. 최연규는 '울티마' 시리즈를 통해 충격을 받았다. 게임을 통해 책이나 영상을 넘어서는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최연규를 RPG에 빠지게 만든 작품 '울티마 4' (사진출처: steambb.com)

그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한국은 지리적/문화적 여건 상 일본과 미국 성향의 게임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혼재하는 시장이었다. 최연규는 미국의 애플II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변 친구들을 통해 MSX나 닌텐도 등의 일본 게임도 접할 수 있었다. 훗날 그가 '창세기전'과 '마그나카르타' 등 미국과 일본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게임을 개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국과 일본의 판이한 게임 역사를 함께 보고 자란 덕이 컸다. 최연규는 게임 외에도 '건담' 등의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국내와 해외의 만화, 무협소설 등에도 깊이 몰입하는 등 다양한 서브 컬쳐를 두루 접하며 한때 애니메이션 제작자가 되려는 꿈을 꾸기도 했다.

최연규가 게임 개발자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확실히 굳힌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다. 사실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89년, 한국에서 '게임 개발자'는 직업으로 인정받기는커녕, 개념과 전례조차도 전혀 없는 미지의 직종이었다. 최연규는 자신의 장래희망을 부모님께 전하기 위해 '저는 울티마 같은 작품을 만드는 게임 개발자가 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당연히 집안이 뒤집어졌다. 부모님은 '울티마'가 대체 뭐냐며 담임선생님을 찾아갔고, 그 때문에 최연규는 선생님과 면담을 하며 '울티마'가 무엇인지 열심히 설명해 드려야 했다. 그러나 끝내 선생님과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고, 92년도에는 친구를 따라 광운대 전자재료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게임에 대한 열정은 나날이 커졌다.

PC통신 1세대, 학규굴을 거쳐 소프트맥스로

대학에 입학한 최연규는 486 PC를 구입하고 모뎀을 설치하면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같은 PC통신을 접한다. 그는 대학 시절 게임 개발을 주제로 한 동호회 '콘솔게임동호회(게임기동)'의 운영진으로 활동했으며, 동시에 게임잡지 'PC챔프'에서 ‘최개굴’이라는 필명으로 게임 공략도 시작했다. 이로 인해 그는 평범한 게이머에서 게임 개발자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게임 개발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이 전무했던 시대였기에, '게임기동' 운영진과 'PC챔프' 필자 생활을 통해 게임을 개발자의 시선에서 분석/접근하는 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그는 각종 게임관련동호회에서 폭넓게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 와중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뭉쳐 실제로 게임을 개발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이때 함께한 인물이 현 소프트맥스 전무 조영기, '창세기전' 모든 시리즈의 아트디렉터를 맡은 전석환 등으로, 소프트맥스의 핵심 멤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곳에 모인 아마추어 개발자들은 서너 명만 앉아도 꽉 찰 정도로 좁은 옥탑방에 모여 컵라면만 먹으며 게임 개발에 전념했다. 이보다 더 열악할 수 없을 정도의 환경이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게임 개발 및 출시 경험이 거의 없던 이들이었기에, 처음부터 오리지널 작품에 도전하기보다는 연습을 겸해 코지마 히데오의 잠입 액션 게임 '메탈 기어(MSX버전)'를 PC로 컨버전하기 시작했다. 이는 상업적인 용도가 아니라 일종의 공부로, 당시 많은 국내 개발자들은 해외의 인기 게임을 컨버전하며 실력을 키웠다.

그렇게 '메탈 기어'를 컨버전하던 이들은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마침 1스테이지 컨버전을 끝냈을 무렵 이원술이 이끄는 손노리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데모를 공개해 화제를 모았고, 최연규 역시 이에 자극받아 자신만의 오리지널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비록 초기 개발 단계에서 중단되었지만, 이때의 각오로 만들어졌던 RPG가 훗날 '창세기전'의 모태가 되는 '윈드로시아'다.

'윈드로시아'를 제작하던 도중, 최연규는 하이텔에서 또 다른 소모임인 '게임제작동호회(게제동)'를 운영하던 김학규(현 IMC게임즈 대표)와 만난다. 당시 김학규 대표는 거의 혼자서 게임 개발을 주도하며 주변 선후배와 친구들에게 게임 개발 노하우를 가르쳐주곤 했는데,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을 바탕으로 직접 제작한 게임 엔진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었다. 반대로 최연규의 팀은 당시 방대한 RPG를 개발하기엔 경험과 기반 시스템이 부족했다. 결국 김학규와 최연규는 연합 팀 아트크래프트를 결성하고, 함께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


▲게임 필자 생활을 시작한 게임잡지 'PC챔프' 창간호 (좌)와 
최연규와 공동작업을 진행했던 IMC게임즈 김학규 대표(우)

이들은 김학규의 연립주택 지하실을 스튜디오 삼아 게임을 제작했는데, 이곳은 아마추어 개발자들 사이에서 통칭 '학규굴'이라 불렸다. '학규굴'은 단순한 게임 개발실을 넘어 열정 가득한 아마추어 게임 개발자들의 아지트 역할을 겸했는데, 이곳에 드나들던 인물로는 '마비노기' 시리즈 등을 만든 데브캣의 김동건, 이은석, '팡야'와 '앨리샤' 등을 제작한 서관희 등 현 게임업계 유명인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최연규는 자신이 개발하던 RPG '윈드로시아'보다는, 김학규가 만들고 있던 액션게임 '리크니스'를 먼저 완성하기로 한다. 팀원들 모두 최대한 첫 상용화 게임을 내고 싶었기에, 개발 기간이 오래 걸리는 RPG보다는 좀 더 빨리 만들 수 있는 액션게임을 먼저 개발하기로 협의한 것이다. 그러나 '리크니스' 개발 도중 예상치도 못했던 김학규의 입대 영장이 나왔고, 이 때문에 개발실이었던 '학규굴'은 주인을 잃게 되었다. 결국 '리크니스' 개발팀은 게임을 개발할 장소가 없어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

이때, 그들에게 작업실을 제공해 준 사람이 현 소프트맥스 정영원 대표다. 당시 정영원 대표는 소프트맥스의 전신 격인 갑인물산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팀 내에 있던 조영기를 통해 이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개발실을 제공해줬다. 갑인물산은 일본에 메가드라이브 게임을 납품하던 회사로, 회사 규모에 비해 사무실이 넓었기에 투자 형식으로 최연규 등의 개발 공간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첫 작품인 '리크니스'가 완성되기 전, 갑인물산은 부도를 이기지 못하고 도산하고 만다.

갑인물산의 도산 이후, 정영원 대표는 최연규를 비롯한 게임개발 인원들을 모아 소프트맥스를 창립한다. 이것이 1994년 초의 일로, 학규굴의 인원 대부분이 이 때 '리크니스' 프로젝트와 함께 소프트맥스에 입사했다. 이후 최연규는 소프트맥스에서 '리크니스' 개발을 완성해 시장에 내놨고, 이어 '스카이&리카' 라는 슈팅게임도 출시했다. 그러나 최연규의 머릿속엔 아마추어 시절 개발하던 RPG '윈드로시아'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소프트맥스의 첫 게임 '리크니스' (사진출처: 소프트맥스 공식 사이트)

'창세기전' 시리즈의 탄생

김학규와의 연합팀 결성과 '리크로스' 개발로 인해 잠시 보류되었던 RPG 개발의 꿈은 '스카이&리카' 이후 본격화되었다. 어린 시절 '울티마'를 통해 얻은 감동을 재현시키고 싶었던 최연규는 새로운 RPG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와중 소프트맥스에서 만난 프로그래머가 만든 SRPG 게임 엔진과 개발 툴을 보게 된다. 최연규가 '메탈기어'를 PC로 컨버전하며 게임 개발을 공부한 것처럼, 해당 프로그래머 역시 당시에 메가드라이브에서 인기가 많던 '랑그릿사'를 PC로 컨버전하기 위해 게임엔진과 툴 등을 개발해 왔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본 순간 최연규의 머릿속에서 '창세기전'의 뼈대가 잡히기 시작했다.

최연규는 개인과 국가를 아우르는 방대한 판타지 세계관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선, 주인공 1명의 시점을 따라가는 일반 RPG보다는 전지적 시점에서 여러 캐릭터를 다루는 SRPG형태가 더 효율적일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최연규는 예전부터 구상했던 RPG를 SRPG에 맞게 바꿔 가며 본격적인 게임 기획에 착수했다. 스토리적으로는 '스타워즈'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모티브로 삼았고, 장면 연출에서는 SF나 애니메이션 등의 서브컬쳐 문화를 오마쥬하거나 국내 무협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를 도입했다. 그렇게 '창세기전'의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졌다.

'창세기전'의 개발은 5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팀에서 이루어졌다. 최연규가 기획을 맡고, 그래픽 디자이너 2명, 프로그래머 2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업무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 않아, 기획자가 도트를 찍고, 프로그래머가 스토리에 관여하는 등 공동작업의 성향이 강했다. 국내 게임산업이 막 싹트기 시작했던 시기였던 데다, 아직 영세했던 회사 사정상 어쩔 수 없는 구조였다. 인원이 적으니만큼 빠른 의사결정 등의 장점도 있었지만, 열악한 개발환경 및 부족한 인력, 짧은 개발기간 등으로 완성도 측면에서는 빈틈이 많았다. 실제로 '창세기전'의 토대가 된 엔진과 툴을 만들고 스토리와 기획에도 상당 부분 관여했던 프로그래머는 '창세기전 1' 출시 이후 버그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다 결국 퇴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열악했던 환경을 딛고 1995년 12월 출시된 '창세기전 1'은 국산 RPG로는 처음으로 SRPG 장르를 채택했고,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10장이라는 대용량을 자랑하는 게임이었다. 물론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창세기전'이 발매되었던 95~96년은 PC게임 유통 시장이 크지 않았기에 흥행에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창세기전 1' 은 초기에 CD-ROM이 아닌 2.5인치 플로피 디스크로 출시되었는데, 자체적인 오류가 높은 플로피 디스켓의 특성 상 10장의 디스크 중 1장이라도 에러가 날 경우 전체 게임이 설치되지 않는 예상치 못한 문제까지 겹쳤다. 출시 이후에는 넘치는 버그를 잡기 위해 우편으로 패치 디스켓를 일일이 발송하기도 했다.


▲방대한 세계관과 강렬한 액션으로 게이머들에게 어필한 '창세기전'

그러나 국산 대작 RPG에 목말라 있던 게이머들은 '창세기전'에 엄청난 호응을 보냈다. 안타리아라는 세계의 탄생과 신들의 이야기, 국가 간의 전쟁과 영웅의 모습을 오가는 방대한 세계관은 RPG 및 판타지 팬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고, '바람의 나라'와 '꿈속의 기사' 등으로 많은 팬을 보유한 순정만화가 김진이 일러스트에 참여한 것 역시 많은 화제를 모았다. 북미나 일본 게임이 대세를 이루고 있던 RPG 시장에서 국내 정서를 충실히 반영해 제작된 '창세기전'은 ‘RPG=마니아 게임’이라는 공식을 깨고 많은 유저들에게 어필했으며, 많은 국내 RPG 개발자들에게 이정표를 제시했다.

이후 최연규는 1년 후인 96년 겨울, 후속작인 '창세기전 2'를 출시했다. 사실 '창세기전'은 1개의 타이틀로 마무리될 예정이었으나, 개발 도중 부족한 인력으로 촉박한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두 편으로 분리 발매가 결정되었던 것. '창세기전 1'의 하편 격인 '창세기전 2'는 안정성이 높은 CD-ROM으로 출시되었으며, 전작 '창세기전 1' 의 이야기까지 모두 담고 있어 '창세기전'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

'창세기전 2'는 발매와 동시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함께 국산 RPG를 대표하는 명작 반열에 올라섰고, 소프트맥스는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게임 개발사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국내 게임업계에는 ‘최고의 게임개발사는 RPG를 잘 만드는 회사’ 라는 공식이 생겨났는데, 이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통용되는 법칙이다.


▲국내에서의 인기를 통해 일본에도 수출된 '창세기전' (좌)와 
유명 만화가 김진의 참여 역시 큰 화제가 되었다(우)

소프트맥스의 자금 위기로 인해 부활한 '창세기전'

'창세기전 2' 출시 이후, 최연규는 여러 가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이 시기 그는 '에임포인트'와 '판타랏사' 등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개발했는데, 특히 '판타랏사'의 경우 전무후무한 잠수함 심해 RTS(리얼타임 전략시뮬레이션)라는 시도를 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너무 생소해서였을까, 위 두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고 소프트맥스에도 한 차례 경영 위기가 찾아왔다.


▲잠수함 심해 전략 시뮬레이션이라는 독특한 시도를 했던 '판타랏사'

결국 차기 타이틀의 성공 여부에 회사의 명운이 걸렸고, 그 임무를 최연규가 맡았다. 그는 회사의 위기 상황에서 섣불리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는 기존 인기작을 이어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본래 2편으로 매듭지었던 '창세기전'의 후속작을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이하 서풍의 광시곡)'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연규는 '창세기전'의 스토리는 2편에서 끝났다고 생각했고, 정식 스토리는 더 늘려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창세기전 3'가 아니라 '창세기전 외전'이라는 이름을 짓고, SRPG가 아닌 일반 RPG를 선택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서풍의 광시곡'은 과거 게임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던 '윈드로시아'의 스토리 라인을 이어받았다. 복수극의 원조격 고전 소설인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모티브로 삼고, 종교재판이 이루어지던 중세 유럽문화와 셰익스피어 소설의 장면도 다수 삽입해 기존 '창세기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냈다. 여기에 '창세기전' 특유의 세계관이 덧붙여지며 2편으로 완결되었던 '창세기전'의 세계관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비록 자금 문제로 인해 개발을 서두른 감이 있긴 했지만, '서풍의 광시곡'은 특유의 어두우면서도 매력적인 분위기와 몰입도 있는 스토리, 무기 내구도 및 멀티 엔딩 등 신선한 시스템들이 고루 어우러져 기대 이상의 흥행을 기록했다. 이후 '서풍의 광시곡' 은 일본과 중국, 대만 등으로 수출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세가의 드림캐스트와 소니의 PS2로도 컨버전 되었다. 특히 PS2판에서는 일러스트도 전면 리뉴얼되며 또 한 번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경영난으로 인해 외전격으로 개발되었던 '서풍의 광시곡'
훗날 일본과 중국, 대만으로도 수출되었다

'서풍의 광시곡' 이후 최연규는 정말로 '창세기전' 시리즈를 매듭짓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는 의미로, 이전까지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장르의 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의 차기작은 미소녀들이 잔뜩 등장하는 육성&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여기에 전략 요소까지 합쳐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겠다는 목표로 제작에 들어갔다. 이 작품이 바로 '템페스트'다. 본격 미소녀게임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최연규는 일본에서 일류 미소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던 타카 토니(TONY)와 계약을 맺기도 했다.

그렇게 미소녀 전략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템페스트'는 순조롭게 개발되어 가는 듯 했지만, 상황은 최연규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바로 IMF라는 국가적 위기가 닥친 것이다. 98년부터 불어닥친 IMF 사태로 '창세기전' 시리즈의 유통을 맡았던 하이콤이 부도를 맞이했고, 이로 인해 소프트맥스는 '서풍의 광시곡'의 판매 수익과 로열티 등을 전부 회수하지 못하고 또 다시 경영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소프트맥스 경영진은 또다시 흥행 보증수표 '창세기전' 시리즈의 새로운 타이틀을 출시하자는 불가피한 선택을 했다. 그러나 게임을 처음부터 만들기에는 여유가 없는 상황. 결국 최연규가 제작 중이던 '템페스트'는 '창세기전 외전 2'라는 이름을 달고 '창세기전' 세계관에 강제 편입되고 만다.

결과만 놓고 보면 '템페스트'는 '창세기전'의 명성에 힘입어 나름의 흥행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전혀 다른 콘셉으로 개발되던 게임을 어거지로 '창세기전'과 연결하려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겼다. 자유로운 영혼의 흡혈귀였던 주인공은 의도치 않게 이중생활을 즐기는 전작의 책사 '클라우제비츠'로 바뀌었고, 후반부에 대폭 추가된 '창세기전' 관련 캐릭터와 엔딩 부분은 원 일러스터였던 토니와의 계약에 없던 내용이었기에 별도의 작업을 통해 추가해야만 했다. 이 때 긴급 투입된 인물이 이후 '창세기전 3 파트 1~2' 와 '마그나카르타' 시리즈의 원화를 맡게 되는 신인 일러스트레이터 김형태였다.

문제는 이러한 일정이 너무 빠듯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템페스트'를 '창세기전'에 편입하는 결정은 98년 8월 내려졌는데, 출시는 그 해 12월에 이루어졌다. 즉, 불과 3~4개월 만에 기본적인 세계관과 설정, 게임의 장르와 시스템 및 엔딩까지 모두 바뀐 것이다. 당시, 살인적인 일정을 맞추기 위해 최연규를 비롯한 '템페스트' 개발팀원들은 당시 열흘 이상 한숨도 못 자며 개발에만 전념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인력과 시간의 한계로 '에고 시스템' 등 다양한 기능이 삭제되고 말았다.


▲자금 위기로 인해 억지로 '창세기전' 시리즈에 편입된 '템페스트'(좌) 
일러스트레이터 김형태의 데뷔 역시 이 때 이루어졌다 (우)

'템페스트'로 인해 '창세기전' 시리즈의 전체적인 세계관도 많이 변경되었다. 당초 설정에 없었던 환생이라는 요소가 도입되었고, '창세기전 2'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최종 보스 '베라모드'의 또 다른 음모 등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결국 최연규는 이러한 스토리적인 결점을 수습하기 위해 이후 출시된 '창세기전 3'에서 세계가 돌고 돈다는 뫼비우스 세계관을 도입했고, '창세기전 3' 파트 1~2를 통해 이를 완성시켰다.

결과적으로 뫼비우스 세계관이 도입된 '창세기전 3 파트 1, 2'는 스토리적 측면에서도 상당한 호평과 함께 대한민국 게임대상(2001)까지 받았지만, 이는 최연규가 애초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그는 훗날 “창세기전 시리즈는 개발자로서 아쉬움이 많은 프로젝트였지만, 당시 현실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 속에서의 최선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훗날 MMORPG로 개발되는 '창세기전 4'에서 원작의 모순과 문제점을 보완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오히려 원작을 훼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뫼비우스 세계관을 도입해 시리즈를 완결지은 '창세기전 3 파트 1~2'

마그나카르타와 콘솔 시장 진출

우여곡절 끝에 '창세기전' 시리즈가 '창세기전 3: 파트 2'로 완결되자, 최연규는 새로운 프랜차이즈의 필요성을 느꼈다. '창세기전' 시리즈는 작품 간 스토리 연결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후속작에 영향을 너무 많이 미쳤고, 게임 개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유로운 발상을 가로막았다. 이에 시리즈 간에도 완전히 독립적인 세계관을 가지는 새로운 IP를 기획했는데, 그것이 바로 '마그나카르타'다.

2001년 PC로 출시된 '마그나카르타'는 소프트맥스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3D 게임으로, 스토리와 세계관적인 면에서 세간의 호평을 받았다. 최연규 역시 개인적인 스토리라이터로서 정점에 있었던 순간이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최연규 3D 게임은 처음으로 제작한 터라 그래픽과 최적화 등 많은 부분에서 미숙한 점을 보였고, 마침 소프트맥스의 기업공개 및 상장 시기가 겹치는 바람에 최대한 빨리 게임을 출시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도 시달렸다. 이는 결과적으로 게임 완성도를 심각하게 저하시켰다. '마그나카르타'가 출시된 이후 게임을 구동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버그가 속출했고, 결국 불매 운동에 이은 리콜 사태까지 맞이했다.


▲소프트맥스 사상 초유의 리콜 사태를 부른 '마그나카르타'

'마그나카르타'가 출시되던 2001년은 소니의 PS2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보급되며 콘솔 시장의 부흥을 이끌던 시기였다. 반대로 국내 PC게임 시장은 갈수록 늘어나는 불법복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결국 최연규는 '마그나카르타 1'에서 느낀 아쉬움을 더 큰 시장으로의 진출을 통해 극복하기 위해, '마그나카르타' 차기작을 PC 대신 콘솔로 출시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난생 처음 PC가 아닌 콘솔 플랫폼으로 게임을 개발하려다 보니, 적응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까다로운 개발 프로세스와 검수 체계를 거치다 보니 자연스레 개발 기간이 길어졌고, PS2로 출시된 '마그나카르타: 진홍의 성흔'이나 Xbox360으로 개발된 '마그나카르타 2'는 개발 기간이 각각 4년씩 걸렸다. 1년 내외로 개발되던 전작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긴 시간이었다. 충분한 개발 기간이 주어짐에 따라 디버깅 역시 전문 업체를 통해 1년 이상 꼼꼼히 진행할 수 있었고, 게임의 완성도는 PC시절과는 달리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다.


▲PC에서 콘솔로 적을 옮긴 '마그나카르타: 진홍의 성흔'(좌)와 
'마그나카르타:진홍의 성흔' 개발 당시의 최연규와 김형태(우)

창세기전 4, 게이머를 이끌어가는 게임을 만든다

최연규는 약 8년 동안 콘솔 버전 '마그나카르타' 개발에 전념했고, 2009년 '마그나카르타 2'를 마지막으로 시리즈를 종결지었다. 이때부터 최연규는 콘솔 시장의 퇴조기를 느끼고, PC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처음 계획은 '창세기전' 캐릭터를 바탕으로 구성된 카드를 가지고 다른 유저와 배틀을 벌이는 캐릭터 수집 게임이었다. 그러나 '창세기전'에 걸린 회사 안팎의 기대는 단순한 라이트게임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해당 프로젝트는 MMORPG '창세기전 4'로 발전한다.

최연규는 2009년부터 '창세기전 4' 프로젝트에 전력을 쏟고 있다. '창세기전 4'는 '창세기전 1~3'의 세계가 몇 번이고 반복되다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버린 평행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MMORPG로, 전작에 등장한 모든 주역 캐릭터들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물론, 배경이나 특성이 바뀐 새로운 모습의 캐릭터를 통해 시리즈를 재해석한다.

최연규는 해당 게임을 기획하며 자신이 즐겨 플레이했던 '슈퍼로봇대전'을 모티브로 삼았다. 다양한 게임/애니메이션/만화에 등장하는 로봇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전투를 벌이는 로봇 팬들의 축제. 이것을 '창세기전' 세계관에서 펼치는 것이 최연규의 새로운 목표다. 여기에 당초 기획 의도였던 캐릭터 수집 게임의 콘셉을 조합해 원작의 여러 에피소드를 새롭게 구성하고, 수집한 다양한 캐릭터를 전장에 집어넣어 전투를 펼치는 꿈의 대전을 구현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다.


▲기존 캐릭터의 재해석을 들고 나온 '창세기전 4'

다만, PC 패키지 및 콘솔 분야에서 온라인게임으로 넘어오려니 어려운 과정도 많았다. 온라인게임 전문 인력은 거의 다 새로 모집해야 했고, 전작의 세계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 역시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 '창세기전'의 캐릭터를 수집한다는 콘셉을 위해서는 일반적인 온라인게임의 1인칭 구도를 벗어나야 했고, MMORPG에서 금기로도 여겨지는 멀티 캐릭터 컨트롤을 완성도 높게 구현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겪어야 했다.

최연규는 과거 아마추어 개발자 시절부터 '유저를 리드하는 게임을 만들자' 라는 개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시류를 쫒아가는 것 보다는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자는 의미로, 현재 소프트맥스 개발실의 표어이기도 하다.

그는 슈팅 게임이 대세였던 90년대 초반에 대하 RPG '창세기전'을 개발했으며, '판타랏사'에서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잠수함 심해 RTS'라는 독특한 시도를 했다. 이 밖에도 육성/연애 시뮬레이션과 RPG를 조합한 '템페스트', 가정용 콘솔 시장의 부흥을 예측하고 도전한 콘솔 버전 '마그나카르타', 캐릭터 수집과 MMORPG를 조합한 '창세기전 4'까지… 최연규의 작품 대부분에는 이러한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컵라면을 먹어 가며 '메탈 기어'를 따라 만들던 20대 초반의 청년은 어느덧 게임 개발에 뛰어든 지 20년이 넘은 베테랑 개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게임 개발과 기획이 어렵게 느껴진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한다. 2014년, 대한민국 RPG에 빠질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최연규는 '창세기전 4'라는 또 다른 도전이자 전설을 준비하고 있다.


▲또 한 번의 도전을 준비하고 있는 게임 개발자 최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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