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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호러게임의 아버지, 바이오하자드의 미카미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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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혹은 어디선가 '호러게임(Horror Game)'이라는 용어를 접했을 때, 아마 당신의 머릿속에는 여러 게임이 떠오를 것이다. 나를 무섭게 했던 녀석들. 개인적으로는 여러 차례 내 심장을 마사지해주신 '화이트데이'의 수위가 떠오르지만, 아마 게이머 대부분이라면 캡콤의 명작 '바이오하자드'를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바이오하자드'가 '호러' 장르를 대중화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군림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거장 미카미 신지는 바로 이 '바이오하자드'를 탄생시킨 남자다. 사실 이 부분 하나만으로도 그의 업적은 세계 게임사에 길이 남는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바이오하자드' 이후 캡콤의 프로듀서로 데뷔해 개발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카미야 히데키, 타쿠미 슈 같은 걸출한 인재가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 지휘봉 아래 다수의 명작이 탄생했다. 잠재력이 충분한 개발자들에게 기회를 열어준다는 것은 곧 열정의 확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열정이 전염될수록 더 좋은 게임이 탄생할 수 있고, 이게 곧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법칙으로 믿었다. 미카미 신지의 이런 신념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호러게임의 아버지 미카미 신지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착한 게임' 만들던 청년

1965년 태어난 미카미 신지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매우 엄격한 아버지 아래서 자란 그는 또래 아이들과 다른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다소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했는데, 어떤 때는 숙제를 하지 않고 잠들었다는 이유로 한밤중에 집 밖으로 쫓아낸 적도 있다. 그 당시 그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폭력적인' 사람으로 기억됐지만, 나이가 찬 이후에는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됐다.

이후 미카미 신지는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 상학부에 입학했다. 게임과의 인연도 이 시기에 거의 처음 이루어졌다. 당시 그는 'Appoooh'라는 레슬링 게임에 푹 빠져 있었는데 이를 통해 서서히 게임이 주는 매력을 알게 됐다. 대학생활을 하기까지 그는 게임 개발자, 아니 게임이라는 문화 자체와 거리가 있었지만 게임은 당시 다소 거칠었던 그의 마음을 살살 녹여주는 벗으로 삼기 충분한 힘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미카미 신지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우연히 캡콤이라는 회사가 주최한 어떤 개발자 파티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마계촌'이나 '1942' 등을 즐긴 경험이 있지만 캡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저 파티에 참여하면 호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줄은 상상도 못했다. 미카미 신지는 캡콤 직원들과 이야기하면서 게임을 제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상상했다. 그만큼 당시 캡콤 직원, 정확히 게임 개발자들이 뱉는 말에는 미래가 있었고 열정이 있었다.

결국, 미카미 신지는 인생에서 커다란 도전을 해보기로 마음먹는다. 게임을 직접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프로그래밍 등 개발 지식은 없었지만 '게임이 좋다'는 젊은 패기 앞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닌텐도와 캡콤에 입사지원을 했고, 고민 끝에 캡콤을 선택하게 된다. 닌텐도보다는 캡콤이 자신에게 조금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1989년, 미카미 신지는 이렇게 캡콤의 기획자로 입사했다.


▲ 미카미 신지가 제작에 참여한 알라딘, 한국 게이머들에게도 잘 알려졌다

캡콤 입사 이후 그는 '캡콤퀴즈: 하테나의 대모험'를 시작으로 닌텐도의 슈퍼패미컴과 게임보이용으로 준비됐던 '로저 래빗(1991)' '알라딘(1992)' '구피와 맥스: 해적섬 대모험(1993)' 개발에 참여했다.

이렇게 몇 종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게임제작에 열중한 그는 창작의 과정이 자신과 잘 맞음을 느꼈다. 때문에 아주 당연하게도, 서서히 어떤 욕망 하나가 찾아와 그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미카미 신지는 약 4년 가까이 디즈니 IP를 기반으로 한 '착한게임'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사실 여기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저 연령층이 아닌 성인을 대상으로 한 어떤 특별한 게임을 제작해보고 싶었다. 게임 개발자로서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행히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버추어파이터(1993)'가 일본을 강타하면서 3D게임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게다가 가정용게임기 역시 기술적 발전과 맞물려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캡콤은 2D게임에서 강점을 보였던 만큼, 3D게임에 대해서는 다소 둔감했다. 이에 내부적으로 R&D 형태의 프로젝트 구상이 있었지만 뾰족한 수는 없어 보였다. 미카미 신지 역시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곧 기회라고 생각했다.

저, 호러게임을 만들어볼까 하는데요

1994년, 미카미 신지는 오랜 구상 끝에 회사에 기획안 하나를 제출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3D 호러게임이었다.


▲ 역사의 시작 '바이오하자드'

미카미 신지는 밝은 분위기로 묘사된 디즈니 게임과 달리 어두운 분위기로 신작을 만들고 싶었다. 호러가 최적이었다. 마침 그는 '어둠속에나홀로(1992)'라는 게임을 즐겨 했는데 여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비롯해 3D 기법을 활용한 카메라 앵글과 시점 등 연출 부분이 특히 뛰어났다. 영감을 얻은 미카미 신지는 더 좋은 그래픽에 정말 무서운 게임 하나를 만들기로 마음먹는다. 회사에 기획안을 낸 결정적인 이유다.

사실 캡콤은 '스위트홈'이라는 호러 장르 게임을 내놓은 전례가 있지만, 당장 시장에서 3D액션이 부상하고 있던 만큼 한 청년의 호기 넘치는 이 기획안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동시에 신선하기도 했다. 당연히 회사 차원에서는 3D를 입히더라도 액션이나 RPG 등 최대한 안전한 장르를 구상한 만큼 호러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 결국, 캡콤은 개발비용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이 청년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당시 미카미 신지는 F1 레이싱 게임 하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캡콤은 이를 전면 취소하고 신작 '프로젝트 바이러스'의 디렉팅을 맡기게 된다.

미카미 신지는 프로젝트에 본격 돌입하면서 호러, 정확히 말해 서바이벌 호러라는 장르를 구상했다. 플레이어(주인공)가 한 으스스한 저택에서 좀비와 사투를 벌이며 탈출하는 형태로 뼈대를 잡은 것이다. 과거 '스위트홈'에 참여한 개발자들도 팀에 합류하면서 서서히 정체성을 갖춰가며 호흡이 불어넣어졌다.

'프로젝트 바이러스'는 원래 1인칭 시점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미카미 신지가 원하는 그런 무서운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았다. 이에 '어둠속에나홀로'의 연출을 참고해 카메라 앵글이 바뀌며 화면을 부분부분 보여주는 형태로 변경됐다. 조작법이 좀 답답해지긴 했지만, 소재가 소재다 보니 호러 분위기를 살려주는 장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 전투는 역동적인 것보다는 강약의 조화를 잘 이루어냈다.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탄약, 플레이어는 서서히 다가오는 좀비의 압박 속에서 매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판단해야 했다. 전투의 임팩트는 떨어질지 몰라도 플레이어가 느끼는 심장박동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출은 당시 호러영화와 기존 게임을 많이 참고했다. 켈베로스가 창문을 깨고 들이닥쳐 심장을 마사지하는 장면 등은 이미 기존 80년대 영화에서 많이 봤던 장면이다. 다만 '보는 것'과 '하는 것' 즉 현장감에서 큰 차이가 나니 이런 연출은 훌륭한 그래픽(당시에는 훌륭했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서바이벌을 내세운 만큼 퍼즐 등 어드벤처 요소도 많이 넣었다. 무서워도 할 수밖에 없는 동기를 만들어 넣은 셈이다.


▲ '바이오하자드'는 당시에 훌륭한 그래픽이었다


▲ 여러 게이머들의 심장을 두드린 공포의 문, 해당 아이디어는 '스위트홈'에서 얻었다

미카미 신지는 이 게임을 제작하며 섬세한 부분에 신경을 특히 많이 썼다. 사실 캡콤 내부에서 해당 프로젝트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시장흐름에 따른 도전 가치에 더 의미를 두려는 그런 눈치였다. 미카미 신지는 이런 기운 없는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방향을 잃지 않았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래픽, 스토리, 연출 등 모든 부분에서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즉, 미카미 신지의 장인 정신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렇게 1996년, 미카미 신지가 처음으로 디렉팅한 서바이벌 호러 '바이오하자드'가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그는 몇만 장만 팔려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게이머들의 반응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바이오하자드'는 그 해에만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이는 플레이스테이션의 첫 밀리언셀러 타이틀이기도 하다. 이 게임은 '레지던전이블'이라는 이름으로 북미로도 출시됐는데, 더 호응을 얻으며 통합 5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게 된다. 이렇게 '바이오하자드'는 패러다임을 바꾸며 호러가 더이상 마니아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증명해냈다. 호러게임이 ‘모두의 장르’가 되는 순간이었다.


▲ '바이오하자드'는 영화로도 개봉됐다, 사진은 '레지던트이블 2' 질 발렌타인

캡콤의 프로듀서로

'바이오하자드'의 성공으로 미카미 신지의 생활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단숨에 스타 개발자 반열에 올라선 그는 캡콤의 절대적인 신뢰를 쌓게 됐고, 그의 후속작을 기대하는 팬층도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다.

미카미 신지는 후속작을 준비하면서 또 한 번 큰 도전을 한다. '바이오하자드'의 후속작은 준비하지만, 디렉터를 다른 인물에게 위임하기로 한 것이다. 게임이 더 발전하고 독창성을 갖추기 위해 다른 유능한 개발자에게 기회를 주고, 자신은 프로듀서로서 게임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원하는 스탠스를 취하기로 한 셈이다. '바이오하자드'의 대단한 성공에 신뢰한 캡콤은 미카미 신지의 의견을 존중했고, 그렇게 후속작인 '바이오하자드2'는 카미야 히데키가 디렉터를 맡게 됐다. 카미야 히데키는 '바이오하자드'에서 기획 파트를 담당했던 인물이다.

물론 이런 구조는 미카미 신지에 있어 처음 시도인 만큼 시련도 있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이 시련은 '바이오하자드2'가 약 70~80% 이상 만들어진 뒤에 드러났다. 미카미 신지는 '바이오하자드2'의 전반적인 콘셉이나 특징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 모든 것을 조합했을 때 이상하리만치 완성도가 떨어졌다. 이도 저도 아닌 느낌마저 스며들었다. 결국, 미카미 신지는 그의 게임개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첫 번째 선택을 한다. 지난 1년의 노력이 물거품되는 것을 감내한 채, 프로젝트를 뒤집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는 물론 개발진 모두 처절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최고의 성과로 되돌아왔다. 1년 뒤, 완성된 '바이오하자드2(98)'는 시장에서 보란 듯 대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이 게임은 전작에 이어 총 580만장 이상을 판매하며 블록버스터 호러게임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렇게 프로듀서로서 데뷔에 성공한 미카미 신지는 '디노 크라이시스(99)' 제작 이후, 계속해 유능한 개발자 발굴에 힘을 쏟았다. 참고로 '디노 크라이시스'는 '바이오하자드'와 흡사한 서바이벌 호러 장르로 좀비가 아닌 공룡이 등장했다. 워낙 '바이오하자드' 붐이 컸던 만큼 이 게임 역시 24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질 발렌타인·크리스 레드필드·클레어 레드필드·레온 스콧 케네디에 이어 레지나라는 인기 캐릭터가 탄생했다.


▲ '바이오하자드'와 비슷한 느낌으로 제작된 '디노 크라이시스' 시리즈

미카미 신지는 '디노 크라이시스'를 내놓음과 함께 캡콤 4개발본부 수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지휘 아래 4개발본부는 '바이오하자드'와 '디노 크라이시스' 시리즈는 물론 '데빌메이크라이(01)' '역전재판(01)' 등을 내놓았다.

여기서 더 중요한 미카마 신지가 발굴한 인재들이다. 그의 지휘 아래 디렉터를 맡은 인물은 카미야 히데키, 타쿠미 슈, 고바야시 히로유키, 이나바 아츠시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카미야 히데키는 앞서 언급한 대로 '바이오하자드2'를 제작하며 인지도를 쌓았고, 이후 '데빌메이크라이'와 '뷰티풀 죠' 등을 만들었다. 참고로 '데빌메이크라이'는 미카미 신지와 카미야 히데키가 '바이오하자드' 후속작을 제작하던 중 탄생했다. 두 남자는 후속작에서 액션에 비중을 실었는데, 이게 도통 서버이벌 호러와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만든 결과물 자체도 묘한 독창성이 있었다. 결국 둘은 방향을 완전히 뒤집고 스타일리시 액션을 추구한 게임 하나를 만드는데 이게 바로 '데빌메이크라이'다. 이 게임을 성공적으로 이끈 카미야 히데키는 이후에도 '베요네타' 등의 액션게임을 제작하며 감각을 여실히 보여줬다.

'역전재판'으로 유명세를 탄 타쿠미 슈는 '디노 크라이시스' 개발에 참여했던 인물로, 추리를 전면에 내세운 아이디어를 미카미 신지가 수용함으로써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바야시 히로유키는 '데빌메이크라이' 등에 제작에 참여하다 'PN.0.3'이라는 근미래 지향 게임을 만들었고, 이후 미카미 신지에 이어 4개발본부 프로듀서에 오르게 된다. 이나바 아츠시는 40개 스위치, 3개 페달, 2개 컨트롤 레버를 장착한 충격적인 컨트롤러와 함께 '철기'를 내놓았고 이후 플래티넘 게임즈로 넘어와 활약하기도 했다.

이런 유능한 개발자 발굴 및 육성은 물론 스타 개발자와 협업도 있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캡콤의 인기 타이틀 중 하나로 떠오른 '귀무자(2001)'는 '록맨'의 아버지로 유명한 경쟁자 이나후네 케이지의 지휘 아래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미카미 신지가 '바이오하자드'의 시스템을 전폭 지원한 영향이 컸다.

이렇게 미카미 신지는 캡콤에서, 아니 일본 게임산업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갖춘 인물로 부상했다. 그의 바람대로 캡콤 4개발본부는 훌륭한 게임을 다수 내놓았고, 동시에 유능한 디렉터들도 인기를 끌었다. 미카미 신지 스스로 생각한 '이상향'에 가까웠지만, 가슴 아프게도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이미 그를 덮치고 있었다.


▲ 스타일리쉬 액션으로 큰 호응을 얻은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

자유로운 날갯짓, 캡콤을 떠난 미카미 신지

때는 2001년, 당시 미카미 신지는 공식석상에서 중대발표를 한다. 앞으로 '바이오하자드' 시리즈는 모두 닌텐도의 신규 콘솔 게임큐브로 독점 발매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충격적인 발표였다. 이미 시장은 세가의 몰락으로 플레이스테이션2가 독식하고 있었고, 게임큐브는 닌텐도가 야심차게 준비한 기기라고는 하나 이미 닌텐도64로 실패한 경험이 있어 시장 기대치는 낮은 수준이었다. 일부 팬들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미카미 신지가 게임큐브 독점발매를 선언한 까닭은 여러 배경이 있다. 우선 그는 늘 게임의 퀄리티를 중요시했는데, 플레이스테이션2에 비해 조금 더 성능이 좋은 게임큐브는 이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줄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바이오하자드'는 캡콤의 상술, 정확히 표현해 '우려먹기' 정책으로 너무나 어질러져 있었다. 비중 있는 타이틀에 기대왔던 캡콤의 역사를 보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사실 미카미 신지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달갑게 느껴질 리 없다. 결국, 그는 '바이오하자드' 시리즈를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유지하고 싶었다. '독점'이라는 표현만 봐도 알 수 있듯, 틈만 나면 다른 기기로 출시되고 심지어 다운그레이드로 퀄리티까지 훼손된 '바이오하자드'를 미카미 신지 본인이 판단한 가장 훌륭한 '공간'에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곧 캡콤의 정책에 반기를 든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마 미카미 신지 스스로도 이런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가 얼마나 창작자로서 신념을 공고히 했는지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러니 캡콤 경영진과 마찰은 클 수밖에 없었다. 독자노선을 밟겠다는 것은 결국 상업성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미카미 신지는 발표와 동시에 커다란 고뇌에 빠지게 된다. 밀리언셀러보다 중요한 자신의 신념(게임을 잘 만들어야 하는 것)은 물론 판매량도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 '바이오하자드 건 서바이버' 시리즈, 기억하는 게이머가 있을까?

다행히 이런 선택에 따른 첫 번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기존 '바이오하자드'를 리메이크한 '바이오하자드(리버스)(2001)'가 최고의 퀄리티로 등장하며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명작의 귀환'이라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후 등장한 '바이오하자드 제로(2002)'는 이에 비해 결과가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라는 평가를 받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실 두 게임의 판매량은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지만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닌텐도 게임큐브가 두 게임으로 인해 판매량이 오를 정도였으니까. 다만, 캡콤 경영진은 이게 못마땅했다.

이후 미카미 신지는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각오와 함께 프로듀서를 스스로 내려두고, 디렉터로 '바이오하자드4'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앞선 두 게임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면, '바이오하자드4'는 시리즈의 전통과 앞으로의 게임적 비전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타이틀이 되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미카미 신지는 그 어느 때보다 전심을 기울여 게임제작에 힘을 쏟았다. 그렇게 출시된 '바이오하자드4(05)'는 그의 열정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최고의 평가와 함께 그 해의 게임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여기서 치명적인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미카미 신지가 '바이오하자드4' 개발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캡콤이 플레이스테이션2 발매를 공식 발표해버린 것이다. 게임큐브 독점을 자신 있게 외쳤던 미카미 신지의 자존심을 지르밟는 순간이었다. 게임큐브 판매량이 부진을 보인 까닭에 캡콤 경영진이 수익을 위해 내린 선택이었고, 이는 곧 미카미 신지를 내치겠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기도 했다. 이 선택에 대해 미카미 신지는 commit hara-kiri(할복자살)이라는 표현까지 썼으니,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 지는 충분히 알만하다.

이렇게 미카미 신지는 '바이오하자드4'라는 자신의 신념이 담긴 게임을 내놓은 이후 캡콤을 나왔다. 그리고 클로버 스튜디오로 이직했다가 다시 플래티넘 게임즈로 거취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그는 '킬러7' '갓핸드' '오오카미' '뱅퀴시' 등의 제작에 참여했지만, 게임의 평가와는 관계없이 낮은 판매량에 시달려야 했다. '쉐도우 오브 댐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고생 끝에 그는 2010년, 탱고 게임웍스를 설립했다. 이후 탱고 게임웍스는 같은 해 제니맥스 미디어에 인수되고, 현재 신작 '디 이블위딘(사이코 브레이크)'를 제작하고 있다.


▲ 전작과 완전히 다른 느낌에 초기 호불호가 갈렸지만 '바이오하자드 4'는 결국 팬들과의 교감에 성공했다

열정은 전염돼야 한다

미카미 신지는 '바이오하자드'의 아버지로서, 호러 서바이벌 장르의 선구자로서, 그리고 유능한 개발자를 키워낸 프로듀서로서 일본 게임산업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신의 업적보다는 '구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구조가 온전해야만 2011년의 '바이오하자드' 2012년의 '바이오하자드' 같은 독창적이고 기념비적인 게임이 탄생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그가 일본 게임산업에 쓴소리를 남긴 것도, 스스로 캡콤에 반기를 든 것도 모두 이런 그의 철학과 궤를 함께한다.

2014년 현재, 미카미 신지는 '디 이블위딘'을 통해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바람이 있다. 과거 '바이오하자드'처럼 성공을 누린 이후, 실력 있는 후배들을 육성해 더 훌륭한 게임이 계속 등장하는 그런 구조다. 이런 식의 열정 전염은 결국 미카미 신지의 이상향인 셈이다. 그렇기에, '디 이블위딘'의 결과가 궁금해진다.


▲ 미카미 신지의 신작 '디 이블위딘(사이코브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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