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 > 전체

[인물열전] DOA & 닌자가이덴 아버지,이타가키 토모노부

/ 1
"게임을 개발한다는 것은 곧 도박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이는 일본의 유명한 게임개발자 이타가키 토모노부가 남긴 말이다. 뭔가가 대뇌피질을 쑤시는 듯한 고동이 밀려온다. 유명 개발자가 언급한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직설적이고 꾸밈이 없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오늘 소개할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바로 이런 남자다. 그는 세계 게임사에 있어 여기저기 기록될 갖가지 '말'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자신의 철학을 스스럼없이 내뱉고, 옳고 그름이 분명해 때로는 거북할 정도로 상대를 짓눌러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오죽하면 '이빨까기'라는 불명예스런 별명까지 생겼을까.

그러나 그는 일본의 최고 개발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다. 이유는 하나. 그는 무엇을 하든 자신의 인생 모두를 건다는 각오와 함께 거친 도전을 일삼았고, 그렇게 해서 세계 게이머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데드오어얼라이브]와 [닌자가이덴] 시리즈 등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언행이 거칠긴 하지만, 여기에는 모두 뼈와 영혼이 있다. 그리고 이런 '말'은 모두 그가 직접 만든 게임의 자신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때문에 그는 아차 실수, 라면서 뱉은 말을 주워담는 경우가 없다. '도박'이라는 언급 역시, 이것이 곧 이타가키 토모노부의 삶일 뿐이다.


▲ 이타가키 토모노부, 검은색 선글라스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도박꾼을 꿈꾸던 비범한 청년

1968년 태어난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어린 시절부터 비디오게임에 관심이 많았다. 게임을 포함한 문화 콘텐츠가 일본 내에서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던 시기인 만큼, 그 역시 자연스레 영향을 받은 셈이다. 특히 그는 게임을 즐기는 수준을 넘어서 남동생과 프로그래밍을 공부해 건담 등을 소재로 한 게임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프로그래밍에 매력을 느낀 그는 이후에도 꾸준히 관련 공부를 하면서 실력을 다듬어가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어떤 한 가지 매력에 빠지게 된다. 바로 인간의 감정이다. 어린 시절, 그는 저술가(소설가)를 꿈꾸기도 했다. 그는 게임을 포함 책,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언의 감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강렬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글쓰기에 소질이 없다는 판단에 일찍 꿈을 접었지만, 그는 당시부터 사람이 느끼는 어떤 감정에 큰 관심을 두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바로 와세다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러 문화 콘텐츠를 접했던 그는 나름 학업에도 충실했고 어느 정도 천재적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학 시절, 그는 공부 대신 어떤 충동적인 무엇인가에 빠져든다. 놀랍게도 그것은 도박이었다.


▲ 마작에 심취했던 이타가키 토모노부

인간의 감정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어떤 공정한 룰 안에서 매 순간 극적인 승부가 펼쳐지는 도박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그는 마작을 즐겨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상대의 감정을 파악해 심리전을 벌이는 두뇌싸움이 그렇게 흥미로웠다. 학교 공부는 너무 딱딱해 이미 멀어져 있었겠다, 결국 그는 일본을 주름잡는 최고의 도박꾼이 꿈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여기에 심취해 버렸다. 덕분에 졸업장을 받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졸업을 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판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도박꾼이 되고 싶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패기에 가까웠고, 현실이라는 벽 앞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손에 놓지 않았던 게임을 잠시 떠올렸다. 그리고 이 게임을 만드는 것이 곧 도박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게임개발자 인생이 도박에서 피어오른 기이한 케이스인 셈이다.

그는 지난 시절 꾸준히 프로그래밍을 공부했던 만큼 게임개발에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1992년, 그는 테크모라는 게임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당시 테크모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패미컴용 [닌자용검전] [캡틴츠바사] 등을 만들며 나름 영향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타가키 토모노부 역시 테크모가 어떤 회사인지 잘 몰랐지만, 그저 게임을 만들 수 있었고 무엇보다 전철 한 정거장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

테크모에 입사한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바로 그래픽 프로그래머로 업무를 시작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첫 게임인 [캡틴츠바사4]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큰 목표 하나를 세우게 된다. 당시 그는 그래픽에서 3D 느낌을 주는 어떤 부분을 담당했는데, 기기가 받쳐주지 않으니 결과물이 영 엉망이었다. 결국,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기술과의 융합이 3D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해 관련 기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캡틴츠바사4] 외에도 기존 패미컴용 게임을 슈퍼패미컴으로 이식하는 팀에서도 근무했다. 여기서 그는 [테크모슈퍼볼] [테크모슈퍼볼2] 등의 이식에 성공하면서 조금씩 영향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런 그의 노력은 얼마 가지 않아 곧 기회를 만드는 역할을 했다. 당시 테크모는 킬링 타이틀 부재로 실적 악화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위기의식을 느낀 경영진이 테크모에 거대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 것이다.

우선 당시 테크모에는 나카무라 준지라는 인물이 개발부장 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게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어떤 체계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당시만 해도 테크모 개발자들은 어떤 일에 체계를 갖춘 것이 아닌, 그냥 머릿속에 있는 것을 바로 게임에 녹여내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원시적이 아니라 당시 문화가 이랬다.


▲ 이타가키 토모노부가 처음 개발에 참여한 [캡틴츠바사4]는 나름 인기를 누린 축구게임이다

이에 나카무라 준지는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 확실한 매니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프로젝트 매니저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확실하게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프로듀서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그는 프로젝트 매니저라는 용어를 밀어붙였다. 이 결과로 당시 테크모는 일본 게임사 중 처음으로 프로젝트 매니저 제도를 도입한 회사로 기록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나카무라 준지는 일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플로차트 등의 교육을 진행하는데, 흥미롭게도 그 1기 교육생에 이타가키 토모노부도 포함돼 있었다.

이런 변화 외에도 테크모는 회사의 소프트웨어를 제작할 신규 기기로 세가의 기판인 모델2(Model 2)를 들여오기로 확정짓고, 당시 일본에 선풍적 인기를 몰고 온 스즈키 유의 [버추어파이터]를 능가하는 게임제작을 주문했다. 악명 높던 모델2 기판에 [버추어파이터]를 능가하는 게임이라니. 이 말에 당시 테크모 선임 개발자들은 전원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나선 남자가 있다. 바로 이타가키 토모노부다. 그는 입사 이후 3D 기술을 꾸준히 공부해왔고, 충분히 [버추어파이터]와 견줄만한 게임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고 테크모 경영진이 이를 쉽게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풋내기 하나가 당돌하게 도전의사를 비친 것은 환영할만했지만, 사운이 걸린 프로젝트인 만큼 쉽게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칼을 빼 들었다. 경영진에 "버추어파이터를 뛰어넘는 최고의 3D 대전액션을 선보이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이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타가키 토모노부가 이렇게까지 배짱을 부리니 경영진도 더는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결국, 그에게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기고 [버추어파이터]를 능가할 수 있는(?) 게임 제작을 책임지게 한다.

이 과정에서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두 가지 흥미로운 선택을 한다. 우선 팀명을 '팀닌자'로 정했다.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어린 시절부터 닌자를 좋아했는데, 훗날 그는 "닌자는 일본의 슈퍼맨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며 그 이유를 밝힌 적이 있다. '팀닌자'는 테크모의 히어로를 상징하는 어떤 패기 정도로 볼 수 있는 셈이다.


▲ 당시 일본게임업계에서는 온전한 3D 격투게임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세가뿐이라는 인식이 컸다. 
이타가키 토모노부의 도전이 오만함으로 비춰질 수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 프로젝트명은 '데드오어얼라이브'로 확정했다. 해당 프로젝트는 그에게 있어 도박과 다름없었다. 그는 확신에 모든 걸 걸었고, 이제 남은 것은 이기느냐 지느냐 둘 중 하나였다. 일본의 거장 사카구치 히로노부가 '나의 마지막 도전'이라는 의미로 [파이널판타지]를 제작한 것처럼, 이타카기 토모노부 역시 '마지막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도전한 것이다. 도박꾼 기질이 다분했던, 정말 그만 선택할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세팅을 마친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검은색 선글라스와 함께 가죽 재킷과 가죽 바지를 몸에 둘렀다. 어차피 벌인 일, 이왕이면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멋진 모습으로 도전하고 싶었다. 특히 검은색 선글라스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는 마작 등의 도박을 즐길 때 자신의 표정(감정)을 읽히지 않기 위해 늘 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썼다. 당시 테크모 직원들은 이타가키 토모노부의 자신감을 오만함으로 해석하며 수군거리기도 했는데, 이들 앞에서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싫었다. 오로지 결과물로 모든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을 뿐이었다.


출렁출렁, 내 철학이 뭐 어때서?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본격적인 게임개발에 앞서 격투액션 특히 [버추어파이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먼저 꿰뚫었다. 그는 자신의 개발철학 중 하나로 '플레이어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꼽는데, 그만큼 이용자 입장에서 무엇이 왜 어떻게 재미있는지 파악하는 걸 우선시했고, 여기에 천부적인 재능도 있었다.

이 결과 그는 격투액션의 포인트는 '승부' 자체에 있기 때문에 꼭 무예에 정통한 남성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에 그는 여성 캐릭터의 비중을 확 끌어올렸다. 당시만 해도 여성 캐릭터는 메인이 아닌 서브 정도의 인식이 있었는데,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시작부터 이 틀을 깨버린 것이다. 또한, 보통의 남성 캐릭터는 탄탄한 근육을 강조한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는 이 포인트를 '아름다움'에 두었다. 현실적으로 보기 어렵지만, 인간 본성이 가장 원하는 그런 것. 즉, 여성의 아름답고 우아한 곡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카스미, 티나 암스트롱, 레이팡 등은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

이와 함께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원래 도박을 즐겼던 만큼, 관련 내용을 게임 내에 녹여내기로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생각하는 '도박'의 정의다.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늘 "도박은 가장 숭고한 게임"이라고 언급한다. 공정한 룰이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기거나 질 수 있고, 그 상황에 따라 극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즉, 돈을 건다는 개념이 아니라 감정이 크게 요동치는 그 짜릿함 자체를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홀드 시스템이다. 홀드 시스템은 일종의 가위바위보(그는 가위바위보나 홀짝 역시 도박과 같은 숭고한 게임으로 생각한다)처럼, 전용키를 활용해 반격하거나 공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상대가 어떤 패를 꺼내는지에 따라 먹힐 수도 혹은 당할 수도 있는 극적인 연출을 이 안에 담아낸 것이다. 결국, 이 시스템은 그가 만든 첫 격투액션을 상징하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해서 그의 첫 게임 [데드오어얼라이브(96)]가 완성됐다. 프로젝트명이 정식 게임명까지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나름 그래픽 퀄리티에도 충실했던 만큼 출시 이후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었으나, 같은 해 [버추어파이터3]가 등장하면서 조금 아쉬운 결과를 보이고 말았다. 그럼에도 참신했던 홀드 시스템과 데인저존(DANGER ZONE)을 포함한 역동적인 스테이지 설계가 더해져 어느 정도 커버할 정도가 됐다.


▲ 여성 캐릭터의 비중을 끌어올린 [데드오어얼라이브]

어? 잠깐, 그런데 저거, 저거는 대체 뭔데 규칙도 없이 위아래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거야?

맞다. 시장에 등장한 [데드오어얼라이브]는 사실 다른 부분에서 더 이슈가 됐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여성의 인체를 있는 그대로 표현했는데, 이게 게이머들의 눈에 포착된 것이다. 특히 그가 빚어낸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는 가슴을 크게 만든 것으로 유명한데, 이들이 역동적인 전투기술을 선보일 때마다 가슴 역시 위아래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른바 '바스트모핑'의 시작이다. 통상적인 물리법칙은 완전히 무시했는지 이 흔들림은 심각할 정도로 역동적(?)이라, 게이머들의 시선은 일제히 한곳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데드오어얼라이브]의 '바스트모핑'은 게이머들에게 찬사 아닌 찬사를 받았다.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게 도무지 싫지 않은 것이다. 입소문을 퍼져 서서히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여성 캐릭터의 매력에 접근한 게이머들은 [데드오어얼라이브]의 참신함을 느끼면서, 격투액션 자체만 놓고 따져봤을 때도 충분히 즐길만한 수준이 된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있기도 했다. '바스트모핑'은 너무 섹스어필을 강조해 여성을 비하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격투액션 타겟층 대부분이 남성 게이머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 애초에 이타가키 토모노부가 이를 노리고 연출한 부분일 수도 있다. 이후 시리즈에서 무수한 복장(코스튬)을 추가하고, 움직일 때마다 속옷을 노골적으로 비추는 것만 봐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런 논란에 대해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늘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을 전했다. 괴상한 철학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목이다.

'가슴이 시키는 게임'이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인지도를 쌓긴 했지만, 결국 [데드오어얼라이브(이하 DOA)]는 테크모의 킬러 타이틀로 부상했다.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이후에도 다양한 이식 버전과 새로운 시리즈를 내놓으며 게임성(물론 바스트모핑을 포함해)과 그래픽 퀄리티를 높였다. 그 결과 일본을 넘어 북미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결국 [DOA]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약 800만 장(2012년 기준) 이상 판매됐다.

[DOA]의 이런 성공은 이타가키 토모노부에게 극적인 짜릿함을 안겨줬다. 인생을 건다는 목표로 도전한 첫 도박에서 승리를 차지한 셈이다. 그가 소속된 '팀닌자' 역시 테크모의 히어로로 부상했다.


▲ 게이머들의 가슴까지 설레게 했던 주역들




▲ 여러 충격이 있었지만 [데드오어얼라이브]는 영화로도 제작됐다(06년), 
B급 느낌이 강하지만 그래도 액션 하나는 잘 살린 것으로 기억된다


[닌자가이덴]의 탄생과 비상하는 이타가키 토모노부

"나는 무적에 가까운 슈퍼히어로를 제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여러분의 몫 아닌가."(이타가키 토모노부)

요즘에 등장하는 게임과 비교했을 때, 지난 고전게임은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바로 난이도다. 이 난이도라는 것은 꼭 기획에 의거했다기보다 여러 요인에 따라 발생하는데, 분명한 것은 과거의 게임은 다소 거칠고 하드코어한 맛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캐릭터가 아닌 게이머가 레벨업 해야 하는 그런 '근성의 재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닌자가이덴]은 '게이머가 레벨업해야 하는 게임'의 대표주자로 불린다. 그만큼 이 게임은 난이도가 어렵기로 잘 알려졌고, 이게 곧 [닌자가이덴]을 상징하는 캐치프레이즈 같은 역할을 했다.

때는 1999년. 당시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팀닌자'의 수장으로서 [DOA]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서서히 다른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은 간지러움이 찾아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DOA]에서 상당한 매력을 지닌 남성 캐릭터 류 하야부사가 눈에 들어왔다. 류 하야부사는 테크모의 수작 중 하나였던 [닌자용검전]의 강력한 주인공으로, 이 콘셉을 그대로 가져와 [DOA]에서도 비중있는 역할로 설계돼 있었다.

사실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테크모에 입사한 뒤에야 [닌자용검전]을 접해볼 수 있었는데, 이 게임이 가진 악랄한 난이도에 흠뻑 빠져버렸다. 또한, 앞서 언급한 대로 그는 닌자를 좋아했는데, 류 하야부사는 여기에도 부합하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이에 그는 3편을 끝으로 시리즈가 끊긴 [닌자용검전]을 그만의 시각으로 재창조하기로 결심한다. 즉, 자신의 힘으로 그가 손대지 않았던 게임을 오마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 테크모의 수작 중 하나였던 [닌자용검전]

그러나 당시 테크모 상황상 이타가키 토모노부가 이 새로운 게임에 온전히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테크모는 회사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만큼 일단 잘 되는 게임에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그는 상술이라는 비난 속에 [DOA]의 갖가지 이식버전은 물론 새로운 시리즈 개발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새 프로젝트는 늦지 않은 시기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2000년~2001년 사이, 분주했던 테크모가 기업공개를 성공적으로 끝냈고, 당시 기준으로 차세대 기기였던 Xbox가 등장한 것이다. 이타가키 토모노부 역시 외전 격인 [DOA: 익스트림 비치발리볼] 개발을 끝마친 시기라, 자연스레 준비한 다음 프로젝트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닌자가이덴]은 그 이름처럼, 닌자 류 하야부사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닌자가 일본의 슈퍼히어로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만큼, 이 부분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집중했다. 쉽게 말해 처음부터 완성체, 즉 가장 완벽하고 강력한 캐릭터로 설계한 것이다. 대신 난이도를 높이기로 했다. 캐릭터가 점점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조작하는 플레이어가 점점 강해지는 그런 형태로 게임플레이를 생각한 것이다. 전투 시 다수를 상대하면서도 적의 AI를 끌어올린 점 역시 인터랙티브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 참 매력적인 캐릭터 류 하야부사


▲ [닌자가이덴] 어떤 의미에서 액션게임의 바이블로 불리기도 했다

Xbox를 선택한 만큼, 하드웨어 성능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욕심 역시 그대로 반영했다. 덕분에 [닌자가이덴]은 캐릭터의 움직임이나 연출, 타격감 등을 모두 최고의 퀄리티로 제작될 수 있었고, 무대가 되는 여러 배경 역시 세밀하게 디자인해 플레이어가 몰입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까지 구축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닌자가이덴]은 2004년, Xbox 플랫폼을 통해 시장에 나왔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최고의 퀄리티로 뽑힌 그래픽은 게이머들의 눈을 즐겁게 했고, 적을 시원시원하게 도륙하는 액션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타가키 토모노부의 바람대로 류 하야부사가 완벽하게 부활한 셈이다. 물론 어려운 난이도 때문에 여기저기 아우성이 들려왔지만, 적응할수록 오는 쾌감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이 역시 곧 찬사로 바뀌었다. 1년 뒤, DLC와 함께 출시된 [닌자가이덴 블랙]은 최고의 평가와 함께 액션게임으로써 그 자리를 공고히 하게 된다.

사실 [닌자가이덴] 역시 이타가키 토모노부의 도박꾼 기질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게임이다. [DOA]로 테크모와 승부를 가렸다면, [닌자가이덴]은 게이머들과 대결을 벌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게이머들이 괴랄한 난이도에 짜증을 느껴 모두 내팽개쳤다면 [닌자가이덴]은 바로 추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확신에 투자한 만큼 여기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게임이 어렵다면 당신의 실력을 탓하세요" "분하면 실력을 키우면 되잖습니까"라는, 게이머들을 약 올리는 '말' 역시 여기에 기반을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테크모와 불화, 그리고 발할라 스튜디오 설립

2008년 6월, 당시 일본에서 큰 소식이 들려왔다. 이타가키 토모노부가 테크모를 퇴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테크모를 포함해 당시 일본 게임사는 유명한 개발자를 전면에 내세우며 힘을 과시했는데, 이타가키 토모노부의 퇴사는 곧 테크모에 추락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같은 해 5월에는 이타가키 토모노부가 인센티브 문제로 테크모 사장이었던 야스다 요시미를 고소한 것까지 알려져 더 파문이 일었다.

물론 그전에는 다른 사건도 있었다. 2006년, 당시 이타가키 토모노부가 테크모의 한 여직원으로부터 성희롱을 이유로 소송을 당했다. 이 사건은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는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2년 뒤 테크모와의 불화로 퇴사까지 했으니, 자칫하면 피어오른 날개가 꺾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 사이사이를 잘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테크모와의 결별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몇 년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창작자로서의 욕망과 자본논리와의 충돌에서 찾을 수 있다.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DOA2]가 PS2로 발매된 2000년 당시 자신의 게임개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당시 PS2용 [DOA2]는 미완성 상태라 출시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기업공개가 급했던 테크모가 이타가키 토모노부를 속이고 해당 버전을 몰래 패키지로 생산해 버린 것이다. '팀닌자'의 수장으로 충실했던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찾아온 것이다. 이건 그가 생각하는 도박과 거리가 멀었다. 룰을 벗어난 숭고하지 못한 행위였다.


▲ 이타가키 토모노부와 [철권]의 하라다 카츠히로, 두 남자 역시 재미있는 우화가 많은데 
어떤 내용인지 직접 찾아보면 꽤 흥미로울 것이다

또한, 테크모는 잘 알려졌다시피 [DOA]가 인기를 끌 무렵 이식과 재발매 등 갖가지 상술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 입장에서는 이 과정이 결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당시부터 어떤 것에 집착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완성도와 최상의 퀄리티, 그리고 서비스였다. 자신의 게임을 선택해준 게이머들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였다. 그가 이 세 가지에 광적으로 집착한 부분 역시 이런 환경이 큰 원인이 됐다. 즉, 그는 게임 창작자로서 이를 즐겨주는 게이머들과 감정적 연대를 형성하고 싶었다. 간혹 오만하지만 그가 뱉는 말이 결코 이 게이머들을 배신하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때문에 이타가키 토모노부 입장에서 당시 회사의 결정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후 '팀닌자'는 잠시 PS2 전용 타이틀을 모두 버리고 Xbox에만 집중해 버렸는데, 좋고 싫음이 분명한 이타가키 토모노부의 성향을 고려하면 당연한 선택이기도 하다. 테크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도 당연한 결과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하면서 [닌자가이덴] 등의 게임을 내놓았다. 확고한 신념, 즉 개발철학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을 매달리며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검은 선글라스 뒤로 감춰진 이타가키 토모노부의 순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 그는 '게임개발자'였던 것이다.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테크모 퇴사 이후,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독립 개발사 발할라 스튜디오를 공동 설립했다. 창립멤버는 [DOA] 시절부터 함께 해온 팀닌자 멤버 여럿이 포함돼 있다. 이 개발사는 이타가키 토모노부에 있어 커다란 상징성이 있다. 그는 어떤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행복'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게임개발자로서의 행복, 게임사의 행복, 게이머들의 행복이 포함된다. 그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누렸지만 딱 하나 주주들의 행복은 누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테크모 퇴사에 결정적인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가 발할라 스튜디오를 직접 세운 것은 이 마지막 행복인 주주들의 행복을 이행하기 위해서다. 주주가 곧 이타가키 토모노부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슈팅에 액션을 버무린 신작 [데빌즈써드]를 개발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전 세계 500만 장 이상 판매량이 목표라고 했으니, 조금 더 여유를 갖고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는 게임을 만드는 과정을 도박에 비유했다. 그리고 그 도박의 정체가 결국 열정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모든 것을 건다는 것, 이 자체가 곧 순수한 열정이기 때문이다. 발할라 스튜디오 설립 이후 그는 "내 본업은 사진작가, 게임개발은 취미", "나는 이미 [DOA]라는 완벽한 격투게임을 이미 만들었기 때문에 후속작을 격투로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 등 계속해 말을, 아니 '이빨을 까고' 있다. 뭐 어쩌겠나, 이게 그가 사는 방법인 것을.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타가키 토모노부는 아직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VS뉴스, Ninja Gaiden’s creator Itagaki pleads for game designers to create titles that change lives
가마수트라 The Philosophy of a Ninja: Tomonobu Itagaki Speaks
DEAD OR ALIVE HISTORY Team NINJA FREAKS
[데드오어얼라이브] 위키
[닌자가이덴] 위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공유해 주세요
게임잡지
2006년 8월호
2006년 7월호
2005년 8월호
2004년 10월호
2004년 4월호
게임일정
2024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