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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마인크래프트 인디신화, 마르쿠스 페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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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라는 단어에 내재된 의미에는 특별한 기운이 있다. 이 단어는 보통 문화 콘텐츠 앞에 붙어 인디게임, 인디영화, 인디음악, 인디문학 정도로 쓰이는데, 여기에는 '흔하지 않고 독창적인' 느낌이 풍기기 때문이다.

이처럼 느낌이 다른 것은 단어 고유의 성질 때문이다. 인디(indie)는 independence의 준말로 소위 '독립적인 무엇인가'를 표현할 때 쓴다. 때문에 인디문화 역시 상업자본에서 벗어나 창작자가 갈망하는 무엇인가를 자유롭게(독립적으로) 만든다는 의미를 안고 있다. 특히 산업은 그 규모가 거대해질수록 막대한 자본 앞에 정형화된 어떤 틀을 갖출 수밖에 없는데, 인디는 바로 이런 점을 거부하는 속성을 안고 있는 셈이다. 즉, 인디는 자본 흐름에 의해 탄생하는 '상품'이 아니라 순수한 의미 그대로의 '창작물'로써 그 이미지를 확립하고 있다.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도 전 세계에는 자신을 인디게임 개발자로 여기고 '그 어떤 새로운 게임'을 내놓기 위해 열정을 퍼붓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협해 감지하기 어려운 세상을 움켜쥐고 싶은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것이 곧 인디의 가치다.

오늘 소개할 스웨덴 출신의 마르쿠스 페르손은 [마인크래프트]를 내놓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개발자가 됐다. 사람들은 마르쿠스 페르손을 가리켜 인디신화를 일궈낸 최고의 게임개발자 중 한 명이라며 호평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거룩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는 그저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한 사내로서, 더 재미있고 독창적이며 새로운 게임을 만들기 위해 도전하고 있을 뿐이다. 맞다. 그는 누가 뭐래도 인디게임 개발자다.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 [마인크래프트]의 아버지 마르쿠스 ‘노치’ 페르손, 검은색 페도라는 그의 상징적 ‘아이템’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던 한 소년

마르쿠스 페르손(마르쿠스 알렉세이 페르손)은 1979년, 스웨덴의 에즈빈(Edsbyn)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유복하지 않았지만 가정은 행복했고, 그 역시 큰 문제 없이 또래 아이들과 비슷한 유년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일곱 살이 될 무렵, 가족이 스톡홀름으로 이사하면서 그의 내면에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좀처럼 새로운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외톨이가 됐다. 다행히 마르쿠스 페르손은 에즈빈 시절부터 광적으로 좋아했던 레고라는 벗이 있었다. 그는 여유가 있을 때마다 틈틈이 레고를 쌓아 올렸고, 계속 무엇인가를 만들며 작은 행복을 느꼈다.


▲ 마르쿠스 페르손이 무척 좋아했던 [보울더대쉬]

같은 해 부친이 집으로 들여온 컴퓨터 코모도어 128를 접하면서 그는 두 번째 변화를 맞이한다. 어린 나이였지만 마르쿠스 페르손은 컴퓨터에 푹 빠졌고, 관련 잡지를 보면서 프로그래밍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실 '눈을 뜬다'는 표현이 간지러울 정도로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가상세계를 구축하는 매력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프로그래밍의 매력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수단은 역시 게임이다. 마르쿠스 페르손 역시 자연스레 게임에 큰 관심을 두게 됐는데, 하나하나가 신세계였다. 당시 그가 즐겼던 게임은 [보울더대쉬] [바즈테일] [헬기대작전] 정도였다. 훗날 그가 꼽은 최고의 게임으로는 [둠] [하프라이프] [던전마스터2] [원숭의섬의 비밀]이었고, 최근에도 [드래곤에이지] [모던워페어] [엘더스크롤] 등을 열거할 만큼 게임광이다.

프로그래밍과 게임, 두 가지에 관심을 보인 소년은 금방 할 일이 정해졌다. 바로 직접 게임을 만들어보는 일이었다. 그렇게 마르쿠스 페르손은 여덟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을 제작했다. 아주 단순한 게임일지언정, 여덟 살짜리 꼬마가 벌여놓은 일은 훗날 무엇을 할지 이미 예견돼있다고 보기 충분했다.

마르쿠스 페르손은 이후에도 컴퓨터와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친구들도 조금씩 사귀기 시작했는데, 어디까지나 '관심분야'가 동일해야 가능했다. 그는 그렇게 친구들과 보드게임 등을 즐기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렇게 그가 관심분야에 몰두하던 사이, 가정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마르쿠스 페르손의 부모가 이혼한 것이다. 그의 부친은 결혼 전 약물에 중독돼 있었는데 그쯤 다시 도진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후 부친은 집을 떠났고, 그의 여동생 또한 충격에 빠져 일탈을 시도(후에는 마약까지)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가정파탄 수준이었다.

당시 마르쿠스 페르손의 나이는 이제 열두 살이었다. 즉, 당시 상황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자아가 성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는 부모가 이혼한 상황조차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했다. 결국, 이 소년이 어지러운 상황을 감내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어떤 일에 몰두해 모든 것을 잊는 것. 이때부터 마르쿠스 페르손은 외출을 꺼리며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무엇인가를 두드렸다. 이게 유일한 탈출구였다.


▲ 혼란스러웠던 마르쿠스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바로 이 컴퓨터였다


자신을 믿기 시작하다

마르쿠스 페르손은 1990년대 후반, 스톡홀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은 포기했다. 아니, 어쩌면 불필요하다고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인터넷 강의로 C++를 공부한 것 외에 거의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습득했고, 그 실력 또한 출중하다고 믿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 집안 문제로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는 것이 편했던 그는 정규 교육을 받을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저 빨리 자신의 프로그래밍 실력을 터뜨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시대 흐름은 아주 잠깐이지만, 마르쿠스 페르손의 손을 들어주지 못했다. 1990년대 후반, 스웨덴을 포함한 유럽은 인터넷 사업이 크게 일어난 시기였다. 그러나 거품은 곧 꺼졌고 수많은 인터넷 벤처 기업이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즉, 닷컴 버블(dot-com bubble)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상황이 이러니 마르쿠스 페르손은 쉽게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결국, 몇 년 동안 백수생활을 지속해야 했다. 속된 말로 '잉여인간' 혹은 '너드'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그는 한없이 미래가 불안하고 불투명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마르쿠스 페르손은 이 시기에 좌절하기보다 미래를 대비해 자신에게 투자했다. 사실 지금에서야 '투자'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당시 마르쿠스 페르손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프로그래밍 공부와 게임개발을 위한 정보습득(게임플레이와 분석 등)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는 몇 년 동안 프로그래밍을 더 공부하고, 더 많은 게임을 플레이하고, 더 다양한 패턴으로 게임을 개발하며 지냈다.

다행히 이런 과정은 마르쿠스 페르손에게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는 게임개발 콘테스트에 자주 참여했는데, 여기서는 짧은 시간 동안 최소한의 코드로 게임을 제작해야 했다. 이런 경제적인 프로그래밍은 마르쿠스 페르손이 선호하는 방식이었고, 이후 [마인크래프트] 제작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그는 게임을 플레이함과 동시에 커뮤니티를 빼놓지 않았다. 그는 어떤 게임을 하든 항상 IRC(채팅프로그램)에 접속해 '게임광'들과 게임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고, 개발자 포럼에도 상주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그리고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 어느새 20대 중반이 된 청년은 여전히 컴퓨터가 안식처였다. 그러나 이런 과정 역시 훗날 그가 [마인크래프트] 이용자들과 소통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시기를 겪은 마르쿠스 페르손은 조금 더 확실하게 자신을 믿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주는 가능성과 이를 다룰 수 있는 실력 사이에서 발생한 것이 믿음의 근원이었고, 이는 그에게 현실감각을 서서히 채워주게 된다. 게임개발자라는 달콤한 꿈도 바로 이 시기부터 완전히 고개를 들어 마르쿠스 페르손을 쿡쿡 찔러댔다.


게임 개발자, 정녕 이런 것인가?

백수로 지내던 마르쿠스 페르손은 2001년 게임페더레이션이라는 회사에 입사했다. 이 회사는 게임을 배포하는 온라인 시스템 관리를 주로 했는데, 여기서 그는 게임의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회사에서 마르쿠스 페르손은 약 4년 가까이 근무했다. 물론 직장생활이 흥미롭지는 않았다. 다만 간접적으로나마 게임개발을 경험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여기서 롤프 얀손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롤프 얀손은 IBM에서 컨설턴트로 일한 경험이 있는 꽤 유능한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마르쿠스 페르손과 마찬가지로 게임개발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죽이 맞았던 둘은 게임으로 소통하며 금방 절친한 관계가 됐다.

이후 2005년, 마르쿠스 페르손은 마이다스플레이어로 거처를 옮긴다. 이 회사는 소규모 스튜디오로 가득했는데 각자 게임을 제작하고 책임까지 안는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게임은 킹닷컴(king.com)에 얹혀 서비스됐다. 마르쿠스 페르손은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마이다스플레이어(2004년 설립)의 비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소규모 개발팀으로 직접 게임을 만드는 구조가 무척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이렇게 마르쿠스 페르손은 마이다스플레이어(후에 킹닷컴에 인수됨)에서 난생처음으로 '게임개발자'라는 명함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좋았다. 회사가 유일하게 쓰는 프로그래밍 언어 액션 스크립트를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고, 소규모 스튜디오(2~8명 사이)로 단기간에 게임을 제작해야하는 속전속결 운영 형태도 나쁘지 않았다. 대부분의 과정이 마르쿠스 페르손의 취향에 적합했던 셈이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곧 고개를 들었다. 초기 마르쿠스 페르손은 회사가 원하는 게임만을 제작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이 생각한 참신한 소재의 게임을 만들어 내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묵사발 나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마이다스플레이어는 보드게임을 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빨리 개발하고 단기간에 돈을 벌고 빠지는 생존전략이 깔려 있었다. 즉, 애초에 '아이디어성 게임'은 필요가 없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될수록 마르쿠스 페르손은 자신이 기계가 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상상했던 게임개발자의 모습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게임개발자는 곧 창작자가 아닌가. 그 창작자의 권리가 묵사발 나고 같은 '상품'만을 찍어내는 기계가 되다니. 납득하기 어려웠다. 회사는 날이 갈수록 얹혀진 게임의 클릭횟수와 수익만으로 '좋은게임'과 '나쁜게임'을 구분했다. 마르쿠스 페르손은 날이 갈수록 화가 났다.

이 과정에서 마르쿠스 페르손은 잠시 게임개발자를 의심했다. 정체성을 의심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가 지난 수십 년간 즐겼던 게임 중 일부가 정녕 '이런 식'으로 개발됐는지, 그리고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역할'에 의심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곧 결론을 내렸다. 바로 '옳지 않다'였다. 그에게 있어 게임은 마트에 진열된 과자나 샴푸 같은 '상품'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게임은 인생, 즉 거의 모든 것이었던 셈이다.

결국, 마르쿠스 페르손은 자신의 게임을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는다. 게임개발자, 즉 창작자에 대한 정체성을 내면에 확실하게 정립한 것이다. 그는 직접 만든 게임을 세상에 풀어두고 싶었다. 쉽게 말해 인디게임 개발자로 들어서길 자처한 셈이다. 사실 이런 그의 생각은 놀라운 부분도 있다. 몇 년을 인내하며 게임개발자의 길로 들어섰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욱하는 심정에 판단의 줄기 자체를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경력을 쌓아 스웨덴의 유명한 게임개발사 다이스(DICE)로 넘어갈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르쿠스 페르손은 컴퓨터를 유일한 안식처 삼으며 현실과 담을 쌓아왔고, 게임개발자라는 꿈을 통해 서서히 현실감각을 채웠다. 그러나 그 현실감각은 '보통의 사람'과 너무나 달랐다.

맞다. 밖에서 바라본 그의 모습은 이상적인 현실론자, 즉 아웃사이더였다.


▲ 스웨덴의 유명한 게임개발자 다이스(DICE) 외곽 전경, 마르쿠스 페르손은 경력을 쌓아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는 것보다 ‘자신의 게임’에 더 큰 꿈을 품었다


자유로운 의지, 억눌린 힘을 세상 밖으로 꺼내 놓다

마음을 굳힌 마르쿠스 페르손은 이후 직장생활에 흥미를 잃었다. 물론 바로 퇴사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생활을 이어갈 돈이 필요했고, 마이다스플레이어는 물질적 만족을 주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대신 마르쿠스 페르손은 회사 밖에서 만족을 얻었다. 직장생활에 필요한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자신의 게임을 만드는데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실행파일 크기를 4K로 제한을 두는 자바 프로그래밍 콘테스트 'JAVA4K'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소닉레이서4K] [헌터즈4K] [마이너즈4K] 등의 게임을 내놓기도 했다. 특히 [마이너즈4K]는 2006년, 콘테스트에서 시상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소소한 것 외에 더 크게 벌인 일도 있다. 게임페더레이션에서 알게 된 동료 롤프 얀손과 함께 [뷔름온라인]이라는 게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게임은 거대한 월드에서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놀 수 있는(사냥, 채집, 하우징, 전쟁 등) MMORPG였다. 또 하나, 그는 마이다스플레이어에서 알게 된 야콥 포서라는 동료와도 수상한 일을 벌이고 있었다. 야콥 포서 역시 게임에 푹 빠진 전형적인 '너드' 스타일이었는데, 당연히 마르쿠스 페르손과 죽이 잘 맞았다. 당시 야콥 포서는 [매직 더 개더링]을 개조해 더 풍부한 재미요소를 넣은 [스크롤즈]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마르쿠스 페르손과 끝없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게임을 차근차근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어디까지나 마이다스플레이어 소속이었다. 당연히 외부에서 몰래 게임을 만드는 것은 규정상 금지돼 있었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마르쿠스 페르손은 몰래 게임을 만드는 것이 들통 났고 경영진과 갈등을 빚게 된다. 대립 끝에 그는 회사를 나와 [저스트코즈2]를 만든 아발란체로 넘어갔지만, 여기서는 2개월도 버티지 못했다. 결국, 마이다스플레이어로 재입사했지만 '내 게임'을 만들 수 없는 규정은 견디기 어려웠다.

보통 사람에게는 아웃사이더, 그리고 마르쿠스 페르손 본인에게는 '자유로운 의지'였던 그의 행동과 사상은 날이 갈수록 더 단단해졌다. 어느새 자신의 게임을 만드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자 방향이 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또 한 번 마이다스플레이어를 나온다. 그리고 게임과 전혀 관계없는 제이앨범이라는 회사에 몸을 실었다. 제이앨범은 온라인 앨범 플랫폼을 만드는 신생회사였는데, 무척 좋은 조건이 있었다. 바로 업무 외 시간에 그가 개인적으로 게임을 만드는데 전혀 개입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마르쿠스 페르손 입장에서는 돈벌이 수단으로, 제이앨범 입장에서는 유능한 프로그래머 입사로, 서로 이해관계가 충족되는 조건이었다.


▲ 롤프 얀손과 마르쿠스 페르손이 한때 열정만으로 같이 만들었던 [뷔름온라인] 리눅스 기반 MMORPG로, 
마르쿠스 페르손은 07년 이 프로젝트에서 손을 뗀다

돈벌이 수단을 얻은 마르쿠스 페르손은 이후부터 자신의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게임에만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열정을 쏟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무척 행복한 일이었다.

마르쿠스 페르손은 동료였던 롤프 얀손, 야콥 포서와 준비 중인 [뷔름온라인]과 [스크롤즈] 외에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담은 게임 역시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는 세 가지 게임을 만나면서 서서히 구체화됐다. 그 게임의 정체는 [드워프 포트리스] [던전키퍼] 그리고 [롤러코스터 타이쿤]이었다.

우선 [드워프 포트리스]는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게임전시회 콜렉션에뽑힐 정도로 예술성을 인정받은 인디게임이다. 이 게임은 키보드 텍스트 문자, 숫자, 기호만으로 월드가 이루어진 특이성이 있다. 플레이어에게 위협적인 몬스터 역시 S 따위로 표시될 뿐이다. 이 게임에 푹 빠진 마르쿠스 페르손은 게임은 정교한 그래픽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즉, S로 표시된 몬스터는 플레이어의 상상력이 동원되면 그 어떤 게임의 녀석보다 위협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픽에서 시간을 번 개발자들은 기획 쪽으로 더 고민할 수 있고 이는 곧 게임의 '즐거움'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질 수 있다.

[던전키퍼]는 플레이어가 던전을 자유롭게 디자인하고 악마들을 요량껏 훈련시켜 쳐들어오는 영웅을 막는 피터 몰리뉴의 수작 중 하나다. [롤러코스터 타이쿤]은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구조물을 플레이어가 직접 만들 수 있는 즐거움이 충분한 게임이었다. 두 게임 모두 마르쿠스 페르손에게 영감을 주기 충분했다. 그는 자유도와 모험이 메인 테마가 되는, 그리고 이게 실제로 잘 작동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르쿠스 페르손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통째로 담을 수 있는 어떤 게임 하나를 발견하고 만다. 바로 [인피니마이너]다. 마르쿠스 페르손은 (실제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손바닥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 텍스트와 문자로만 이루어진 경이로운 세계 [드워프 포트리스]


▲ [마인크래프트]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피니마이너]


[마인크래프트]의 탄생

[마인크래프트]의 모태가 되는 [인피니마이너]는 확실히 놀라운 게임 중 하나였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땅을 파고 여기서 얻은 사각형 블록을 통해 뭔가를 만들 수 있었다. 원래 이 게임은 제한된 시간 내에 누가 더 귀한 광물을 많이 캐내는지 경쟁하는 형태로 방향이 잡혔다. 그러나 플레이어는 경쟁보다 블록으로 뭔가를 계속 만드는데 더 큰 재미를 느꼈다. 결국, 이 게임은 08~09년 사이 게이머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사실 [마인크래프트]의 탄생배경에는 바로 이 [인피니마이너]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인피니마이너]는 미국에서 개발돼 큰 기대를 모았는데, 출시를 앞두고 게임 개발소스가 인터넷에 누출되는 사고가 터지게 된다. 프로그램 지식이 있으면 변형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결국 [인피니마이너]는 인터넷에 각종 '짝퉁'이 등장하게 됐고, 괴상한 버전은 서로 충돌을 일으켜 멀티 플레이가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결국, 이 게임을 만든 미국의 인디게임개발자 자카리 바스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누구라도 게임을 개발할 수 있도록 오픈소스로 재출시를 선언한 것이다. 확실히 이 대목은 인디게임개발자의 애증을 엿볼 수 있다. 오픈소스는 곧 게임개발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를 감내했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 환호성을 지르며 온갖 찬사를 내뿜던 마르쿠스 페르손 역시 해당 소스를 활용해 게임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인피니마이너]는 그간 그가 쌓아온 아이디어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최고의 그릇이었다.

그렇게 그는 시점을 3인칭으로 변경하고, 게임을 조금 더 어드벤처한 형태로 구성했다. 이는 그가 늘 강조한 자유도를 최대한 잘 작동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각형의 블록 역시 그래픽을 조금 더 개선해 눈에 잘 보일 수 있도록 했다. 워낙 조악한 그래픽이었던 만큼, 큰 차이는 없었지만 보기에는 훨씬 나아 보였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에 재미가 크다고 판단했던 만큼, 블록을 활용하는 부분 역시 공들여 개선작업을 진행했다. 채굴과 조합을 활용해 각 블록을 활용하는 방식을 보다 체계적으로 확립한 것이다.

그렇게 2009년 초, 마르쿠스 페르손은 [인피니마이너]를 개조한 자신의 게임 테스트 버전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물론 그가 자주 이용하던 게임개발자 포럼도 잊지 않았다. 당시 이 게임은 이름이 없었다. 마르쿠스 페르손은 이 게임을 [인피니마이너 클론]이라고 소개했다. 원 창작자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였다.


▲ [마인크래프트] 알파 버전, 화면에 Notch가 보인다

이후 그는 포럼에서 친하게 지낸 동료들과 게임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기 시작했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순서를 정했다. 게임의 이름은 '마인'과 '크래프트'를 합쳐 [마인크래프트]로 부르기로 했다. 특히 그는 개발과정에서 투명성을 내세우며 모든 과정을 문서화해 포럼에 등록했다. 포럼 동료들 역시 계속해 마르쿠스 페르손에게 갖가지 아이디어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포럼에서 '노치'라는 닉네임을 썼는데 워낙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만큼 서서히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직접 만든 게임이 주가 돼 활발하게 의견의 교류되는 광경은 마르쿠스 페르손에게 최고의 행복이었다. 인디문화에서 가장 우아한 순간이 그의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쉼 없이 개선작업을 진행했던 마르쿠스 페르손은 새로운 모드와 시스템, 콘텐츠를 추가한 클래식, 서바이벌 테스트, indev-InfDev 버전을 거쳐 마침내 실행이 가능한 [마인크래프트]의 알파 버전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선택을 한다. 바로 게임에 가격을 책정하는 일이었다.

사실 알파버전 공개와 가격 책정은 마르쿠스 페르손 입장에서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알파 버전을 빨리 공개한 이유는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기에 그만큼 동기가 필요했다. 그 동기는 피드백이었다. 가격을 책정한 것은 훗날 게임이 완성됐을 때 그 가치를 스스로 매길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대신 구매만 하면 이후 모든 업데이트는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했고, 버전이 오를수록 가격 역시 오르는 구조로 만들었다.

어쨌든 [마인크래프트]의 알파버전은 2009년 5월 포럼에 업데이트됐고, 6월에는 사이트를 통해 등록됐다. 그리고 다음날, 마르쿠스 페르손은 하루 새 15명이 게임을 다운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마인크래프트] 알파 버전의 가격은 약 13달러였고, 그의 통장에는 150달러가 넘는 돈이 들어와 있었다. 그에게 '규모'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려 15명이나 자신의 게임을 사준 것에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 서서히 균형이 잡혀갔던 [마인크래프트] 베타 버전


[마인크래프트] 신화와 마르쿠스 페르손

마르쿠스 페르손은 통장에 입금된 150달러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하루에 게임을 20개 정도만 팔 수 있다면, 그때는 정말 회사를 정리하고 게임개발에만 매진하겠다는 그런 달콤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인크래프트]의 인기는 그의 작은 소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이 게임은 하루가 지날수록 판매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베타 버전을 앞둔 2010년에는 2만 장 이상이 판매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게임에 접한 사람들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블록투성이 게임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재미있다'는 반응이 세계 각국에서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결국 이 게임은 2011년 100만 장을 돌파했고, 정식 판매 이후 2012년 2월에는 무려 500만 장을 돌파했다. 모든 플랫폼을 더해 현재까지 누적 판매량은 3,500만 장에 이를 정도다.

[마인크래프트]가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요인은 '창작의 파생'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게임은 게이머들이 자유로운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계속 만드는, 즉 창작할 수 있는 것이 큰 재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게이머들은 자신이 만든 완성품이나 과정을 동영상으로 제작해 유튜브에 등록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공유돼 [마인크래프트]는 대중적인 인지도까지 얻을 수 있었다. 전 세계 이용자들에 의해 창작이 파생되는 이 흥미로운 과정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기업이 쏟아내는 마케팅 비용보다 훨씬 값진 가치였다. 사실 [마인크래프트]의 인기 요인이나 그로 인해 발생한 사회현상은 도저히 이 지면에 채우기 부족하니, 일단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어쨌든 확실한 것은 마르쿠스 페르손은 큰 부자가 됐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가 됐다는 것이다. 통장에 쌓이는 돈과 유명세는 너무 갑작스러워 마르쿠스 페르손 본인조차 어떻게 제어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성공'과는 별개로 마르쿠스 페르손은 계속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가까운 예로, 그는 2009년 [마인크래프트]를 준비하며 동료인 야콥 포서와 모장을 설립했다. 원래 둘은 [스크롤즈]로 회사를 창업할 계획이었지만, 생각보다 [마인크래프트]가 인기를 누림에 따라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는 회사의 구조를 괴상하게 만들었다. 모장은 마르쿠스 페르손, 야콥 포서, 카를 마네(당시 제이앨범 대표)가 공동으로 소유하되, 대신 마르쿠스 페르손은 자신의 회사 '노치 디벨로먼트'를 통해 [마인크래프트]의 모든 무형 자산 권리를 받는 것이었다. 게다가 '노치 디벨로먼트'는 모장과 단독 계약을 통해 독점개발 및 판매까지 할 수 있었다.




▲ [마인크래프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데 간혹 그 결과물은 경이로울 정도다

그가 이런 괴상한 구조를 취한 것은 '큰 회사'가 되지 않고도 '큰 회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페르손은 수익구조가 우선시되는 통상적인 사업논리를 거부하고 있었다. 즉, 자신은 인디게임 개발자이고 직접 설립한 모장 역시 인디 개발사로 계속 유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논리가 아니었다면, 현재 모장은 [마인크래프트]의 수많은 확장팩은 물론 [마인크래프트2]까지 내놓았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마르쿠스 페르손은 [마인크래프트]의 커다란 성공과 관계없이 인디게임 개발자라는 자신의 직업에 만족했다. 그리고 그는 이미 뼛속까지 창작자의 마인드가 확실하게 박혀 있는, 즉 누구보다 자유로운 의지가 있었고 통상적인 사업 논리보다 '우리 식대로' 한다는 것이 걸 중요하게 여겼다.

관련해 유명한 두 가지 일화가 있다. 마르쿠스 페르손은 소위 '밸브빠'라 불릴 정도로 밸브를 사랑했다. 게이브 뉴웰이 설립한 밸브는 대기업 중에서도 유일무이하게 외부자본에 잠식되지 않은 독립회사였고, 갖가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수용하고 있었는데 이런 방향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2010년, 마르쿠스 페르손은 [마인크래프트]가 한창 궤도에 오를 무렵, 밸브에 초청받으며 입사할 기회를 얻었다. 동경했던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페르손을 이를 거부하고 모장을 설립했다. "마인크래프트는 나에게 밸브에서 일하는 기회 대신, 밸브 같은 회사를 줄 것만 같다" 이게 가장 큰 이유였다.


▲ [마인크래프트]는 갖가지 서브컬쳐를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국내에도 아프리카TV의 BJ 양띵 등
게임을 통한 갖가지 아이디어를 엔터테인먼트 형태로 꾸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 하나는 제니맥스와 [스크롤즈]를 두고 벌인 상표권 분쟁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제니맥스는 [스크롤즈]가 자회사인 베데스다가 개발한 [엘더스크롤]와 이름이 흡사해 상표권 등록이 불가능하다며 모장을 압박했다. 한창 분쟁이 과열되던 사이, 우리의 마르쿠스 페르손은 제니맥스에 괴상한 제안을 한다. [퀘이크3]로 대결을 하자, 우리 쪽 전사(?) 3명과 당신들의 전사 3명이 접전을 벌인다, 우리가 이기면 소송을 취하하고 당신들이 이기면 우리는 [스크롤즈]의 이름을 바꾸겠다, 라고 언급한 것이다. 어떤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확립된 제니맥스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미친 소리'로 들렸을 법한 언급, 이게 바로 마르쿠스 페르손의 정체다.

이런 특별한 이슈를 통해서 마르쿠스 페르손은 더 유명세를 탔다. 외부에서는 마르쿠스 페르손이라는 인디신화를 이끌어낸 인물이, 게임에서는 '노치'라는 친숙한 게임개발자가 계속 이슈가 됐다. [마인크래프트]는 어느새 Xbox360과 모바일 등 갖가지 플랫폼으로 출시돼 있었고, 게이미피케이션을 통해 교육용 목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워너 브라더스와 손잡고 [마인크래프트] 영화 제작까지 진행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2012년 초. 마르쿠스 페르손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이제, 내려두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모장에 입사한 '말총머리' 젠스 베르겐스텐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자신은 앞으로 [마인크래프트] 개발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결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한때 아웃사이더에서 단숨에 인디신화 주역으로 떠올라 세간이 떠들썩했던 '마르쿠스 페르손'이 이 꿈같았던 시기에서 벗어나 다시 자신의 공간, 즉 그를 있게 했던 '노치'로 돌아와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노치' 페르손은 이렇게 남아 있다.


▲ [마인크래프트]로 만든 노치 신전, 마르쿠스 입장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저는 아니 '우리는' 인디게임 개발자니까요

사실 마르쿠스 페르손의 삶은 보통의 인디게임 개발자들의 삶과 비슷하다. 물론 그 궤적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기본적인 스토리는 비슷할 것이라고 본다. 때로는 아웃사이더라 불리는 그들, 그렇지만 누구보다 뜨거운, 그리고 게임이 인생 모두인 사람들. 그가 이들과 차이가 있다면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마르쿠스 페르손의 이와 같은 이야기는 세상의 거의 모든 인디게임 개발자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본문에서 그의 삶 자체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곧 인디게임 개발자 삶에 상징적인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에 포인트를 둔다면 [마인크래프트]와 인디신화는 더 명쾌하게 해석하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런 인디신화는 최근 들어 오픈마켓(디지털 유통)의 활성화와 킥스터터 등의 크라우드 펀딩까지 열리면서 한층 가능성이 높아졌다. 거품도 있겠지만 인디와 '포화'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이 삶 속에는 마르쿠스 페르손도 있다. 그 역시 지금도 거대한 집, 그러나 어느 한구석에서 모니터를 보며 때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때로는 껄껄 웃으며 때로는 씩씩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가 앞으로 만들 게임은 [마이크래프트] 이상의 유명세를 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아마 다수의 언론매체는 그가 내놓을 다음 게임을 집중 조명하며 '최고'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일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게임이 실패하면 비웃고 깔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다. 애초에 그는, 아니 그들은 이런 부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도전하고 또 도전할 뿐이다. 알다시피, 창작은 이런 것이다.


▲ 마르쿠스 ‘노치’ 페르손 <출처: AUSTRALIAN MAGAZINE>

참고문헌
[마인크래프트 이야기] 다니엘 골드버그·리누스 라르손 공저
[마인크래프트 위키]
[AUSTRALIAN MAGAZINE] How Minecraft creator Markus Persson built the world
[GAMASUTRA] Interview: Markus 'Notch' Persson Talks Making Minecraft
[GURU] Markus Persson: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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