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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북미 대전격투의 대부, '모탈 컴뱃' 개발자 에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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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오래 전부터 대전격투 게임의 강국이었다. ‘스트리트 파이터’, ‘버추어 파이터’, ‘철권’, ‘킹 오브 파이터즈’, ‘데드 오어 얼라이브’ 등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으는 대전격투 게임의 대다수는 일본 개발사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대전격투 분야에서 일본은 타 국가에서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금자탑을 세웠고, 그 결과 전세계 대전격투 게임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미국 게임개발사 미드웨이가 내놓은 ‘모탈 컴뱃’은 일본 게임들이 지배하는 대전격투 게임 시장에서 특유의 센스와 독특한 게임성으로 독보적 인기를 얻은 시리즈이다. 사실 이 작품은 결투에서 진 상대를 산산이 찢어 죽이는 잔혹성으로 더 유명하지만, 자세히 파헤쳐 보면 대전격투 장르의 본 목적에 충실한 명작이다. ‘모탈 컴뱃’이 대전격투 게임의 전반적인 침체기 속에서도 유일하게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식 대전격투 게임을 대표하는 ‘모탈 컴뱃’은 홍콩 쿵푸 영화와 미국식 B급 액션 영화에 심취해 있던 20대 청년 4인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에드 분이다. 그는 친 유저 성향의 개발자로 유명하며, 재치와 여유를 게임에 담는 법을 안다. ‘모탈 컴뱃’이 단순히 잔인한 게임만으로 치부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모탈 컴뱃’을 만든 에드 분 (사진출처: taringa.net)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액션 영화와 닌텐도 게임을 좋아하던 소년

에드의 본명은 에드워드 J. 분(Edward J. Boon). 그는 1964년 미국 시카고에서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컴퓨터 게임 문화가 없었기에, 그는 각종 만화 및 영화에 심취했다. 특히, 이소룡(Bruce Lee)이 등장하는 동양의 무술 영화나 과도한 액션이 난무하는 B급 액션 영화는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가 컴퓨터를 처음 접한 것은 10대 시절, 중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많은 게임 개발자들이 그렇듯, 에드 역시 컴퓨터 속의 매력적인 세계에 깊이 빠졌다. 1982년, 그는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 캠퍼스에 입학해 수학&컴퓨터사이언스를 전공한다.

에드는 대학 시절, 닌텐도 게임을 접하며 게임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는 곧 프로그래밍을 배워 게임회사에 입사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대학 졸업 후 아케이드 게임을 제작하는 중소기업 미드웨이(Midway)에 들어갔다. 당시 미드웨이는 마크 터멜(Mark Turmell)의 주도 하에 다양한 스포츠 및 액션 게임을 제작했다. 에드는 그의 밑에서 다양한 프로젝트에 프로그래머로서 참가하며 게임 개발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미식축구 게임인 ‘하이 임팩트’ 프로젝트의 프로그래머로 게임업계에 처음 발을 디뎠다. 1990년 출시된 이 작품은 미식축구의 인기가 높은 미국 등지에서 나름 인기를 얻었고, 이듬해에는 후속작 격인 ‘슈퍼 하이 임팩트’도 출시되었다. 그 외에도 에드는 슈팅 게임 ‘토탈 커니지’, 각종 핀볼 게임 개발에 관여하며 프로그래머 및 게임 디자이너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 에드가 처음으로 개발에 참여한 게임 ‘하이 임팩트 풋볼’

그러나 에드가 진정으로 만들고 싶은 게임은 스포츠나 슈팅 게임이 아니었다. 그는 평소 아케이드 게임 센터에 자주 갔는데, 1987년 발매된 캡콤의 ‘스트리트 파이터’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다. ‘스트리트 파이터’는 기본적으로 1인용 게임이었지만, 중간에 다른 플레이어가 난입해 들어오면 PvP(Player vs Player)의 전투가 가능했다. 이 게임은 미국 내에서 많은 화제를 모았고 에드는 이를 좀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었지만, 그가 원하는 게임을 제작할 기회는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운명의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를 만나다

‘토탈 커니지’가 출시된 1991년, 전세계 아케이드 게임업계에는 한바탕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대전격투 게임의 교과서로 불리는 ‘스트리트 파이터 2’가 발매된 것이다. ‘스트리트 파이터 2’는 전작에서 부분적으로 구현된 PvP 대결을 특화시킨 게임으로, 국내를 비롯해 일본과 미국, 유럽 등 전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대결에서 진 사람은 물러나거나 동전을 다시 넣어야 했기에, 기존 게임보다 훨씬 빠른 회전율을 기록했다.

‘스트리트 파이터 2’는 단순한 인기 게임의 수준을 넘어, 아케이드 게임업계 전체의 부흥을 가져왔다.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신화를 지켜본 전세계 게임사들은 앞다퉈 대전격투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드웨이 역시 마찬가지였고, 마침내 에드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스트리트 파이터 2’와 경쟁할 만한 작품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에드는 당시 미드웨이에서 캐릭터 디자인을 하던 존 토비아스(John Tobias)를 찾아갔다. 이 둘은 ‘토탈 카니지’ 개발팀에서 함께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성격과 관심사 등이 매우 비슷했다. 그들은 틈 날 때마다 다양한 신작 게임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곤 했는데, 마침내 그것을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다. 이후 스토리와 설정 담당 존 보겔, 사운드 담당 댄 포든이 팀에 합류하며 ‘모탈 컴뱃’의 초기 제작진이 꾸려졌지만, 대부분의 작업은 에드 분과 존 토비아스를 필두로 진행되었다. 이 둘의 조합은 마치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했던 존 카멕과 존 로메오 콤비를 연상시켰다.

‘모탈 컴뱃’은 전체적으로 ‘스트리트 파이터 2’를 가이드 삼아 제작되었다. 가드와 장풍 등 ‘스트리트 파이터 2’가 정립한 대전 액션 시스템을 상당수 답습하되, 스페셜 무브 기능을 비롯한 새로운 시스템도 다수 삽입했다. 에드는 여기에 80년대 홍콩 액션 영화나 일본 닌자 영화에서 본 동양적인 색채를 본격적으로 넣어 ‘스트리트 파이터 2’와의 차별화를 꾀했다.


▲ 91년 발매되어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스트리트 파이터 2’


모탈 컴뱃’의 두 주역, 에드 분(우)과 존 토비아스(좌)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존 토비아스는 이소룡의 ‘용쟁호투(Enter the Dragon)’, 장 끌로드 반담의 ‘투혼(Bloodsport)’과 같은 액션 영화의 광팬이었다. 존 토비아스는 불과 며칠 만에 서브제로, 스콜피온, 라이덴, 리우 캉 등 많은 캐릭터의 콘셉을 완성했다. 에드는 존 토비아스가 그려낸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게임 내에 구현했다. 당시 ‘스트리트 파이터 2’보다 더욱 사실적이고 판타지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선택한 기술이 바로 실사 모션캡쳐 그래픽이었다. 이 기술은 미드웨이의 전작 ‘하이 임팩트’나 ‘NARC’, ‘터미네이터 2’ 등에도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에드는 이 때의 경험을 살려 ‘모탈 컴뱃’을 실사 게임으로 제작했다.

실사화가 결정되자 캐릭터를 연기해 줄 배우를 모집하는 일이 남았다. 당시 에드와 존 토비아스는 한창 인기를 끌던 액션 배우 장 끌로드 반담을 기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스트리트 파이터’ 영화화 및 이를 바탕으로 한 게임에 출연하기로 계약이 체결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에 존 토비아스는 장 끌로드 반담을 포기하고, 또 다른 주인공 ‘리우 캉’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 때 채용된 배우가 당시 미국에서 중국무술 우슈(wushu) 챔피언으로 등극한 존 토비아스의 한국인 친구 박호성이었다. 박호성은 이후 ‘모탈 컴뱃’의 인기를 바탕으로 성룡의 영화 ‘취권 2’ 등에 출연하며 액션 배우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배우들의 연기를 바탕으로 한 실사 모션캡쳐 그래픽을 이용해, 에드는 ‘모탈 컴뱃’의 대전 시스템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가장 힘을 기울인 부분이 바로 공중 콤보 개념의 도입이었다. 공중 콤보란 공격을 당해 뒤로 넘어지는 캐릭터에게 추가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지금에야 모든 대전 액션 게임에 포함되어 있지만 당시엔 존재치 않았던 기능이었다. ‘스트리트 파이터 2’에서 ‘달심’에 한해 부분적인 공중 콤보가 가능했지만, 이는 의도한 것이 아닌 버그에 가까웠다.

에드가 공중 콤보 시스템을 본격화 한 데는 실사를 바탕으로 한 ‘모탈 컴뱃’의 특성이 한 몫을 했다. 당시 하드웨어 여건 상, 캐릭터의 동작을 세밀하게 묘사하기에는 너무 많은 용량이 들어갔다. 결국 캐릭터의 모션을 최대한 간소화해 펀치를 뻗거나 기술을 쓰는 데 고작 1~3프레임의 이미지만을 넣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캐릭터의 모션을 빠르게 설정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캐릭터의 이동 속도와 공중에서 쓰러지는 속도는 기존의 대전액션 게임과 비슷했다. 그러자 캐릭터가 다운되고 바닥에 쓰러지기까지의 공백 시간이 생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에드는 공중에 떠 있는 캐릭터에게도 다양한 타격을 넣으며 호흡을 이어갈 수 있게 했다. 기존 대전격투 게임에서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였다.




▲ 장 끌로드 반담을 대신해 ‘모탈 컴뱃’의 주인공을 맡은 한국 배우 박호성

또한, 모션 이미지를 간소화 한 탓에 캐릭터의 움직임이 다소 정형화되고 딱딱한 느낌이 들었는데, 에드는 이를 ‘모탈 컴뱃’의 특징으로 승화시켰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모탈 컴뱃’ 시리즈의 전통으로 자리잡아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아 왔으며, 초당 30프레임의 부드러운 동작이 가능한 지금도 당시 느낌을 살린 특유의 움직임을 구현하고 있다.

에드는 게임 디자인에서부터 프로그래밍, 아트 작업부터 스토리까지 게임 개발의 전 분야에 관여하며 ‘모탈 컴뱃’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이 때 에드는 게임 캐릭터인 ‘스콜피온’의 성우 작업을 맡기도 했는데, 시리즈 탄생 22년이 지난 지금도 ‘스콜피온’의 목소리는 그가 계속 맡고 있다. 참고로 에드는 이를 통해 ‘가장 오랫동안 한 게임 캐릭터의 목소리를 맡고 있는 인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에드 분과 존 토비아스 등 4인의 ‘모탈 컴뱃’ 개발팀은 궁합이 잘 맞았다. 그들은 같은 목표를 공유하며 일사천리로 게임을 만들었으며, 불과 8개월 만에 게임을 완성했다. 그렇게 1992년 아케이드로 출시된 ‘모탈 컴뱃’은 출시와 함께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모탈 컴뱃’의 광팬을 뜻하는 ‘모탈리언’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 미국에서는 ‘스트리트 파이터 2’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그 해 CES(Consumer Electronics Show)에서 ‘모탈 컴뱃’은 단연 화제작이었다. 수많은 팬들이 행사장에서 ‘모탈 컴뱃’을 연호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에드는 게이머들의 외침을 들으며 하나의 결심을 했다. ‘모탈 컴뱃’ 시리즈를 더욱 발전시켜 ‘스트리트 파이터’를 뛰어넘는 최고의 대전액션 게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 '모탈 컴뱃’은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스트리트 파이터 2’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었다

너무 잔혹하다, 북미 게임 심의단체 설립

‘모탈 컴뱃’이 인기를 끈 것은 실사 캡쳐 그래픽과 화려한 기술 효과 및 높은 게임성도 한 몫을 했지만,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온 것은 잔혹성이었다. ‘모탈 컴뱃’을 대표하는 마무리 기술 ‘페이탈리티(Fatality)’가 주 원인인데, 이 기술을 전투 말미에 사용하면 상대를 잔혹하게 처형시키는 연출을 보여준다. 목을 자르는 것은 기본, 상대방의 몸을 반으로 가르거나 사지를 찢고, 심지어 상대의 척추를 뽑아버리는 잔혹한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다소 지나쳤다. 말 그대로 피와 살이 튀는 게임이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아케이드 게임센터에서 어린이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자, 미국 내에서는 게임의 폭력성을 분류 감독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상∙하원 의원들은 너도 나도 게임의 폭력성을 규탄했고, 그 중심에는 ‘모탈 컴뱃’이 있었다.(1993년 ‘둠’이 등장하며 규탄의 지분을 반씩 나눠가졌고, 이후에는 ‘GTA’ 시리즈가 그 바통을 넘겨받았다)

결국 쏟아지는 비난을 이기지 못한 미국 게임업계는 자체적인 등급 심의 기관인 ESRB(Entertainment Software Rating Board)를 출범시켰다. 이전까지 뚜렷한 등급 체계가 없던 게임에 심의 및 연령표기가 적용된 것이다. 그만큼 ‘모탈 컴뱃’은 뜨거운 감자이자, 게임업계의 이단아였다.

단,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에 얽히며 곤혹을 치른 ‘둠’과는 달리, ‘모탈 컴뱃’은 실제 폭력사건과 연관된 적은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모탈 컴뱃’은 분명 폭력적이었으나,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철저한 판타지를 추구했다. 이후 ‘모탈 컴뱃’은 2편부터 M(Mature) 등급을 받고 성인용으로 출시되었고, 이후에는 타 게임에 비해 폭력성 논란에서 상당 부분 자유로워졌다.




▲ 게임 등급 심의기관 ESRB 설립의 중요 요인으로 작용한 ‘모탈 컴뱃’의 페이탈리티 장면들

‘모탈 컴뱃’의 전성기와 몰락

‘모탈 컴뱃’은 미드웨이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특유의 게임성을 계속 발전시키며 3편까지 발매되었다. 4명으로 시작했던 개발팀도 점점 불어났고, 선택 가능한 캐릭터나 기술의 수, 페이탈리티 역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게임의 무대도 아시아에서 벗어나 다크 판타지가 결합된 아웃월드로 확장됐고, 세계관 역시 입체적이고 탄탄하게 진화했다. 플랫폼도 아케이드를 넘어 세가 세턴과 플레이스테이션 등 다양한 가정용 콘솔로 확장해 가며 유저를 점점 늘려갔다.

에드는 ‘모탈 컴뱃’ 시리즈 개발과 동시에 영화화에도 참여했다. 영화로 제작된 ‘모탈 컴뱃’은 원작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며 호평을 받았고, 에드는 존 토비아스와 함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이 작품은 전세계 1억 2천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했는데, 이는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 중 최초로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이처럼 ‘모탈 컴뱃’은 1990년대 초~중반, 대전격투 게임의 홍수 속에서도 그 위상을 뽐냈고, 에드 역시 풋내기 개발자에서 ‘모탈 컴뱃’의 아버지로 거듭났다. 게임의 흥행과 함께, 미드웨이의 기대도 더욱 커졌다.




▲ 게임과 영화 모두 흥행에 성공하며 ‘모탈 컴뱃’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1996년, 미드웨이는 ‘모탈 컴뱃’의 3D화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당시는 ‘버추어 파이터’의 영향으로 3D 게임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할 때였다. 특히, 인간형 폴리곤과 사실적인 움직임이 뒷받침되는 3D 대전격투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게임회사로서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던 시대였다. 어찌 보면 자존심 경쟁에 가까웠지만, 사실 3편에 이르러 ‘모탈 컴뱃’의 흥행도 조금씩 정체되는 느낌이 있었다.

마침, 에드는 당시 3D 대전격투 게임 ‘철권’에 푹 빠져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자신의 게임인 ‘모탈 컴뱃’ 대신 ‘철권’을 플레이 할 정도로 ‘철권’을 즐겨 했다. 게임 개발자로서, ‘철권’과 같은 3D 격투게임을 만들어 보고 싶었던 에드는 미드웨이의 3D 게임 요구에 맞춰 3D로 재구성된 ‘모탈 컴뱃 4’의 개발을 결정한다.

그러나 당시 에드와 제작진은 3D 프로그래밍 경험도 부족했거니와, 3D 게임 개발에 대한 노하우도 없었다. 특히나 ‘모탈 컴뱃’의 경우 기존까지 실사로 표현해오던 캐릭터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려다 보니 퀄리티가 2D 시절과 비교해서도 상당히 떨어졌고, 결국 어정쩡한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이를 커버하기 위해 에드는 게임성 측면에서 많은 시도를 했으나, 이마저 과도기적인 단계에 머물렀다.

결국 1997년 발매된 ‘모탈 컴뱃 4’는 평단의 혹평과 함께 흥행에 참패했다. 이후 인기 캐릭터 ‘서브제로’를 내세운 외전격 액션 게임 ‘모탈 컴뱃 미솔로지 서브제로’까지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개발진 내부에서도 3D를 지속해야 한다는 의견과 2D로 회귀해야 한다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결국 ‘모탈 컴뱃’의 주역인 존 토비아스는 1999년 미드웨이를 퇴사하고 만다. 이후 존 토비아스는 미드웨이의 다른 직원들과 함께 기가테인 스튜디오를 차렸지만 2005년 문을 닫은 후에는 게임 컨설턴트 역할로 돌아섰다.

절친한 벗이자 둘도 없는 파트너였던 존 토비아스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에드는 ‘모탈 컴뱃’ 시리즈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모탈 컴뱃 4’의 패인을 3D에 대한 개발지의 이해력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캐릭터의 이동과 점프 등 움직임은 3D 공간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졌지만, 정작 게임성과 기술 등은 2D에서 보여줬던 평면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면서 불협화음을 낸 것이다. 에드는 훗날 “그 때 우리는 정말이지 3D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데들리 얼라이언스를 개발하면서 비로소 3D에 대한 감을 잡았다.” 라고 평했다.


 3D 적응에 실패한 ‘모탈 컴뱃 4’


 2002년 작업실에서의 에드 분

미드웨이의 파산과 ‘모탈 컴뱃’의 위기

‘모탈 컴뱃 4’의 실패 이후, 에드는 절치부심해 팀을 재정비하고 차기작 구상에 들어갔다. 새로운 마음가짐을 반영하듯 차기작에는 ‘모탈 컴뱃 5’가 아닌 ‘모탈 컴뱃: 데들리 얼라이언스’라는 부제를 붙였다. ‘데들리 얼라이언스’는 ‘모탈 컴뱃’의 전성기였던 1, 2편의 동양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를 최대한 살렸고, 실제 무술과 무기 유파 시스템을 도입해 게임성도 한층 발전시켰다. 캐릭터 모델링을 포함한 전체적인 그래픽도 전작에 비해 대폭 향상되었으며, ‘페이탈리티’ 역시 한층 자세히 묘사되었다.

‘데들리 얼라이언스’ 이후 출시된 ‘모탈 컴뱃: 디셉션’ 역시 전작에서 호평을 받은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선택 가능 캐릭터 수을 30명까지 늘이는 등 게임의 볼륨을 대폭 상승시켰다. 위 두 작품은 ‘모탈 컴뱃 4’에서 땅에 떨어졌던 인기와 팀의 사기를 올렸고, 흥행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한동안 침체기에 빠졌던 ‘모탈 컴뱃’은 이 두 편의 게임을 통해 다시 날개를 다는 듯 했다.

하지만 ‘데들리 얼라이언스’와 ‘디셉션’의 흥행에 고무된 미드웨이 경영진은 점차 무리한 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차기작에서는 ‘모탈 컴뱃 1, 2’편 당시의 열광적인 흥행을 재현하고 시리즈의 완성형이 될 만한 대작 게임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이제껏 등장한 모든 캐릭터를 총출동시킴은 물론, 유저 자신이 직접 ‘페이탈리티’를 만들며 즐길 수 있는 꿈의 대전을 구현해 전성기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 그것이 에드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 3D 적응이 끝나고 재도약에 성공한 ‘데들리 얼라이언스’와 ‘디셉션’

이러한 미드웨이 경영진의 요구는 제작진의 한계를 전혀 생각지 않은 무리한 주문이었다. 캐릭터의 수가 너무 많아지다 보니, 수많은 유파의 무술과 무기술을 모션 캡쳐로 구현하는 데만 해도 팀의 모든 전력이 투입되었다. 여기에 PSP 이식작과 외전 게임 ‘모탈 컴뱃: 소림승’까지 동시에 제작하려다 보니, 에드를 비롯한 ‘모탈 컴뱃’ 제작진은 늘 살인적인 일정에 쫓겼다. 심지어 미드웨이는 회사의 재정적 위기를 이유로 발매 시기를 재촉하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탈 컴뱃: 아마게돈’은 2007년 다소 미완성인 느낌으로 발매되었다. 각 캐릭터에 대한 세부적인 설정도 부족했고, 스토리는 모순 투성이인 채로 공중에 붕 떴다. 밸런스 조절은 뒷전이었고, 캐릭터의 특성을 살린 고유의 페이탈리티도 사라졌다. 게임 스토리 담당인 존 보겔은 발매 이후에도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캐릭터의 개별 플롯을 완성시키려 했으나, 결국 도중에 포기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데들리 얼라이언스’ 부터 조금씩 나아지던 ‘모탈 컴뱃’의 인기는 ‘아마게돈’을 기점으로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늘 여유롭고 유머가 넘쳤던 에드 역시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여태껏 자신과 존 토비아스의 이름에서 철자를 따 온 캐릭터 ‘눕 사이보트’를 게임 안에 교묘히 숨겨 놓거나(*이는 대전게임 역사상 첫 히든 캐릭터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미국 싱어송라이터 ‘프린스(Prince)’의 의상을 입은 캐릭터 ‘레인’을 만드는 등 유쾌하고 창의적인 시도를 많이 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모탈 컴뱃’에 걸린 기대치가 높아지고 시리즈가 대형화 되어가면서 이러한 면도 많이 흐릿해졌다.


▲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던 ‘모탈 컴뱃: 아마게돈’

‘모탈 컴뱃: 아마게돈’이 발매된 2007년, 미드웨이는 적자의 늪에 빠져 있었다. ‘모탈 컴뱃’ 이외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성과를 거두지 못해 벌어진 사태였다. 결국 에드는 회사의 위기를 구원하기 위해 워너브라더스 산하 DC코믹스와의 연계를 통한 드림 매치 ‘모탈 컴뱃 vs DC’를 제안했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DC코믹스 영웅이 잔혹함의 대명사 ‘모탈 컴뱃’의 룰에 따라 결투를 벌인다는 컨셉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화제를 모았고, 일사천리에 개발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조합은 처음부터 한계를 안고 있었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 정의를 위해 싸우는 DC 유니버스 영웅들의 이미지와 패자는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모탈 컴뱃’의 차이가 가장 큰 문제였다. ‘모탈 컴뱃’의 팬들은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페이탈리티를 당해 죽거나 그러한 기술을 구사하는 장면을 원했으나, DC코믹스 및 히어로 팬들은 이에 반대했다. 결국 ‘모탈 컴뱃’ 측이 한 발 양보하여 잔인하지 않은 ‘페이탈리티’를 구현해냈다. ‘모탈 컴뱃’ 의 최대 특징인 잔혹함을 포기한 것이다.

대신 에드는 게임성을 극대화시켜 이를 극복하려 했다. 영웅들이 서로를 붙잡고 근접 난타전을 벌이거나, 빌딩에서 떨어지면서까지 싸우는 참신한 시스템을 다수 구현했다. 전투에서도 3D와 2D를 아우르는 조작법, 탄탄한 밸런스와 그래픽 수준, 영화와 같은 연출 등을 통해 많은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모탈 컴뱃 vs DC’가 발매된 2008년 말, 미드웨이는 도산 직전에 몰려 있었다. 미드웨이는 당시 2억 달러 상당의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그 와중 미드웨이 주식 87%인 9천만 주가 10만 달러라는 헐값에 넘어간 ‘주식 헐값 처분 사건’이 겹쳤다. ‘모탈 컴뱃 vs DC’는 결코 나쁘지 않은 판매량을 기록했지만, 미드웨이의 위기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결국 2009년 2월 미드웨이는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하고 만다.


▲ 수작이었지만 미드웨이의 파산을 막을 수 없었던 불운의 작품 ‘모탈 컴뱃 vs DC’

워너브라더스 산하 네더렐름 수장이 되다

미드웨이의 파산 후 ‘모탈 컴뱃’의 생명도 끝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에드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던 업체가 있었다. 바로 워너브라더스였다. ‘피어’, ‘쇼고’, ‘에얼리언vs프레데터’ 등을 제작한 모노리스를 인수하며 게임에 대해 적극적인 투자를 해 온 워너브라더스는 ‘모탈 컴뱃vsDC’ 때부터 에드가 이끄는 ‘모탈 컴뱃’ 제작진의 가능성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워너브라더스는 미드웨이의 파산 신청을 전해들은 즉시 스튜디오 인수에 나섰다. 다만, 미드웨이의 스포츠 게임 제작 스튜디오는 인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실상 미드웨이가 아닌 에드와 ‘모탈 컴뱃’ 제작진의 인수를 위한 교섭이었다.

결국 에드와 ‘모탈 컴뱃’ 제작진은 워너브라더스 산하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워너브라더스는 개발팀의 명칭을 ‘네더렐름 스튜디오’로 변경하고, 팀의 독립적인 개발 환경과 적극적인 투자 및 지원을 약속했다. 워너브라더스 산하에서 에드는 네더렐름 스튜디오를 이끌며 ‘모탈 컴뱃’ 시리즈를 부활시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에드는 그 동안 꼬이고 꼬인 스토리와 게임 시스템을 전부 초기화시켰다. 2010년 당시 3D 격투는 하향세에 접어들고 있었다.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를 비롯해 ‘소울 칼리버’, ‘철권’ 등의 영향력도 예전만 못했고, 반대로 캐릭터와 배경 등만 3D로 표현하고 게임 방식을 2D로 유지한 ‘스트리트 파이터 4’가 과거의 명성을 되찾으며 대전격투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맞춰, 에드는 ‘모탈 컴뱃 4’ 이후로 고집해 온 3D 전투 방식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리하여 고퀄리티 3D 그래픽과 1~3편의 2D 게임성이 어우러진 ‘모탈 컴뱃 9’가 출시되었다.

새롭게 재탄생한 ‘모탈 컴뱃 9’는 많은 이들의 호평 속에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2D 시절의 대중성과 함께 20년간 쌓아온 대전격투게임의 노하우를 총집결시켜 진입 장벽이 낮으면서도 깊이 있는 게임성을 구현했다. 공중에 붕 떴던 스토리는 시간을 과거로 되돌린다는 설정을 채택해 처음부터 바로잡았으며, 페이탈리티의 잔혹성도 대폭 높였다. 대전격투 세계대회 EVO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가 한편, ‘갓 오브 워’의 크레토스나 영화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프레디 크루거의 특별 참가도 화제를 모았다. 다만, 높은 잔혹성 때문에 국내 정식발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워너브라더스 산하에서 부활에 성공한 ‘모탈 컴뱃 9’

이후 워너브라더스는 네더렐름 스튜디오의 개발 역량을 살려 DC코믹스 영웅을 본격 활용한 새로운 격투게임을 제안했다. 바로 ‘인저스티스: 갓즈 어몽 어스’였다. 이 게임은 과거 ‘모탈 컴뱃 vs DC’가 아닌 ‘모탈 컴뱃 9’에 가까운 게임으로 제작되었으며, 철저하게 DC코믹스 영웅과 빌런의 박력 넘치는 전투에 집중해 좋은 평가를 얻었다. 이 작품으로 에드는 ‘모탈 컴뱃’만이 아니라 북미 대전격투 게임을 대표하는 개발자로 떠올랐다.

에드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개발자 중 한 명이다. 팬들이 원하는 것을 게임 내에서 구현하려고 애쓰고, 잔혹함 속에서도 유머를 집어넣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모탈 컴뱃’은 단순히 자극적이기만 한 게임이 아닌, 북미 및 유럽 대전격투 게임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2014년, 에드는 잠시도 쉬지 않고 게임 개발의 최전선에서 대전격투 게임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네더렐름 스튜디오 내부에서는 ‘모탈 컴뱃’의 10번째 작품인 ‘모탈 컴뱃 X’를 개발 중이며, 외부적으로는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개발사인 캡콤에 끊임없이 ‘모탈 컴뱃 vs 스트리트 파이터’ 제작을 건의하고 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에드 분. 그가 만들어나갈 대전 액션 게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 네더렐름 스튜디오에서 새로 제작한 IP ‘인저스티스: 갓즈 어몽 어스’


▲ 2014년 발표된 ‘모탈 컴뱃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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