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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세가 마스코트 ‘소닉’의 아버지, 나카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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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중반, 가정용 콘솔 게임시장은 닌텐도와 세가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패미컴과 게임보이 등을 통해 게임 문화를 전파한 닌텐도, 메가드라이브와 아케이드 기판을 통해 첨단 기술을 이끈 세가. 이 두 회사 사이의 경쟁사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나카 유지(中 裕司)는 이러한 시대의 일선에서 세가를 뒷받침한 개발자다. 그의 대표작 ‘소닉 더 헤지혹’ 시리즈는 세가의 게임 콘솔 메가드라이브와 세가 새턴, 드림캐스트에 이르기까지 최고 인기 타이틀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닌텐도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던 유일한 게임으로 기록되었다.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 '소닉 더 헤지혹'의 아버지, 나카 유지

도쿄에 살고 싶어 세가에 입사한 고졸 청년

196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나카 유지는 어릴 적 공부에 큰 관심이 없었다. 대신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쳐에 빠져 살았다. 오사카에서는 최신 정보 및 관련 상품을 구하기 어려웠기에, 그는 방학이나 주말을 이용해 마음 맞는 사람들과 모여 서브컬쳐 중심지인 도쿄로 원정을 떠나곤 했다. 도쿄에서 마음에 드는 만화책을 사고, 유명 만화가를 만나고,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방문하면서, 나카 유지는 ‘크면 꼭 도쿄에서 일을 하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푹 빠졌던 나카 유지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중학생 때 전국적으로 아케이드 붐을 일으킨 ‘스페이스 인베이더’ 덕택에 자연스럽게 게임을 접했지만, 엄한 교칙으로 게임센터에 자주 가지 못했기에 큰 관심을 두진 않았다. 동기는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어느 날 우연히 TV를 보던 나카 유지는 일본의 유명 뮤지션 사카모토 류이치가 지휘하는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 연주를 접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윽고 ‘나도 이런 음악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악기 연주에는 자신이 없었다. 대신, 잡지에서 본 컴퓨터 음악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컴퓨터를 통해 다양한 MIDI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잡지 등을 통해 독학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가 입사 후 당시 경험을 살려 ‘아웃런’ BGM을 만들기도 했다)

이후 나카 유지는 독학으로 쌓은 프로그래밍 기술을 활용해 게임 포팅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취미 활동을 위한 돈을 모을 수 있었고, 도쿄에 가는 횟수도 점점 늘어났다. 결국 그는 1984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선택했다. 도쿄에서 좋은 회사에 취직해, 취미 생활을 마음껏 즐기려는 이유에서였다.

도쿄에 본사가 있는 회사를 알아보던 중, 마침 프로그래머 공채를 진행하던 게임회사 세가가 눈에 띄었다. 그는 별 망설임 없이 면접 시험장인 세가 오사카 지점으로 향했다. 당시 한창 유망 직종으로 떠오르던 게임. 그 선두 주자 중 하나였던 세가의 입사 시험장에는 명문대 졸업생을 포함한 200여 명의 지원자가 들어차 있었다. 공채 인원은 고작 10명으로, 경쟁률은 20대 1이었다. 그러나 나카 유지는 당당히 시험에 합격해 세가에 입사했다. 실전으로 갈고 닦은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과 열정에 고졸이라는 학력 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가에 들어간 나카 유지는 신입 사원 연수 중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 만한 게임을 만들어라’는 과제를 받고 ‘걸즈 가든’을 제작했다. 이 게임은 시험용이었으나 도무지 신입 개발자의 작품이라 믿기지 않는 완성도와 게임성으로 주변을 놀라게 했고, 상품화까지 진행되었다.


▲ 나카 유지의 첫 게임 ‘걸즈 가든’

당시 세가에서는 천재 프로그래머 스즈키 유가 세계 최초의 체감형 아케이드 게임 ‘행온’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 작품을 통해 스즈키 유의 눈에 띈 나카 유지는 그의 밑에서 게임 개발 및 프로그래밍 노하우를 익히며 ‘아웃런’, ‘스파이&스파이’ 등 다양한 아케이드 게임을 콘솔로 이식하는 작업을 맡아 했다. 참고로 ‘소닉 더 헤지혹’ 크레딧에 쓰여진 그의 닉네임은 ‘YU2’였는데, 이는 일본어 발음으로 ‘유지’이기도 하지만, 제 2의 스즈키 유(Yu)라는 중의적인 뜻을 담고 있다. 스즈키는 나카 유지의 스승이자 좋은 동료였고, 훗날 그의 게임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나카 유지는 특유의 꼼꼼하고 빠른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스페이스 해리어’의 메인 프로그래머를 맡았으며, 나아가 세가의 대표 RPG로 기획된 ‘판타시 스타(국내명: 판타지 스타)’에서도 메인 프로그래머 겸 기획까지 일부 맡았다. 이 때의 경험을 살려 그는 1988년부터 게임 프로듀서로도 본격적으로 활약했는데, ‘슈퍼 썬더 블레이드’를 시작으로 ‘판타시 스타 2’의 총괄 제작을 맡으면서 나카 유지라는 이름은 조금씩 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기 ‘판타시 스타 2’ 개발에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게임은 당초 세가 마크3 플랫폼으로 기획되었지만, 도중에 세가의 신형 콘솔 메가드라이브로 플랫폼이 변경되었다. 심지어 메가드라이브의 출시일이 앞당겨짐에 따라, 개발기간이 총 6개월 정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 유지는 기한을 맞춰 높은 완성도의 게임을 제작해냈다. 그렇게 발매된 ‘판타시 스타 2’는 메가드라이브 초창기 매출 견인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게임을 통해 나카 유지는 세가 경영진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고, 더욱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다.


▲ 세가를 대표하는 RPG ‘판타시 스타’ 

세가의 중심에서 ‘소닉’을 만들다

패미컴으로 아타리 쇼크 이후 콘솔 게임업계를 장악한 닌텐도는, 1990년 11월 패미컴의 후속작 슈퍼매미컴을 출시하며 속도를 가했다. 한편 세가는 88년 말 세계 최초 16비트 가정용 콘솔 메가드라이브를 내놓았고, 플랫폼의 경쟁력인 타이틀 라인업을 강화하기 위해 온갖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세가가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닌텐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게임기를 대표할 만한 마스코트 게임이었다. 닌텐도는 이미 1985년 패미컴으로 출시되어 전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보유했고, 이를 활용한 다양한 마케팅 및 시리즈화를 통해 쏠쏠한 재미를 보는 중이었다. 실제로 1988년 출시되어 전세계 4,0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3’와 2년 후 출시된 ‘슈퍼 마리오 월드’ 같은 월드와이드 히트작은 세가 진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였다.

사실 세가에도 마스코트 캐릭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원숭이를 닮은 캐릭터 알렉스가 나오는 횡스크롤 액션 게임 ‘알렉스 키드’가 나름 인기를 끌며 시리즈화까지 됐다. 그러나 사회적인 신드롬까지 일으키는 마리오의 상대가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 소닉 이전에 세가를 대표했던 마스코트 게임 ‘알렉스 키드’ 

결국, 1990년 세가는 알렉스를 대체할 회사의 마스코트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당시 나카 유지는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가 AM8(훗날의 소닉 팀) 팀장이 되었고, ‘판타시 스타’ 개발 작업에서 같이 일했던 디자이너 오오시마 나오토, 기획자 겸 프로그래머 야스하라 히로카즈 등과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능가할 세가의 마스코트 게임을 만들라는 임무가 AM8에 맡겨졌다.

세가 측 주문은 다음과 같았다. 패미컴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처리할 수 있는 메가드라이브 CPU 성능을 과시할 겸, 캐릭터 움직임을 마리오보다 몇 배 빠르게 할 것. 이에 걸맞는 캐릭터를 만들고, 게임을 디자인하는 것이 나카 유지와 AM8 팀의 임무였다. 이윽고 사내 곳곳에서 기획된 캐릭터 디자인들이 AM8의 R&D 부서에 보내졌다. 이 중에는 토끼, 강아지 등 달리기 하면 떠오르는 동물 캐릭터는 물론, 아르마딜로부터 잠옷을 입은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캐릭터까지 다양한 원안이 존재했다. 이 중 귀로 물건을 집어 상대방에게 던지는 토끼 캐릭터가 나름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나카 유지의 생각은 달랐다.

“빨리 달리는 캐릭터 역할에 토끼나 강아지를 집어넣는 건 나태한 발상이다. 여기에 물건을 집어 던지는 시스템까지 들어가면 게임이 복잡해 질 것이다” 나카 유지는 이 말과 함께 캐릭터 기획안을 반려했다. 사실 이 캐릭터들의 수준이 낮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기획된 캐릭터 디자인 중 아르마딜로는 훗날 ‘마이티 더 아르마딜로’로, 루즈벨트 캐릭터는 ‘소닉 더 헤지혹’ 시리즈의 악당인 닥터 에그맨, 토끼는 ‘리스타 더 슈팅스타’ 등에 활용될 정도로 상품 가치가 충분했다. 그러나 나카 유지의 눈에는 한참 부족했다. 그는 좀 더 사람들의 허를 찌르는 캐릭터를 원했다.

그러던 와중, 오오시마 나오토가 새로운 캐릭터 원안을 가져왔다. 새 기획안에는 느릿느릿한 동물로 유명한 고슴도치가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광속으로 맵을 누비고 다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세가의 로고 색인 파란색을 메인으로, 마이클 잭슨이 신을 법한 빨간 슈즈를 신은 이 캐릭터는 음속을 넘나드는 고슴도치, 바로 소닉 더 헤지혹(당시 이름은 Mr. Needlemouse)이었다. 나카 유지는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이거야!”


▲ 소닉 프로젝트 초기 기획되었던 토끼 캐릭터 (출처: nintendolife.com)


▲ 최종 결정된 고슴도치 캐릭터 소닉

캐릭터를 완성하자마자, 나카 유지와 AM8은 즉각 ‘소닉 더 헤지혹’ 게임 개발에 들어갔다. 팀명을 소닉 팀으로 개명한 것도 이 때쯤이었다. 나카 유지는 점프를 이용해 적을 죽이거나 스테이지를 클리어 해 나가는 등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정석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따르되, 스피드와 자유도를 덧붙여 완전히 다른 느낌의 게임을 만들었다.

스피드의 경우 위에서 설명한 메가드라이브 기기 성능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였다. 소닉의 대쉬는 마리오의 달리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빨랐다. 관성을 이용해 롤러코스터처럼 디자인 된 다양한 코스를 빛의 속도로 주파하는 고슴도치 소닉의 모습은, 당시 게임업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자유도 역시 ‘소닉 더 헤지혹’의 명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소닉 시리즈는 빠른 캐릭터의 속도만큼이나, 콘텐츠 소모 면에서도 기존 횡스크롤 액션 게임과는 궤를 달리 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나카 유지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일률적 맵 진행이 아닌, 상하좌우를 자유롭게 오가며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디자인했다. 눈 앞의 길 대신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달린다거나, 아예 바닥을 뚫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것. 그렇게 제작된 ‘소닉 더 헤지혹’의 스테이지는 일종의 월드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잘 짜여진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느낌이었다면, ‘소닉 더 헤지혹’은 수많은 월드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목적지에 도달하는 탐험에 가까웠다.

그렇게 1991년 메가드라이브로 발매된 ‘소닉 더 헤지혹’ 1편은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세가가 전세계 16비트 콘솔 시장의 과반수를 장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소닉을 등에 업은 세가는 최초로 닌텐도를 콘솔 점유율로 눌렀으며, 이 때부터 닌텐도와 세가 사이에는 ‘마리오 vs 소닉’이라는 경쟁 구도가 본격화됐다. 이 둘의 경쟁 구도로 게임업계에도 호황이 찾아왔다. 그 중심에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미야모토 시게루, 그리고 ‘소닉 더 헤지혹’의 나카 유지가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소닉 더 헤지혹’ 발매 전 세가 내에서는 ‘이런 게임은 안 팔린다’며 반대하는 의견이 꽤 컸다는 것이다. 나카 유지가 ‘소닉 더 헤지혹’의 발매를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아마 세가의 전성기는 더욱 늦게 찾아왔거나, 혹은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 세가의 새로운 마스코트로 자리잡은 ‘소닉 더 헤지혹 1’


▲ 상하좌우를 광속으로 뛰어다니는 소닉의 모습 (출처: www.gamefabrique.com)

‘소닉 더 헤지혹 1’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나카 유지는 개발 과정과 후속작 개발 건으로 세가 상부와 다소 마찰을 겪었다. 이로 인해 그는 한때 퇴사까지 결심했으나 오오시마 나오토와 야스하라 히로카즈 등이 만류함에 따라 세가 북미지사로 자리를 옮겨 속편인 ‘소닉 더 헤지혹 2’를 개발했다. 이 작품 역시 60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이후 ‘소닉 더 헤지혹 3’, ‘소닉 앤 너클즈’, ‘소닉 스핀볼’ 등이 차례차례 출시되어 소닉 신화를 이어갔다.

나카 유지와는 별개로, 세가 본사에서도 소닉 시리즈를 계속 제작했다. 1993년 발매된 ‘소닉 CD’ 는 나카 유지가 아니라, 그의 동료였던 오오시마 나오토가 메인 프로듀싱을 맡았다. 당시 일본에 남아 있던 오오시마는 ‘소닉 더 헤지혹 2, 3’의 제작에서 빠져 있었지만 이를 통해 ‘소닉’ 시리즈 개발에 재참여했고, 나중에는 ‘소닉 어드벤처’까지 제작한다.

1996년, 일본으로 귀국한 나카 유지는 ‘소닉’ 시리즈를 떠나 더욱 혁신적인 게임을 만들기 위해 과거의 소닉 팀 동료들을 다시 소집했다. 당시 세가는 94년 발매한 세가 새턴을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철권’과 ‘파이널 판타지 7’ 독점을 앞세운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에 추격을 허용했다. 덩달아 닌텐도도 신형 콘솔 닌텐도 64를 내놓고 ‘슈퍼마리오 64’를 출시하며 또 한 번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세가 새턴은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나카 유지는 세가 새턴의 부흥을 꿈꾸며 소닉보다 더욱 혁신적인 게임성을 지닌 ‘나이츠 인투 드림즈’를 발매한다. 이 게임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독특한 액션이 특징인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마니아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나카 유지 역시 자신의 대표작으로 ‘소닉’과 ‘판타시 스타’, 그리고 ‘나이츠’를 내세울 정도로 이 게임에 쏟은 열의가 대단했다. 그 해 말에는 ‘나이츠’ 시리즈 번외편이자 무료 번들 ‘크리스마스 나이츠’도 출시되었다.


▲ 소닉의 뒤를 잇겟다는 각오로 출시된 ‘나이츠 인투 드림즈’ (출처: www.gamesradar.com)


▲ 새로운 마스코트 캐릭터를 꿈꾼 나이츠 (출처: www.fanpop.com)

하지만 ‘나이츠’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는 평가와 함께 ‘소닉 더 헤지혹’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주인공인 나이츠 역시 소닉의 뒤를 이을 마스코트로 자리잡는 데 실패했다. 안 그래도 세가 새턴의 부진으로 슬럼프에 빠져 있던 세가는 ‘나이츠’를 기점으로 끝없는 하향세를 타기 시작한다.

‘나이츠 인투 드림즈’를 끝으로, 나카 유지는 경영 및 인력관리 등 관리 업무가 늘어나면서 프로그래밍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프로듀서로서 역할만 수행했다. 동시에 세가의 신형 콘솔 드림캐스트 개발에도 참여하며, 컨트롤러 개발도 담당했다.

1998년, 나카 유지와 소닉 팀은 드림캐스트 발매에 맞춰 3D로 제작된 ‘소닉 어드벤처’를 발매한다. 해당 프로젝트는 오오시마 나오토가 메인이 되어 진행했고, 나카 유지와 미국에서 호흡을 맞췄던 야스하라 히로카츠는 개발에서 배제됐다. ‘소닉 어드벤처’는 드림캐스트 게임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타이틀로 기록되는 등 나름 선전했다. 그러나 전작의 게임 디자인을 담당했던 야스하라의 공백 때문이었는지, 게임성 면에서는 호불호가 갈렸다. 이에 더해 드림캐스트의 몰락까지 겹치며, 소닉 시리즈도 끝없는 하향세에 접어들고 만다.

‘소닉 어드벤처’ 발매 이후, 소닉 팀의 주 멤버들은 하나둘씩 세가를 떠나기 시작했다. 오오시마 나오토는 ‘아툰(Artoon)’이라는 독립 개발사를 차려 독립했고, 이후 ‘피노비’, ‘블링스’, ‘요시 아일랜드 DS’ 등을 제작했다. 야스하라 히로카츠 역시 2000년대 초 너티 독으로 적을 옮겨 ‘잭’과 ‘언차티드’ 시리즈를 디자인했고, 2012년에는 닌텐도에 합류했다. 결국 ‘소닉 어드벤처’는 소닉을 제작한 3인방이 세가에 재직하며 마지막으로 만든 타이틀로 기록되고 만다.

나카 유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일본에서 소닉 팀을 이끌며 ‘삼바 데 아미고’나 ‘츄츄로켓’ 등 다양한 게임을 제작했지만, ‘소닉 더 헤지혹’ 개발 당시와 같은 흥행을 기록하진 못했다. 엎친 데 덮진 격으로, 1999년 발매된 스즈키 유의 ‘쉔무’ 시리즈가 게임 역사상 최악의 흥행 참패를 기록하면서, 회사의 경영 상황 또한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나카 유지는 이웃나라 한국에서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를 필두로 한 온라인게임이 붐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자신이 만들었던 ‘판타시 스타’ 세계관을 바탕으로 콘솔용 온라인 MORPG ‘판타시 스타 온라인’을 제작하는 등 여러 모로 노력했지만, 기울어지는 회사를 다시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세가는 기울어 가는 드림캐스트 플랫폼에서 소닉 팀을 분리 독립시키기로 결정했다. 그에 따라 나카 유지는 2000년, 세가 팀의 인원들을 이끌고 소닉 팀 리미티드(Sonic Team Ltd)의 대표가 된다. 이렇게 소닉을 만든 3인방이 모두 2000년을 전후하여 세가를 직/간접적으로 떠남에 따라, 소닉 시리즈는 기나긴 암흑에 빠지게 되었다.


▲ 콘솔용 온라인게임 최초의 흥행작으로 기록된 ‘판타시 스타 온라인’ 


▲ 나카 유지(좌)와 오오시마 나오토(우) (출처: segabits.com) 

세가로부터의 독립, 프로페 설립

세가로부터 분리된 소닉 팀은 더 이상 드림캐스트 게임 개발에 매달리지 않고 닌텐도 게임큐브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2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진출했다. 당시 주요 작품으로는 세가에서 개발했던 ‘판타시 스타 온라인’의 에피소드 1~2, 컴파일에서 넘어온 ‘뿌요뿌요’ IP로 제작한 ‘뿌요 팝 피버’ 등이 있다. 여기에 미국에 남아 있던 소닉 팀(‘소닉 아케이드 2’ 제작사)을 흡수해 NDS용 ‘필 더 매직 XX/XY’, ‘더 럽 래빗’ 등의 퍼즐 게임도 제작했으며, 멀티플랫폼으로 제작된 ‘소닉 라이더즈’ 시리즈도 발매했다. 그러나 위 타이틀의 수익성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고, 결국 소닉 팀은 재정 악화로 인해 2004년 초 세가에 재인수됐다.

소닉 팀의 독립과 재인수. 그 과정에서 나카 유지는 게임 타이틀 개발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서, 후임 개발자들을 육성하고 전체적인 기획 방향을 감독하는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정작 나카 유지 본인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영화업계에서는 감독은 계속 감독을 맡는다. 직위가 올라가더라도 현장에서 일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게임업계는 그렇지 않다. 이는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라고 당시 심정을 밝혔다.

결국 나카 유지는 세가에서의 경영자로서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게임을 창조하는 프로듀서로서의 길을 택한다. 그는 2006년 발매된 ‘판타지 스타 유니버스’를 마지막으로 세가를 떠나기로 결심. 함께 일하던 동료 10여명을 데리고 세가 게임 크리에이터 독립지원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그 해 5월 주식회사 프로페(PROPE)를 설립한다. 이전의 소닉 팀 분리가 회사의 결정이었다면, 이번 독립은 순수한 나카 유지 자신의 의지였다.


▲ 신선한 시도가 더해진 ‘소닉 라이더’도 기울어가는 소닉 시리즈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독립 개발사 프로페에서, 그는 CEO 겸 게임 프로듀서로 돌아가 다양한 게임을 제작했다. 게임의 재미를 위해서는 플랫폼을 가리지 않았고, 기존 인기작의 후속편보다는 항상 새로운 작품을 추구했다. 그 결과, 프로페는 Wii용 게임인 ‘렛츠 텝(2008)’을 비롯하여 ‘디지몬 어드벤처(PSP, 2013)’, ‘리얼 스키점프(iOS/And)’, ‘이비 더 키위(NDS, iOS/And/WinM)’ 등 약 7년 간 30여종의 게임을 출시했다. 도중에 개발이 취소된 ‘천공의 기사 로데아(Rodea The Sky Soldier)’, 키넥트나 PS무브 등 모션 컨트롤을 도입하려 한 미공개 작품까지 합하면, 40명 규모의 소규모 개발사라고는 믿기지 않는 활동이다.

동시에, 나카 유지는 세가 뿐 아니라 반다이남코, 카도카와, 닌텐도, 애플, 구글, MS, DeNA 등과도 긴밀한 협업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세가 타이틀의 컨설턴트 역할도 겸임하는데, 실제로 닌텐도 Wii로 출시되어 1,600만 장 이상이 팔린 히트작 ‘마리오&소닉 올림픽’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도 그였다.


▲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타이틀을 매년 발매하는 프로페 

‘소닉 더 헤지혹’과 ‘나이츠’, ‘판타시 스타’ 시리즈로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과거 모습에 비하면, 지금 나카 유지는 다소 정체돼 보일 수도 있다. 혹자는 “그렇다면 다시 ‘소닉 더 헤지혹’이나 ‘나이츠’ 시리즈에 손 대면 되지 않겠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카 유지는 이런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항상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가 세가를 퇴사한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어떤 소프트가 잘 팔렸으니 그 속편을 만들자!’ 라는 방침에 따라야 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무언가의 2편 보다는, 새로운 게임을 통해 놀라움을 제공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카 유지는 게임 제작자는 늘 유저의 창의성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의 게임들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일률 진행 방식이었다면, 소닉의 세계는 비슷하면서도 더욱 자유도가 높았다. 모두가 2D 상에서의 횡스크롤 액션 게임을 만들 때, 그는 3D 환경을 깊이 이해한 ‘나이츠’를 개발했다. 그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는 늘 머릿속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해 상상하게 되고, 게임 속 세계에 깊이 빠져든다.

“나는 많은 상을 받았고 많은 영광을 누렸지만, GDC에서 ‘퍼스트 펭귄 상’을 받아보고 싶다. 몇 천 마리의 펭귄 무리가 절벽에 서서 머뭇대고 있는 가운데, 한 마리가 용감하게 뛰어들면 다른 펭귄들도 일제히 그 구멍에 뛰어든다고 한다. 게임업계에서 오래 일했지만, 이 상만큼은 꼭 받고 싶다.” 나카 유지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러한 생각이 지속되는 한, ‘소닉 더 헤지혹’을 뛰어넘는 새로운 유명 시리즈의 탄생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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