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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RPG명가 바이오웨어 창립자 레이 무지카&그렉 제스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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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색채를 갖고 있는 게임개발사는 많다. 그 중 가장 뚜렷한 개성을 지닌 곳을 뽑자면, ‘RPG의 명가’ 바이오웨어는 세 손가락 안에 빠져선 안 될 개발사다. 바이오웨어는 ‘발더스 게이트’부터 ‘네버 윈터 나이츠’, ‘드래곤 에이지’, ‘매스 이펙트’ 등 수많은 역작을 통해 RPG 장르의 대중화와 유행을 진두지휘한 곳으로, RPG 제작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바이오웨어의 게임이 특히 사랑받는 이유는 많지만, 가장 큰 요인은 이미 만들어진 유행에 발맞춰 흥행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없던 새로운 경험을 제시하고 유행을 선도하는 방향성에 있다. 플레이어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에 따라 세계가 달라지는 경험을 통해 몰입감을 극대화시키는 특유의 게임성은 바이오웨어의 전매특허로 자리잡았고, 전세계 게임업체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바탕에는 바이오웨어의 공동 창립자이자 핵심 개발자인 레이 무지카(Raymond Muzyka)와 그렉 제스척(Greg Zeschuck)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 바이오웨어의 창립자 레이 무지카(우)와 그렉 제스척(좌) (사진출처: 바이오웨어 공식 블로그)

괴짜 의사 3인방의 게임 회사 설립기

레이 무지카와 그랙 제스척은 1994년, 앨버타 대학에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처음 만났다. 흥미롭게도, RPG 대부로 불리는 그들이 만난 곳은 컴퓨터 소프트웨어 관련 학과가 아니라 의학부였다. 이유는, 그들의 본업이 프로그래머나 게임 기획자가 아닌 의사였기 때문이었다.

앨버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내과의사로 활동하던 레이와 그렉은 마치 쌍둥이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그들은 유년기부터 각종 영화와 애니메이션, 테이블에서 주사위와 노트를 가지고 즐기는 TRPG 등에 심취했으며, 어려운 의학 공부를 하던 학부생 시절에는 ‘울티마’나 ‘위저드리’ 시리즈에서부터 FPS ‘둠’ 등 다양한 컴퓨터 게임에 몰두했다. 특히, 그들은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것을 넘어 게임과 같은 소프트웨어 제작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틈틈이 프로그래밍을 독학하기까지 했다.

그런 이들이 의학부 졸업 후, 모교인 앨버타 대학에서 의과 대학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는 프로젝트에 뛰어든 것은 어찌 보면 필연에 가까웠다. 레이와 그렉, 그리고 또 한 명의 의대 졸업생인 어거스틴 입(Augustine Yip)까지 세 명의 괴짜 의사는 앨버타 대학의 의뢰를 받아 의학 교육 프로그램을 공동 제작했고, 단기 수익만 10만 달러를 기록하는 등 꽤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의학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며, 레이와 그렉은 서로의 관심사가 매우 비슷함을 발견했다. 취향과 관심사는 물론, 만만치 않은 의학부 학위를 밟으면서도 학창 시절 내내 게임에 몰두했던 점. 나아가 게임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하는 창조적인 열정까지 일치했다. 의학 교육 프로그램 제작은 이런 그들의 열정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들은 매일 밤 모여 의학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남는 시간에는 게임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는 조심스레 게임 개발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제시했다. 우리 손으로 이제껏 없던 멋진 게임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렉은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이를 수락했고, 옆에서 지켜보던 어거스틴 역시 이에 동조했다.

기업과 대학에 퍼스널 컴퓨터(PC)가 널리 보급되고 소프트웨어 산업이 한창 성장하던 90년대 초중반, 당시 의학 교육 프로그램 시장은 블루오션이었다. 레이와 그렉, 어거스틴도 그 와중에 자그마한 성공을 거뒀고, 이를 기반삼아 더욱 큰 성공을 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의학 프로그램 분야에 안주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1995년 2월, 그들은 의학 교육 프로그램으로 번 돈을 바탕삼아 캐나다 앨버타의 애드먼턴에 조그마한 게임 개발 사무실을 설립하고 바이오웨어 코퍼레이션(BioWare Corporation)라는 이름을 걸었다.

그들의 첫 작품은 메카닉 시뮬레이션 게임 ‘맥 워리어’에서 영감을 받은 메카닉 액션 게임이었다. 본격적인 개발에 앞서, 레이와 그렉은 개략적인 테크 데모를 제작해 EA를 포함한 수많은 게임 퍼블리셔에게 보냈다. 아무래도 세 명이서 하나부터 열까지 게임 개발을 주도하는 것보다는, 전문 기술과 인력을 갖춘 업체와 협력하는 것이 안정적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바이오웨어의 테크 데모는 카툰 렌더링을 연상시킬 정도로 선명한 3D 그래픽 엔진으로 엄청난 관심을 모았고, 10개 업체 중 7개 업체에서 계약하자는 연락이 왔다.

레이와 그렉은 그 중 ‘러시안 식스’와 ‘캐슬’ 시리즈를 유통한 인터플레이 프로덕션(Interplay Productions)과 계약을 체결하고 ‘쉐터드 스틸(Shattered Steel)’의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했다. 인터플레이는 ‘쉐터드 스틸’ 개발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다양한 게임 개발 툴과 전문 인력을 보내 게임 개발을 도왔고, 일정 막바지에는 마무리 작업을 위해 파이로텍 스튜디오(Pyrotek Game Studios)를 통째로 투입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다.




▲ 바이오웨어의 첫 게임 ‘쉐터드 스틸’ (사진출처: old-games.com)

의사와 게임 개발자,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첫 게임인 ‘쉐터드 스틸’ 개발과 동시에, 레이와 그렉, 어거스틴은 인터플레이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게임 기획에도 착수했다. 사실 첫 게임이 액션 장르긴 했지만, 그들이 진정 만들고 싶었던 것은 RPG였다. 테이블에서 종이와 연필을 이용해 즐기는 아날로그 테이블 RPG를 컴퓨터 세상으로 옮기자는 대전제를 가지고, ‘울티마’ 시리즈, ‘C&C’, ‘워크래프트’ 등의 전략 시뮬레이션, ‘재기드 얼라이언스’와 같은 전술 시뮬레이션 RPG 등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바이오웨어의 두 번째 게임은 초창기에는 ‘배틀그라운드: 인피니티’라는 이름의 데모 형태로 제작되었다. 때마침 인터플레이는 ‘던전 앤 드래곤(D&D)’ 컴퓨터 게임 라이선스를 소유한 상태였고, 이 ‘배틀그라운드: 인피니티’를 ‘D&D’ 세계관과 시스템으로 제작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던전 앤 드래곤’의 팬이었던 레이와 그렉은 이 결정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만, 실시간 게임 진행을 위해 몇몇 요소를 변형시켜 독창적인 느낌을 살렸다. ‘D&D’ 룰을 도입한 이 게임이 바로 PC RPG의 전설이라 불리는 ‘발더스 게이트’다.

레이와 그렉, 그리고 바이오웨어 직원들은 ‘쉐터드 스틸’의 후속작 계획까지 잠정 취소하고 3년 동안 ‘발더스 게이트’ 개발에 전념했다. 사실 초기에만 해도 레이는 이 게임을 MMO로 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엔 상용화된 온라인 MMO게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였고, 그들 역시 게임 개발을 밑바탕부터 배워나가고 있었기에 결국 실행에 옮겨지진 못했다.

그렇게 ‘쉐터드 스틸’을 출시하고 ‘발더스 게이트’를 개발하던 도중, 게임업계에는 한바탕 돌풍이 불었다. 바로 블리자드의 대표작인 ‘디아블로(1997)’이 발매된 것이다. 이전까지 RPG의 본가는 미국이었으나, ‘울티마’, ‘마이트 앤 매직’, ‘위저드리’ 등 전통적 RPG의 전성기가 지나고 ‘파이널 판타지’와 같은 일본 RPG가 상승세를 타면서 한동안 북미식 RPG는 정체기에 빠졌다. ‘디아블로’는 그런 게임업계에 혁명적인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고전 RPG 팬이 아닌 새로운 RPG 팬들을 다수 끌어들였다. 이는 TRPG의 전통적 재미를 유지하되 이전까지 RPG에 관심이 없었던 신규 유저들도 동시에 끌어들이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던 ‘발더스 게이트’로서는 넘어야 할 큰 벽이었다.

‘디아블로’의 등장으로 바이오웨어의 세 창립자들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들의 첫 작품인 ‘쉐터드 스틸’이 자그마한 성공을 거둘 때도, 두 번째 작품인 ‘발더스 게이트’가 한창 개발 중일 때도 그들은 풀 타임 게임 개발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본직은 여전히 의사였다. 낮에는 개인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밤과 주말에는 게임 개발자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바이오웨어와 ‘발더스 게이트’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고, 그 외에도 다양한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됨에 따라 더 이상 부업으로는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여기서 더욱 본격적으로 게임 개발에 뛰어들려면 자신들의 본업이었던 의사를 포기하거나, 혹은 의사 활동을 위해 게임개발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결국 레이와 그렉은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게임 개발자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물론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개업의를 그만둔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게임 개발에 대한 열정은 그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을 만큼 강했다. 이후 레이는 본격적인 게임 프로듀서로, 그렉은 아티스트 겸 엔진 개발 등을 담당하며 바이오웨어를 이끌어갔다. 한편, 바이오웨어의 창립 멤버 중 나머지 한 명인 어거스틴은 ‘발더스 게이트’ 개발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98년 게임업계를 떠나 본업인 의사로 돌아갔다.

 “의사는 일종의 보험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게임 개발을 그만두고 의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수 년간 공부한 의학을 좋아했고, 사회에 그것을 환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열정은 아무도 개발하지 않은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는 것에 있었고, 결국 의사직을 그만두는 것을 선택했다. 또 하나의 이유라면, 창조적인 의사를 좋아하는 환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 그렉 제스척

그렇게 1998년 겨울 완성된 ‘발더스 게이트’는 발매와 동시에 200만 장 이상 판매고를 올리며 흥행에 성공했다. 상업적인 성공 외에도, ‘발더스 게이트’는 미국 RPG에서 매우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다양한 선택과 그에 따른 스토리 분기 및 멀티 엔딩은 테이블 RPG와 버금가는 높은 자유도를 선사했으며, 스토리 완성도도 매우 높아 몰입감을 극대화했다. 게임성에서도 ‘디아블로’와 같이 액션성을 강조한 것이 아닌 전통적인 ‘D&D’ 룰을 채용한 RPG로 제작돼 마니아들의 호응도 높았다.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를 기점으로 바이오웨어는 ‘RPG의 명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폴아웃’과 함께 당시 미국 게임업계에 퍼져 있던 ‘RPG는 사양 장르다’라는 편견을 정면으로 깨부쉈다. ‘발더스 게이트’는 국내에서도 한글화 발매되어 많은 인기를 모았는데, 당시 한글로 발매된 미국 RPG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게임이 전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짐작할 만 하다.




▲ 전세계적인 RPG 열풍을 불러온 ‘발더스 게이트’ (사진출처: giantbomb.com, kotaku.com.au)

‘발더스 게이트’를 넘어 RPG의 명가로 거듭나다

‘발더스 게이트’는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반면 바이오웨어에게 크나큰 허들이기도 했다. 레이 무지카는 훗날 인터뷰를 통해 ‘발더스 게이트’의 성공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고 회고했다. ‘발더스 게이트’가 바이오웨어의 유일한 대표작으로 기록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레이와 그렉은 항상 새로운 게임에 대한 고민을 했다.

‘발더스 게이트’가 PC 플랫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멀티플레이 모드도 나름 호평을 받긴 했지만, 시대적인 특성상 처음에 기획했던 온라인 멀티플레이 요소를 모두 담진 못했다. 바이오웨어 창립자들은 이에 주목했고, 더욱 자유로운 멀티플레이 게임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그때 눈에 띈 작품이 바로 ‘네버윈터 나이츠’였다.

스톰프론트가 개발한 ‘네버윈터 나이츠(온라인)’는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서비스되었던 그래픽 온라인게임(MUG)으로, 규모 및 서버 구조적으로 MMO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세계 최초 MMORPG 논쟁에 항상 언급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바이오웨어는 ‘발더스 게이트’ 후속작이자 온라인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즉 유저들이 고유 콘텐츠(모드, MOD)를 만들어 즐기는 창조성을 갖춘 게임을 만들고 싶었고, ‘네버윈터 나이츠’를 재탄생시키기로 결심한다.

바이오웨어의 ‘네버윈터 나이츠’ 기획은 ‘발더스 게이트’ 발매 전인 1997년 시작되었고, 5년의 개발 기간을 거쳐 2002년 출시되었다. 그 기간 중 바이오웨어는 ‘발더스 게이트’와 확장팩, 2편과 그 확장팩, 액션 게임인 ‘MDK 2’ 등을 발매했고, 1999년에는 루카스아츠와 협약을 통해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기사단’ 개발까지 시작했다. 도중에 개발이 취소된 타이틀까지 합하면 통상 5~7개 프로젝트가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됐다.

레이와 그렉은 항상 미래를 내다봤다.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관리하면서도 현재 개발 중인 자신들의 작품을 뛰어넘을 만한 게임을 기획하곤 했다. 레이는 특유의 창조성을 한껏 발휘하며 바이오웨어 개발팀을 이끌었고, 그렉은 예리한 통찰력과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넓은 시야, 뛰어난 리더십을 통해 팀을 뒷받침했다.

이처럼 수많은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고 매년 새로운 RPG를 출시하면서, 레이와 그렉, 바이오웨어의 유명세는 날로 커져갔다. 2005년에는 Profit 100이 선정한 ‘캐나다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기업 81위’에 랭크되었으며, 2007년 말에는 3개의 독자적인 스튜디오를 갖춘 직원 500여명 규모의 큰 개발사가 되었다. 그러나, 레이와 그렉은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를 관리/경영하며 점차 게임 개발 일선에서 멀어져갔다.




▲ ‘발더스 게이트’의 뒤를 이어 명작 RPG로 추앙받는 ‘네버윈터 나이츠’ (사진출처: sites.psu.edu, listal.com)

EA 산하로 흡수된 바이오웨어

레이와 그렉은 바이오웨어를 이끌며 ‘제이드 엠파이어(2005)’, ‘매스 이펙트(2007)’, ‘드래곤 에이지(2009)’ 등 신작을 꾸준히 선보이면서 RPG 장르 대중화에 힘썼다. 이들 게임은 바이오웨어 특유의 자유도 높은 정통 RPG에 액션과 슈팅을 접목시켜 높은 호응을 얻었고, ‘매스 이펙트’와 ‘드래곤 에이지’는 바이오웨어의 미래를 책임질 새로운 IP로 떠오르고 있었다.

‘매스 이펙트’가 출시될 무렵, 승승장구하던 바이오웨어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업체가 있었다. 바로 일렉트로닉 아츠(EA)였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로 전세계를 휩쓴 블리자드가 부러웠던 EA는 이에 버금가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했지만, 온라인게임 분야에서는 실패를 거듭해 왔다. 이에 RPG 제작으로는 세계 제일이라고 일컬어지는 바이오웨어의 기술력을 필두로 재도약을 꿈꿨고, 결국 2008년 바이오웨어와 팬더믹 스튜디오를 약 7천억 원의 자금을 들여 인수했다. 레이는 바이오웨어 치프 그룹 제너럴 매니저(Chief Group General Manager) 겸 EA 선임 부사장으로, 그렉은 오스틴주 바이오웨어 제너럴 매니저(General Manager) 겸 EA 부사장으로 자리잡았다.

앞에서 설명했듯, EA가 바이오웨어를 흡수한 최우선 목표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뛰어넘을 MMORPG 개발이었다. 2003년 출시된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기사단’을 더욱 발전시킨 초대형 프로젝트 ‘스타워즈: 구 공화국’은 EA 산하로 들어온 바이오웨어의 핵심 과제였고, 당시 개발 중이던 ‘드래곤 에이지’와 ‘매스 이펙트’ 후속작도 계속 이어나가야 했다.

그러나, EA 산하에 들어간 후 바이오웨어의 행보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가장 먼저 전작의 뒤를 이을 것으로 여겨졌던 ‘드래곤 에이지 2(2011)’가 바이오웨어의 색채를 잃어버렸다는 혹평을 받았으며, EA가 1억 달러 이상의 제작/마케팅비를 투입하며 큰 기대를 걸었던 MMORPG ‘스타워즈: 구 공화국(2011)’도 기대 이하 성적을 기록했다. 여기에 ‘매스 이펙트’ 시리즈 3부작을 마무리하는 ‘매스 이펙트 3’도 엔딩 부분에서 논란을 일으키며 용두사미라는 비판을 받았다.




▲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한 MMORPG ‘스타워즈: 구 공화국’ (사진출처: 공식 웹사이트)


▲ 시리즈의 초라한 마지막을 장식한 ‘매스 이펙트 3’ (사진출처: 공식 웹사이트)

이 같은 하락세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대표적인 원인을 꼽자면 그 동안 바이오웨어를 이끌어 온 레이와 그렉의 개발 전선 이탈이 크다. 미씩 개발진 편입으로 바이오웨어 내부 인원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쩍 늘어났고, 프로젝트 규모도 커졌다. 레이와 그렉은 더 이상 게임 개발 최전선에서 활약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바이오웨어 뿐 아니라 기존 EA 스튜디오 직원 1500명을 관리하고, 각종 지적재산권 관리와 계약, 협상 등 관리 업무에 매달려야만 했다. 실제로 ‘매스 이펙트’가 발매되던 2007년까지만 해도 레이와 그렉은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게임 제작을 최전선에서 이끌었지만, ‘드래곤 에이지’의 총괄을 마크 다라(Mark Darrah)에게 넘기고 EA 산하로 들어간 이후에는 제작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바이오웨어의 하락세가 전적으로 레이와 그렉의 부재 탓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2009년 ‘드래곤 에이지: 오리진’ 이후 2014년 중반까지 오리지널 IP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즉, 바이오웨어를 지난 14년간 이끌어 온 창의력이 실종된 것이다.


▲ EA 간부가 되며 게임 개발 일선에서 물러선 레이 무지카(좌)와 그렉 제스척(우) (사진출처: shazoo.ru)

17년만의 퇴사와 게임 개발 은퇴

2012년 9월,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바이오웨어의 두 창립자, 레이와 그렉이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퇴사나 이직, 독립 개발사 설립이 아니라 게임 개발자로서의 은퇴였다.

바이오웨어는 이미 레이, 그렉, 어거스틴이 밤중에 모여 게임을 만들던 자그마한 사무실이 아니었다. 2개국 3개 스튜디오를 거느린 세계적인 업체였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모험보다는 기존 인기작 유지에 더 신경을 쏟게 되었다. 창조적인 일을 하기 위해 의사라는 안정적 직업을 포기한 바이오웨어 창립자들에게, 이러한 상황은 결코 이상적이지 못했다.

결국, 레이와 그렉은 고심 끝에 17년 동안 몸담았던 바이오웨어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돈이나 권력 때문은 아니었다. 이미 레이와 그렉은 바이오웨어의 수장으로 입지를 탄탄히 다지고 있었으며, 게임 개발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그들이 은퇴를 선언한 이유는 바로 ‘자유로운 기업정신’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향후 게임산업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라는 말과 함께 은퇴 후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레이는 현재 의학과 미디어 분야 사회적 기업 투자회사 ‘ThresholdImpact’를 경영하고 있으며, 그렉은 맥주 관련 인터뷰 쇼인 ‘The Beer Diaries’를 진행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둘 다 게임과는 관계 없는 분야다.


▲ 레이 무지카가 운영하는 의학&미디어 사회적 기업 투자회사 ThresholdImpact


▲ 맥주 인터뷰 쇼를 진행하고 있는 그렉 제스척(사진출처: 그렉 제스척 페이스북)

어쩌면, 바이오웨어의 전성기는 끝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남겨 놓은 RPG 정신은 아직 남아 있다. 바이오웨어는 최근 초능력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액션RPG ‘섀도우 렐름’을 공개했으며, 레이와 그렉의 정신을 물려받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 레이 무지카와 그렉 제스척은 2011년 미국 아카데미 오브 인터렉티브 아트 & 사이언스(AIAS) 명예의 전당에 게임업계 사상 14번째로 헌액되었으며, 은퇴 후인 2013년, IGDA의 게임 개발자 초이스 어워드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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