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란제비아 Aranzebia 소원을
잊지 않는 자 아란제비아가 처음 바다를 사랑하게 된 것은 바닷가에 솟은 성채 때문이었다. 그곳은 `죽은 왕녀의 성`이라고 불렸는데 아무도 살지 않았다. 가파른 외벽과 우아한 탑을 갖춘 그곳은 무시무시한 미인과 같은 매력이 있었다. 아이들이 저 성은 왜 버려졌느냐고 물으면 어른들은 무서운 전설이 있어서 그렇다고만 대답했다. 아란제비아는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였다. 상냥한 부모가 있었고 사려 깊은 대(代)부모도 있었다. 유력한 집안의 딸이었고, 아름다웠다. 엘프 왕국을 찾아온 인간들은 홀로 바닷가를 거니는 아란제비아의 자태에 넋을 잃고 몇날 며칠이고 머물곤 했다. 엘프 사이에서도 아란제비아는 소년들의 끊임없는 이야깃거리였다. 아리따운 자태 때문에 그랬고, 동시에 누구도 보이지 않고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 듯한 표연한 태도 때문에도 그랬다. 칭송받는
미녀다운 자신감이나 사교성 같은 것은 부름에는 답하지 않았고 숲의 아름다움에든 비단옷의 아름다움에든 매한가지로 관심이 없었다. 자신 속에서 뭔가 찾아내려는 것처럼 오직 자신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찾는지는 자신도 몰랐지만 분명코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 영원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리라 믿었다. 바깥세상은 소란스럽고 무가치했다. 죽은
왕녀의 성에 들어갔던 것은 우연이었다. 가까이 가지 말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이슬 맺힌 담쟁이가 드리워진 고요한 입구를 흘끗 바라본
순간 어른들의 이야기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는
겹겹이 엉킨 거미줄을 헤치고 어두컴컴한 홀을 지나갔다. 쥐들이 뛰어다니는
계단을 올라 가장 높은 테라스에 다다랐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이 감옥에서 꺼내줘. 누구일까?
그리고 무슨 뜻일까? 왜 이런 곳에 새겨져 있을까? 아란제비아는 이
글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엘프 왕국을 통틀어 자신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온 세상에서도 자신뿐일지 모른다. 그러자 신비로운
감정이 솟아났다. 글귀의 주인공을 찾고 싶었다. 좁다란
나선 계단을 내려가자 빛이 들지 않는 복도가 나타났다. 더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복도 너머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빛났다. 자세히 볼수록
강해졌다. 금빛 광채였다. 고개를
들자 바로 앞에 하얀 문이 있었다. 왜 조금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뒤이은 일들은 홀린 것처럼 벌어졌다. 열쇠를 꽂았고,
문을 열었고, 작은 침대에서 자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꼭 아란제비아
또래였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예뻤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여자아이가
눈을 뜨더니 물었다."넌 날 사랑하니?" 여자아이는
벌떡 일어나 아란제비아의 손을 잡고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란제비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전까지 거미줄투성이였던 복도에는 녹색 융단이
깔려 있고 벽에는 황금 촛대들이 즐비했다. 나선 계단을 올라가자 장려한
현관홀이 나타났다. 에메랄드로 만든 샹들리에와 채색 도자기들, 조각상들,
비단 벽지로 꾸며진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풍경이었다. 조금 지나친
감이 들 정도였다. 먼지와 거미줄, 쥐떼는 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문득 아란제비아는 생각했다. "이제
그만 가야겠어." 아란제비아의
대부 아란제브는 아르 씨족의 젊은 마법사였다. 그는 아란제비아를 아꼈지만
아이의 특이한 성품과 남자들의 무분별한 숭배가 합쳐져 좋지 않은 결과를
부를지 모르니 경계하라고 자주 부모에게 상기시켰다. 반면 대모인 니네르는
스스럼없이 아이를 사랑해서 무엇이든 아낌없이 주었다. 아란제비아는
니네르를 어머니만큼이나 따랐지만 아란제브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란제브가 와서 이것저것 질문하자 아란제비아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란제브는 소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란제비아는
한동안 죽은 왕녀의 성에 가지 않았지만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달 만에 다시 찾아가고 말았다. 이번에는 전과 같은 과정이 필요
없었다. 그녀가 발을 들여놓자마자 을씨년스럽던 성은 다시 호화롭게
변했다. 소녀는 계단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다시
즐거운 놀이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아란제비아도 실컷 놀지 않고 제
딴에는 꽤 빨리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에노아로 돌아가 보니 7일이
흘러 있었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아란제브는 아란제비아를 재빨리 끌어당겨
등 뒤에 세우더니 입구를 노려봤다. 그제야 오던 길을 돌아본 아란제비아는
뭔가가 따라오고 있었음을 알았다. 검은 물을 뚝뚝 흘리는 정체 모를
덩어리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복도 너머 계단 아래까지 계속 이어져
있었다. 덩어리들이 밀어닥치자 곧 둘은 테라스에 갇힌 꼴이 되었다.
아란제브는 마법으로 보호막을 쳤다. 그리고 외쳤다. 그때
아란제브는 두 소녀를 보고 당황했다. 둘은 똑같이 생겼던 것이다. 하나는
검고, 하나는 흴 뿐이었다. 그는 마법의 밧줄을 만들어 검은 소녀를
움켜잡았다. 밧줄이 몸을 조르자 소녀는 비명을 질렀다. 아란제비아는
풀어주라고 호소하다가 들어주지 않자 함께 비명을 질러댔다. "아니야. 저 앤 내가 만들었어. 왜냐면 난 다른 친구 따윈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마술을 부린 거야! 나라고! 누구도 날 조종할 순 없어!" 아란제브도
처음에는 몰랐다. 아란제비아가 낯선 열쇠를 목에 걸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죽은 왕녀의 혼이 나타났음을.
죽은 왕녀가 나타나지 않은 지 백 년이 넘었지만 오래 사는 엘프들은
그녀가 저지른 일을 기억했다. 그녀는 어떤 문이든 영원히 열고 잠글
수 있는 열쇠를 갖고 있었다. 그 문으로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가둬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항상 원하는 세계의 문을 열었다.
그녀가 한바탕 놀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사라진
뒤였다. 악령을
퇴치하는 빛이 닿자 검은 소녀의 몸이 녹아내렸다. 마지막으로 추방
명령을 발하자 녹아내린 물조차 사라져버렸다. 추방에 성공한 것인지,
아니면 왕녀 스스로 달아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성은 다시 봉인되고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자물쇠가 채워질 것이었다. 뒤이어 아란제브는
아란제비아를 껴안아 진정시키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란제브의
팔을 뿌리치고 뛰어간 그녀는 바닥을 샅샅이 만져보고 도로 맹렬히 테라스로
달려왔다. 뛰어내리려는 줄 알고 깜짝 놀라 붙들었지만 아란제비아는
바다 쪽으로 상체를 내민 채 미친 듯이 난간을 더듬고 있었다. 아란제브는
결국 진정 마법을 걸어야만 했다. 잠든 아이를 안고 에노아로 돌아오는
동안 간간이 아란제비아의 입술이 달싹이며 나직한 속삭임이 새어나왔다. 아란제비아는
이틀 동안 잠을 잤다. 진정 마법을 너무 세게 걸었나 걱정스러워 아란제브는
수시로 드나들며 소녀 곁을 지켰다. 원로원은 성을 폐쇄하고 재봉인하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위대한 알렉산데르에게 직접 배운 아란제브의
마법이 상상 이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알려져 여러 씨족들이
술렁거렸다. "당신은 날 감옥에서 꺼냈어. 그리고 당신은 날 사랑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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