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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데브캣 스튜디오 대장 고양이, 김동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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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게임 개발자는 어렵다. 이에 속한 모든 이들은 '게이머들이 즐거워할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은데 '지난 게임'을 답습해야 하고, 눈물을 머금고 방향을 비틀어야 할 상황도 많이 주어진다. 하루하루 지옥처럼 밤낮 가리지 않고 만들었는데, 게이머들은 그저 그런 게임 정도로 치부 하며 비난에 나선다. 갖가지 서비스 정책은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뿐이랴. '게임'을 보는 사회의 냉소적인 시선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지고 있다. 비약하자면, 이들은 '마약'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과연 우리는 게임 개발자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끝없이 묻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슬픈 현실이다.

현 넥슨 데브캣 스튜디오의 김동건 본부장은 바로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자신을 던진 인물이다. 누군가에게는 김동건, 누군가에게는 '나크'로 알려진 그는 [마비노기]를 시작으로 서서히 그 이름을 알려왔다. 그는 게임을 만들지만, 동시에 이를 창조하는 개발자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늘 고민했다. 이에 김동건은 자신의 이념을 바탕으로 '데브캣 스튜디오'를 구축했고, 그 비전을 전파하며 이 땅의 개발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주고 있다.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 데브캣 스튜디오의 김동건 본부장


- 소년, 즐거움을 주고 즐거움을 얻다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이었을까요? 당시 컴퓨터를 처음 만져봤는데, 이후부터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오락실을 가거나 휴대용 게임기에서만 즐기던 게임을 컴퓨터로 직접 할 수 있다는 건 무척 매력적이었거든요. 저에게 있어 컴퓨터는 게임 외에 다른 걸 하고 싶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 김동건

어린 시절 김동건은 조용하면서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다. 맞벌이 부부 아래서 자란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 시간에 집에서 TV를 보거나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장래희망은 막연하게 '과학자'로 적어냈다. 그랬던 그가 변한 것은 컴퓨터를 접한 뒤였다. 당시 같은 아파트에 살던 동네 형이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걸로 게임을 해 보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이후 컴퓨터 게임에 푹 빠진 그는 매일 그 집을 들락였고, 보다 못한 그의 부모는 결국 컴퓨터 한 대를 장만하기에 이른다. 김동건 역시 차곡차곡 모은 쌈짓돈까지 털어 내 보탤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만큼 그에게 컴퓨터는 '보물상자'였다.

컴퓨터를 품에 안은 김동건은 본격적으로 '게임'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산 컴퓨터는 애플의 복제품인 ‘로얄 컴퓨터'였는데, 당시에는 불법복제가 판을 치고 있어 상가에 디스켓을 가져가면 게임을 복사해주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김동건도 갖고 있던 5장의 5.25인치 디스켓을 활용해, 약 1000여 종에 가까운 애플용 게임 대부분을 접했다. 시대의 쓰라린 풍토가 한 소년에게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친 순간이었다.

다행히 그 영향력은 이 소년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줬다. 그가 지닌 특유의 호기심은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뿐 아니라, 직접 만들어봐야 한다는 데까지 타고 올라와 그릇을 채워줬기 때문이다. 결국, 김동건은 컴퓨터 잡지에 공개된 소스를 활용해 게임을 만들어보고, 한발 더 나아가 테이크원툴킷(2D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주는 애플의 소프트웨어) 등을 활용해 게임을 만드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프로그래밍에 눈을 뜬 그는 고등학교 진학 이후, 전국 컴퓨터 올림피아드에서 대상을 받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쌓게 된다. 이에 김동건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특기자'로 카이스트 입학을 미리 확정 짓게 된다.

이후 그는 진짜 '꿈' 하나를 품게 되는데, 바로 '게임 만드는 어른'이다. 80년도 당시에는 '게임개발자'란 직업개념 자체가 희미했던 만큼, 이 역시 '과학자'만큼이나 막연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꿈을 확신했다.

실제로 김동건이 이런 꿈을 갖게 된 배경에는 즐거움을 '공유'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그는 늘 친구를 집에 데려왔는데, 주로 게임을 하면서 놀았다. 나이가 차면서 당시 애플에 없던 [테트리스] 등을 직접 만들어 선보이기도 했는데, 친구들의 '재미있다'는 반응이 그렇게 신이 날 수 없었다. 더 만족을 주기 위해 끝없이 고민하고 탐구했던 이유다.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것, 이게 그렇게나 즐거웠다.


▲ 김동건이 즐겁게 했던 바즈테일(Bard’s Tale), 
음유시인의 노래라는 의미로 훗날 그가 만든 첫 온라인게임 [마비노기] 게임 명에 영향을 준다


▲ 김동건이 무척 좋아했던 게임 선독(SUNDOG), 
과학을 좋아했던 그는 우주화물선을 주제로 한 이 게임에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드라이버 닫아 XX야! 즐거웠던 대학시절

김동건은 1993년, 예정대로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전공의 경우 프로그래밍이나 IT를 깊게 파는 것보다, 디자인을 배우는 것이 게임을 만드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판단에 내린 선택이었다.

그가 대학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에는, 김동건과 같은 '게임 개발'을 꿈꾸는 청년들이 많았다. 이들을 주로 PC 통신에 게임동호회를 만들어 정보를 공유했는데, 김동건 역시 하이텔 '게재동(게임제작자동호회)'에서 활동했다. 당시 하이텔에는 이원술, 김학규, 서관희, 이현기 등 소위 1세대로 통칭되는 아마추어 게임개발자가 많았는데, 김동건은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게임지식을 더 쌓고 나아가 게임 개발자로서의 꿈을 한층 더 굳혀가게 된다.

김동건은 2학년부터 동기들과 팀을 꾸려 서서히 아마추어 개발자로 활동했다. 핵심 멤버로는 이은석과 이원을 꼽을 수 있다. 이은석은 김동건보다 한 살 아래였지만,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해 카이스트 동기로 학교생활을 같이 시작했다. 이은석 역시 게임을 만들기 위해 산업디자인을 택한 '괴짜'였던 만큼, 묘하게 닮은 두 사람은 통할 수밖에 없었다. 이원은 이은석의 지인으로 시나리오 집필에 능력이 있어 두 '괴짜'와 함께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들을 주축으로 한 '김동건 패밀리'는 그렇게 활동을 시작했다.

첫 작품은 SF액션 장르를 표방하는 [불기둥 크레센츠(95)]다. 외주로 제작한 이 게임은 김동건이 혼자 50% 이상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한데, 게임 내 여성형 기체가 쓰러질 때 내는 앓는 소리(?)를 괴상한 목소리로 자신이 직접 녹음하거나 다소 저질스런 효과음을 합성해 곳곳에 B급 느낌을 주는 등 특유의 유머감각을 녹여내 완성했다.

그러나 [불기둥 크레센츠]는 발매 이후, 게임 내 '욕설'이 나온다는 이유로 전량 리콜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게임 중 CD롬을 열면 "드라이버 닫아 XX야!"라는 괴상한 욕설이 음성으로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김동건의 생생한 목소리로 말이다. 문제의 욕설은 개발 과정에서 김동건이 이은석을 놀래주기 위해 만들었으나, 수정되지 못한 채 발매돼 문제가 됐다. 돌이켜보면 추억 중 하나이지만, 당시에는 '웃픈' 사건이었다.


▲ 불기둥 크레센츠는 당시에는 드물게 CD로 구동되는 게임이었다

이후에 나온 [85되었수다(97)]는 이은석의 농담에서 탄생한 게임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코나미의 [그라디우스]란 게임이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이를 패러디한 [패러디우스]란 게임이 나오기도 했다. 이를 보며 이은석이 "우리도 패러디 해볼까?"라며 농담을 건넸는데, 그게 실제로 [85되었수다] 개발로 이어졌다.

완성된 [85되었수다]는 1년 뒤 또 한 번 패러디를 거쳐 [삭제되었수다(98)]로 만들어진다. 이 게임은 당시 하이텔 게재동에서 열린 게임경진대회 출전용인데, 대회 주제가 100kb 용량 내에서 게임을 만들어 제출하는 것이었다. 이에 김동건은 [85되었수다]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전부 삭제하고, 필요한 것만 골라내 이를 완성했는데 완성도와 감각이 돋보여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게임 내 삭제가 하도 많아 게임 명도 [삭제되었수다]였다.

게임 제작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 김동건에게 이 시절은 무척 즐거운 나날이었다. 혼자가 아닌 팀을 꾸려 게임을 만드는 것도 즐거웠고, 그 과정에서 피어 오르는 '개발 감각'을 쌓아가는 것도 뿌듯했다. 이후에도 김동건은 [가이스터즈(98)] [아이스키스(98)]를 내놓으며, 한국 패키지게임 시대의 마지막을 그렇게 함께하고 있었다.


▲ 패러디에 패러디를 거듭한 삭제되었수다, 가위만 봐도 콘셉을 알 수 있다


- 넥슨 입사와 [마비노기]

1999년, 카이스트를 졸업한 김동건은 서서히 프로 개발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IMF 경제위기 이후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IT산업이 크게 성장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됐는데, 게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전국에 PC방 열풍을 불어넣었고, 넥슨의 [바람의나라]와 엔씨소프트의 [리니지]가 성과를 내며 온라인게임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영향력을 불려 가고 있었다.

당시 시대상황을 관망하던 김동건 역시 온라인게임에서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인터넷이 빨리 보급됐던 카이스트에서 [둠] 같은 게임을 멀티로 플레이하며 '함께 하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가 카이스트 연구원으로 활동하던 무렵, 넥슨 김정주 대표(현 NXC 대표)가 학교를 찾아와 입사제안을 한 것이다. 김동건은 [창세기전] 같은 유명한 게임을 만들지 못했지만, 특유의 감각과 색깔이 돋보이는 그의 게임은 당시 '게임인'들에게 무척 매력적인 포트폴리오였다. 김동건 역시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온라인게임에 욕심이 있었고, 동료였던 이은석과 이원이 손노리에서 [화이트데이]를 만들고 있었던 만큼 그 역시 움직일 타이밍이라는 걸 스스로 느낀 것이다. 이렇게 그는 2000년 1월, 넥슨에 입사했다.


▲ 당시 넥슨은 [바람의 나라]를 시작으로 온라인게임 시장을 열었다

넥슨에 입사한 김동건은 이후 약 2년 동안 무선팀 팀장으로 [퀴즈퀴즈 모바일] [코스모노바] 등의 모바일게임을 만들었다. 팀이라고 해봐야 1~2명 인원으로 엮인 무척 작은 규모였다. 당시 넥슨은 체계가 잡히지 않은 작은 회사였던 만큼, 이런 식으로 자유롭게 하나 둘 모여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후 2002년, 김동건은 넥슨 내에서 '데브캣'이라는 팀 하나를 결성해 온라인게임(MMORPG)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이은석과 이원도 손노리에서 [화이트데이] 개발을 끝마치고 넥슨에 합류한 시점이었다. 당시 그는 경영진을 설득하기 위해 학교에서 배운 프레젠테이션 방식을 도입해 그가 기획한 온라인게임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당시 넥슨은 전혀 경험이 없는 직원에게 온라인게임을 맡기는 것이 한편으로는 불안했지만, 보고 내용이 워낙 꼼꼼하고 착실했던 만큼 결국 승인을 해주기에 이른다. '데브캣 스튜디오'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프로젝트는 서서히 가속화됐다. 목표는 '게임다운 게임을 만들자'였는데, 이는 콘솔이나 PC에서 경험했던 RPG의 재미를 온라인 플랫폼에서도 고스란히 느낄 수 하자는 데 의미를 담고 있었다.

김동건은 우선 자유도로 뼈대를 잡았다. 당시 그가 즐기던 [울티마온라인]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이는 '게임은 꼭 이렇게 해야 해'가 아니라 '게임은 이렇게 해도 돼'라는 문법상 자유로움을 열어 두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대신 전반적인 비주얼은 따뜻한 느낌으로 구상했다. 당시 게임은 남성 유저를 초점에 두고 개발되는 경향이었었는데, 모바일게임을 경험했던 그는 여성 유저도 무척 중요하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이에 그래픽은 카툰렌더링 기법을 도입해 편안하고 아늑한 형태로 분위기를 만들었고, 나아가 PC사양에 크게 구애받지 않도록 하는 데에도 집중했다. 게임 세계관과 시나리오에도 신경을 썼다. 유저가 RPG에 몰입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에 세계관은 북유럽 켈트 신화를 참고했고 그 안에 시나리오를 디테일하게 구성해 유저들이 이를 차근차근 음미하도록 했다. 게임명은 '음유시인의 노래'라는 의미에서 [마비노기]로 결정했다.

'데브캣' 팀의 첫 작품인 [마비노기]는 바로 이렇게 탄생했다. 2004년 정식 서비스에 돌입한 [마비노기]는 국내시장은 물론 해외 각지에서도 인기를 끌며 김동건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큰 성과를 이끌어냈다. 물론 9년이 지난 지금도 다수의 팬층을 확보하며 튼튼하게 서비스되고 있다. 게임 자체의 즐거움도 크지만, [마비노기]와 견줄만한 자유도와 게임성을 지닌 작품이 아직 없다는 것도 인기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마비노기]를 계기로 김동건은 넥슨 내에서도 신임을 얻게 된다. 여기서 그는 고민에 빠졌다. 이제 무엇을 하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당시 풍토로 보면 회사를 떠나 더 좋은 조건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고민하던 것은 '데브캣'의 방향이었다. 첫 작품이 뜻밖에 성공을 거둔 직후라 나름의 부담감도 있었다. 고민 끝에 그는 세계 최고의 게임개발 스튜디오로 '데브캣'을 키우기로 한다.


▲ 마비노기 프로젝트 개발 완수 보고서, 놀랍게도 당시 내용과 그가 완성한 [마비노기]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만큼 기획 단계부터 꼼꼼하게 준비했다는 의미다


- 여기서 잠깐! [마비노기]는 어떤 게임?

원래 [마비노기]는 잘 알려졌다시피 [소서리언 온라인]이 될뻔한 게임이다. 당시 온라인게임 트렌드는 [바람의나라]와 [리니지]처럼 특정 IP를 기본으로 제작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김동건 역시 이 흐름에 맞춰 [소서리언]을 온라인화할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팔콤 측이 이를 거부하면서 결국 모든 걸 직접 만들게 된다.

[마비노기]는 정통 판타지를 추구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녹여내 '판타지 라이프'라는 친숙한 슬로건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게 가능했던 데에는 게임 내 '나(게이머)'의 존재를 자유롭게 풀어놨다는 데 있다. 게이머들은 [마비노기] 세계에서 그 무엇을 하든 특별한 존재가 된다. 전투만 하면 그에 맞는 전문가가 될 수 있고, 악기를 연습하며 음유시인이 될 수도 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푼돈을 벌다가, 제작에 더 전념하면 그 분야의 장인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 게이머들은 이런 '생활' 자체를 무엇보다 즐거워했다.

덕분에 [마비노기]는 상상 이상으로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은 전투 중 모닥불을 피우고 모여 앉아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연주에 휴식을 풀었고, 어떤 장소에서는 콘서트가 열려 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누군가는 길드 제복을 맞춰 입고 '기사단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마비노기]는 이처럼 원하는대로 놀 수 있는 게임이었다.




▲ 개성적인 캐릭터를 만들고, 아기자기한 ‘놀이’를 연출할 수 있는 것이 [마비노기]의 매력이다

김동건 역시 당시 게이머들이 즐기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게이머들이 게임을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 역시 '나크'라는 닉네임으로 그들과 소통에 나섰다. 나크는 1인칭이 아닌 3인칭 시점에서 게임을 바라볼 때 쓰는 호칭인데, 이는 주관이 배제된 상황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생각해낸 노하우다. 이에 김동건은 특정 지역에 몹을 모조리 처치하고 '나크가 모두 무찔렀음'이라는 팻말을 박아두기도 하는 등 자신의 권위(?)를 즐겁게 풀어내며 게이머들과 즐겼다. 이렇게 게이머들과 '놀 줄 아는' 타이틀의 '나크'는 개발팀장이자 친구로서 게이머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사실 초창기 [마비노기]는 문제점도 많았다. 버그는 물론 갖가지 밸런스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 게임은 게임에 접속해 별 부담 없이 '노는 것'을 일상으로 제공했던 만큼, 이 매력은 문제점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힘이 있었다. 이에 [마비노기]는 차츰 발전해 현재까지 서비스가 이어지고 있다. 워낙 팬들이 많은 만큼 넥슨은 3년 전부터 '마비노기 판타지파티' 라는 오프라인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지난 2013년 7월에 열린 3회 행사에서는 무려 12,000명이 찾아오기도 했다. 단일 게임이라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인기라 할만하다.


▲ 마비노기 판타지파티 현장, 게이머가 ‘주인공’인 게임답게 행사 역시 관람객 중심으로 진행됐다. 
개발자는 없었고 관람객이 주도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 데브캣 스튜디오 구축과 프로듀서의 길

'데브캣 스튜디오'는 그가 [마비노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구성한 '데브캣' 팀에서 시작됐다. 김동건은 2003년 당시 [마비노기]를 만들면서 무척 고생했는데, 밤낮없이 업무에 매달리며 지쳐 나가떨어지는 자신과 팀원들을 보며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 그가 어린 시절 꿈꾸던 '게임 만드는 어른'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당시 넥슨의 개발본부장이었던 서민(현 넥슨 대표)에게 '데브캣'을 프로젝트 순환체제를 갖춘 본부로 확장하자는 의견을 낸다. 여기서 순환체제라는 건 의미가 크다. 당시 게임 개발자들은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회사를 나가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성과가 좋으면 좋아서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아서 나갔다. 회사 내 개발 노하우가 쌓일 리도 만무하다. 김동건은 주기가 다른 프로젝트를 여러 개 돌려 개발자가 순환하는 구조로 개발력을 키우자는 의견을 냈고, 서민 역시 회사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판단해 승낙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불과 3명으로 시작했던 '데브캣' 팀은 [마비노기]의 정식 서비스와 함께 2004년 본부로 승격됐다. 이름은 그대로 '데브캣 스튜디오'를 쓰기로 했다. 구성원은 이미 100명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김동건은 '데브캣 스튜디오'를 설립하며 크게 두 가지 비전을 내세웠다.

우선 개발자로서 프라이드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김동건은 [마비노기]를 개발하던 시기, 엔씨소프트의 [리니지2]를 보며 충격을 받았다. 그에 눈에 들어온 것은 게임보다 개발자들이었다. 당시 엔씨소프트는 코엑스에서 [리니지2] 출시 쇼케이스를 진행했는데, 개발자들이 직접 나와 관람객들에게 게임을 소개했다. 직접 만든 게임에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그들을 보며 김동건은 난생처음으로 부러움을 느꼈다. 이에 김동건은 후배들에게 게임 개발자로서 프라이드를 갖도록 주문했는데, 여기에는 직업 자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해도 그것을 이겨내자는 의미도 깔려 있다.

두 번째는 창조성이다. '데브캣 스튜디오'는 본래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경험을 창조한다'는 기조로 운영됐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라도 새로운 기술이 가미되면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김동건은 이런 기조를 아이맥스(IMAX)의 성공을 보며 확신했다. 아이맥스는 시장에 나오기 전에 부정적 여론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며 사람들에게 만족을 줬다. '데브캣'도 개발자를 의미하는 Developer와 Created Advanced Technology의 약자이자 'Cat(고양이)'을 합쳐 만든 명칭이다.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 개발자로서 전문성을 지향하면서도, 고양이와 같은 친숙한 이미지로 고객들에게 다가서자는 데 의미가 있다.

또, 그는 창조는 휴식에서 나온다는 걸 굳게 믿으며 오전 8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은석은 이를 가리켜 '잉여야말로 창조의 어머니'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개발자들에 있어 휴식은 창조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2013년 지금까지 이어져 개발자들에게 '꿈의 직장'으로 군림하고 있다.


▲ 데브캣 스튜디오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김동건은 ‘똑똑한 사람’이 많아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그래야 팀원들의 능력 밀도가 높아지고, 함께 하고 싶은 똑똑한 사람이 계속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성된 '데브캣 스튜디오'는 넥슨 내에서도 가장 독립성 강한 본부로 평가 받으며, 현재까지 크고 작은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마비노기] 이후 김동건은 본부장 겸 프로듀서를 병행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도 [마비노기영웅전]과 [허스키 익스프레스]를 내놓으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프로듀서는 디렉터와 자주 마찰을 빚기도 하는데, 그는 우직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결과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것으로 잘 알려졌다. 참고로 [마비노기 영웅전]은 그의 절친이자 동료인 이은석이 디렉팅한 게임으로, 2010년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그해에 '대한민국게임대상'서 대상을 받을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데브캣 스튜디오'도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있다. 바로 그의 팬들이다. 온라인게임은 패키지나 콘솔과 달리 지속성이 있다. 그러나 '데브캣 스튜디오'는 게임 개발만 집중하고 이후 운영은 넥슨의 별도 본부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들의 팬들은 큰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마비노기]와 [마비노기 영웅전]의 라이브 서비스를 주도한 후임 디렉터는 팬들에게 비난을 사며 유명해진(?) 슬픈 사태도 있었다.

또, '데브캣 스튜디오'가 원하는 방향과 팬들이 원하는 방향도 좀처럼 풀기 어려운 문제다. 김동건은 2012년, 자신이 오랜만에 디렉팅한 게임 [마비노기2]를 공개했는데, 전작과 너무 다른 종류의 게임이라며 팬들 사이에서 격한 논쟁이 일기도 했다. 이후 김동건은 지스타2012에서 새로운 시도에 대한 데브캣의 철학을 이야기하며 [마비노기2]의 정체성을 설명했지만, 걱정 반 기대 반의 시끌시끌한 여론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는 ‘데브캣 스튜디오’와 김동건이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자 성장통이다. 게임개발에 대한 고집은 대단하지만, 팬들과의 소통 또한 중요시하는 김동건이기에 그의 앞으로의 대처가 더 궁금해진다. 아마 그 답은 앞으로 나올 '데브캣 스튜디오'의 게임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마비노기 이후 데브캣 스튜디오의 작품이었던 마비노기 영웅전과 허스키 익스프레스


- 그래요, 나크는 게임을 만듭니다

게임 개발자로서 즐거움이란, 그들의 고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다. 김동건은 어린 시절 [테트리스]를 만들어 친구를 즐겁게 해주는 순간부터, 바로 이 즐거움을 알고 있었고 지금도 그 일을 즐기고 있다.

김동건은 게임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한국의 토양적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한쪽에서는 '게임'을 사회 악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더 재미있는 게임'을 원하는 전 세계 최고 수준의 게이머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동건은 그래서 이 일이 즐겁다. 또, 게임의 발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루가 달리 발전하는 기술의 홍수 속에서 게임 역시 더 발전할 것이다. '데브캣 스튜디오'는 바로 여기서 길을 찾고 있으니, 언젠가 그들이 목표로 한 '세계 최고의 개발사'가 되는 것도, 그저 아득한 꿈만은 아니다.

최근의 김동건은 한 가지 목표가 더 생겼다. 바로 '롤모델'이다. 그가 어린 시절 꿈꾸던 '게임 만드는 어른'이 대체 어떤 모습인지 직접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가 '게임 개발자'로서 프라이드를 더 단단히 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하루하루 고민하고 탐구하는 데 여전히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게임 개발자는 아직 '정년'이 없다. 대체 개발자는 언제까지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답은 김동건도 아직 모른다. 그래서 그는 선배인 송재경 등과 함께 그 '기준'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충분히 야심 찬 목표라 할만하다.


▲ 이렇게 대장 고양이 나크는 지금도 게임을 만들고 있다. 그의 '개발자 인생'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또, 그와 함께 하는 '개발자 고양이'들 역시 지금 이 시간에도 우쭉우쭉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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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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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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