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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게임의 신' 미야모토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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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시게루는 게임을 만들었지만, 사실 그것을 창조했다고 보는 게 옳다."
- 빌 로퍼(현 디즈니 인터랙티브 부사장)

게임의 기본 문법을 제시한 인물, 닌텐도 혁신의 대표 아이콘, 그리고 마리오의 아버지까지. 이 시대 미야모토 시게루를 수식하는 표현은 무척 다양하다. 그러나 이 모든 수식은 결국 '게임의 신'이라는 표현으로 귀결된다. 그만큼 그는 전 세계 수많은 개발자에게 게임 제작에 대한 영감을 제공했고, 게임 자체가 특정 타겟층의 전유물이 아닌 성별과 세대를 초월한 '문화'로 각인시키는 데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지난 1977년 닌텐도에 입사해 올해로 36년째 둥지를 틀고 있다. 글로벌 게임산업의 거대한 축을 이룬 닌텐도의 화려한 역사와 함께 호흡해온 셈이다. 혹자는 미야모토 시게루를 가리켜 "닌텐도가 없었으면 미야모토 시게루도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 사실 상황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미야모토 시게루가 날개를 펼칠 수 있었던 건, 격동의 세월 속에서 '게임'으로 돌파구를 찾은 닌텐도의 사업 방향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닌텐도 역시 미야모토 시게루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없었다. 때문에 굳이 '옳은 표현'을 쓰자면 "미야모토 시게루=닌텐도, 닌텐도=미야모토 시게루" 정도가 되겠다.

올해로 그의 나이 61세. 미야모토 시게루의 '게임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 올해 61세의 미야모토 시게루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 순수했던 시골 소년

1952년 11월, 미야모토 시게루는 일본 교토 외곽 소노베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동네 친구들과 산골짜기를 뛰어다니며 자연과 어울리며 놀았다. 집에는 TV가 없어 가끔 아버지와 도시로 나가 [피터팬]이나 [백설공주] 같은 인형극을 본 것이 문화생활 전부였다.

중학교 입학한 미야모토 시게루는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다"는 교사의 칭찬에 만화에 관심을 두게 된다. 특히 [아톰]을 좋아했던 그는 데즈카 오사무 같은 일류 만화가가 될 결심을 하고, 쉬지 않고 그림연습을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미야모토 시게루는 한계를 느낀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데즈카 오사무 같은 일류 만화가가 될 수 없다고 느낀 것이다. 결국, 그는 늦긴 했지만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야모토 시게루는 1970년, 정든 교토를 떠나 가나자와 미술공예대학에 입학한다. 자신의 예술적 관심과 공학적 감각을 모두 아우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내린 선택이었다. 전공은 공업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학시절은 그야말로 '자유'였다. 특히 음악에 빠져들었다. 밴드 동아리에서 기타를 쳤고, 여기에 너무 빠져 '프로 음악가'라는 또 다른 꿈까지 가졌을 정도였다. 그 결과 수업의 반도 채우지 못해 유급까지 당했고, 부모로부터 혼쭐이 난 뒤에야 정신을 차리게 된다. 이후 공부에 전념해 5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미야모토 시게루의 갖가지 경험은 다소 공통된 면이 있다. 어린 시절 산을 타며 뛰어 놀던 순수했던 기억, [피터맨]과 [백설공주] 같은 인형극에 관한 관심, [아톰]에서 자극받은 만화 그리기, 그리고 음악까지. 그가 관심을 둔 대부분의 경험은 문화와 예술 분야에 가까이 있었다. 어쩌면, 훗날 그가 '게임'이란 녀석을 만나고, 이를 정복하게 된 데에는 이런 필연적 과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후 1977년. 대학을 졸업한 미야모토 시게루는 완구제품을 만드는 닌텐도에 입사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열정을 어디다 어떻게 쏟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저 장난감을 만드는 것이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 미야모토 시게루의 천진난만한 미소는 여전히 많은 사람을 편하게 한다


- 게임? 혹시 이건가?

때는 1980년. 당시 닌텐도는 큰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게임사업에 손을 덴 닌텐도는 일본에서 그럭저럭 성과를 거둔 ‘갤럭시안’의 '짝퉁' 아케이드 게임기 ‘레이더 스쿠프’ 약 3,000대를 북미 지사로 보낸 상황이었다. 1970년대 후반 북미서 아케이드 게임기가 인기를 끈 이후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일종의 '붐'을 일으켰던 만큼, 닌텐도는 북미에서도 충분히 ‘레이더 스쿠프’가 통할 수 있다고 확신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레이더 스코프’는 불과 1,000대 남짓만 팔릴 정도로 최악의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성공을 기대한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당황했고, 재고 처리 방법을 모색해 재정난을 극복해야 할 비상사태에 놓였다.

마침 닌텐도의 핵심인물 중 하나인 엔지니어 요코이 군페이가 아이디어 하나를 냈다. 기기 데이터에 저장된 게임만 바꾸기로 하고, 사내 공모전을 통해 관련 아이디어를 받기로 하자는 것이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 수립 측면에서 좋은 의견이라고 판단, 사내 공모전을 열게 된다. 세상에 모든 기적은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 나온다. 이 사내 공모전은 궁지에 몰린 닌텐도의 역사를 통째로 바꾼 사건이 된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이 문제의 사내 공모전이 열리기까지 닌텐도에서 공업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련된 일보다는 다른 직원의 일을 도와 잡무를 처리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닌텐도와 미야모토 시게루의 만남은 조금 특별하다. 대학을 졸업한 미야모토 시게루는 하루하루 똑같이 반복되는 평범한 삶을 살기 싫었고, 고민 끝에 완구업체에서 장난감을 만들기로 한다. 앞서 밝혔듯 이게 가장 적성에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 당시 일본에서는 닌텐도가 제작한 '광선총'이 인기를 끌고 있었고, 미야모토 시게루는 아버지 지인의 추천으로 닌텐도에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닌텐도는 디자이너가 필요 없었지만, 미야모토 시게루의 장난감 포트폴리오에 만족했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그를 채용하기에 이른다.

이후 3년 뒤, 회사에서 사내 공모전이 열리자 미야모토 시게루도 관심을 보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어차피 '즐거운 일'이 하고 싶어 닌텐도에 입사했는데, 꼭 완구가 아닌 '게임'도 즐거울 거 같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인기 애니메이션 [뽀빠이]를 기반으로 한 게임의 아이디어를 냈다. 닌텐도 입장에서는 아케이드 기기 재고 처리가 목적이었던 만큼, 북미에서 인기가 있던 [뽀빠이] 기반의 게임은 최적의 아이디어였다. 이렇게 미야모토 시게루의 아이디어는 채택됐고, 난생처음으로 '게임'이라는 녀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이후 그는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내며 게임 하나를 만들어낸다. 3개월 뒤, 그 결과물이 나왔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동키콩]이다. 1980년, 북미에 발매된 [동키콩]은 먼지 쌓인 2,000대의 아케이드 기기를 모두 팔아 치웠고, 1년 만에 5만 대가 판매되는 등 그야말로 '대박'을 일궈냈다.

[동키콩]의 성공 이후 미야모토 시게루는 한 가지를 깨닫는다. 어린 시절의 경험과 그의 관심 분야, 그리고 '즐거움'까지. 이 모든 것을 충족할 수 있는 수단, 그리고 자신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그것'의 정체를 흐릿하게나마 깨달았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게임을 만났다. '혹시 이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미야모토 시게루를 세상에 알린 작품 [동키콩]


- 만화가의 꿈 '마리오'로 대신하다

미야모토 시게루를 이야기함에서 '마리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마리오'는 미야모토 시게루가 창조해낸 캐릭터 중에 가장 유명하며, 그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마리오'의 탄생은 다시 [동키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동키콩]을 제작할 당시 게임제작에 전혀 감이 없었다. 물론 참고할만한 기준도 없었다. 게다가 이 게임은 원래 [뽀빠이]의 캐릭터를 사용하려고 했지만, 제작사로부터 사용권을 거부당해 더 난관에 부딪혔다. 할 수 없이 그는 모든 걸 직접 만들기로 한다. 과거 음악에 심취했던 시절을 떠올려, 게임에 쓰일 음원까지 직접 연주해 붙여 넣을 정도였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점프맨'으로 일컬어지는 주인공 캐릭터를 우선 디자인했다. 당시 기술로는 256X224 해상도에 가로 16 세로 16 도트로만 표현해야 했는데, 여기서 특징을 넣는다는 것이 무척 까다로웠다. 이에 미야모토 시게루는 모자와 수염을 그려 넣어 포인트를 줬다. 코는 일부러 크게 표현해 수염을 더 돋보이게 했고, 갈색 티셔츠에 붉은색 멜빵바지도 입혔다. 색깔을 넣은 것은 '점프맨'의 움직임을 더 눈에 띄도록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캐릭터를 일부러 뚱뚱하게 표현한 것도 유명하다. 훗날 미야모토 시게루는 '뚱뚱하고 못생긴 남자가 영웅이 돼 공주와 사랑에 빠지는 로망'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얼마나 순수하게 접근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붉은 모자에 주먹코, 입을 감싼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붉은색 멜빵바지를 입은 '점프맨'이 탄생했다. 보잘것없던 이 캐릭터는 [동키콩] 이후 인기가 치솟아 '마리오'라는 정식 이름을 달게 된다.

[슈퍼마리오 브라더스]가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이후, '마리오'는 닌텐도를 대표하는 마스코트로 발돋움한다. '마리오'는 월트디즈니의 '미키마우스'와 견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아톰]으로 만화가의 꿈을 키웠던 그는 게임이라는 줄기 안에서 '마리오'로 이를 충족한 셈이다.


▲ 이제 마리오는 팬들에게 ‘마본좌’로 불린다.


- 신(神)의 탄생

[동키콩]의 성공으로 회사에 신임을 얻은 미야모토 시게루는 1984년, 닌텐도 정보개발부 4팀의 리더로 임명된다. 그의 나이 고작 32세였다. 이때부터 그는 가정용게임기 소프트웨어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이후 그가 제작해 내놓은 게임이 바로 그 유명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와 [젤다의 전설]이다. 두 게임은 명성은 판매량이 증명해준다.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는 1,000만장 이상 판매고를 기록했고, 전체 시리즈는 무려 2억 6,000만장을 돌파하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게임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젤다의 전설]은 발매 이후 650만장을 돌파했고, 전체 시리즈는 4,200만장이 팔리며 닌텐도의 '별'의 하나로 군림하게 됐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이 두 가지 게임으로 크리에이터로서 글로벌 명성을 쌓게 된다. 그렇다면 두 게임은 어떤 배경으로 만들어졌을까? 독특하게도, 두 게임 모두 그의 지난 '경험'과 '순수한 시각'에서 비롯됐다.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의 핵심은 '점프'에 있다. 점프로 벽을 넘거나 부수고, 점프로 악당을 물리치고, 점프로 공주를 구해낸다. 검은색 배경화면 대신 하늘을 넣어 화사함을 더했고, 주인공 '마리오'의 이동에 따라 화면이 움직이는 현재 횡스크롤 게임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아냈다. 또, 아파트 파이프라인이 지하로 연결되는 부분에서 착안, 게임 내 이를 도입했다. 파이프라인에 들어가는 일종의 '비밀장소'를 넣은 셈이다.

또, 어린 시절 그가 즐겨 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영감을 얻어 버섯을 먹으면 몸이 커지는 부분까지, 게임은 단순했지만 즐거운 요소는 [동키콩] 그 이상으로 구현됐다. 우리에게 친숙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미야모토 시게루는 카트리지 교체식 가정용 게임기의 마지막을 감안하고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를 만들었지만, 이 게임으로 인해 카트리지 교체식 가정용 게임기 시대가 오히려 개막하게 됐다.


▲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화면만 봐도 당장 패드를 쥐고 점프하고 싶다

[젤다의 전설]은 게임이라기보다 '예술작품'으로 불리는 걸작이다. 이 게임은 동화 같은 스토리, 모험, 그리고 액션이라는 요소를 한데 묶어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는데, 게임으로 즐길 수 있는 가장 흥미진진한 요소를 한 번에 담아내려는, 미야모토 시게루의 '게임 감각'이 잘 녹아나는 대목으로 평가할 수 있다.

주인공은 '마리오' 대신 뾰족한 귀에 초록색 재킷과 고깔모자, 그리고 가죽 부츠를 신은 아담한 캐릭터를 내세웠다. 마치 피터팬을 연상시키는 듯한 이 캐릭터는 검과 방패를 손에 쥐고 있는데, 소년 용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자아내고 있다. 맞다. 바로 이 캐릭터가 지금까지 [젤다의 전설]을 전설로 이끈 주인공 '링크'다.

'링크'가 완성된 이후에는 세부적인 시스템이 뒷받침됐다. 우선 필드를 넓게 구현하고 여러 던전을 만든 뒤, 이를 뛰어다니게 함으로써 '모험'의 기반을 쌓았다. 던전을 지키는 몬스터를 배치해 액션을 구현했고, 여기에 스토리와 퍼즐 개념도 도입했다. 스토리는 다시 '퀘스트' 개념을 통해 플레이의 목적의식과 연결시켰고, 퍼즐은 부메랑이나 플룻 등 각종 아이템을 활용해 푸는 재미로 방향을 잡았다. 기존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와는 달리 더 많은 플레이 시간을 요구하는 만큼, 최초로 '게임저장'이라는 개념까지 확립했다. 복잡해 보이지만, 이 게임은 ‘패미컴’ 패드의 십자키와 A, B 두 버튼만으로 모든 조작이 가능했다.

1986년, [젤다의 전설]은 이렇게 현 시대 액션 어드벤처 장르의 귀감이 될 만한 형태로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젤다의 전설]은 역사상 가장 완벽한 게임, 게임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 등으로 평가됐다.

두 게임이 가진 의미는 크다.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는 횡스크롤 액션으로 [젤다의 전설]은 액션 어드벤처로 당시 수많은 개발자에게 '게임 문법'에 대한 어마어마한 영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상업성과 작품성 모두 잡아낸 것도 진귀한 기록이다. 두 게임은 앞서 언급했듯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했음은 물론, 각종 게임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특히 닌텐도64용으로 출시된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는 일본의 권위 있는 게임잡지 <패미통>으로부터 역사상 최초 만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건 바로 상징성이다. 두 게임의 어마어마한 성공으로 닌텐도는 글로벌 게임사로 점쳐졌고,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와 [젤다의 전설] 시리즈는 닌텐도의 상징적인 마스코트가 됐다. 전 세계 가정에는 '게임'으로 웃을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됐고, 이로 인해 483억 달러 규모(글로벌, 2011년 기준)의 비디오게임 시장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게임을 만들었지만, 사실 그것을 창조했다고 보는 게 옳다"는 빌 로퍼의 말이 새삼 수긍된다. 이렇게 신(神)은 탄생했다.


▲ 사실 ‘링크’는 미야모토 시게루가 자기자신을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모험놀이’를 떠올리며 만든 작품이 [젤다의 전설]이기 때문이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디자인 중에 실수라고 했지만 링크도 왼손잡이, 그 역시 왼손잡이다. 그랬거나 말거나, 사실 가장 멋진 사진이다


- 원점으로

[동키콩]을 시작으로 게임 제작을 시작한 미야모토 시게루는 2000년에 접어들 무렵까지 꾸준히 활약했다. 닌텐도의 규모가 커지자 그는 스스로 '디렉터'라 칭하고, 게임 소프트웨어 총괄을 맡게 된다.

그러나 2000년 들어 미야모토 시게루는 촉이 섰다. 새로운 무엇인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느낀 것이다. 닌텐도는 ‘패미컴’을 시작으로 가정용 게임기의 대부로 자리잡았지만, 소니와 MS가 '플레이스테이션'과 'Xbox'로 그 자리를 꿰찬 만큼, 당시 닌텐도 입장에서도 대안이 필요했다.

특히 미야모토 시게루는 '떠나난 게이머'들을 생각하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젊은 남성을 타겟으로 한 출중한 비주얼의 소프트웨어 다수를 보유한 '플레이스테이션'과 'Xbox' 사이에서 '착한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는 점차 줄었고, 성능 높은 휴대폰마저 등장해 게임기를 멀리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2003년, 미야모토 시게루와 닌텐도의 이와타 사토루 대표는 새 기기 프로젝트에 돌입하게 된다. 테마는 '원점 회귀'였다. 여기서 '원점 회귀'란 떠나간 게이머들을 다시 불러들이자에서 출발한, 말 그대로 닌텐도다운 발상이다.

2004년, 이렇게 해서 나온 기기가 바로 ‘닌텐도DS’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당시 빠져 있던 PDA의 기능에서 착안, 새 기기에 터치 스크린을 적용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특히 신규 기기 자체가 두 화면을 채택했는데, 터치 스크린과 이를 활용할 수 있는 터치팬은 게임 기기의 이상적인 기능에 가장 잘 부합했다.

소프트웨어도 차별화를 두었다. '플레이스테이션'과 'Xbox'의 아성과는 관계 없이, 닌텐도는 5세부터 95세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소프트웨어 제작을 고집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두뇌트레이닝]은 ‘닌텐도DS’가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 미야모토 시게루 역시 과거 기술적 한계로 실패했던 경험을 가져와 애완견과 교감한다는 콘셉의 [닌텐독스]를 제작해 내놨다. 참고로 [닌텐도스]는 패미통으로부터 또 한번 만점을 기록했고, 여성들에게도 인기 있는 소프트웨어로 발돋움했다.

결국 [닌텐도DS]는 전 세계적으로 1억 5000만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 1위에 이름을 올려 놨다. 결과적으로 '원점 회귀'는 성공한 셈이다.


▲ ‘닌텐도DS’는 발매 이후 글로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진은 [닌텐독스].


- 또 다시 원점으로

‘닌텐도DS’ 이후 닌텐도는 '게임인구 확대'라는 슬로건 아래 또 한번 차세대 기기를 기획한다.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닌텐도'와 친숙해질 수 있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한 것. 이렇게 해서 나온 기기가 2006년 발표된 ‘닌텐도 위’다. 이 기기를 통해 닌텐도는 또 한번 '원점 회귀'에 성공하게 된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닌텐도 위’ 제작 과정에서 패드의 중요성을 생각했다. 그는 ‘닌텐도64’ 전용 패드를 보며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대중 반응은 그렇지 못했다. 또, 다수의 게임기기가 더 복잡한 패드 설계를 갖추면서 이용자들의 적응력에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패드에서도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닌텐도 위’의 상징적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위모트' 패드는 이런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이용자들에게 10개가 넘는 '공포의 패드'를 안겨주는 대신, 누구나 쉽게 적응할 수 있는 패드를 기획했다. 이에 TV 리모콘을 원형으로 해 양손이 아닌 '한 손만으로' 적응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했고, 인체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를 탑재했다. 완성된 '위모트'과 ‘닌텐도 위’는 마리오와 루이지 콤비만큼 완벽했다.

사실 ‘닌텐도DS’와 ‘닌텐도 위’는 시대를 역행한다는 시장 인식과 함께 늘 부정적 여론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미야모토 시게루는 이런 상황을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반발이 있다는 건, 해당 시도가 무엇이든 확실히 새롭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창조는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 나온다. 결국 ‘닌텐도 위’는 주변 우려를 말끔해 해소하고, 무려 9,000만대 이상을 판매하며 소니와 MS를 압도하며 1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에도 닌텐도와 미야모토 시게루는 '원점'이라는 목표 아래, 지금의 '닌텐도 법칙'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닌텐도 법칙'이란 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성별과 세대를 초월한 게임을 내놓는 것이다. ‘닌텐도 위’ 이후 발매된 ‘3DS’와 ‘닌텐도 위유’도 이런 맥락에서 제작된 기기다. 두 기기는 ‘닌텐도DS’와 ‘닌텐도 위’ 정도의 파급력은 보이지 못했지만, 그들이 철학으로 삼는 '닌텐도 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 미야모토 시게루는 공업 디자이너 출신답게 기기의 ‘기능’을 먼저 생각한다. ‘닌텐도 위’의 홍보 이미지에서도 ‘위모트’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 미야모토 시게루의 삶, 그것이 곧 게임이다

미야모토 시게루가 남긴 말 중에 유명한 두 가지가 있다. "인생에 헛된 것은 없다. 모든 경험은 하나의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와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즐겁지 않으면, 그 게임을 하는 사람도 즐거울 수 없다"가 그것이다.

두 가지 언급은 미야모토 시게루의 삶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어린 시절 뛰어 놀던 경험은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와 [젤다의 전설]을 탄생시킨 계기가 됐고, 음악에 매진했던 경험은 [위 뮤직]으로 이어졌다. 날이 갈수록 몸이 나빠지는 그가 운동을 하던 중 떠올린 아이디어 기반의 [위 핏]은 '건강'을 테마로 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호 받았고, 결혼 이후 아이들과 정원을 꾸미다 낸 아이디어는 [피크민]으로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속설이지만, 한때 닌텐도 내부에서는 "미야모토 시게루의 취미생활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취미생활은 곧 게임 소프트웨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험을 기반으로 한 게임 제작은 단순히 그의 '촉'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그만큼 도전과 실패가 공존했다. 특히 ‘닌텐도 위’의 아바타 채널인 ‘Mii’의 경우, 무려 20년이 지나서야 완성됐다. ‘Mii’는 욕심을 낸다면 이전에 충분히 내놓을 수도 있었지만, 기술적 지원이 부족한 점 때문에 20년을 기다렸다. 완벽하지 않으면, 소비자들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그러나 10년이든, 20년이든 기회는 찾아온다. ‘Mii’는 ‘닌텐도 위’의 새로운 기능과 함께 등장했고, 전 세계적으로 통하는 아바타 채널을 만들어냈다.

모든 경험은 하나의 양식이 될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여기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결국 인생에 있어 헛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이런 인생관이야 말로 미야모토 시게루가 빚어낸 창조력의 근원이라 할만하다.

그가 게임을 제작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즐거움'이다. 그렇다면 그 즐거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미야모토 시게루는 '직접 조작해서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실에서 '미지와의 조우'는 두발로 돌아다니며 체험하는 것을 뜻하는데, 게임에서는 직접 조작해서 돌아다녀보고 이것저것 해보는 것이 그 의미에 부합한다. 이렇게 이용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게임이 즐겁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그렇게 즐겼던 [슈퍼마리오 브라더스]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 플레이해도 '즐거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후배 개발자들에게 그의 철학을 전파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특히 자신의 경험을 발판 삼아, 제작자가 자신만의 감수성을 최대한 살려 작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그는 직원들에게 게임을 '작품'이 아닌 '상품'으로 표현하도록 주문한다. 이는 철저히 고객 입장에서 만족스런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소비자의 시각에서 바라봐야 진정한 결과물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 또, 그는 프로젝트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과정을 모두 백지화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밥상 뒤집기'에 나선다. 힘든 과정이지만, 직원들은 기꺼이 이 과정을 반기기도 한다. 거꾸로 생각하면 새로운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고, 그들의 노력이 더 완벽한 결과물로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곧 닌텐도의 사상으로 연결돼 있고, 이는 그들의 고객들에게 ‘신뢰’를 쌓게 한 근원이 되고 있다.


▲ 미야모토 시게루의 사인


- 모든 사람이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하는 것

세계 많은 개발자들에게 존경받는 미야모토 시게루는 명성만큼 상복도 많다. 지난 2012년에도 스페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알려진 '스페인 왕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스투리아스 왕자 재단은 미야모토 시게루에 대해 "그는 TV 게임을 통해 사회적인 혁명을 일으켰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매체로 발전시켰다"면서 "모든 연령의 사람이 민족과 사고방식의 차이를 넘어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미야모토 시게루가 '어떤 인물'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밝고 명랑한 게임을 만든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특히 그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게임의 사회 부정적 인식에 대해 안타까움을 크게 느끼고 있다. 게임산업은 큰 발전을 이룩하며 하나의 문화로써 인정받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골방에 온종일 앉아 모니터만 쳐다보는 족속들'을 양산한다는 시선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야모토 시게루는 창작자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부분에도 집중하고 있다. 단순히 자본은 투자해 사회공헌에 일조하는 것 외에도, 미야모토 시게루는 ‘닌텐도DS’와 ‘닌텐도 위’를 통해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상황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닌텐도가 노선을 꺾고, 시대 트렌드에 몸을 맡겼다면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야모토 시게루가 있었기에 닌텐도는 존재했고, 또 닌텐도가 있었기에 미야모토 시게루가 있었다. 그와 닌텐도의 목표는 여전히 동일하다. 바로 '모든 사람이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하는 것'이다. 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

참고문헌
[미야모토 시게루], 김정남 저
‘잘 만든 게임과 재미있는 게임의 차이는? 미야모토 시게루 개발 철학 인터뷰’ <http://bizmakoto.jp/>
[닌텐도 ‘놀라움’을 낳는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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