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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천국와 지옥을 오간 디아블로 아버지 '빌 로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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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빌 로퍼는 외롭지 않았다. 그는 [디아블로]와 [스타크래프트] 등 당대 최고의 게임을 만들어낸 경험이 있고, 그 유명한 블리자드의 개발 총 책임자라는 명함이 있었다. 또, 그에게는 인생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알렌 아담(블리자드 창업자)과 마이크 모하임(현 블리자드 대표)이 곁에 있었고, 최고 수준의 게임개발자로 이름을 높인 데이비드 브레빅, 에릭 쉐퍼, 막스 쉐퍼 등이 그와 함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팬들이 많았다. 팬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그를 아끼고 또 아꼈다. 맞다. 그는 천국에 있었다.

지금의 빌 로퍼는 외롭다. 대부분 그의 곁을 떠났다. 그와 인연이 됐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헤어졌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별을 맞이했다. 그에게 열광하던 팬들도 모두 떠났다. 아니, 그들은 이제 빌 로퍼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원흉은 [헬게이트: 런던]이었다. 그가 직접 만들어낸 '괴물'은 여전히 빌 로퍼에게 족쇄를 채우고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히고 있다. 결국, 그 '괴물'은 빌 로퍼를 지옥까지 내몰았다.

대체 빌 로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헬게이트: 런던]은 대체 왜 '괴물'이 된 것일까?


▲ 디아블로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빌 로퍼


프로 음악가를 꿈꾸던 빌 로퍼
빌 로퍼는 196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쪽에 위치한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외동아들인 빌 로퍼는 부모의 애정어린 관심 속에 자랐는데, 덕분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갖가지 문화 콘텐츠를 두루 접할 수 있었다. 그의 부모는 빌 로퍼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성장하길 바랐고, 이에 소년이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경험'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음악, 게임, 스포츠, 문학, 연극, 미니어처 피규어 놀이, 컴퓨터, 만화, 영화, 여행 등 분야는 다양했다.

이 중에서도 빌 로퍼는 크게 세 가지 분야에 각별한 관심과 재능을 보였는데, 바로 음악·스포츠·게임이었다.

빌 로퍼의 음악적 재능은 확실했다. 활동적이고 수줍음이 없었던 빌 로퍼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8살부터 색소폰을 비롯한 갖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음악적 감각을 키워나갔다. 이러한 경험은 빌 로퍼에게 즉흥적이면서 감성적인 창의력을 길러 주었는데, 덕분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작곡 등의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음악에 심취한 그의 첫 꿈 역시 '프로 음악가'였다.

스포츠 역시 빌 로퍼의 관심 분야 중 하나였다. 빌 로퍼는 야구와 골프, 축구, 아이스하키 등을 직접 즐기는 것을 좋아했는데, 다른 누군가와 승부를 겨루는 것이 그에게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게임과 빌 로퍼의 만남 역시 유년시절에 이루어졌다. 그의 부모는 빌 로퍼가 더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곱셈과 뺄셈 등 산수의 기본을 익힐 수 있는 카드게임 [크리비즈]를 알려줬는데, 이를 통해 '게임'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이후 빌 로퍼는 [블랙잭] [백개먼] 등 갖가지 보드게임에 흠뻑 빠져들었다. 1970년대 초반에 나온 아타리의 [퐁] 등의 아케이드 게임 역시 빌 로퍼에게 즐거운 '놀이' 대상 중 하나였다.

그러나 빌 로퍼가 가장 관심을 둔 장르는 RPG였다. 음악에 재능을 보이며 창의력을 쌓은 빌 로퍼에게 RPG 장르는 그야말로 신세계였기 때문이다. 세계관에 룰 하나하나까지 '창조'해야 하는 RPG는 빌 로퍼에게 여러 영감을 제공했는데, [던전앤드래곤] 같은 TRPG가 제격이었다. 이에 빌 로퍼는 플레이어가 아닌 마스터(운영자) 역할로 게임을 즐겼고, 게임에 어울리는 음악을 직접 만들어 제공하거나 마법주문을 손수 만들며 동료들을 주도했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TRPG를 즐겼고, 나이가 찬 뒤에도 [위저드리] 등에 빠져들며 손에서 게임을 놓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빌 로퍼에게 넉넉한 창의력과 합리적인 리더십을 길러주는데 영향을 끼쳤다. 훗날 그가 블리자드에 입사해 게임개발에 참여한 것은 여러 분야에서의 경험과 거기서 우러나는 창의력이 큰 힘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능동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동료들을 이끌던 '대장'으로서의 경험 역시, 그가 블리자드에서 프로듀서로 활약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경험의 씨앗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후 빌 로퍼는 1985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입학해 실용음악 및 성악을 공부했다. 학교 근처에 임대주택으로 거처를 옮겨 독립생활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음악에 열정이 있었던 빌 로퍼는 교내 음악 컨테스트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등 꽤 순조롭게 학교생활을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생활은 길게 가지 못했다.


▲ TRPG 던전앤드래곤.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실제로 연기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다. 
여기에 푹 빠진 빌 로퍼는 마법 주문을 직접 만들어 선보이기도 했는데,
그가 만든 주문은 워낙 어려워 동료들이 외우는 걸 어려워하기도 했다고.
빌 로퍼는 그게 즐거웠다


무명 음악가 빌 로퍼, 게임회사에 발을 들이다

대학생 빌 로퍼는 집안사정이 어려웠던 관계로 학비를 포함한 생계비 모두를 직접 마련해야 했다. 힘든 생활을 하던 빌 로퍼는 2학년 무렵 돈이 바닥나자 결국 휴학을 선택하게 된다. 이후 그는 낮에는 트럭운전을 하고 밤에는 재즈 공연을 하며 생계와 '꿈'을 병행했다. 힘들었지만 그는 이 생활을 마냥 비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당시 생활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프로 음악가가 되기 전에 생계를 위한 일자리를 얻는 건 특이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주말에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그 당시는 나에게 있어 '도전의 시기'였습니다. 젊은 시절 자신의 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런 시절이 있기 마련이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기 싫어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이것이 당시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될 것 같네요.”
-빌 로퍼
이런 생활이 길어지자 결국 그는 한 가지 선택을 했다. 자퇴였다. 당시 졸업장은 누군가를 가르칠 때나 유효하다는 판단에 내린 선택이었다. 밖에서 공연을 하고 싶었던 빌 로퍼는 당장 학업보다 새로운 직업과 경험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다. 결국, 그는 프리랜서로 음악을 작곡하고 트럭운전사의 일을 지속하며 뚝심 있는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약 10여 년간 빌 로퍼는 무명 생활을 거친다. 그래도 그의 음악활동 경력은 짚어볼 만하다. 그는 1994년 룸메이트와 '폭시 보가즈'라는 포크밴드를 결성했는데,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어필하기 위해 밴드 구성원을 모두 남자로 통일하고 중세시대 복장을 걸친 채 아일랜드 민속적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밴드를 함께 만든 룸메이트가 르네상스 플레저(일종의 민속촌)에서 근무했는데, 바로 여기서 공연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 영리한 아이디어는 잘 통했고, '폭시 보가즈'는 아이리시 포크밴드로 두루 활약해 지금도 수명을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 보면 '앞날이 불투명한' 빌 로퍼 자신에게는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그의 거친 생활은 1994년 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고 이 사건은 빌 로퍼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다.

상황은 이랬다. 빌 로퍼의 친구이자 대학 동기인 스튜 로즈는 블리자드라는 회사에서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는 빌 로퍼에게 어떤 게임의 배경음악을 만들어줄 사람을 뽑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해당 게임은 [블랙쓰론]이었다. 당시 빌 로퍼는 동료의 말에 '이거다!'라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게임과 음악은 그가 수십 년 동안 관심을 둔 분야였기 때문이다. 이에 빌 로퍼는 직접 제작한 배경음악 샘플을 블리자드에 보냈다. 샘플을 받은 블리자드는 만족스러워했고, 그렇게 빌 로퍼는 자신의 운명을 바꿔 줄 회사에 발을 들이게 된다.


▲ 빌 로퍼는 아이리시 포크밴드 ‘폭시 보가즈’에서 활동했다.


괴상한 그 남자, 블리자드의 17번째 직원이 되다

블리자드에 입사했지만 빌 로퍼의 상황은 당장 나아지지 못했다. 당시 블리자드는 직원 10명 남짓의 작고 초라한 회사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로스트바이킹]이나 [락앤롤레이싱]으로 겨우 사업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였다.

결국, 빌 로퍼는 음악제작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다. 일주일에 40시간씩 워드 프로세서로 타이핑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는 시간을 음악제작에 할애했다. 잠이 부족했던 그는 사무실에서 꾸벅꾸벅 조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생계를 위한 것인 만큼, 이렇게 그는 무리한 생활을 몇 개월 동안 지속해야 했다.

빌 로퍼가 회사 내에서 포지션이 바뀐 것은 블리자드가 처음으로 개발과 유통을 자체 진행한 [워크래프트] 제작 시기였다. 그의 타고난 오지랖과 넉살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빌 로퍼는 음악제작을 하는 계약직 직원이었지만, 게임 제작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에 개발자 아이디어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여기서 게임의 '재미'를 높여줄 만한 여러 의견을 냈다. 당시 블리자드 개발자들은 음악 제작이나 하는 괴상한 남자가 개발에 참견하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워낙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것을 보고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푸짐한 풍채와 온화한 미소, 거기에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가 앙상블을 이루니 빌 로퍼 특유의 넉살은 곧 블리자드 직원들에게 일종의 마스코트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확실히 빌 로퍼의 친화력은 그의 삶에 두루 영향을 끼쳤다. 삶을 긍정적이면서 유희적으로 접근했던 빌 로퍼는 'enjoy(즐기다)'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온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 노하우가 뒷받침돼 조직 전체를 밝게 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빌 로퍼는 게임개발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한 개발자들 사이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아마 빌 로퍼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블리자드도 틈만 나면 꾸벅꾸벅 졸면서도 여기저기 관심을 두는 이 남자가 '싹이 보인다'고 판단했고, 결국 [워크래프트]의 개발 회의에 꾸준히 참여시켰다. 암묵적으로 '게임 개발'에 포함한 것이다. 이후 빌 로퍼는 회의 중 의견충돌이 있을 때 이를 정리하는 조정자 역할까지 하는 등 계약 이상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본연의 업무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다. 빌 로퍼는 [워크래프트]의 배경음악은 물론 오크와 휴먼 캐릭터의 목소리를 직접 더빙하는 등 자신의 전공을 최대한 살려 150%의 업무 효율을 냈다. 또,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가 완성된 이후 홍보를 위해 미국 전자제품 전시회(CES)에 참가했는데, 홍보영상에 해설자로 활약하기까지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빌 로퍼는 전시장에서 마이크를 쥐고 직접 홍보하는 등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국, 블리자드는 빌 로퍼가 음악제작뿐 아니라 여러 업무를 소화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라고 판단했고, 그를 17번째 정식 직원으로 채용했다. 빌 로퍼 입장에서는 길고 길었던 암흑 생활을 청산하는 순간이었다.


▲ 빌 로퍼가 게임 개발에 처음으로 참여한 워크래프트


▲ 블리자드 창립 3인방, 오른쪽부터 알렌 아담, 마이크 모하임, 프랭크 피어스. 
빌 로퍼와 가장 인연을 맺은 사람은 알렌 아담으로, 
그는 빌 로퍼에게 회사가 돌아가는 시스템은 물론 게임 개발 등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인생의 스승인 셈이다


콘도르와의 만남, 그리고 [디아블로]의 아버지로…

1994년 하반기, 블리자드의 정식 직원으로 채용된 빌 로퍼는 이후 '멀티 플레이어'로 꾸준히 활약하게 된다.

우선 그가 처음 개발에 참여한 [워크래프트(94)]는 출시 이후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나름 블리자드에 희망을 안겼다. [워크래프트]는 당시 [듄2]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탄탄한 세계관과 직관적 UI 등으로 나름 정체성을 쌓으며 RTS 장르에 영향력을 쏟게 된다. 탄력을 받은 블리자드는 이후 [워크래프트2] 개발에 착수하는데, 여기서부터 빌 로퍼는 프로젝트 전체를 총괄하는 프로듀서로 데뷔하게 된다.

당시 개발 프로듀서는 사실상 '멀티 플레이어'에 가까웠다. 전체적인 일정을 맞추는 것은 물론 예산과 마케팅·홍보까지 모두 프로듀서의 몫이었다. 게임 개발에도 깊게 관여했다. 게임 구조, 밸런스, 기술, 그래픽, 분위기 등 대부분의 요소에 관여해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게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했다. 가장 어려운 직책이기도 했는데, 갖가지 경험이 풍부한데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탁월한 빌 로퍼가 최고 적임자였다.

이 과정에서 빌 로퍼는 명확한 개발철학을 세운다. 그래야 쌓이는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게임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복잡한 게임 내용을 지양하고 최대한 심플하게 제작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너무 기술력에만 치중하면 '재미'를 빠뜨릴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에게 어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완성도 역시 중요하게 여겼다. 여기서 완성도는 게임의 전체적인 형태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쉽고, 재미있게'라는 항목이 얼마나 완벽하게 작동하느냐에 가까웠다. 그의 개발철학은 늘 신중하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블리자드 스타일과도 잘 맞았고, 이는 곧 블리자드가 가야 할 항로로 여겨졌다.

이런 개발철학에 기반을 두고 탄생한 [워크래프트2(96)]는 출시 이후 무려 100만 장을 팔아치우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프로듀서로 활약한 빌 로퍼는 회사 내에서 더 신뢰를 쌓았고, 개발자로서 확실한 포지셔닝을 하게 됐다.


▲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워크래프트2는 지금 해도 재미있을 거 같다.

이후 유명세는 탄 블리자드는 차기작으로 [워크래프트3]가 아닌 새로운 IP를 준비했다.

당시 블리자드의 설립자이자 대표였던 알렌 아담은 과거 [저스티스 리그 태스크포스]라는 게임의 포팅작업을 담당하던 콘도르(Condor)라는 이름의 개발사를 떠올렸다. 콘도르의 대표였던 데이비드 브레빅은 게임개발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알렌 아담과 인연이 돼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콘도르는 새로운 게임으로 턴제 기반 RPG 하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자금 사정으로 개발이 중단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콘도르의 저력을 믿고 있던 알렌 아담은 30만 달러 규모의 개발비를 지원하고, 해당 게임의 판권을 소유하게 된다.

양사의 계약 관계가 성립된 이후, 빌 로퍼는 블리자드의 대표 프로듀서로 콘도르를 오가며 가교 구실을 했다. 빌 로퍼의 특유의 친화력은 여기서도 발휘됐는데, 덕분에 그는 콘도르 직원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된다. 특히 데이비드 브레빅을 포함한 콘도르 핵심인력은 자유롭고 즉흥적인 면이 돋보였는데, 이는 다소 보수적이었던 블리자드 스타일과 완전히 달랐다. 자칫 무너질 수 있는 두 회사의 관계는 빌 로퍼를 통해 온전히 호흡했다.

당시 콘도르가 개발하던 게임은 그 유명한 [디아블로]였다. 이 게임은 턴제 기반의 RPG였는데, 데이비드 브레빅은 [X-COM]에 영감을 받아 전략과 RPG가 잘 조화된 게임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빌 로퍼는 당시 정황상 턴제보다는 실시간 방식이 더 좋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이에 빌 로퍼는 실시간으로 바꿔보자는 의견을 냈는데, 데이비드 브레빅은 이를 완강히 거절했다. 실시간으로 바꾸면 그가 애초에 기획한 전략성이 모조리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 로퍼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자는 선에서 합의했다. 데이비드 브레빅은 프로토타입을 제작한 이후, 아니다 싶으면 원래대로 밀어붙일 작정이었다.

그랬거나 말거나, 데이비드 브레빅은 당대 최고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그럼 한번 바꿔볼까? 라는 전설적인 말 한마디를 남긴 채, 단 3시간 만에 [디아블로]를 포인트앤클릭 방식의 게임으로 바꿔버렸다.


▲ 콘도르(블리자드 노스)를 세상에 알린 디아블로

그렇게 바뀐 [디아블로]는 블리자드뿐만 아니라 콘도르도 놀라게 했다. 실시간으로 살아 움직이는 [디아블로]는 세간에 그 어떤 게임보다 새롭고 근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더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확신을 얻은 블리자드와 콘도르는 바뀐 [디아블로]로 방향을 다시 잡았고, 모든 요소를 실시간 방식에 맞게 전면 개편했다. 확신에 찬 빌 로퍼는 콘도르에 한 가지 더 요청을 했다. 전 세계 유저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할 수 있는 접속망에 대한 아이디어였다. 개발기간이 촉박했던 데이비드 브레빅은 망설였지만, 결국 의견을 받아들여 '배틀넷'을 제작하게 된다. 발매 전 콘도로는 블리자드에 완전히 인수(96)되는데, 이때 사명도 '블리자드 노스'로 변경됐다.

1997년 1월, 그렇게 출시된 [디아블로]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게이머들은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박진감 넘치는 플레이에 환호했고, 이 공포스런 게임에 푹 빠졌다는 소식이 세계 각지에서 들려 왔다. 결국 [디아블로]는 예상 판매량이었던 20만 장을 완전히 뒤엎고, 무려 300만 장 이상이 판매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판매량 외에도 [디아블로]는 세계 게임사에 큰 의미를 남겼다. 우선 [디아블로]는 핵앤슬래시 장르의 표본을 열었고, 전략성이 빠진 RPG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놨다. 결국, 이 게임은 국내에도 영향을 끼쳐 [리니지] 등의 모태가 됐다. 또 [디아블로]에서 탄생한 '배틀넷'은 수많은 사람에게 멀티 플레이의 즐거움을 선사했고, 나아가 온라인게임의 가능성을 열기도 했다. 그만큼 [디아블로]는 산업에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디아블로]신화는 빌 로퍼에게도 커다란 자산이 됐다. 이후 그는 블리자드의 프로듀서이자 블리자드 노스의 부사장으로 활약하며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2] [워크래프트3]를 내놓으며 연타석 홈런을 터뜨렸다. 명성은 하늘 높이 치솟았고 그에게는 '디아블로의 아버지' '히트메이커' 등 갖가지 호칭이 따랐다.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2]는 국내에서도 메가 히트를 쳤고, 그의 명성은 한반도에서도 맹위를 떨치기에 이르렀다.


▲ 빌 로퍼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데이비드 브레빅(좌), 그는 당대 최고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이었다.


▲ 국내서도 크게 인기를 끈 디아블로2. 메피스토는 추억의 보스 몬스터 중 하나다


플래그십 스튜디오 설립과 [헬게이트: 런던]

때는 2003년. 당시 큰 사건 하나가 외신을 통해 보도됐다. 빌 로퍼가 블리자드 노스를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이미 블리자드와 빌 로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여겨진 만큼, 처음에는 모두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뉴스 내용은 사실이었다. 당시 블리자드의 모회사인 비벤디가 극심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블리자드 매각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만약 비벤디가 협의 없이 게임사업을 매각해버리면, 자칫 블리자드는 쌓아온 모든 것을 한 번에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빌 로퍼는 매각설에 관련해 비벤디에 협상을 요구했고, 응해주지 않을 경우 회사를 퇴사하겠다고 칼을 빼 들었다. 그러나 비벤디는 협상은커녕, 빌 로퍼의 사퇴를 오히려 받아들여 버렸다. 이에 빌 로퍼를 비롯한 블리자드 노스 핵심인력이 줄줄이 퇴사했다.

이 사태가 사실로 드러나자 세간에는 난리가 났다. 외신에서는 "비벤디가 게임사업의 보석을 잃었다"면서 어두운 전망을 내리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블리자드에 있어 빌 로퍼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회사를 떠난 빌 로퍼는 [디아블로] 신화의 주역이기도 한 데이비드 브레빅, 에릭 쉐퍼, 막스 쉐퍼 등과 함께 새로운 게임 개발사 '플래그십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빌 로퍼 사단'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멤버는 게임 개발에 대한 각 분야의 베테랑들이었고, [디아블로] 성공신화 이후 이미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 플래그십 스튜디오 주역들, 대부분 블리자드 노스의 핵심 개발진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회사 설립 이후 처녀작을 기획했는데, 데이비드 브레빅이 아이디어 하나를 냈다. 바로 [하프라이프]와 [디아블로]의 만남이었다. 이 게임은 1인칭 시점을 기본 베이스로 하지만, FPS처럼 정확한 조준이나 빠른 움직임을 요구하기 보다 [디아블로]처럼 스킬과 무기를 활용한 액션RPG 같은 느낌으로 가자는 데 뼈대를 두고 있었다. 빌 로퍼는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고, 게임을 구체화하는데 이게 바로 [헬게이트: 런던]이다.

이후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빌 로퍼 사단은 그 명성이 워낙 높았던 만큼, 어렵지 않게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2]의 한국 유통을 맡아 크게 성장한 한빛소프트의 역할이 컸다. 한빛소프트는 대대적인 투자와 함께 [헬게이트: 런던]의 온라인 버전을 국내를 포함 아시아 전 지역에서 서비스하기로 했다. 일본은 남코가, 북미와 유럽(패키지 버전)은 EA가 각각 맡기로 했다.

든든한 파트너사로부터 크고 작은 투자를 받은 플래그십 스튜디오는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헬게이트: 런던] 개발에 착수했다. 빌 로퍼는 개발기간 중에도 드문드문 게임의 분위기나 정보 등을 흘리며 게이머들의 기대심리를 높였다. 기대치가 너무 오르는 바람에 [헬게이트: 런던]은 출시 이후 곧 세상을 정복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플래그십 스튜디오는 그들도 모르는 여러 문제가 서서히 목을 죄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헬게이트: 런던]은 개발이 진척될 수로 여러 '문제'를 안게 되는데, 덕분에 개발기간은 계속 늘어졌다. 밖에서는 '완성도 때문에 늦어지는 게 틀림없다'며 더 기대하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었다. 분위기가 고조될수록 플래그십 스튜디오는 다급했고, 무엇인가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헬게이트: 런던]은 2008년 1월 15일 국내에서 대망의 공개 서비스를 시작했다. 당시 이 게임을 기다렸던 게이머라면 1월 12일 진행된 헬게이트 전야제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당시 한빛소프트와 플래그십 스튜디오는 서비스를 기념해 화려한 행사를 진행했다. 소녀시대, DJ DOC, 윤하 등 인기 뮤지션이 출동해 축하공연을 했다. 하이하이트는 빌 로퍼였다. 그는 직접 무대에 올라 조 카커(Joe Cocker)의 Unchain My heart를 열창했다. Unchain My heart… 열광하는 팬들 사이에서 노래를 부른 빌 로퍼는 당시 무슨 생각을 했을까?


▲ 헬게이트 전야제 행사서 Unchain My heart를 열창한 빌 로퍼


▲ 빌 로퍼는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가 만든 디아블로2와 스타크래프트가 한국에서 최고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헬게이트: 런던]이 남긴 것들

이럴 수가 없다. 도저히 이럴 수가 없다. 개발이 완료된 [헬게이트: 런던]은 충격적이었다. 빌 로퍼 사단이 만든 게임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조악한 완성도에 온라인게임으로서 갖춰야 할 미덕 또한 형편없었다.

확실히 그랬다. [헬게이트: 런던]은 국내 서비스에 돌입한 이후 동접 10만에 월 매출 30억을 돌파하는 등 인기 값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헬게이트: 런던] 이후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게이머들은 각종 버그에 골머리를 앓았고, 콘텐츠 수급이 원활하지 못해 할 게 없었다. 서버도 툭하면 말썽을 부렸다. 국내보다 먼저 출시된 북미 패키지 버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헬게이트: 런던]을 '지루하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게임 초기 잠깐을 제외하면 혁신적이고 놀라운 경험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맞다. 이렇게 [헬게이트: 런던]은 성공은커녕 쓰라린 참패를 맛봐야 했다.


▲ 한때 최고의 기대작이었던 플래그십 스튜디오의 헬게이트: 런던

[헬게이트: 런던]의 실패요인은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우선 플래그십 스튜디오는 각 개발영역에 베테랑들이 모여 있었지만, 온라인게임에 대한 노하우는 전혀 없었다. [헬게이트: 런던]은 원래 패키지로 제작된 게임인데, 이를 온라인으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플래그십 스튜디오와 한빛소프트는 이를 위해 공동법인 '핑제로'를 설립하고 온라인게임 기술에 필요한 각종 솔루션을 제공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결국 [헬게이트: 런던]은 DB와 서버 문제,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다양한 변수를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특히 크리티컬한 버그가 많았다. 얼마나 심각했는지, 게임을 창조한 플래그십 스튜디오조차 어떻게 해결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결국, 이러한 버그는 고쳐지지 못한 채 서비스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게 됐다.

두 번째는 욕심과 강박 사이에서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데 있다. 플래그십 스튜디오는 애초에 독립 개발사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것이 목표였지만, 생각보다 [헬게이트: 런던]의 볼륨이 커져버렸다. 블리자드 노스 핵심 개발자 출신이란 그들의 이력은 초기 '자신감'으로 작용했지만, 외부의 기대치가 점점 높아지자 이는 곧 강박으로 돌변했다. 소규모로 시작한 신생 개발사가 [디아블로]를 뛰어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수익기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투자만으로 회사를 유지한 아슬아슬한 상황도 [헬게이트: 런던]에 불안한 기운을 심었다. 결국, 플래그십 스튜디오는 [헬게이트: 런던]에 올인해 한 방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강박과 욕심은 결국 모험이나 도전이 아닌 '도박'으로 작용했다. 개발 막바지 사방에서 시작된 자금난 압박은 게임의 완성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결국 [헬게이트: 런던]은 이도 저도 아닌 게임으로 변질해 버렸다.

물론 [헬게이트: 런던] 자체에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게이머들도 '게임은 괜찮았는데…'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는데, 확실히 플래그십 스튜디오가 욕심을 버리고 조금 더 가볍게 접근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만큼 세계관부터 시작해 기본 콘셉, 그리고 시스템까지 [헬게이트: 런던]의 게임성은 나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플래그십 스튜디오의 선택은 실패로 돌아갔고 [헬게이트:런던]은 빌 로퍼에게 최악의 작품으로 낙인찍혔다. 여기에 올인했던 플래그십 스튜디오와 한빛소프트는 게임이 되지 않자 자금난에 허덕였고, 한때 전우였던 양사는 결국 감정싸움까지 벌였다. 이후 2008년 7월, 자금난에 허덕이던 플래그십 스튜디오는 '폐쇄'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고, 한빛소프트는 T3 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되는 씁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빌 로퍼는 꽤 긴 시간 동안 [헬게이트:런던]이란 족쇄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게이머들도 그를 비난하고 나섰다. [디아블로]와 [스타크래프트]를 제작한 경험은 순전히 블리자드라는 뒷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그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며 손가락질했다. 그렇게 괴물이 된 [헬게이트: 런던]은 빌 로퍼의 명성에 칼질했고, 그를 지옥으로 내몰았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괴물은 빌 로퍼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 빌 로퍼는 헬게이트: 런던에 모든 것을 걸었다


▲ 헬게이트: 런던이 실패한 이후 빌 로퍼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블리자드는 디아블로2의 정식 후속작인 
디아블로3 개발을 발표한다. 디아블로를 창조한 빌 로퍼 입장에서는 씁쓸한 소식이었다. 
사진은 한 누리꾼이 당시 빌 로퍼의 심경일 것이라며 편집한 사진. 물론 픽션이다


빌 로퍼는 정녕 회복 불가능한 '패배자'인가!

빌 로퍼는 앞서 재차 언급했듯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몸에 밴 사나이다. [헬게이트: 런던]의 후유증이 거세긴 했지만, 이후 그는 크립틱 스튜디오에서 2년간 몸담았고 현재 디즈니 인터랙티브 마블 게임 부사장으로 재직 중에 있다. 크립틱 스튜디오나 디즈니 인터랙티브가 어색하기만 하지만, '도전'을 하고 있다는 건 좋은 신호다.

우리는 빌 로퍼가 지닌 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헬게이트: 런던]이 큰 실망을 주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누구나 겪는 '실패'를 한 번 더 경험했을 뿐이다. 그가 실패했다고 해서 [디아블로]와 [스타크래프트] 등의 게임을 성공시키고, 전 세계 수많은 게이머에게 즐거움을 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임 하나만으로 그의 능력까지 거론하며 평가절하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 가혹한 행위다.

그렇다면 빌 로퍼는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건 빌 로퍼 자신이다. 그는 현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헬게이트: 런던]에 대한 상처는 다 아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남은 것은 도전에 대한 용기와 자신감이다. 빌 로퍼가 아무리 떨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최고 수준의 게임 개발자라는 것은 변함없다. 게임 개발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게이머들을 즐겁게 하는 게임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가 이 '임무'를 제대로 이행한다면 또 한 번 그는 팬들의 환호를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임산업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빌 로퍼 같은 인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 과연 빌 로퍼는 팬들의 엄지손가락을 다시 ‘선물’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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