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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신이 되고자 한 사나이, 피터 몰리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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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인간들의 삶을 내려다보며, 마음에 드는 이에게는 축복을 내리고 거슬리는 이에게 벼락을 떨어뜨린다. 가끔은 자연 재해를 일으키거나, 재난을 막아 주기도 한다. 자신을 본뜬 자를 하계로 내려 보내 인류를 이끌게 하거나, 반대로 인간들을 조종해 세계를 마음대로 휘두른다.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과 같은 권력을 꿈꿨지만, 이에 다다른 이는 없었다.

피터 몰리뉴는 게임을 통해 인류를 신으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다. 그는 ‘파퓰러스’를 통해 갓 게임이라는 장르를 이끌어냈고, 실시간 시뮬레이션 게임 장르의 생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스타크래프트’나 ‘리그 오브 레전드’ 등의 기반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타이쿤, 디펜스 등 다양한 장르를 창조해 게임의 세계를 다채롭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가 만드는 게임은 언제나 창의적이고 혁신적이었다. 권선징악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세상에서 권악징선을 장려한다거나, 세계를 지배하려는 악의 집단의 시점에서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신이 되어 추종자를 모아 영토를 넓혀나간다. 피터 몰리뉴를 통해 게이머들은 절대자가 되었다.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 신이 되고자 한 사나이, 피터 몰리뉴

어릴 적 신이었던 아이, 게임 속 절대자를 꿈꾸다

1960년대 초 영국, 마당에서 뛰어놀던 어린아이가 우연히 개미 떼를 발견했다. 이를 따라간 아이의 눈에 각종 개미들이 수없이 드나드는 개미집의 입구가 들어왔다. 수많은 개미들이 자신의 역할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지켜보던 아이는 개미들에게 먹을 것을 던져 주거나, 몇몇 개미를 잡아다 엉뚱한 곳에 놓아두고 그 행동을 지켜보곤 했다. 가끔은 심술을 부리며 개미집을 파헤쳐 개미들에게 재앙을 선사한 후 그 복구 과정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개미와 자신 밖에 없는 자그마한 세상에서, 아이는 마치 신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어린아이가 바로 훗날 세계 3대 게임 개발자로 불리는 피터 몰리뉴(1959년생)다.

이처럼 피터 몰리뉴는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왕성했다. 장난감 가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언제나 원하는 장난감을 가질 수 있었고, 덕분에 원하는 것은 즉시 손에 넣고 궁금한 점은 바로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곤 했다. 어린 시절 세계 최초의 전자 게임인 ‘퐁(PONG)’을 처음 접한 후 할머니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아타리 2600 기기를 구입하고, 게임의 작동 원리가 궁금해 게임기를 분해했다가 완전히 망가뜨린 일화는 그의 호기심 많고 직선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수학 외의 학업에 큰 흥미가 없었던 그는 사우스햄튼 대학을 졸업한 후, 친구와 함께 DB 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타루스(Taurus)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창업으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 매우 유명했던 컴퓨터 회사 코모도어 인터내셔널이 그들에게 프로그램 제작 일을 맡긴 것이다.

사실 이는 코모도어 측의 실수였다. 그들은 당시 이름을 떨치던 소프트웨어 업체 토루스(Torus) 에게 일을 맡기려 했으나, 담당자의 실수로 이름이 비슷한 타루스에 연락이 간 것이다. 피터 몰리뉴는 프레젠테이션 중 이를 눈치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의뢰를 접수해 난생 처음 네트워크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그는 실수와 우연이 만들어 준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결국 거액의 보수와 함께 고사양 컴퓨터까지 지원받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코모도어로부터 지원받은 10여대의 아미가 컴퓨터를 통해 ‘드루이드 2’를 아미가 시스템으로 컨버전하는 작업을 맡는다. 이 때 피터 몰리뉴는 어릴 적부터 관심을 가져 왔던 게임 산업의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후 회사의 방향을 게임 개발로 선회했고, 동시에 회사명을 불프로그(Bullfrog)로 바꾼다. 본격적인 게임 개발 인생의 시작이었다.


▲ 어릴 적 할머니 돈을 훔쳐 산 게임기 '아타리 2600'


▲ 다양한 명작 PC게임을 탄생시킨 불프로그 스튜디오 로고

불프로그를 세운 피터 몰리뉴는 자신이 어릴 적 개미집을 보며 느꼈던 신으로서의 기분을 게임 속에서 구현하고 싶었다.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개미들을 내려다보듯, 까마득한 창공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절대자의 느낌을 게임 속에서 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제작된 게임이 바로 ‘파퓰러스(1989)’다.

‘파퓰러스’는 플레이어가 신이 되어 다른 악한 신을 숭배하는 문명을 몰아내고 세상을 다스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을 직접 조종할 수는 없지만, 지형이나 날씨를 바꾸고 때로는 재앙과 축복을 내리면서, 인류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조종하고 그 반응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는 것이 주된 재미 요소다. 마치 개미집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게임 ‘파퓰러스’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들어있던 원초적 욕망을 자극했다.

뿐만 아니다. ‘파퓰러스’는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의 기반을 닦은 게임이라고 불리울 정도로(최초라 하기엔 애매하지만) 해당 장르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일반적인 영토 관리뿐 아니라 전투까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파퓰러스’에서는, 장기나 체스처럼 오랜 시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화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하고, 그에 맞는 반사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이 필수적이었다. 이는 훗날 ‘듄 2’나 ‘C&C’, ‘워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등 다양한 RTS 장르 게임의 출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나 ‘파퓰러스’의 인터페이스나 조작 방식 등은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을 정도다.

89년 당시 ‘파퓰러스’는 너무 혁신적이고 낯선 방식의 게임이었기 때문에 유통사를 쉽게 찾지 못했다. 그 와중 맥시스에서 개발한 도시경영 시뮬레이션 ‘심시티’가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를 주의깊게 지켜보던 EA는 ‘파퓰러스’가 제 2의 ‘심시티’가 될 수 있겠다고 판단해 불프로그 사의 게임 유통을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파퓰러스’는 4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히트를 기록했고, 피터 몰리뉴와 불프로그의 이름도 세계에 알려졌다. 피터 몰리뉴의 필모그래피 첫 번째를 장식하고 있는 ‘파퓰러스’는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그의 첫 작품은 비즈니스 시뮬레이션 게임 ‘디 엔터프리너’ 였으나, 사실상 반은 취미로 제작된 게임이었고 단 두 장 만이 판매되었다.)




▲ 1989년 출시된 피터 몰리뉴의 첫 갓게임 '파퓰러스'

RTS, 타이쿤, 던전 시뮬레이션… 수많은 장르의 창조자가 되다

‘파퓰러스’의 대성공 이후 피터 몰리뉴와 불프로그는 수년 간 많은 히트작을 출시하며 그 명성을 더욱 높였다. 놀이공원 경영 게임인 ‘테마 파크(1994)’는 말 그대로 내 마음대로 놀이기구를 배치하고 공원과 동선을 설계하며 관람객을 모으는 게임으로, 이후 ‘롤러코스터 타이쿤’ 등 다양한 타이쿤류 게임의 시초가 되었다. 현재 모바일을 통해 수없이 퍼져 있는 팜류 게임이나 카페 경영게임 등도 그 원류를 따져보면 ‘테마 파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끈 ‘신디케이트(1993)’는 정부를 능가하는 힘을 가진 다국적 기업연합의 중역이 되어 자신의 요원들을 관리하고 세계를 지배해 나간다는 독특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을 세뇌하고 경찰을 죽이고, 시민을 학살하고, 타임 슬립이나 투시, 해킹 등 다양한 특수 능력을 발휘하는 주인공에 초점을 맞춰 미션을 수행하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심어줬으며, 이후 ‘디아블로’ 등 쿼터뷰 시점의 액션 RPG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불프로그는 ‘파워 몽거(1990)’, ‘매직 카펫(1994)’ 등 다양한 히트작을 잇달아 출시했고, 이들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의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위에서 예로 든 게임들은 게임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고, 피터 몰리뉴의 개발자로서의 이름은 전세계에 알려졌다. 그는 더 이상 동네 식당에서 마음 편히 식사도 못 할 정도의 유명인이 되었다.


▲ 타이쿤 게임의 시초가 된 '테마 파크'


▲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끈 '신디케이트'

1995년, 불프로그는 EA에 부분 인수된다. EA의 지원을 받아 피터 몰리뉴는 그간 시도하지 못했던 대규모의 개발팀을 이끌고 ‘던전 키퍼’의 제작을 시작한다. ‘던전 키퍼’는 여러 모로 기존 상식을 깬 작품이었다. 일반적인 RPG에서 플레이어는 용사의 시점에서 악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한 모험을 펼친다. 몬스터와 던전은 그 와중에서 거치게 되는 장애물이자 성장을 위한 초석에 불과하다. 하지만 ‘던전 키퍼’에서는 플레이어가 던전을 지배하는 악마의 입장에 서서 각종 함정을 설치하고 몬스터를 고용해 던전에 쳐들어온 용사들을 물리치는 과정을 그린다. 그야말로 권선징악이 아니라 권악징선을 모토로 한 게임이다.

3년 간의 개발 기간을 거쳐 1997년 출시된 ‘던전 키퍼’는 그 독특하고 매력적인 게임성으로 국내를 포함한 전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했다. 피터 몰리뉴가 ‘던전 키퍼’를 통해 만들어낸 던전 관리와 침입자 격파라는 컨셉은 향후 다양한 디펜스류 게임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이 인기를 기반으로 ‘던전 키퍼’는 2편까지 출시되며 그 상승세를 이어갔다.


▲ 용사와 몬스터 간의 관계를 근본부터 뒤집은 '던전 키퍼'


▲ 독특한 컨셉과 매력적인 던전 경영(?)으로 2편까지 출시된 '던전 키퍼'

그러나 게임의 성공과는 별개로, 훗날 피터 몰리뉴는 ‘던전 키퍼’의 개발 기간이 자신의 게임 인생에서 최악의 나날이었다고 회고한다. 이유는 바로 제작진의 규모, 그리고 자신의 역할이었다. 피터 몰리뉴는 불프로그에서 항상 20여 명 내외의 개발자들과 팀을 이루고 개발에 전념해 왔으나,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EA에서는 100여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개발팀을 이끌어야 했다.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일부 개발자들은 자신이 뭘 만드는 지도 모른 채 작업에 임했고, 그 결과 게임을 통째로 갈아 엎을 정도의 시행착오를 몇 번씩 겪어야만 했다. 결국 피터 몰리뉴는 개발자들을 일일이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데 엄청난 시간을 쏟았다. 이로 인해 개발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들자, 개발 후반부에는 아예 제작진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숙식을 해결하며 온종일 게임을 만들기도 했다.

결국 ‘던전 키퍼’는 EA와 약속한 계약보다 늦게 출시되었고, 그 과정에서 피터 몰리뉴와 EA와의 사이도 다소 소원해졌다. 결국 피터 몰리뉴는 ‘던전 키퍼’의 개발을 끝마침과 동시에 불프로그 스튜디오의 보유 지분을 모두 처분하고, EA와의 관계를 정리한 후 회사를 떠났다.

“난 게임을 개발하고 싶었다. EA의 중역회의에 참가해서 직원 화장실의 화장지를 무슨 색깔로 할까 토론하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라는 그의 말처럼, 그에게 중요한 것은 회사의 규모나 개발진의 수가 아니었다. 자신의 개발 철학을 이해해주는 소수의 개발자들과 즐겁게 게임을 개발할 수 있는 환경만 갖춰진다면, 회사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피터 몰리뉴의 퇴사 이후 불프로그는 2004년 EA에 완전히 인수되어 EA UK 스튜디오로 편입,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더불어 ‘던전 키퍼 3’ 역시 불프로그 스튜디오가 EA에 완전 흡수되며 개발이 잠정 중지되었다. 이후 ‘던전 키퍼’의 IP를 이용한 MMORPG와 모바일게임 등도 만들어졌으나, 피터 몰리뉴와는 상관 없는 게임이었으며 인기 또한 미미했다.




▲ 중국에서 개발된 '던전 키퍼 온라인(위)' 과 EA에서 제작된 모바일게임(아래)

진정한 신을 꿈꾸다, 블랙 앤 화이트

피터 몰리뉴는 ‘파퓰러스’에서 선한 절대자를, ‘던전 키퍼’에서 악한 지배자를 구현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가 원했던 진정한 신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게임 속 세상이 현실 세계와 같이 절대자의 개입이 없어도 스스로 판단하고 성장하길 원했고, 플레이어는 그 속에서 자유롭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퓰러스’와 ‘던전키퍼’의 절대자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제한적인 신이었다면, 차기작에서의 절대자는 그야말로 원하는 것을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신이 되길 원한 것이다.

잠시 과거로 돌아가 ‘던전 키퍼’의 개발이 거의 완료되었을 당시, 피터 몰리뉴는 당시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병아리 키우기 게임 ‘다마고치’에 푹 빠져 있었다. 삑삑대는 비프음이 울리면 먹이를 주고, 다시 삑삑대는 비프음이 들리면 놀아주고…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자 그의 집에서 하숙까지 하며 하루 20시간씩 개발에 몰두하던 개발자들은 점차 짜증이 났다. 급기야 테스터 팀의 리더였던 앤디 롭슨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피터 몰리뉴의 ‘다마고치’를 뺏어 커피잔에 풍덩 집어넣어 버렸다.

방수 기능이 없는 ‘다마고치’는 뜨거운 커피 속에서 그대로 운명했고, 피터 몰리뉴는 절망했다. 그 때, 그의 머릿속에서는 ‘다마고치’를 초월하는 갓 게임이 구상되기 시작했다. ‘나처럼 ‘다마고치’를 잘 돌봐주는 사람도 있지만, 뜨거운 커피에 처박아버리는 앤디 롭슨 같은 나쁜 사람도 있구나. 신과 피조물의 관계도 마찬가지겠지. 자신의 창조물을 잘 키우는 신과 나쁘게 키우는 신이 있을 거야. 이게 바로 진정한 신이다.’

▲ 병아리 키우기 게임 '다마고치(왼쪽)' 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블랙 앤 화이트' 의 크리쳐(오른쪽)들

‘다마고치’의 죽음을 딛고 일어선 그는 그 즉시 ‘블랙 앤 화이트’의 개발을 시작했다. 불프로그를 나가 자신이 새로 세운 라이온헤드 스튜디오에서 말이다. 라이온헤드 스튜디오는 피터 몰리뉴의 철학이 담긴 회사였다. ‘던전 키퍼’ 때처럼 개발팀 간의 의사소통이 힘들지 않도록 개발팀의 규모를 2~30명을 넘지 않게 조정했으며, 피터 몰리뉴 스스로는 개발자들을 위에서 지켜보는 신 같은 역할을 하며 개발자들이 자유롭게 일하도록 놔뒀다. 이렇게 개발자들이 스스로 제작한 다양한 프로토타입이 나오면 피터 몰리뉴는 방향 지도를 비롯한 전 방면에서 간섭과 조언을 했고, 게임의 방향을 조절해 나갔다.

한편에서는 게임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철학자를 고용한다거나, 회사 내부에 리서치 그룹이나 실험적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팀 등 다양한 별도의 유닛을 만드는 등 일반적인 개발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심지어 라이온헤드 스튜디오 내부에서 ‘The Room’이라는 기술 실험용 데모 프로그램을 만들던 팀은 훗날 ‘리틀 빅 플래닛’의 제작사인 미디어몰레큘 사가 되는데, 독립 배경에는 피터 몰리뉴의 권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스튜디오 자체를 갓 게임화 시켰고, 구성원들의 자생력을 중요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블랙 앤 화이트’는 갓 게임의 새로운 지표를 열었다. 플레이어는 신이 되어 자신이 창조한 크리쳐를 교육/진화시켜 세계에 풀어놓음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킨다. ‘파퓰러스’에서처럼 플레이어는 하늘 위에서 인간 세계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던전 키퍼’에서처럼 자신의 부하나 다름없는 크리쳐를 거느린다. 이 두 가지가 만나 ‘블랙 앤 화이트’의 세계는 ‘파퓰러스’ 보다 더욱 깊어졌고, ‘던전 키퍼’의 세계보다 더욱 넓어졌다.

2001년 출시된 ‘블랙 앤 화이트’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국내에도 정식 발매되었는데, 초기 물량이 다 떨어져 게이머들이 발을 동동 구를 정도였다. 많은 개발자들이 ‘블랙 앤 화이트’의 독창성에 감명을 받았고, 피터 몰리뉴의 이름을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의 높아진 명성에 대한 부작용이 조금씩 커져 갔다.




▲ 신의 선악과 크리쳐, 인간과의 관계를 그린 '블랙 앤 화이트' 1편(위)과 2편(아래)

너무 큰 기대가 독이 되어 돌아온 게임 ‘페이블’

‘블랙 앤 화이트’는 갓 게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피터 몰리뉴에 대한 비판의 의견도 서서히 번져 갔다. 발매 전 그가 약속한 게임 내 요소 일부가 구현되지 않았거나,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을 실망시킨 것. 사실 피터 몰리뉴는 친언론적인 개발자 중 한 명으로, 자신이 꿈꾸고 있는 다양한 정보를 강연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 시시때때로 공개해 왔다. 여기에 대한 부작용일까, ‘블랙 앤 화이트’는 분명 명작이었지만 너무나 커진 유저들의 기대에 100% 부응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 와중 피터 몰리뉴는 또 다른 도전을 공표한다. 여태껏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장르 RPG를 토대로,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세상이 바뀌는 극한의 자유도를 가진 게임. 바로 ‘페이블’이다. 피터 몰리뉴가 목표로 한 ‘페이블’은 완벽한 자유가 주어진 RPG였다. 주인공은 나이를 먹으며 성장하고, NPC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집을 사고, 심지어는 2세를 낳기도 한다. 선과 악 어느 길이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직업도 없어 자신만의 개성 있는 능력을 개발한다. NPC들은 제각기 자유롭게 생활하며, 플레이어와의 관계에 따라 매번 다른 행동을 보인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세계가 변화해 가는 RPG. ‘페이블’에 대한 소식이 하나 둘 전해질 때마다 전세계 개발자들과 게이머들은 충격과 감탄을 일삼았다. ‘페이블’은 RPG의 새로운 장을 열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2004년, 모두의 기대 속에 발매된 ‘페이블’은 호평보다 혹평을 더욱 많이 받았다. 그가 약속했던 수많은 혁신적 요소들은 대부분 배제되거나 대폭 축소된 채 구현되어 있었으며, 자유도 역시 타 RPG에 비해 그리 대단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항상 혁신적인 게임을 만들어 오던 피터 몰리뉴의 게임이 맞냐는 의문마저 들 정도였다. 수많은 항의 속에 결국 라이온헤드는 공식 사이트를 통해 사과문까지 게재한다.


▲ 극한의 자유도를 추구했으나 실망도 크게 안겨준 RPG '페이블'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은 계속 커져 갔다. 이듬해 출시된 ‘블랙 앤 화이트 2’ 역시 전작의 문제점을 개선했을 뿐 딱히 특별한 요소가 존재치 않았고, 2008년 출시된 ‘페이블 2’도 전작에서 남긴 숙제를 급히 해결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전에 비해 그 빈도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피터 몰리뉴는 여전히 꿈의 게임을 이야기했고, 실제로 출시된 게임은 미처 꿈에 이르지 못한 게임에 머물렀다.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며 피터 몰리뉴를 둘러싼 세간의 평가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다만, 혹평과는 별개로 위의 작품들을 졸작이라 폄하할 수는 없다. 작품성만 놓고 보면 ‘페이블’ 시리즈는 확실히 시리즈를 거듭하며 그 자유도와 완성도, 스케일이 한층 높아졌으며, ‘블랙 앤 화이트 2’ 역시 전작에서 다소 아쉬웠던 부분을 훌륭히 메웠다. 판매량도 ‘페이블 2’의 경우 300만 장을 기록하는 등 꽤나 준수했다.


▲ 3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페이블 2(좌)' 와 마지막 넘버링 타이틀 '페이블 3(우)'

그는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이전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한 것을 해냈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걸어갔다. ‘페이블’과 ‘블랙 앤 화이트 2’가 출시되던 2004~2005년, 그는 미야모토 시게루, 시드 마이어, 사카구치 히로노부, 존 카멕, 윌 라이트, 스즈키 유에 이어 7번째로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AIAS)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영국 여왕으로부터 제국 훈장(OBE)를 받기도 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혁신적인 게임을 만드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재미있는 게임 정도가 아니라 충격을 가져다 줄 대작 말이다. 그의 다양한 후속작 관련 발언들은 이러한 기대를 더욱 부추겼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평범한, 혹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게임이 나오면 어김없이 혹평이 뒤따랐던 것이다. 그에 대한 기대가 더더욱 높아지고 있는 환경에서, 이제껏 없던 새로운 게임을 개발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기대치는 그가 차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일단 ‘피터 몰리뉴는 허풍쟁이다!’ 라는 비판 여론이 형성되자, 그의 새로운 시도들도 빛을 잃었다. 2005년 출시된 ‘더 무비’의 경우 플레이어가 영화사의 주인이 되어 다양한 영화를 만들고 세상에 출시한다는 독특한 소재를 채용했으며, 각본을 짜고 스탭과 배우를 고용해 제작한 영화를 감상하고 평가를 듣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구현하는 등 혁신적 요소가 가득 담긴 작품이었다. 그러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페이블 3’ 이후 제작된 ‘페이블: 더 저니’는 MS의 동작인식게임기 키넥트를 이용해 제작된 게임으로 ‘페이블’의 세계관을 1인칭 관점에서 풀어낸다는 목표로 제작된 게임이다. 키넥트의 초기 개발 단계부터 MS의 연구 개발에 동참해 온 그는 ‘페이블: 더 저니’에서 키넥트의 매력을 한껏 느끼게 해 준다는 각오를 밝혔으나, 이 역시 큰 반향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결국 그는 ‘페이블 3’의 개발을 끝내고 키넥트용 게임 ‘페이블: 더 저니’가 한창 개발 중이던 2012년 초, 라이온헤드 대표직과 MS 게임 스튜디오 유럽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직을 사퇴한 후 22cans라는 회사로 이적한다고 발표한다. 22cans는 과거 ‘파퓰러스’ 때부터 ‘페이블: 더 저니’까지 호흡을 맞춰 온 개발자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소규모 개발사로, 피터 몰리뉴가 늘상 추구해 왔던 마음이 통하는 소수의 베테랑 정예 멤버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 세계는 피터 몰리뉴에게 수많은 상을 수여하며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사진은 2011 브리티쉬 비디오 게임 어워드 현장


▲ 키넥트의 전신인 프로젝트 나탈 때부터 개발에 참여해 온 피터 몰리뉴

그를 과거의 영광만 남은 개발자라 부르지 말라

피터 몰리뉴는 전설로 남은 1세대 개발자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22cans로 이적한 그는 iOS와 PC용 멀티 미스터리게임 ‘큐리어시티(Curiosity)’를 2012년 여름 출시했다. ‘큐리어시티’는 전세계 유저들이 모여 거대한 검은색 큐브를 해체시켜 그 안쪽에 있는 것을 확인한다는 독특한 컨셉의 게임이다. 큐브는 수천만 개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맨 마지막 조각을 제거한 유저만이 안쪽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독특한 점은, 큐브 조각에 보다 높은 데미지를 가할 수 있는 캐쉬 아이템의 가격이 최고 5만 파운드(우리돈 약 9천만 원)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사실 피터 몰리뉴는 이 터무니 없는 가격에 대해 ‘실제 구매를 유도한 것은 아니다. 화폐 심리학에 대한 일종의 테스트였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큐리어시티’는 그 자체가 하나의 군중 테스트에 가까웠다. 하나의 보물을 숨겨두고, 이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 어느새 게이머들은 피터 몰리뉴의 갓 게임 속 유닛이 되어 있었다.

그해 말, 피터 몰리뉴는 소셜 펀딩 사이트 킥스타터를 통해 22cans에서 개발 중인 신작 게임 ‘가더스(Godus)’를 공개했다. 이름부터 ‘신(God)’에 소셜성을 뜻하는 ‘우리(Us)’가 합쳐진 ‘가더스’는 ‘파퓰러스’의 직관적인 유저 인터페이스와 기본 설정, ‘블랙 앤 화이트’의 끝없이 변화하는 세계, ‘던전 키퍼’의 경영과 심리 요소, 그리고 ‘큐리어시티’에서 얻은 심리 데이터를 모두 합친, 그야말로 피터 몰리뉴의 모든 것이 담긴 소셜 갓 게임이다.

‘가더스’ 역시 뜨거운 관심을 불러모았다. 킥스타터 모금액은 일찌감치 달성했으며, PC 타이틀 디지털 유통 플랫폼의 얼리 억세스를 통해 개발 중인 베타 버전을 공개했을 때도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개발 도중에서도 지속적인 피드백을 받으며 계속해서 버전을 수정해 나가고 있다.


▲ 세상의 모든 유저들을 상대로 수수께끼를 제시한 게임 '큐리오시티'




▲ 피터 몰리뉴의 새로운 갓 게임 '가더스'

그는 독선적인 천재도, 자신의 고집만을 내세우는 유명인도 아니다. 언제나 더 나은 게임을 만들려는 열의에 차 있으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척자다. 비록 몇몇 작품에서 팬들을 실망시키긴 했지만, 그의 열정은 아직 식지 않았다. 피터 몰리뉴의 새로운 도전이 게임계를 또 한 번 크게 변화시키길 바라 본다.


▲ 피터 몰리뉴, 평생 현역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1세대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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