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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버파와 쉔무를 탄생시킨 게임 혁명가, 스즈키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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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산업 초창기, 사람들은 점 몇 개로 그려진 우주선과 몬스터, 콧수염 난 배관공 등에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 머릿속 가상 세계를 만들곤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얼핏 보면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는 고품질 게임을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버추어 파이터’ 와 ‘쉔무’ 의 제작자로 잘 알려진 스즈키 유는 만화적 상상력이 지배하던 게임의 트렌드를 ‘영화처럼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사실성’ 으로 바꿔놓은 장본인이다. 그는 매번 혁신적인 발상을 통해 게임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렸으며, 하드웨어적 기술 발전에도 막대한 업적을 남겨 동양인 사상 세 번째로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AIAS)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누렸다.

한편, 그는 비운의 명작 ‘쉔무’ 를 통해 수백억 원의 개발비를 공중분해시키고, 결국 세가의 가정용 콘솔 사업 철수와 함께 좌천을 당하는 등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단순한 전자오락에 불과했던 게임을 가상현실로 진화시킨 스즈키 유. 그를 집중 조명해 보자.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 '버파' 와 '쉔무' 의 아버지, 스즈키 유

세계 최초의 체감형 아케이드 게임을 제작하다

스즈키는 1958년, 일본 이와테 현 가마이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미술과 음악, 서예 등 예체능 활동과 학업에 전념했고, 오카야마대학 전자물리학과에 진학한 후에는 밴드 기타리스트 활동을 포함한 각종 스포츠와 레저를 즐겼다. 얼핏 게임과는 전혀 연이 없던 모범생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의 유년 시기(6~70년대)는 게임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시대였다. 대신 스즈키는 게임 제작자 뿐 아니라 크리에이터로서 필요한 다양한 감성을 키웠다. 자동차나 오토바이 운전에서 얻을 수 있는 스피드 감각, 밴드 활동을 통한 음악적 감각, 미술과 서예 활동을 통한 미적 감각 등은 향후 그의 작품들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후 대학에서 스즈키는 컴퓨터를 처음 접했고, 같은 시기 1세대 전자 게임인 ‘퐁(PONG)’ 등을 통해 게임이라는 문화를 만났다. 애플 컴퓨터 속에서 돌아가는 다양한 게임을 보며 감명을 받은 스즈키는 게임이야말로 현대 전자기술이 보여줄 수 있는 정점이라는 생각을 했고, 자연스레 프로그래밍에 빠져든다. 이윽고 82년, 대학을 졸업한 스즈키는 프로그래머로 세가에 입사하게 된다.

게임 개발자가 된 스즈키는 84년, ‘챔피언 복싱’ 이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첫 프로듀싱 게임을 출시한다. ‘챔피언 복싱’ 은 세가 최초의 가정용 콘솔 SG-1000으로 발매되었고, 이후 아케이드로도 이식된다. 그러나 스즈키가 진정으로 만들고 싶은 게임은 따로 있었다. 스즈키는 당시 회사에 페라리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 건방진 신입사원으로 유명세를 떨칠 정도로 레이싱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스포츠카와 오토바이의 속도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레이싱 게임을 제작하길 원했고, 이를 위해 ‘행온’ 의 기획서를 들고 세가 경영진을 찾아갔다.




▲ 스즈키 유가 세가에 입사해 처음으로 제작한 게임 '챔피언 복싱'

스즈키가 기획한 ‘행온’ 은 아케이드용 오토바이 레이싱 게임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기존 게임과 같이 스틱과 버튼으로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바이크를 연상시키는 탑승 기구 위에 올라타 몸을 기울여 가며 실제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것처럼 즐기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었다. 아케이드게임이라면 모니터와 조이패드밖에 없었던 시절, 스즈키의 아이디어는 너무나도 혁명적이었고 위험했다. 당연히 수많은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그러나 체감형 게임에 대한 스즈키의 열정은 대단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세가 경영진으로부터 개발 허가를 받는 데 성공한 그는 본격적인 ‘행온’ 개발에 들어갔다. 참고할 만한 자료도 하나 없는 새하얀 눈밭 같은 기로에서, 스즈키는 프로그래밍과 음악, 하드웨어 제작, 테스트, 사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총괄하며 ‘행온’ 제작을 주도했다. 몸을 기울이면 와이어가 끊어지거나 브레이크가 고장나고 스프링이 나가는 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업사와 오토바이 제작사를 뛰어다녔고, 게임센터에 기기를 팔 때 스페어 부품까지 패키지 형태로 끼워 주는 등의 사업 모델도 구상했다. 심지어는 사실적인 운전음을 내기 위해 실제 바이크 엔진을 기기에 달려는 시도도 했다. (물론 이는 배기가스 문제로 인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무엇이 최선인 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경험하며 세계 최초의 체감형 게임을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85년, 스즈키의 지휘 하에 제작된 세계 최초 체감형 아케이드 게임 ‘행온’ 은 일본과 전세계 아케이드 센터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더 이상 게임은 모니터 앞에 앉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을 움직여가며 플레이하는 활동적인 놀이 문화가 되었다. 입사 2년 차가 조금 지난 젊은 프로듀서와 10여명의 스태프, 그리고 불과 몇 개월밖에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만들어낸 성과로서는 놀랄 만큼의 성공이었다. 이전에 없던 역동적이고 체감적인 게임에 전세계 게이머들은 환호했고, 세가는 체감형 아케이드게임 시장의 선구자 타이틀을 얻었다.

스즈키가 ‘행온’ 을 개발하겠다고 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던 세가 경영진 역시 ‘행온’ 의 성공으로 그에게 절대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결국 세가는 그를 필두로 세가의 기술력을 총 집결시킨 세계 최고 수준의 개발팀을 조직한다. 이름하여 AM2다.




▲ 세계 최초의 체감형 아케이드 레이싱 게임 '행온'

아케이드의 전설, AM2의 수장으로

AM2의 정식 명칭은 AM R&D DEP.T#2, 즉 제2 어뮤즈먼트 연구 개발부다.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력이 요구되던 아케이드게임 시장을 주 목표로 삼았으며, 기존에 없던 새로운 아케이드게임 개발이 주 임무였다. 그리고 스즈키는 언제나 세가의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내놓았다. 수많은 아케이드게임과 ‘버추어 파이터’ 등에 삽입된 AM2 마크는 SEGA 로고와 함께 고품질 게임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는 한때 일본 게임업계 전체의 1/3 가량을 세가가 독식하도록 만드는 원동력 역할을 했다.

AM2를 맡은 스즈키는 ‘스페이스 해리어(85년)’ 와 ‘아웃런(86년)’, ‘애프터 버너 1, 2(87년)’, ‘파워 드리프트(88년)’, ‘G-LOC(90년)’ 등 다양한 아케이드게임을 출시하며 전설을 써내려간다. 특히 AM2는 누구보다 빠른 개발 속도, 그리고 빈틈없는 완성도로 유명했다. 일례로 ‘스페이스 해리어’ 는 게임 개발 완료까지 불과 2개월, 세가의 아케이드게임 제작 기준과 캐비닛 컨트롤 등을 맞추는 데 4개월. 총 반년 만에 제작되었다. 제작 인원도 ‘행온’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처럼 빠른 제작에는 스즈키의 명확한 방향성과 과감한 개발 전략이 뒷받침되었다. 사실 스즈키는 게임을 딱히 즐기거나 잘 하는 편이 아니었으며, 대학 시절엔 친구들과 게임센터에 가도 항상 지기만 했었다. 덕분에 그는 기존 게임들이 가진 단점을 누구보다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레이싱게임에서 패배할 경우 ‘분명 나는 친구들보다 운전을 더 잘 하는데, 게임 내에서는 차가 폭발하고 리셋되는 틈에 친구들에게 추월당한다. 이는 내가 아니고 게임이 잘못된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더 합리적이고 사실적인 게임을 만들기 위한 원동력으로 삼은 것이다.

스즈키의 이러한 철학 하에 개발된 게임들은 평소 게임을 많이 접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납득하며 즐길 수 있고, 게이머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재미를 선사했다. 예를 들어 2D 그래픽을 사용한 입체적 슈팅게임 ‘스페이스 해리어’ 에서는 멀리 있는 대상을 쉽게 맞출 수 있도록 자동 미사일 조준 시스템을 도입해 3D 슈팅은 어려워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편견을 깼으며, 레이싱게임 ‘아웃런’ 에서는 당시 레이싱 게임에 무의식적으로 포함되어 있던 차 폭발 등의 비현실적 시스템을 없애 오로지 플레이어의 운전 기술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도록 했다. 알고 보면 굉장히 심플한 방법이지만, 이전까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해결책이었다.

AM2는 90년까지 ‘파워 드리프트’, ‘G-Loc’ 등의 게임을 잇따라 출시하며 시뮬레이션 게임 업계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오른다. 이윽고 스즈키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사실감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기 위한 결심을 한다. 바로 3D 폴리곤을 활용한 본격적인 3D 게임 제작에 뛰어든 것이다.


▲ AM2에서 제작한 '파워 드리프트(좌)' 와 'G-LOC'
이러한 작품들로 세가는 체감형 아케이드 게임을 주름잡는다

게임 사실주의의 시작, 버추어 시리즈의 등장

‘G-Loc’ 의 개발을 완료한 90년, 세가가 3D 게임을 위한 기판을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를 전해들은 스즈키는 학생 시절부터 꿈꿔 온 본격적인 3D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물론 90년 이전에도 3D 게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3D 게임이라면 다수의 2D 이미지에 스프라이트 기법을 적용하여 여러 층의 화면을 하나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폴리곤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고 사실감을 준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었고, 실제로 AM2가 제작한 수많은 체감형 게임들에도 이러한 제작 기법이 사용되었다. 폴리곤을 활용한 3D 게임은 83년 출시된 최초의 3D게임이라 불리는 ‘I-로봇’ 이후 소수가 나왔으나, 하드웨어적 능력 부족으로 인해 다수의 폴리곤을 한 화면에서 부드럽게 처리하지 못함에 따라 3D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3D 기판을 이용한 폴리곤 게임에 뛰어든 스즈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게임을 만들기에 현재 게임업계의 기술 수준은 다소 낮았다. 세가에서 만든 첫 번째 3D 기판은 1프레임 당 300개의 삼각형 폴리곤만을 지원하는 수준이었고, 이 정도로는 도저히 사실적인 게임을 만들기 어려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스즈키는 하드웨어 칩 설계부터 손을 보기 시작했다. 비행기 조종사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3D 컴퓨터 기술을 응용하기 위해 비행기 제조사 록히드 마틴과 제휴를 맺고 기판을 제작한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게임 개발을 위해 비행 업계의 기술까지 사용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훗날의 일이지만 ‘F355’ 에 이르러서는 프로 카레이서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사실감을 극대화시키고 중력 값과 페달 사용법 등의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페라리를 십수 대씩 빌려가며 실험을 하는 등 게임 이상의 사실감을 연출하기 위해 애썼다. 이렇게 최첨단 기술을 모아 제작한 기판이 바로 ‘MODEL-1’ 이다. 이를 기반으로 스즈키는 폴리곤을 활용한 세가의 첫 3D 게임 ‘버추어 레이싱’ 을 제작했다.

‘버추어 레이싱’ 의 ‘버추어’ 는 ‘사실상의’, 혹은 ‘거의 …과 다름없는’ 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Virtual’ 에서 마지막 글자 ‘L’ 을 뺀 것으로, 스즈키가 늘 꿈꿔왔던 실제와 같은 가상 현실을 의미한다. 당초 ‘버추어 레이싱’ 은 ‘MODEL-1’ 기판의 성능 실험용으로 제작되었으나 내부 평이 너무 좋아 아케이드로 상용화 되었고, 당시 가격으로 40만 엔을 호가하는 16:9 와이드비전 16인치 모니터와 공기압을 이용한 부스, 세미 7단 기어를 사용하는 등 최고급 사양으로 출시되어 아케이드게임의 전반적인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버추어 레이싱’ 은 최대 8대의 기기를 연동해 즐기는 후속작 ‘버추어 포뮬러’ 등으로 발전했다.




 폴리곤으로 구현된 3D 레이싱 게임 '버추어 레이싱'

체감형 아케이드게임 업계에서 더 이상의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히트작을 출시한 스즈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스트리트 파이터 2’ 였다. ‘버추어 레이싱’ 이 출시된 92년, 전세계 아케이드 게임센터는 캡콤의 ‘스트리트 파이터 2’ 로 한바탕 난리를 겪고 있었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기기 옆에 줄을 서 있었고, 대전격투 특유의 높은 회전율로 인해 금방금방 동전이 쌓였다. ‘버추어 레이싱’ 역시 많은 팬들을 양산했지만, 시대의 대세는 대전격투였다. 이로 인해 90년대 초중반, 일본에서는 ‘스트리트 파이터 2’ 가 촉발시킨 대전격투게임의 붐이 일어났다. 메이저 개발사부터 소규모 개발사까지 매달 수십 개의 대전격투게임이 나왔지만 그 중 살아남은 것은 극히 일부분이었으며, 그마저도 ‘스트리트 파이터 2’ 의 높은 벽을 넘은 작품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 스즈키는 3D 대전격투게임으로 눈을 돌렸다. ‘버추어 레이싱’ 에서 얻은 3D 폴리곤 기술을 살린 대전격투게임을 만들면 ‘스트리트 파이터 2’ 와 완전히 다른 매력으로 승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스즈키의 몸이 달아올랐다. 사실 3D 대전격투게임에 대한 생각은 스즈키가 처음 한 것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남코 역시 ‘철권’ 의 프로토타입 개발을 논의하고 있었다. 시대가 3D로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각면체가 아닌 곡선으로 이루어진 인간을 폴리곤으로 구성하고, 그 인간의 움직임과 상대방과의 상호 작용을 하나의 화면에서 구현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너무나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때문에 3D 폴리곤 격투게임을 만든다는 그의 말에 주변에서 많은 만류가 있었다. 당시 게임업계에서는 3D로 제작된 대전격투게임에 대한 이미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스즈키는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많은 애로사항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3D로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만들고 싶었던 스즈키는 완강했으며, 수많은 시도와 설득 개발비 정도는 뽑아낼 수 있을 거라며 세가 경영진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 3D 대전격투게임 프로젝트 ‘버추어 파이터’ 의 개발을 시작했다.

‘버추어 파이터’ 에서 스즈키는 ‘스트리트 파이터 2’ 와 다른 방향의 격투를 구현하고 싶었다. 그는 이전부터 ‘게임이 갖춰야 할 첫 번째 요소는 생생한 현실감’ 이라고 생각했으며, 대전격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인간이 공중을 날고 장풍을 쏘는 만화영화가 아니라, 현실 속 중국 무술이나 길거리 싸움, 복싱과 유도 등의 격투기를 재현하고 싶었다. 이에 그는 중국 소림사와 미국 특수부대 등을 찾아가 직접 무술을 배우고, 싸움에 임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철저히 연구했다. 상대의 공격에 얻어맞을 때의 기분을 알기 위해 동료 개발자로 하여금 자신을 때리라고 지시했으며, 나중에는 AM2 동료 제작자들에게도 무술을 배우도록 시켰다. 개발자들의 몸에 생긴 멍 자국이 늘어날수록 게임은 점점 더 사실성을 띄어 갔다는 당시 AM2 개발실 풍경 묘사는, 게임 제작자가 해당 게임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즐겨야만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그의 좌우명을 확실히 대변해준다.

‘버추어 파이터’ 의 개발을 위해 스즈키는 GPU 평행구조 도입 등을 통해 ‘MODEL-1’ 기판의 하드웨어적 환경도 대폭 개선했다. ‘버추어 레이싱’ 에 사용되었던 기술 수준에서는 캐릭터와 배경 등에 사용되는 수많은 폴리곤들을 초당 30프레임의 부드러운 동작으로 계산해 나타내기 어려웠다. 스즈키는 이러한 기술적 어려움을 프로그래밍 최적화와 하드웨어의 발전 양쪽에서 활약하며 마침내 두 캐릭터의 부드러운 대전 장면을 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93년 12월, 세계 최초의 3D 대전격투게임인 ‘버추어 파이터’ 가 아케이드 게임센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 대전격투게임계에 충격을 선사한 '버추어 파이터'

사실 ‘버추어 파이터’ 가 처음 보급되었을 때만 해도 많은 게이머들은 그 생소한 모습에 다소 당황했다. 일단 3D 대전격투게임이라는 것을 처음 본 이들은 문화 충격을 느꼈고, 필살기도 장풍도 없지만 실제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펼치는 캐릭터를 보고 두 번 놀랐다. 각목 인형을 연상시키는 낯선 그래픽, 펀치-킥-가드라는 생소한 시스템 등으로 인해 ‘버추어 파이터’ 는 발매 초반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플레이 해 본 사람들은 안색을 바꾸며 게임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실제로 관절이 꺾이고 아픔이 느껴지는 사실적인 격투를 게임에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버추어 파이터’ 는 게이머 뿐 아니라 게임 개발자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3D 폴리곤으로 이런 게임을 만들 수 있다!’ 는 것을 ‘버추어 파이터’ 를 통해 본 것이다. ‘버추어 파이터’ 이후 조금이라도 기술에 자신이 있는 업체는 3D 대전격투게임을 만드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철권’ 시리즈의 카츠히로 하라다 프로듀서 역시 “90년 초중반에는 3D 대전격투 게임을 만드는 것이 가장 최신 기술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행위였다” 고 말한 바 있다. 덕분에 ‘버추어 파이터’ 이후 ‘철권’, ‘투신전’, ‘소울칼리버’ 등 다양한 3D 대전격투게임이 나오며 대전격투게임은 2D와 3D로 나뉘었다. 바야흐로 3D 대전격투게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참고로 ‘버추어 파이터’ 보다 조금 늦게 출시된 ‘철권’ 시리즈는 향후 ‘철권 3’ 와 ‘태그 토너먼트’ 가 나오며 대히트를 기록할 때까지 아류작이라는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

출시 이후 ‘버추어 파이터’ 는 그 인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스트리트 파이터 2’ 와 그를 따라잡기 위한 후발 주자들로 일론화되어 있던 대전격투게임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전작으로부터 1년 후 출시된 ‘버추어 파이터 2’ 는 ‘MODEL 2’ 로 업그레이드 된 기판으로 더욱 사실적인 그래픽을 구현해냈고, 캐릭터 역시 목각인형 같은 모습에서 비로소 사람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현세대 3D 대전격투 게임에서 표준으로 사용되는 초당 60프레임의 구현이 가능해졌고, 심리전도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이후 ‘버파’ 시리즈는 ‘스트리트 파이터 2’ 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으며 아케이드 게임센터를 주름잡았고, 그 인기를 몰아 3, 4, 5편까지 제작되었다.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에 대한 자세한 역사는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 - 버추어 파이터 편’ 에 상세히 다뤄져 있다.




▲ '버추어 파이터' 의 기세를 이어간 2편(위)과 3편(아래)

비운의 작품 쉔무

‘버추어 파이터’ 를 통해 게임 제작자로서의 정점에 다가가고 있었던 스즈키. 당시만 해도 아케이드게임은 게임업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이 밀집된 분야로, 아케이드의 1인자는 사실상 게임업계의 정상과 다름 없었다. 지금에야 콘솔과 PC의 발전으로 집에서도 아케이드 게임센터와 같은 수준이거나 그 이상(으로 보이는)의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불과 2000년대 초중반 까지만 해도 게임업계의 최고 기술은 아케이드게임 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 AM2는 그 정점에 위치해 있었고, 스즈키는 어느새 세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스즈키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90년대 후반, 당시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에 밀리던 세가는 자사의 가정용 콘솔 세가 새턴을 대신해 차세대 게임기 드림캐스트를 출시하기로 결정한다. 세가는 플레이스테이션 진영의 ‘파이널 판타지 7’ 같은 RPG가 하드웨어 판매량 견인의 주력이라고 판단, 이를 능가할 차세대 RPG의 개발을 스즈키에게 지시했다.

첫 게임인 ‘챔피언 복싱’ 을 SG-1000으로 개발한 이후 쭉 아케이드게임에 몰두해 온 스즈키는 가정용 콘솔 게임 개발과는 거리가 멀었다. ‘버추어 파이터 2’ 등이 새가 새턴으로 출시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케이드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스즈키는 이를 기회 삼아 세가의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받으며 오래 전부터 꿈꾸던 자신의 꿈을 현실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레이싱이나 대전격투 등 특정 분야에 한정되지 않은, 그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그 자체를 게임으로 구현하겠다는 것, 바로 ‘쉔무’ 의 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쉔무’ 는 ‘버추어 파이터’ 의 캐릭터를 활용한 RPG로 기획되었다. 유저 간 대전이 위주였던 ‘버추어 파이터’ 에 스토리와 현실성을 부여하여 무술 뿐 아니라 일상 생활과 캐릭터들의 이야기까지 그려내자는 것이었다.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쉔무’ 는 단순히 주어진 길과 역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집에서 밥을 먹고, 옷을 입고 길거리로 나가고, 길거리에 있는 AI 캐릭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심심하면 오락실에 가서 게임을 하는 등 실제 생활을 할 수 있는 게임으로 진화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내게 반응하는 극한의 자유도를 가진 게임. Full Reactive Eyes Entertainment, 줄여서 FREE 장르를 내걸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상상만 해도 까마득한 작업으로, 엄청난 인력과 기술이 뒷받침되어야만 했다. 서랍 속 스푼 하나까지 인터렉션이 가능할 만큼 섬세한 장인정신이 반영된 ‘쉔무’ 의 개발비는 총 당시 돈으로 약 70억 엔, 이는 2008년 ‘GTA 4’ 가 나오기 전까지 게임업계 최고의 개발비로 기록되었다.

‘쉔무’ 에 대한 정보가 하나 둘씩 공개될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다. 수많은 히트작을 탄생시킨 천재 개발자 스즈키 유가 게임 역사 상 최대 개발비를 들여 현실을 연상시키는 게임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은 전세계 게임업계의 시선을 세가로 집중시켰다. 시대를 뛰어넘는 그래픽과 엄청난 자유도. 1천 명 이상의 인공지능 NPC, 실제와 동일하게 통째로 구현된 마을, 수많은 오브젝트들… 당시 스즈키의 손에서는 ‘게임의 미래’ 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 드림캐스트 중흥의 사명을 띄고 개발되었던 '쉔무'

그러나, 밀레니엄 쇼크를 며칠 앞둔 99년 12월 출시된 ‘쉔무’ 는 게임 역사상 최악의 흥행 참패를 기록하고 만다. 드림캐스트 최고 기대작으로 관심을 모았던 ‘쉔무’ 의 판매량은 일본 40만 장, 해외 60만 장으로 총 백만 장에 불과했다. 하드웨어 기기를 싸게 팔고 소프트웨어 판매량을 높이겠다는 세가의 전략은 결국 히트 타이틀 부족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고, 그 중심에는 ‘쉔무’ 가 있었다.

‘쉔무’ 의 흥행 실패 원인 중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시대를 앞서간 지나친 현실성이 꼽힌다. 스즈키는 ‘행온’ 부터 ‘버추어 파이터’ 에 이르기까지 항상 현실과 같은 경험을 강조했다. 그 정점이 바로 ‘쉔무’ 였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 레이싱이나 격투 등 비일상적인 부분의 현실성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쉔무’ 에서 강조된 것은 그야말로 현실 세계였다.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서랍을 열어 젓가락을 들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다가 오락실에 들러 게임을 하고 NPC와 대화를 하다 보면 해가 저무는 등의 일상 말이다. 심지어 플레이어 캐릭터 뿐 아니라 NPC들도 이 같은 일상을 영위했다.

이러한 부분은 분명 획기적이었지만, 게임의 재미 부문에서는 결과적으로 낙제점을 받았다. 대다수의 게이머들은 대체 내가 왜 게임에서까지 이런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게임의 재미 대신 번거로움을 느꼈다. 모션 캡쳐를 통한 사실적 움직임과 현실감 있게 묘사된 도시, 풀 보이스 등은 분명 눈길을 끌 만한 요소였지만, 이렇게 묘사된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정말 예상 가능한 일상 생활의 범위에 그쳤고, 나중에는 그저 번거로움으로만 남았다. 지나가는 행인을 구타해 돈을 뺏고 차량을 탈취하는 등 일상 밖에서의 자유를 구현한 ‘GTA’ 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마시고


▲ 오락실에 가서 세가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등 사실성을 강조한 '쉔무'

결국 세가는 ‘쉔무’ 에 투입된 70억 엔이라는 어마어마한 개발비를 회수하지 못 한 채 계속해서 휘청거렸으며, 드림캐스트가 플레이스테이션 2에 완패함에 따라 결국 세가는 2002년을 끝으로 가정용 콘솔 기기 사업 완전 철수라는 뼈아픈 결말을 맞는다. 물론 세가의 가정용 콘솔 사업 철수를 오로지 ‘쉔무’ 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쉔무’ 이후 세가가 게임 개발 및 퍼블리싱 업체로 한 발 물러난 것 역시 사실이다.

드림캐스트의 몰락과 함께 ‘쉔무’ 역시 내리막 일로를 걸었다. 총 3부작으로 기획되었던 ‘쉔무’ 는 결국 2편까지 나온 채 미완성으로 남아 있으며, 국내 게임업체 JCE(현 조이시티)와 제휴를 맺고 개발되던 ‘쉔무 온라인’ 역시 양사 간 마찰로 인해 개발이 중지되고 개발사가 옮겨지는 등 홍역을 겪으며 지금까지도 별다른 소식이 없는 상태다.




▲ '쉔무 2(위)' 와 '쉔무 온라인(아래)' 조차 '쉔무' 의 하락세를 막진 못했다

명예의 전당 헌액과 암흑기

2003년, 그는 게임업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야모토 시게루와 사카구치 히로노부에 이어 동양인 사상 3번째로 AIAS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행온’ 이나 ‘버추어 파이터’ 외에도 ‘쉔무’ 역시 명예의 전당 헌액에 큰 역할을 했는데,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그 게임성과 도전 정신은 전세계 게임 제작자들에게 큰 영감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유명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를 만나 그 역시 ‘쉔무’ 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사인을 요청한 일화는 유명하며, ‘GTA’ 나 ‘엘더스크롤’ 시리즈 역시 ‘쉔무’ 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스즈키는 ‘쉔무’ 시리즈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결국 그는 AIAS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2003년 말,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AM2를 떠나 세가가 새로 설립한 자회사인 디지털렉스로 적을 옮기게 된다. 사실상의 좌천 인사조치였다. 닌텐도의 상징이었던 미야모토 시게루가 승승장구를 거듭한 것과 달리, 세가의 상징이었던 스즈키는 자신의 개인적 자금까지 투입하며 변방으로 내몰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후 스즈키가 대표로 있던 디지털렉스는 세가 그룹의 구조조정으로 본사에 통합되고, 스즈키는 세가 AM 플러스 연구 개발부 부장이 된다. 2009년에는 자신이 설립한 YS넷을 통해 ‘쉔무’ 의 외전격 SNG인 모바일게임 ‘쉔무 시티’ 를 제작, 2010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했으나 그마저 1년 후 서비스를 종료했다. 이후 출시된 카드 배틀 게임 ‘버추어파이터 쿨 챔프’ 역시 큰 반향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쉔무’ 이후 그의 발자취를 보면 전작들에 대한 미련이 남아 계속해서 온라인과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이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해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는 늘 좋지 않았다. 2013년 초에는 ‘쉔무 3’ 개발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도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진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스즈키는 YS넷에서 '버파' 와 '쉔무' 를 이용한 다양한 모바일게임을 만들었으나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현재 그는 자신의 회사 YS넷을 이끔과 동시에 세가와 프리미엄 에이전시(에이전트7 개발사)의 개발 고문을 맡고 있다. 특히, 2013년에 들어서며 그는 신작 IP인 ‘슈팅 워즈’ 라는 게임을 제작하는 등 과거 히트작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모바일로 넘어간 게임 환경이 스즈키가 활약하던 시대와 많이 달라진 탓일까, 그가 참여한 게임들은 아직까지 커다란 화제를 부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번쩍이는 천재성으로 게임업계의 진화를 십 년은 빨리 이끈 영웅 스즈키 유, 그의 진정한 복귀는 언제쯤 이루어질까? 팬들은 언제나 스즈키의 대격변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 2011년 GDC 어워드를 수상하는 등 게임업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스즈키 유
그의 또다른 비상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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