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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둠'과 '퀘이크'로 세상을 흔든 세기의 천재, 존 카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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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업계에는 천재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존 카멕이야말로 천재라는 말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인기있는 게임 장르인 FPS(First Person Shooting)의 기초를 정립했을 뿐 아니라, 훗날 온라인게임의 토대가 되는 온라인 멀티플레이 시스템을 최초로 개발/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재치뿐 아니라 신기에 가까운 프로그래밍 능력으로 수많은 게임 엔진과 3D 기술을 개발해내며 하드웨어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뼛속까지 프로그래머인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가 어떻게 해서든 끌어들이고 싶어 할 정도로 컴퓨터 분야에 많은 혁명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게임 개발자들에게 수여되는 AIAS 명예의 전당에 최연소의 나이로 오르기도 했다. 넘치는 에너지를 바탕으로 로켓과 가상 현실 분야에까지 진출한 사나이 존 카멕, 그는 어떤 인물인가?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 천재라는 수식어가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존 카멕

사제폭탄 제조해 컴퓨터 훔치던 문제아

존 카멕은 1970년생으로, 초창기부터 게임업계를 이끌어 온 거장 치고는 상당히 젊은 편이다. 그는 타고난 명석한 머리 덕분에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영재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일까, 존 카멕은 어릴 적 홀로 지내는 날이 많았다. 학교 수업은 그에게 너무 쉬웠으며, 또래 친구들의 생각은 너무 유치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파고드는 것을 즐겼고, 주변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던 존 카멕에게 인생의 반환점이 찾아온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애플2 컴퓨터를 접하면서였다. 주사위를 이용해 즐기는 테이블RPG [던전앤드래곤] 등에 빠져 있었던 그에게 리차드 개리엇의 [울티마]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진로를 프로그래머로 결정한 후 무섭게 파고들었다. 11살의 나이로 [울티마] 게임 프로그램을 해킹해 능력치를 변환시키는 등의 작업도 할 정도였으니 그의 프로그래밍에 대한 열정을 짐작할 만 하다. 그러나 자식을 의사나 교수 등으로 키우고 싶었던 그의 부모는 당시로서 전망도 불확실한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을 반대했고, 개인용 컴퓨터를 사 주지 않았다. 그러자 다소 괴팍했던 존 카멕은 실로 무시무시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바로 사제 폭탄을 제작, 컴퓨터 가게의 문을 부수고 애플 2 컴퓨터를 가지고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폭탄이 터지자 곧바로 경찰이 출동했고, 아직 어렸던 존 카멕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소년원으로 보내진다. 소년원에서 그를 진찰했던 정신과 의사는 “이 아이는 감정이 없다. 다리 위로는 전부 뇌밖에 없는 것 같다” 라고 평가했다. 사제 폭탄 제조라는 전과와 냉소적인 눈빛 때문에, 소년원에서 생활한 1년 동안 아무도 존 카멕을 건드리지 못 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문제아이기도 했지만, 하나에 꽂히면 다른 분야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집요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프로그래밍과 컴퓨터 게임이었고, 그는 컴퓨터 교육의 선두 주자였던 샤니 미션 이스트 고등학교를 거쳐 미주리 캔자스 대학교에 진학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는 어려워진 가정 환경 탓에 각종 컴퓨터회사에서 외주 일을 받아 프로그래밍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 벌이를 했다. 이윽고 그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대학 수업과 답답한 시스템에 염증을 느끼고, 2학년 때 대학에 자퇴서를 제출한다.

개발 인생의 스승 겸 동반자, 존 로메로를 만나다

이후 계속해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그는 잡지용 부록 게임 제공 회사인 소프트디스크에 들어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바로 존 로메로를 비롯한 훗날 이드 소프트웨어 창립자들(아드리안 카멕, 케빈 클라우드, 톰 홀 등)을 만난 것이다. 사실 존 카멕은 회사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딱딱한 일정과 사교 활동에 염증을 느껴 사표를 내려고 했으나,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마음을 터 놓고 대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나 즐겁게 게임을 만들 수 있었기에 회사에 남기로 결심했다.

사실 존 카멕은 그 동안 학교 선생님이나 대학 교수, 주변 동료들이 모두 자신보다 못한 존재며 배울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존 카멕은 훗날 이 시절에 대해 “현재 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땐 정말 현명하지 못했다” 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존 로메로는 뭔가 달랐다. 프로그래밍 실력과 다양한 분야에 대한 깊은 상식을 지닌 존 로메로는 존 카멕 인생 최초의 스승이자,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 존 로메로 역시 자신보다 세 살 연하이면서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을 가진 존 카멕을 마음에 들어 했고, 자신이 맡고 있던 게임 개발 프로젝트에 그를 끌어들였다.

존 로메로와 존 카멕의 팀은 소프트디스크 산하에서 수많은 PC게임을 만들었다. 그 중 대표작인 [데인저러스 데이브]는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끈 바 있다. 소프트디스크 역시 사내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내는 이 팀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시기, 그는 주말을 이용해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닌텐도의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3]를 컴퓨터로 컨버전하는 데 성공하고, 이를 닌텐도에 보냈다. 이는 회사와 관계 없는 존 카멕의 개인 작업이었다. 비록 닌텐도는 컴퓨터 게임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나, 당시 업무상 협력 관계에 있던 어포지 사(현재 3D렐름)의 CEO였던 스콧 밀러는 여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

결국 스콧 밀러의 제안에 의해 존 카멕을 필두로 존 로메로, 아드리안 카멕(존 카멕과 성이 같지만 친척이나 형제는 아니다), 톰 홀 등은 소프트디스크사를 퇴사해 1991년 2월, PC게임 전문 개발사 이드(id) 소프트웨어를 설립한다. 90년대와 2000년대 세계 최고의 게임 개발사 중 하나로 손꼽혀 온 이드 소프트웨어는 이렇게 탄생했다. 존 카멕 21세 때의 일이다.


▲ 이드 소프트웨어 설립자들(좌측부터 존 카멕, 케빈 클라우드, 아드리안 카멕, 존 로메로, 톰 홀, 제이 윌버)

이드 소프트웨어는 초창기 자신들의 전 직장이었던 소프트디스크와의 계약 의무 이행을 위해 한동안 하청 업무를 진행했으며, 어포지 사와 함께 존 카멕의 초기작인 [커맨더 킨]을 출시하기도 했다. [커맨더 킨]은 [슈퍼마리오 3]를 PC로 컨버전한 존 카멕의 기술을 살려 제작된 횡스크롤 액션 게임으로, 당시로서는 어려웠던 PC 상에서의 부드러운 스크롤 이동 기술을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커맨더 킨]을 비롯한 이드 소프트웨어의 초기 작품들은 일반적인 패키지 유통이 아닌 쉐어웨어(ShareWare) 방식으로 판매되었다. 쉐어웨어는 스콧 밀러의 어포지 사에서 당시 추진하던 일종의 네트워크 체험 판매 시스템으로, 일부 콘텐츠만을 담은 체험판을 네트워크를 통해 무료로 배포한 후 정식 버전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구조였다. 이는 향후 대부분의 PC 및 비디오게임에 도입되었으며, 현재는 모바일게임과 PC 소프트웨어 등에서 두루 사용되고 있다. [커맨더 킨]은 쉐어웨어를 통해 15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냈으며, 이 자금은 이드 소프트웨어 초기 설립 자금으로 유용하게 사용됐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열정이 넘쳤던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이드 소프트웨어는 다양한 명작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한동안 [커맨더 킨]의 속편을 개발/출시하던 이드 소프트웨어는 91년 자신들의 첫 FPS [호버탱크]를, 그리고 이듬해에는 [울펜슈타인 3D]를 세상에 내놓았다. 위의 두 작품은 그때까지 개념마저 확실하지 않았던 FPS라는 장르를 확실히 정립시켰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1인칭 시점에서 무기를 바꿔 가며 적을 해치우고, 탄약과 회복 아이템을 주워 먹으며 진행하는 게임 방식. 이는 향후 [둠]에서 더욱 발전되어 현재까지도 통용되는 FPS 시스템의 대부분을 구현하기에 이른다.

특히나 [울펜슈타인 3D]는 게이머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안겨줬으며, 훗날 FPS를 세계 최고의 인기 장르 중 하나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존 카멕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울펜슈타인 3D]가 채 출시되기도 전부터 차기작 개발을 위한 작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 1981년 출시된 [울펜슈타인성]


▲ [울펜슈타인성] 을 토대로 제작된 [울펜슈타인 3D]

FPS의 교과서 [둠]의 등장

[울펜슈타인 3D]는 이름에 3D가 붙긴 했지만 이는 과거 출시되었던 액션 어드벤처게임 [울펜슈타인성]을 리메이크하며 FPS 방식을 도입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정작 게임 자체는 2D 그래픽의 응용이었다. 존 카멕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당시 컴퓨터 성능의 한계를 뛰어넘어 3D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이는 [울펜슈타인 3D] 등에서도 어느 정도 구현되어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존 카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울펜슈타인 3D]가 발매된 이듬해인 1993년, 이드 소프트웨어는 이름만 들어도 전세계 FPS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둠(DOOM)]을 출시한다. 비록 개발 도중 이드 소프트웨어의 설립 멤버이자 기획자였던 톰 홀이 퇴사하는 등의 진통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둠]은 전세계 게임 팬들에게 거대한 충격을 안겨줬다.

[둠]은 존 카멕의 프로그래밍 기술이 메인이 된 게임이다. 존 카멕은 [울펜슈타인 3D]의 게임 엔진을 개발한 직후 이를 더욱 발전시킨 둠 엔진(현재 id 테크1 엔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드 소프트웨어의 게임 개발은 일단 존 카멕이 엔진을 개발한 후에 이루어졌으니, 그의 존재가 팀에 미치는 영향을 짐작할 만 하다.

그는 독특한 아이디어나 참신한 기획력보다는 ‘현재 기술로 얼마나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을까?’ 를 우선시해 개발을 진행했고, 시나리오나 캐릭터 등은 차후 문제로 미뤄두었다. 그가 중요시한 것은 스토리텔링을 통한 감동보다는 단순한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었고, 이는 적중했다.


▲ 이드 소프트웨어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둠(DOOM)]

[둠]이 게임업계에 미친 업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크게 나눈다면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현대 FPS와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을 정도의 시스템을 확립시킨 것. 2) 3D 텍스쳐와 2D 그래픽을 적당히 섞어 기술적 충격을 안겨줌과 동시에 엔진을 판매하며 게임시장에 엔진 붐을 일으킨 것. 3) 세계 최초로 네트워크 대전 기술을 도입하여 온라인게임 시대의 발판을 연 것. 4) 그리고 유저 제작 콘텐츠(MOD: Game Modification)의 활성화를 이끈 것 등이다.

[둠]이 제시한 FPS 게임 방식은 과거 [울펜슈타인 3D]에서 보여줬던 고전적인 시스템에서 한층 발전한 것으로, 최근의 FPS에서도 적용되는 다양한 개념을 정립시켰다. 일례로 게임 내에는 샷건이나 런처 등 다양한 무기가 존재했으며, 서로간의 개성이 매우 뚜렷했다. 이는 현대 FPS의 다양한 무기 체계를 확립시켰다. 또한 비슷한 적과 단순한 플레이만 존재했던 [울펜슈타인 3D]와 는 달리, [둠]은 다양한 적과 공격 패턴, 그리고 투명이나 야시경 등의 아이템을 부여해 게임 플레이의 다양성을 더욱 진화시켰다. 또한, 엔진의 발전으로 인해 맵의 높낮이나 명암 등 다양한 요소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어 게이머로 하여금 ‘자신이 게임 속 가상세계에 있는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엔진 판매 역시 이러한 게임성과 존 카멕의 완성도 높은 프로그래밍 기술을 토대로 시작되었다. 이드 소프트웨어는 [둠] 제작에 사용된 둠 엔진의 사용 라이선스를 레이븐 소프트웨어와 로그 엔터테인먼트 등 타 개발사에 판매하며 로열티를 받았다. 사실 그 이전에도 게임 개발 소스를 판매하는 방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드 소프트웨어는 그러한 소스를 둠 엔진이라 명명짓고 이른바 패키지 형식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는 [둠]의 높은 인기와 시너지 효과를 내어, 향후 에픽게임스 등을 주축으로 한 3D 미들웨어 엔진 시장이 만들어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네트워크 대전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 역시 [둠]이다. 존 카멕은 당시 조금씩 일반에 보급되고 있던 네트워크 기술을 활용해 원거리에서 다른 플레이어와 함께 게임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했고, 이는 [둠]에서 데스매치라는 모드로 처음 구현되었다. 이 데스매치 모드는 미국 전역의 네트워크 통신망을 마비시킬 정도로 높은 인기를 끌었다. 당시로서는 안방에 앉아 멀리 떨어진 플레이어와 대전을 즐긴다는 것은 미래 기술 정도로 받아들여졌기에, [둠]의 데스매치 기능은 하나의 혁명과도 같았다. 향후 데스매치 모드는 불특정 게이머와 매칭을 즐길 수 있는 배틀넷으로 확장되었으며, 여기서 영감을 받은 수많은 게임사들에 의해 수많은 온라인 멀티플레이 모드가 등장하고 훗날 온라인게임 시대를 여는 발판을 마련한다.

[둠]은 93년 출시되어 2년 동안 쉐어웨어 방식으로 판매되었으며, 북미와 유럽에서만 1,5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95년 말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95보다 더 많은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을 정도였으며, 때문에 빌 게이츠가 이드 소프트웨어를 인수하려 했다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 곧이어 출시된 [둠 2] 역시 북미 지역에서만 200만 장(쉐어웨어 대신 패키지 판매로 바뀜)이라는 높은 판매고를 올렸으며, 이로 인해 존 카멕과 이드 소프트웨어의 이름은 세계 전역에 알려졌다.


▲ [둠] 을 출시했던 1993년 이드 소프트웨어 인원들

당시 [둠] 시리즈의 인기가 얼마나 컸는지를 설명하는 일화가 있다. 당시는 개인용 PC 보급이 지금처럼 일반화되지 않은 시대라, 회사에만 컴퓨터가 있는 회사원들이 많았다. 그들 사이에 [둠] 이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일부는 업무 시간에도 게임을 하다 적발되곤 했다. 관리자들이 아무리 주의를 주고 감시를 강화해도 [둠]을 플레이하는 직원이 줄지 않자, 몇몇 회사에서는 [둠] 프로그램을 찾아 자동으로 삭제하는 무서운 프로그램을 강제 배포해 직원들의 게임 플레이를 막기도 했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영화배우 로빈 윌리엄스도 유럽과 미국에서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해 데스매치를 즐겼다고 할 정도로 [둠]은 국민 게임이었다.

이처럼 [둠]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나, 부작용도 함께 따라왔다. [둠]은 캐릭터의 체력에 따라 얼굴이 피범벅이 되고, 적을 해치우면 산산조각나며 사방으로 피와 살점, 내장이 튀어오르는 고어(gore)한 게임이었다. 이는 게임 디자이너인 에이드리언 카멕의 개인적 취향이 한껏 반영된 결과인데, 결과적으로 [둠] 시리즈 특유의 액션성에 크게 기여했지만 폭력성에 대한 질타를 받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은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의 원인으로 [둠] 이 지목된 것이다. 9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모탈 컴뱃] 등 폭력적인 게임이 출시됨에 따라 게임의 폭력성을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 와중 1999년, 세계를 놀라게 한 흉악범죄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의 용의자가 [둠]의 마니아라는 것이 밝혀지며 [둠]은 순식간에 마녀사냥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미국 법원은 콜럼바인 사건에 [둠]이 영향을 미쳤다며 유족들이 건 소송에 대해 ‘흉악 범죄의 원인을 게임으로 볼 수는 없다’ 는 판결을 내렸고, ESA(북미 자율심의등급기구)의 활동이 본격화되며 이와 관련된 문제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 2.5D 그래픽으로 3D 효과를 낸 [둠]


▲ [둠] 은 잔인한 장면으로 폭력성 시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퀘이크]의 성공과 존 로메로와의 이별

[둠] 시리즈의 엄청난 흥행에도 불구하고, 존 카멕과 이드 소프트웨어는 멈추지 않았다. [둠 2]로부터 2년 후인 1996년, 그들은 풀 3D FPS인 [퀘이크]를 발매했다. 존 카멕 26세 때였다. 참고로 존 카멕은 광원, 텍스쳐, 복셀엔진 등 여러 개의 게임 엔진을 동시에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데, [퀘이크]와 [퀘이크 2]를 개발하던 1996~1997년도에는 무려 6개의 엔진을 동시에 만들었다. [퀘이크] 역시 [둠] 시리즈를 개발하면서부터 기술적으로 고민하던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퀘이크]는 [둠]에서 보여준 각종 요소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킨 게임으로, 2D 그래픽을 응용해 3D 효과를 낸 [울펜슈타인 3D]나 [둠] 시리즈와는 달리 진정한 3D 그래픽을 구현했다. 이는 초창기 3D 가속카드 시장의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둠]에서 최대 4인까지 함께 할 수 있었던 멀티플레이를 무려 32명이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데스매치로 발전시켰으며, 컴퓨터 게임 멀티플레이 대전 문화를 한껏 꽃피웠다.


▲ 진정한 3D FPS [퀘이크]

이전까지 일부 회사에만 판매했던 엔진 라이선스 역시 퀘이크 엔진에 이르며 엄청나게 활성화되었다. 퀘이크 엔진은 당시 FPS 제작사들에게 가장 환영받았던 엔진으로, 인피니티 워드의 [콜 오브 듀티 1]나 밸브 코퍼레이션의 [하프 라이프], 레이븐 소프트웨어의 [솔저 오브 포춘], 드림웍스의 [메달 오브 아너] 등 시대를 평정한 수많은 FPS게임들이 퀘이크 엔진 시리즈를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사용해 제작되었다.

[퀘이크] 시리즈를 통해 존 카멕은 3D 게임업계의 독보적 존재로 자리잡았다. 그의 말 한 마디에 게이머와 개발자들이 구매하는 그래픽카드의 주류가 바뀔 정도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래픽카드의 경우 게임 개발사가 얼만큼이나 해당 하드웨어를 지원하는지에 따라 성능에 큰 차이가 있었고, PC용 3D 게임의 선두에 서 있는 존 카멕의 결정은 그대로 그래픽카드 업체의 매출로 이어졌다.

존 카멕이 얼만큼이나 3D 그래픽카드 업계에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부두(VooDoo)사 관련 일화다. 1990년대 중후반, 부두사는 3D 그래픽카드의 선두 업체였다. 그러나 존 카멕이 부두 사의 자체적 모드인 [글라이드(Glide)] 사용이 어렵고 복잡하다며 자신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폭탄 발언을 한다. 그러자 수많은 PC 사용자들이 부두사의 그래픽 카드 대신 존 카멕이 선호한다는 엔비디아(Nvidia)사로 옮겨가고, 결국 부두사는 그 규모가 차츰 축소되다 결국 엔비디아에 인수되어 자취를 감춘다.

얼핏 보면 유명 개발자의 횡포, 혹은 이면계약을 통한 마케팅으로 보이기도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존 카멕은 돈이나 명예, 친분이 아니라 자신의 개발 철학에 맞는 그래픽카드를 추천해 왔으며, 유저의 입장에서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판단의 1순위로 삼았다. 덕분에 그의 발언은 공신력을 얻게 되었고, 전세계 그래픽카드 업체들은 존 카멕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PC 그래픽기술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 존 카멕의 선택에 희비가 갈린 [VOODOO] 와 [엔비디아]

[울펜슈타인 3D]와 [둠]을 통해 현대 FPS의 틀을 정립시키고, [퀘이크] 시리즈로 FPS 장르를 꽃피운 이드 소프트웨어는 게임업계의 슈퍼스타로 일약 발돋움했다. 존 카멕과 존 로메로 등에게도 엄청난 부와 명예가 주어졌고, 그들은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청산했다. 이들은 30세도 안 된 젊은 나이에 꿈에도 그리던 페라리 스포츠카를 살 정도로 부자가 되었고, 게임 개발에 있어서도 물량과 인력을 충분히 투자할 만큼의 여유가 갖춰졌다. 그렇지만 존 카멕은 엄청난 성공 이후에도 여전히 개발실에 틀어박혀 프로그램을 주무르는 것만 좋아하는 괴짜였다.

하지만 존 로메로는 존 카멕과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백만장자가 되어서도 프로그래밍에 미쳐 책상과 컴퓨터, 피자와 콜라만 있으면 행복해 했던 존 카멕과는 달리, 존 로메로는 다양한 분야에 조예가 깊었고 인생을 즐기는 법을 알았다. 이러한 정반대의 성격은 개발 방향에 있어서도 충돌을 낳았다. 존 카멕은 단순한 게임 플레이와 효율성을 추구했지만, 존 로메로는 게임에서도 영화와 같은 디테일과 화려함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둘의 상성은 때로는 시너지 효과를 냈지만, 다툼이 지속되면서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둘의 사이는 [퀘이크 2] 개발 도중 급속히 나빠졌고, 결국 둘 중 하나가 회사를 나가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드 소프트웨어는 존 카멕의 프로그래밍 실력을 기반으로 성장, 발전해 온 회사였기에 자연히 사내 분위기는 존 로메로의 퇴사 쪽에 쏠렸고, 결국 존 로메로는 [퀘이크 2]가 발매된 1997년 이드 소프트웨어를 퇴사했다. 이후 그는 이온스톰이라는 개발사를 설립하고 [다이카타나]라는 게임을 개발했으나, 흥행 저조로 인해 결국 게임업계 최전선에서 은퇴한다.


▲ 컴퓨터와 책상, 의자, 다이어트 콜라는 존 카멕에게 필요한 전부였다


▲ 견해 차이로 인해 이드 소프트웨어를 퇴사한 존 로메로

존 로메로의 퇴사 이후, 존 카멕은 사실상 이드 소프트웨어를 이끌게 된다. 그는 [둠]과 [퀘이크] 시리즈를 계속 발전시키고, 그 와중에서 수많은 기술 데모를 통해 게임업계에 충격을 던졌다. 특히, 그는 자신이 수 년 동안 힘들여 개발한 수많은 소스를 일반에 공개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기술을 독점하지 않고 사람들과 공유하겠다는 해커 정신을 가지고 있던 존 카멕은 [울펜슈타인 3D]와 [둠], [퀘이크] 시리즈의 핵심 소스 코드를 배포(물론 상업적 이용 시에는 라이선스 비용 지불 조건)했으며, 자신이 개척한 수많은 기술의 특허를 포기하기도 했다. 존 카멕의 기술을 특허 신청하려는 이드 소프트웨어 관계다에게 “특허를 내라고 하면 회사를 그만 둘 것이다” 라고 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자신이 개발한 원천 기술을 아낌없이 공개했다.

물론 게임 출시 시기와 소스 배포 시기가 일치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애써 만든 소스를 일반에 공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존 카멕 이후 이에 감명을 받은 수많은 개발자들도 차츰 자신의 개발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문화는 시간이 흘러 게임개발자컨퍼런스(GDC) 를 비롯한 수많은 개발자 컨퍼런스 문화로 발전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한편, 정보 공유와 관련된 그의 철학은 [둠] 에서 언급한 유저 제작 콘텐츠(MOD: Game Modification)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둠]과 [퀘이크] 시리즈의 프로그래밍 소스와 함께 게임 개발툴도 공개했는데, 프로그래밍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를 이용해 새로운 게임. 즉 개인 MOD를 만들 수 있었다. 이는 아마추어 개발자들이 신선한 아이디어를 적용한 게임을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준다. 실제로 [하프라이프]는 [둠]의 MOD를 만들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게임이며, 여기서 파생된 MOD가 [카운터 스트라이크]로 현재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 [카운터 스트라이크 온라인 2]는 그 후속작에 속한다. [퀘이크]에서도 [팀 포트리스], [CTF] 등 다양한 모드가 인기를 끌었고, [팀 포트리스]의 경우 밸브에 의해 후속작이 출시되었다. 현재 [리그 오브 레전드] 등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장르 AOS 역시 [스타크래프트]와 [워크래프트 3]의 MOD에서 출발했음을 감안하면 존 카멕의 공로를 짐작할 만 하다.


▲ [둠] 의 MOD를 만들던 사람들이 만나 제작한 [하프 라이프]

시대의 변화, 그리고 이드 소프트웨어의 내리막

2000년대에 들어, 존 카멕은 개발자로서의 명예에 정점을 찍는다. 대표적인 것이 2001년,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AIAS)가 시상하는 명예의 전당에 게임업계 관계자 중 미야모토 시게루, 시드 마이어, 사카구치 히로노부에 이어 네 번째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 때 존 카멕의 나이는 31세, 이 최연소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더불어 그는 2000년, 로켓 개발 회사 아르미달로 에어로스페이스를 설립했다. 어릴 적 폭탄이나 로켓을 만들며 놀던 것에 착안한 것으로, 그는 약 14년 동안 자신의 사비를 털어 가며 로켓 개발에 매진했다(2013년 들어 로켓 개발을 중지한 상태).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소유했던 페라리를 팔고 로켓 부품을 옮길 밴을 구매하는 등 열성적인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아르미달로 에어로스페이스를 설립한 그 해, 존 카멕은 [퀘이크] 대회에서 만난 한국계 교포 캐서린 안나 강과 결혼식을 올렸으며, 신혼여행지에도 작업용 컴퓨터를 배달시켜 코딩 작업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그는 [퀘이크] 토너먼트를 비롯해 이드 소프트웨어의 신작 발표와 멀티플레이 게임 파티 역할을 하는 [퀘이크콘]에서 유명 퀘이커인 데니스 ‘쓰레쉬’ 퐁에게 자신의 페라리 중 한 대를 선물하는 등 다방면에서 화제를 모았다. 현재 [퀘이크콘]은 제니맥스의 이드 소프트웨어 인수 이후 [엘더스크롤]이나 아케인 스튜디오 등도 참여하며 하나의 빅 게임쇼로 자리매김했다.



▲ 존 카멕이 세운 로켓 발사 업체


▲ 존 카멕(우)과 배우자 안나 강(좌). 가운데는 락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의 리더 트렌트 레즈너

그러나 존 로메로가 떠난 이후, 존 카멕의 성공신화도 차츰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드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최고의 게임 개발사였지만, [둠]과 [퀘이크]처럼 세상을 뒤흔들 만한 작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물론 존 로메로의 퇴사 후에도 이드 소프트웨어는 [퀘이크 3]나 [둠 3] 등을 출시했고, 완성도와 깊이 면에서는 여전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전작에 비해 파급효과가 크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이드 소프트웨어는 [언리얼] 의 에픽게임스나 [하프 라이프]의 밸브 등 후발 주자들에게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퀘이크 3] 이후 [퀘이크] 시리즈가 예전 같은 영향력을 잃고, [둠 3] 이후 대작 프로젝트 소식이 한동안 끊기며 이드 소프트웨어에도 조금씩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존 카멕은 2005년 이후에도 각종 모바일 RPG와 게임 엔진 등을 제작하며 건재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예전만큼 큰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과거가 코딩 프로세스를 통해 하드웨어 성능을 뛰어넘는 시대였다면, 바야흐로 눈부시게 발전해가는 기술을 개발자들이 따라가는 상향평준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윽고 2009년, 존 카멕은 이드 소프트웨어를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의 모회사 제니맥스에 매각한다.

이드 소프트웨어를 인수한 베데스다는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개발진을 배 이상으로 늘리는 한편, 개발사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했다. 존 카멕은 오랫동안 개발진의 크기를 10~20명 내외로 유지해 왔는데, 이는 초기에만 해도 상당한 이점이었으나 갈수록 거대해져가는 게임의 스케일과 규모를 감당하기엔 부족했다. [언리얼 토너먼트]나 [하프 라이프] 개발진에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인원으로 게임을 제작하다 보니, 여러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드러났던 것이다. 다행히 제니맥스에 의한 개혁은 존 카멕의 의지와 크게 상충되지 않는 방향에서 진행되었고, 2011년 출시된 오픈월드 FPS [레이지]는 변해 가는 시대에 맞춘 이드 소프트웨어의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흥행 부문에서는 다소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지만 말이다.


▲ 이드 소프트웨어에서의 마지막 작품 [레이지]

이드 소프트웨어를 떠나 가상 현실 분야로

[레이지]와 각종 모바일 프로젝트, id Tech 엔진 시리즈 등에서 조용하지만 꾸준하게 활동해 오던 존 카멕. 그러나 2013년 8월, 그는 이드 소프트웨어를 떠나 가상 현실 기기 [오큘러스 리프트]를 제작하는 오큘러스VR의 최고기술경영자(CTO)로 적을 옮긴다. 초반에는 이드 소프트웨어의 기술 자문 역할도 병행했으나, 현실적인 이유와 함께 관심사를 나눠 집중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이를 사퇴함에 따라 존 카멕은 22년 간 재직했던 이드 소프트웨어를 완전히 떠났다. 이로써 이드 소프트웨어는 초기 설립자 4명이 모두 퇴직하여 현재는 후임자들과 제니맥스 측 인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사실 [둠]과 [퀘이크] 등의 게임을 만들던 그가 가상 현실 기기 [오큘러스 리프트]를 개발한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최근 행적과 개발 철학을 살펴보면 그리 의아한 일은 아니다. 존 카멕은 [오큘러스 리프트]가 개발자 키트조차 없던 초창기, 처음으로 기기에 게임을 적용시킨 이 중 하나였다. 즉, 프로젝트의 초창기부터 참가한 멤버나 마찬가지다. 그는 언제나 콘텐츠보다는 기술적인 발전에 초점을 맞춰 온 개발자였으며, 가상 현실이라는 새로운 세계는 그의 개척자 정신에 불을 붙였다.

그는 오큘러스VR에서 자신의 게임 개발 인생을 돌아보며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게임의 대세는 콘솔에서 PC로, 온라인으로 진화해 왔으며, 가상 현실 플랫폼은 향후 다가올 새로운 파도 중 하나다. 존 카멕에 따르면 가상 현실은 앞으로의 게임산업을 이끌 미래이며, 개척할 만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은 분야다. 원시적이던 PC게임 환경을 실사에 가까운 수준까지 개척한 존 카멕. 그의 새로운 비상은 가상 현실 분야에서 이루어 질 지도 모른다.


▲ 가상 현실 기기 오큘러스 리프트를 쓰고 있는 존 카멕

“게임업계에서 업무를 진행해 오면서 즐거운 추억이 많이 있다. 1인칭 게임의 강렬함, LAN와 인터넷 플레이, 게임 모드 등이다. 오큘러스VR의 설립자 럭키 파머가 강력 접착 테이프를 감아 줄을 연결하고 센서를 열간 접착제로 붙인 [오큘러스 리프트] 초기 버전을 보여준 후 이에 대한 코드를 작성한 일은 여기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나는 가상 현실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작업을 하고 있는 모두가 개척자라고 생각한다. 가상 현실 분야에는 아직도 많은 숙제들이 남아있고, 어떤 부분을 해결해야 할 지조차 모르는 문제들도 많다. 나는 지금 의욕이 넘친다. 앞으로 닥칠 일들은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 존 카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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