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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캐주얼게임의 아버지 '띵(THING)' 정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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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온라인게임에 다양성을 쥐여준 남자, 정상원 띵 소프트 대표

정상원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어느 하나에 집중돼 있다기보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그는 넥슨 초창기 시절 [바람의 나라]를 시작으로 [카트라이더] [마비노기] [크레이지아케이드비엔비] 등 캐주얼 성향이 짙은 게임을 성공하게 한 프로듀서로 활약했다. 즉, 캐주얼로 대변되는 넥슨의 기본 뼈대를 세운 셈이다. 이후 그는 네오위즈(현 네오위즈게임즈)로 넘어가 [피파온라인] [피파온라인2] 등을 추가로 성공하게 했다. 국내를 대표하는 여러 종류의 게임을 시장에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 정상원은 띵소프트라는 작은 개발사에서 [페리아연대기]라는 게임을 만들고 있다. 이 거장이 대체 왜 이런 작은 개발사에 몸담은 것일까?

◀ 띵소프트 정상원 대표


사실 국내를 대표하는 1세대 게임개발자는 그에 맞는 호칭이 따른다. 송재경은 온라인게임의 아버지, 김태곤은 역사게임의 거장 같은 식이다. 그러나 정상원은 딱히 부를만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다른 1세대 게임개발자에 비해 두드러진 활약, 즉 업적이 부족했던 것일까? 천만의 말씀. 절대 그렇지 않다.

한때 생물학자를 꿈꾸던 정상원은 게임이라는 세계를 접하면서 지난 십수 년 동안 한 길만을 파왔다. 이런 그가 늘 강조해온 것은 다양한 시도와 ‘그 어떤 재미있는 게임'을 갈망하는 열정이었다. 재미있는 게임, 그러니까 사람들 가슴에 남을 수 있는 그런 부류의 게임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다양한 시도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고, 이렇게 해야 시장은 물론 산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맞다. 정상원은 국내 온라인게임의 다양성을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이 남자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우직함에서 출발한다.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서울대 청년, 그 게임 [바람의 나라]와 만나다

어린 시절, 정상원은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단순히 우등한 꿈이 아니었다. 과학을 좋아했던 정상원은 꾸준히 학업에 매진하며 생물학자라는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처럼 가끔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거나 놀기도 했지만 학업은 항상 우선순위였다. 당연히 성적은 우수했고, 그렇게 그는 1989년 서울대학교 분자생물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이 청년은 몇 년 후 한국의 과학자가 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대학시절 역시 학업에만 매진했고, 이제 동 대학 대학원에 입학(분자생물학)하기만 하면 꿈이 이루어질 것 같은 상황만 남았다. 1992년. 정상원은 대학원 입학시험을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처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본다. 정상원은 사람 많은 도서관보다 더 조용하고 아늑한 학교 전산실에서 공부하기로 하는데, 바로 여기서 머드게임을 접하게 된 것이다.

맞다. 바로 이 전산실이 '시작'이었다. 여기서 정상원은 동료가 열심히 하는 [KIT MUD]라는 머드게임을 접하게 된다. [KIT MUD]는 [단군의땅]이 등장하기 전, 카이스트 학생들이 만든 게임이다. 별생각 없는 그였지만, 호기심에 발동해 잠깐 그 게임을 해봤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결국, 그는 공부를 잠시 미루고 한 달 여간 머드게임에 푹 빠져버렸다. 학업에만 열중하던 한 청년이 처음으로 다른 무엇인가에 빠진 작은 사건이었다.


▲ 정상원은 [문명] [삼국지] [마스터오브오리온] 등 전략 게임을 무척 좋아했다

대학원 시절에도 그는 '게임'이라는 녀석과 계속 연을 이어간다. 생물학은 한 번 실험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생기는데 정상원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게임을 즐겼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뮬레이션 [문명]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문명]은 재미있는 것 정도가 아니라, 게임에 대한 그의 인식 자체를 바꿀 정도의 힘이 있었다. '대체 이런 게임은 누가 만드는 거지?' '이런 게임 정도면 애들 장난이 아니라 진짜 세상을 움직일 수 있겠구나' 이런 거대한 생각이 서서히 내면에서 커지기 시작했다.

마침 당시 정상원은 과학자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생물학은 교과서 한 줄을 쓰기 위해 평생을 바쳐야 하는 학문이다. 정상원은 이게 힘들었다. 결국, 그는 엄청난 고민 끝에 컴퓨터 한 대를 장만하고, 컴퓨터공학과로 편입을 준비했다. 대단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컴퓨터가 주는, 그리고 그 컴퓨터로 해볼 수 있는 게임이라는 녀석에 대한 희미한 가능성만을 보고 선택한 것뿐이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게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정상원은 부모를 설득하지 못했다. 공부 잘하던 아들이 갑자기 전공을 접고 컴퓨터를 하겠다는데 어떤 부모가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그는 1994년, 삼성 SDS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데 뭘 해도 재미있을 리가 없듯이. 당시 그는 삼성SDS 산하에 의료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름 훌륭한 직장이었다. 문제는 역시 재미가 없었다. 답답하고 지루했다.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은 그의 갈망은 하루가 지날수록 더 커져갔다. 결국 그는 회사를 나온다. 그리고 마음 맞는 동료 둘과 게임을 만들자는 막연한 목표 아래 블루버드 인터넷이라는 회사 하나를 창업했다.

정상원은 창업한 이후 일단 자금을 모으기 위해 웹 사업을 시작했다. 일이 잘 풀리는 바람에 수익도 꽤 나왔다. 그러나 여기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애초에 목적이었던 게임 개발은 도저히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게임은 언제 만들지? 창업한 동료들도 사업에만 매진하고 있어, 게임을 만든다는 목표는 이미 희미해진 거 같았다.

이런 정상원에게 드디어 첫 번째 인생기회가 찾아온다. 당시 블루버드 인터넷은 선릉에 있었는데, 바로 맞은편 건물에 넥슨이라는 게임회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게임 개발을 갈망했던 만큼, 무작정 그 회사를 찾아갔다. 견학 겸 설렁설렁 가본 것이다. 여기서 정상원은 정체 모를 게임 하나를 보고야 만다. 머드게임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PC게임도 아닌 것이 처음으로 보는 신기한 게임이었다. 귀여운 캐릭터가 돌아다니는데 화면에 말풍선이 뜨면서 다른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는 넥슨의 창업자이자 당시 대표였던 김정주에게 물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게임입니까?" 이렇게 그는 넥슨이라는 작은 회사에서 [바람의 나라]를 만났다.


▲ 정상원이 보고 푹 빠진 국내 최초의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


신바람 띵 선생, [바람의 나라]에 생명을 뿌리다

그랬다. 시대 흐름에서의 어떤 사건은 인연을 낳는데 유효한 법칙이다. 모든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정상원이 넥슨을 방문하던 무렵에는 김정주와 송재경(현 엑스엘게임즈 대표)이 의기투합해 국내 최초의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를 만든 시기였다. 송재경은 퇴사하고 없었지만, 이미 게임의 틀은 만들어진 뒤였다.

정상원의 호기심은 여기서 시작됐다. 그만큼 [바람의 나라]는 신기한 물건에 가까웠다. 온라인게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정상원이 계속 넥슨을 방문하며 관심을 보이자, 사람욕심이 있었던 김정주는 결국 그의 마음을 흔든다. 관심이 있으면 함께 일해보자는 거다. 정상원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블루버드에 있던 동료들은 이미 마음이 기울었으니,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로 넥슨으로 옮겼다.

이렇게 해서 1996년. 정상원은 넥슨에서 게임 개발자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바람의 나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송재경이 이미 틀을 만들어 놨는데, 이 안에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정상원은 회사 내에서 기획자라는 명함을 받고, 게임이 재미있게 돌아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구상하게 된다.

무일푼 경력의 기획자였지만 이 일은 정말 신바람 그 자체였다. 생각해보자. 온라인게임이 없었을 무렵, 당신의 눈앞에 그 틀이 만들어져 있다면? 이 얼마나 즐거운 상황인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최초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상원은 기획을 하기 시작했다. 마법도 넣어보고, 몬스터도 넣어보고, 스토리도 넣어보고, 퀘스트도 넣어보고, 뭔가 재미있을 거 같은 것들은 다 넣어봤다. 넣는 족족 게임이 작동하고 재미가 파생되고 커지는 상황. 정상원은 이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는 천사의 모습을 한 NPC를 직접 조종하며 유저들과 어울리며 놀기도 했다. 아이디는 THING(띵)이었다. 다소 굳은 표정의 정상원도 마침내 웃음을 찾았다.

상황도 재미있었다. 당시 [바람의 나라]는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에 서비스됐는데, 이를 통해 드디어 유저들이 한두 명씩 들어온 것이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당시 유저들은 개발자와 '친구'에 가까웠다. 정상원은 이 유저들이 있었기에 더 재미있는 것을 넣기 위해 노력했다. 뭐 하나가 채워지면 지나가는 유저를 붙잡고 물었다. 이거 어때 재미있어? 그 반응이 너무 즐거웠다. 이렇게 신바람나는 일은 계속됐다. 연봉은 삼성SDS나 블루버드에 비교하면 절반 가까이 줄었지만, 온몸을 두드리는 즐거움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는 1년 남짓 그렇게 [바람의 나라]를 갈고 닦았다. 한국의 첫 온라인게임은 바로 이런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 함께 [바람의 나라]를 제작한 정상원 대표와 서민 대표는 지금도 친한 사이이며, 애니파크 김정률 실장(사진 왼쪽)은
당시 [바람의 나라]를 즐겨했던 게이머였다. 그들은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넥슨 내 게임팀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정상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아리방같은 느낌이었다고. 특히 김정주와 정상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청년이 많았다. 병역특례나 아르바이트하던 친구들이었다. 특히 넥슨은 지금 돌이켜보면 인재 집합소였다. 김정주, 정상원은 물론 서민(현 넥슨 대표), 나성균(현 네오위즈 홀딩스 대표), 김병관(현 웹젠 이사회의장), 박진환(현 네오아레나 대표) 등이 한 식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회사사정은 썩 좋지 못했다. 지금의 넥슨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넥슨은 돈 없고 작은 초라한 회사였다. 김정주가 웹 사업 수주로 겨우 회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게임은 계속 적자였다. 아니, 수익 자체가 없었다. 초기 동접 30명. 많아 봐야 100명. 당연한 결과다. 특히 96년 겨울에는 내부에서 게임사업을 매각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갈등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여기서 김정주는 선택한다. 미래를 봤을 때 게임은 계속 끌고 가야 한다는 것, 대신 당장 수익이 나지 않으니 게임 쪽 직원들의 급여를 일부 삭감하고 이후 성공하면 인센티브 지급을 약속한 것이다. 매서운 결단이면서,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갔지만, 정상원은 큰 불만이 없었다. 여전히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힘들었던 96년 겨울을 보낸 넥슨은 이듬해 드디어 노력의 결실을 보게 된다. 97년, IMF 사태가 발생한 이후 이에 대한 여파로 PC방이 전국에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IMF는 한국사에 아픈 기억이지만, 이는 곧 IT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흐름에 게임도 같이 성장하였다. PC방이 늘어나면서 동접 30명이었던 [바람의 나라]는 쭉쭉 성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 게임은 넥슨이 그렇게 기다렸던 사업 성과를 안겨주게 된다. 진정한 온라인게임의 탄생이다.

당시 정상원은 [바람의 나라]가 지닌 잠재력이 폭발했다고 봤다. 어떤 계기가 됐던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런 게임. 이에 그는 게임 개발자로서의 직업을 확신하고 '이런 게임'을 계속 내놓겠다고 다짐한다.




▲2013년 7월, 넥슨은 [바람의 나라] 원년멤버 김정주 대표(엔엑스씨), 정상원 대표(띵 소프트), 서민 대표(넥슨코리아),
송재경 대표(엑스엘게임즈), 그리고 김진 작가가 모인 자리에서, 게임 초기 버전 복원을 발표했다


넥슨의 기반을 만들다, 캐주얼게임의 등장

[바람의 나라]로 확신을 얻은 정상원은 이후 넥슨의 게임개발 총괄을 담당하게 된다. 프로듀서가 된 셈이다. 정상원은 편입을 준비하던 시기와 삼성SDS 시절 프로그래밍을 공부했지만 실력은 한참 밀렸다. 대신 이후부터 서버 프로그래밍을 공부해 기획/서버 프로그래머를 병행했다. 물론 프로듀서인 만큼 모든 게임은 그의 손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엔씨소프트의 등장이다. 지금이야 넥슨이 엔씨소프트의 최대주주로 올라서면서 상황이 바뀌었지만, 두 회사는 지난 10여 년 동안 시장에서 최대의 라이벌이었다. 김정주와 넥슨을 창업한 송재경이 엔씨소프트에서 [리니지]를 제작한 것이 바로 그 경쟁의 시작이다. 당시 김정주는 넥슨에서 새로운 시스템이나 게임 내용이 나오면 바로 송재경과 김택진을 찾아가 으스대기도 했다. 절대 지지 않는 송재경 역시 '우리도 있다' 같은 걸 보여주며 '즐거운 경쟁'을 펼쳤다. 당시 게임사 문화는 이래서 재밌었다.

정상원은 [바람의 나라]의 차기작으로 [어둠의 전설(98)] 개발을 착수하게 된다. 이 게임은 어떤 특별한 목표가 있었다기보다, [바람의 나라]의 틀에서 조금 더 완성도 높은 RPG를 만들어보자는 데에서 출발했다. 물론 [어둠의 전설]은 엔씨소프트가 준비 중인 [리니지]를 견제하기 위한 게임이기도 했다. 이렇게 완성된 [어둠의 전설]은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분위기도 좋았다. [리니지]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1998년 엔씨소프트가 서비스를 시작한 [리니지]는 한국 온라인게임에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당시 정상원은 김정주에게 [리니지]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게임이라며 안심을 시켰다. PK가 가능한 하드코어 게임인데,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니 절대 신규 유저풀이 늘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서였다. 그러나 [리니지]는 혈맹 시스템이 들어가면서 그 어떤 게임보다 강력한 커뮤니티가 형성돼 버렸다. 게다가 약육강식의 대표 아이콘으로 떠오르는 공성전이 등장하면서 [리니지]는 그야말로 최고의 MMORPG로 부상해 버렸다. 새로운 렌더링 기법을 활용했던 [리니지]는 [바람의 나라]나 [어둠의 전설]과 비교해 그래픽적으로도 훌륭했다. 넥슨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넥슨과 엔씨소프트의 경쟁구도는 계속됐다. RPG에서 한 방 얻어맞았으니, 넥슨 입장에서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했다. 바로 여기서 정상원은 RPG가 아닌 다른 종류의 게임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 엔씨소프트의 [리니지]는 서비스 이후 MMORPG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여기서 넥슨은 조직 시스템에 변화를 준다. 넥슨 직원이라면 누구든지 아이디어를 낼 수 있고, 그게 온라인게임으로 내놓기 적합한 형태라면 무엇이든 시도해보는 방향으로 개선된 것이다. 꼭 RPG가 아니더라도 [바람의 나라]에서 느꼈던 즐거움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 정상원의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이 방법은 통했다. 엠플레이가 제작한 [퀴즈퀴즈(99)]가 대박을 친 것이다. 정상원이 수장을 맡고 있던 엠플레이는 당시 넥슨의 자회사로 일종의 실험적인 게임을 개발하는 곳이었다. [퀴즈퀴즈]는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퀴즈라는 난데없고 엉뚱한 아이디어였지만 정상원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넥슨의 첫 캐주얼게임이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퀴즈퀴즈]는 서비스를 개시한 이후 동접 2만 명을 기록했다. 당시에 '대박'에 가까운 수치다. 특히 이 게임은 넥슨이 최초 부분 유료화를 도입한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여기에는 실패가 공존했다. 최초 [퀴즈퀴즈]는 월 정액제(9,900원)를 썼다가 동접이 반 토막이 나는 사태를 겪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상원은 RPG가 아닌 가벼운 장르는 새로운 수익모델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후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익모델을 연구했고, 아바타 아이템 판매 수익모델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런 방식이 [퀴즈퀴즈]에 적합하다고 내다본 정상원은 이를 바로 도입했다. 게임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거 같은 수익모델이 '게임'에 통용된 최초의 순간이었다.

[퀴즈퀴즈]의 성공은 직원들의 여러 아이디어를 수용한다는 회사 방침을 더 공고히 했다. 정상원 역시 개발 총 책임자로서 후배 개발자들에게 여러 기회를 주며 성공을 이끌어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카트라이더(04)]다. 이 게임은 당시 넥슨에 개발실장이었던 정영석이 무려 3번의 도전 끝에 완성한 게임이다. 정영석은 댄스게임[비트댄스], 골프게임을 차례로 개발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상원은 그에게 더 잘하는 것을 찾아보라며 계속 격려했고, 그렇게 정영석은 다시 레이싱 게임에 도전했다. [카트라이더]가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런 과정에서 정상원은 01년 넥슨 대표에 오른다. 게임 개발에 대한 총 책임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까닭이다. 결국, 그는 [일랜시아(99)]. [아스가르드(01)]. [크레이지아케이드비엔비(01)]. [메이플스토리(03)]. [마비노기(03)]. [테일즈위버(03)]. [카트라이더(04)] 등을 성공시키며 넥슨에 밑거름을 뿌렸다. 경쟁사였던 엔씨소프트는 넥슨과 반대로 큼직한 MMORPG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리니지2(03)] 정도가 있다. 엔씨소프트는 엔씨소프트 나름대로, 넥슨은 넥슨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 성장하고 있었다. 드라마는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었다.




▲ 정상원의 활약으로 넥슨은 캐주얼 게임을 평정하며 국내 최대기업 중 하나로 성장한다


정상원, 비운의 명작 [택티컬 커맨더스]

게임개발자 정상원을 이야기하면서 [택티컬 커맨더스]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게임은 정상원이 만든 게임 중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지금도 다수의 게이머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게임이기 때문이다.

때는 98년. 정상원이 넥슨 개발총괄을 할 당시, PC방 열풍을 불러일으킨 [스타크래프트]가 확장팩 [브루드워]를 출시하면서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전 국민이 [스타크래프트]에 열광하던 시기였다. 넥슨 입장에서는 이 게임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당시 김정주는 정상원에게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이 필요하다고 전했고, 그렇게 그는 자신을 포함한 4명으로 R&D 팀을 구성해 전략 시뮬레이션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우리도 이런 거 필요하지 않나? 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에서 출발한 R&D 프로젝트였지만, 정상원 입장에서는 이 시도가 좋았다. 앞서 언급했듯 정상원은 [문명]을 포함해 [삼국지] 등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무모한 도전일지언정,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당시 정상원은 [스타크래프트] 같은 컨트롤을 유지하면서도, 온라인게임처럼 조금 더 매시브하게 다룰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자 했다. 유닛은 최대한 개성을 부각하면서 파츠 별 업그레이드 등을 디테일하게 구성해 육성의 재미를 높였고, 이렇게 키운 유닛은 다양한 플레이어의 특성과 호흡해 여러 전략을 구사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전쟁은 실시간으로 일어나게끔 구현해 그 안에서 유저들이 신나게 놀 수 있도록 설계했다. 밸런스 역시 중요했던 만큼, 여러 실험을 통해 살려냈다.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겼던 정상원의 노하우가 모두 담긴 셈이다.

물론 아픔도 따랐다. 불과 4명으로 만들기에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았을까. 특히 디자이너가 한 명이었다. 결국, 정상원은 자구책으로 인간 유닛의 팔과 다리를 떼다 로봇 기체에 붙이는 등 힘겹게 게임을 풀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상원은 마치 이런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바람의 나라]만큼이나 개발 과정이 즐거웠다.


▲ [택티컬 커맨더스]는 게임 내용 외 분위기도 좋았다. 특히 “너를 위해 나를 희생하겠다!” 같은
전우애를 자극하는 특유의 전쟁 분위기를 연출해 게이머들의 감성을 두드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택티컬 커맨더스]는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극찬을 받았다. 게이머들의 호평이 줄을 이었다. 2000년에는 대한민국 게임대상에서 우수상도 받았다. 게다가 [택티컬 커맨더스]는 해외로도 진출했다. 북미에서 진행하는 '인디게임 페스티벌'에 출품한 것이다. 여기서 [택티컬 커맨더스]는 대상은 물론 인기상, 게임 디자인상, 기술상까지 총 4개 부문을 휩쓸었다. 2001년에는 게임스팟이 선정한 최고의 인터넷 전략 시뮬레이션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야말로 [택티컬 커맨더스]는 한국이 아닌 세계에서 통하는 게임으로 부상한 셈이다.

그러나 이 게임은 결국 정상원에게 '비운의 명작'으로 남았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에 이 게임은 R&D 프로젝트였다. 4명이 만든 게임이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건 무리였다. 정상원 역시 게임을 회사에 선보인 이후, 확신을 얻으면 인력을 더 투입해 게임을 완성할 참이었다. 그러나 [택티컬 커맨더스]는 분위기에 휩쓸려 완성도 없이 정식 서비스까지 진행하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게임은 호평을 받았지만,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각종 문제는 [택티컬 커맨더스]를 힘들게 했다. 결국, 이 게임은 2004년 들어 서비스를 종료하고 만다. 한국의 [스타크래프트]가 될 수 있었던 게임 하나가 정상원에게 비운의 명작으로 남게 된 셈이다.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


▲ 정상원은 넥슨을 퇴사한 후 네오위즈에서 [택티컬 커맨더스]를 추억하며 [프로젝트GG]를 준비했지만, 
아쉽게도 이 게임은 개발이 중단됐다. 참고로 사진은 [택티컬 커맨더스]


넥슨을 떠나 네오위즈로…

때는 04년. 당시 정상원은 김정주와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가장 민감한 부분인 보상체계에 따른 갈등이었다.

정상원은 김정주와 이 문제를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갈등의 골은 시대 흐름과도 연관이 있다. 당시만 해도 게임업체는 급여가 낮은데다 인센티브 제도도 아직 온전하지 못했다. 인재들은 애사심도 낮은 편이었다. 실력 있는 개발자들은 필요한 것을 익힌 이후 창업해 대박이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일부 몸집이 커진 기업은 상장을 통해 주식을 배정하거나 복지를 강화하는 식으로 문제 해결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넥슨은 큰 변화가 없었다.

이에 개발자들은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개발 총 책임자였던 정상원은 결국 퇴사를 선택하게 된다. 9년 가까이 몸담은 직장이었지만, 보상 문제는 어쩔 수 없었다. 현재 넥슨의 반 페이지를 채운 그의 퇴사는 큰 사건이었다.

회사를 나온 정상원은 막막했다. 홧김에 나온 것이라 이후 마땅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넥슨에서 마이더스의 손으로 군림했던 만큼, 해야 할 일은 금방 정해졌다. 과거 넥슨에서 함께 했던 옛 동료 박진환(당시 네오위즈 사장)이 투자하겠다며 찾아온 것이다. 투자에 응한 정상원은 사람을 서서히 끌어모으며 새로운 법인 띵 소프트를 설립했다. 띵(Thing)은 앞서 설명했듯 정상원의 닉네임이자 넥슨 시절 쓰던 이메일 주소였다.

당시 띵 소프트에 투자한 네오위즈는 피망이라는 게임포털을 갓 만든 상황이었다. 여기에 여러 게임을 서비스할 예정이었지만,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네오위즈 사업 담당자들은 게임 서비스에 필요한 것들을 조언 받기 위해 정상원을 자주 찾았다. 이렇게 네오위즈와 교류하던 정상원은 결국 설득 끝에 회사에 들어가기로 한다. 네오위즈가 띵 소프트를 인수하고, 정상원은 네오위즈의 신규 개발 조직을 총괄 지휘하는 형태였다.

그렇게 정상원은 네오위즈라는 두 번째 게임 직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피파온라인]과 [피파온라인2]의 성공적인 안착이다. [피파온라인]은 정상원이 직접 선두에 서서 EA와 공동 개발해 내놓은 게임이다. EA는 스스로 이 게임을 만들어 테스트했지만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고 무너진 전례가 있었다. 정상원은 실패 이유를 어느 정도 꿰뚫고 있었고, 그의 리드 하에 [피파]가 온라인 플랫폼에 맞도록 전체가 재 디자인된 케이스다. 공동개발이긴 했지만 사실상 EA는 서포트하는 형태였고, 네오위즈 개발팀이 대부분을 주도했다. 이렇게 [피파온라인]은 5개월 만에 완성돼 큰 인기를 누렸다. 이에 기반해 후속작으로 나온 [피파온라인2]는 한국 온라인게임 최고의 스포츠 장르로 군림하게 된다. [스페셜포스] 등과 호흡해 피망도 훌쩍 크고 있었다.


▲ 정상원이 선두에서 개발을 지휘한 [피파온라인2]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피파온라인2] 이후에도 정상원은 과거 넥슨에서 그랬던 것처럼, 성공할 수 있는 게임보다 다양한 시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다. 그는 애초에 ‘무조건 성공할 수 있는 게임은 없다’고 여겼다. 실패를 겪고 또 실패를 겪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실패 확률을 줄이는 것이 온라인게임이 수도 없이 쏟아지던 시기에 게임을 개발하는 방법으로 여겼다. 그렇게 네오위즈 시절 정상원이 주도한 게임은 [NBA스트리트온라인], [워로드], [피구쏘구], [퍼펙트KO], 등이 있다. 이름도 기억하기 힘들 만큼 모두 잊혀진 게임이다. 맞다. 대부분 시장에서 실패한 게임이다.

그러던 2009년. 한 뉴스가 매체를 통해 보도됐다. 정상원이 네오위즈 북미 R&D 센터로 발령 났다는 것이다. 이 소식은 금방 전해져, 신작을 계속 실패한 정상원이 결국 경질됐다는 식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물론 이건 사실과 달랐다. 정상원이 주도한 일부 게임이 실패로 돌아섰지만 [피파온라인2]는 해를 거듭할수록 더 인기를 얻고 있었고, [크로스파이어]의 중국 서비스 등이 터지면서 네오위즈는 최고의 게임사 중 하나로 성장해 있었다. 경질당할 상황이 아니었다. 문제는 대표와의 갈등이었다. 네오위즈는 이미 기업분할을 통해 지주회사 체제로 출범할 만큼 몸집이 커져 있었다. 당시 네오위즈 게임개발은 전부 정상원(당시 부사장)이 책임지고 전담하는 형태였는데, 규모가 커진 네오위즈가 서서히 여기에 간섭이 들어온 것이다. 정상원은 이런 간섭을 계속 밀어냈다. 회사가 생각하는 방향이 정상원은 물론 그가 거느린 개발조직에 해를 줄 수 있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회사의 방향과 개인의 신념간의 충돌은 계속 트러블을 생산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은 팽팽해져만 갔다.

결국 정상원은 회사에서 통제할 수 없는 인물로 이미지가 굳어져 버렸다. 특히 최관호 이후 새로 부임한 이상엽 당시 네오위즈 대표와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 결국 정상원은 다시 회사를 나가기로 한다. 그 누구도 그의 퇴사를 막지 않았다. 넥슨에 이어 네오위즈까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이별을 맞이한 것이다. 국내 최고의 게임개발자 중 한 명이자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린 정상원이 어떤 면에서 초라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회사를 떠난 정상원은 답답한 마음을 추스르고자 가족들과 잠시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자신이 네오위즈USA R&D 센터에 발령 났다는 뉴스를 접했다. 씁쓸했다. 방법은 없었다. 그냥 받아들여야 했다.


누가 이 남자를 씁쓸하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럼 잠시 정상원의 게임 개발자 인생을 돌아보자. 그는 [바람의 나라]를 시작으로 게임 개발의 길을 걸었다. 무엇보다 가장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확신을 얻은 그는 게임 개발자로서의 신념이 명확히 확립된다.

앞서 설명했듯, 정상원은 게임을 개발함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도전에 있다고 봤다. 교과서 같은 이야기지만, 교과서 같기에 맞는 말이다. 그는 계속 도전을 해야 여러 형태의 게임이 나올 수 있고, 이렇게 새로운 게임이 나와야 올바른 시장이 형성되고 나아가 산업이 발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는 여기에 확신을 갖고 있다. 때문에 도전에 따른 실패는 자연스런 결과로 생각한다. 게임 100종이 나오면 100종 모두 성공할 수 없다. 실패에서만 얻을 수 있는 학습과 교훈이, 결국 실패 확률을 줄이는 열쇠 정도일 뿐이다.

실제로 정상원은 자신뿐 아니라 후배 개발자들에게 이런 인식을 심어주는 멘토로 활약해왔다. 만약 넥슨 시절, 그가 허무맹랑한 아이디어를 그냥 무시해 버렸다면? 게임 실패를 겪은 후배들에게 격려가 아닌 압박을 줬다면? 아마 넥슨은 히트작이 가장 많은 회사 이미지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넥슨과 네오위즈를 거칠게 떠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사실 그가 조금만 더 융통성 있는 처신을 보였다면 지금 그는 넥슨이 됐든 네오위즈가 됐든 높은 위치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융통성이라는 것이 게임 개발자로서 신념을 버려야만 가능했다. 정상원은 이게 싫었다. 절대 버릴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정상원이 넥슨 수장으로 있던 시절, 사실 사업은 모두 김정주가 하고 그는 어디까지나 개발분야에 대해서만 대표직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회사가 크게 성장했다. 몇 천 억대 매출을 기록하였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누가 뭐래도 게임이었다. 그리고 그 게임은 게임개발자들에 의해 탄생했다. 당연히 정상원은 이에 맞는 대우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야 튼튼한 개발조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고, 스타 개발자가 탄생할 수 있고, 무엇보다 시장 소비층(게이머)의 감정을 두드리는 게임이 탄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다소 책임감 없는 행동이긴 했지만, 그 역시 회사를 잃었다. 이는 후배들의 보상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개발자 맏형의 반기였던 셈이다.

네오위즈에서도 상황은 비슷하였으며 그가 네오위즈를 떠날 무렵, 한국의 온라인게임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원은 회의를 느꼈고, 당시에도 더 신선한 무엇인가를 내놓기 위해 후배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때문에 정상원은 한국 게임사에 기록돼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이 남자가 있었기에 초창기 온라인게임은 다양성을 부여 받았고, 이 남자가 있었기에 게임개발자들의 처우나 위치에 대한 문제가 고려됐기 때문이다.


▲ 현재 정상원 대표가 제작 중인 [페리아 연대기]


명작을 만들고 싶다

그렇다면 지금 정상원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미국에서 몇 개월 휴식을 취한 이후,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소규모 독립 개발사 띵 소프트를 설립했다. 2010년, 두 번째 띵 소프트였다. 이를 설립한 배경 역시 단순하다. "게임개발자가 게임을 만들어야지"라는 명쾌한 논제이다. 여기서 그는 [페리아 연대기]라는 MMORPG와 일본 코에이테크모의 유명한 전략 시뮬레이션인 [조조전]을 기반으로 한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을 만들고 있다.

특히 [페리아 연대기]는 그가 10년 만에 시도하는 RPG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게임은 자유도를 기반으로 월드의 모든 것을 게이머가 직접 창조할 수 있는 형태로 구현돼 있다. 누가 봐도 신선해 보이는 게임이다. 정상원은 [페리아 연대기]를 기획하며 과거 [바람의 나라]를 떠올렸다. 여기서 얻은 한 가지, 바로 온라인게임은 플레이어(유저)가 하나의 콘텐츠로 호흡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창조하는 세계”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페리아 연대기]가 성공할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늘 강조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우리는 충분히 이 게임을 기다려봐도 좋은 이유가 된다.

또 하나, 정상원은 반기를 들었던 넥슨에 10년 만에 재합류했다. 넥슨이 작년 띵 소프트를 인수했기 때문이다. 정상원은 시대 흐름을 겪으면서 시장의 변화를 누구보다 냉철하게 보고 있다. 이제 시장은 과거와 다르다. 온라인게임을 다룰 수 있는 회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소규모 독립 개발사에서 선택할 길은 몇 가지 없다. 즉, 정상원이 다시 돌아온 것은 넥슨이 앞으로도 온라인 사업을 튼튼하게 이어갈 수 있다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며 이는 곧 게임 개발자로서 현실과 타협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 정상원은 또 한 번 순수한 꿈을 꾸고 있다. 후배 개발자들의 후방 지원을 톡톡히 하면서, 동시에 띵 소프트와 정상원을 대표할 수 있는 명작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 그가 빚어낸 게임이 계속 실패를 거듭한다면, 결국 그에게 명작은 비운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택티컬 커맨더스]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패를 즐겨왔던 그이기에 큰 걱정은 되지 않는다. 게이머들의 감정을 두드리는, 정말 ‘띵’ 소리나는 그의 게임을 한 번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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