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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치] 마이너 게임기 열전: 패미컴이 나온 이유 ‘카세트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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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콘솔게임 시장은 보통 닌텐도의 ‘패밀리 컴퓨터’부터 시작됐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패미컴보다 먼저 발매돼, 한순간 일본 게임기 시장의 왕자로 군림했던 게임기가 있었다. 

1981년부터 1983년. 2년이라는 짧은 왕권을 누렸지만 일본 게임기 시장 쉐어 1위를 기록하며 위세를 떨쳤던 에폭(EPOCH) 사의 ‘카세트 비전’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에폭(EPOCH) – 카세트 비전

1980년 이전 일본의 게임기 시장은 에폭 사의 ‘테레비 테니스’나 닌텐도의 ‘TV게임 15’ 같이 기기 내에 게임이 들어가 있는 내장형 게임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미 기기에 여러 개의 게임이 포함돼, TV에 연결하여 스위치로 플레이하고 싶은 게임을 선택하여 플레이하는 방식이다. 입때까지만 해도 북미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ATARI VCS’와 같은 카트리지 교체식의 게임기는 아직 도입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 일본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였던 에폭사의 '테레비 테니스'(좌) 라이벌이었던 닌텐도의 'TV게임-15'(우)
(사진 출처: ZUKANDA(좌)/ 유투브(우))

닌텐도와 에폭은 이러한 게임기를 게임 종류만 달리하여 ‘테레비 블록’, ‘테레비게임 6’ 등의 마이너 체인지 버전으로 만들어 발매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에폭에서 야심 차게 내놓은 게임기가 있었으니, 바로 ‘카세트 비전’ 이다.


▲ 지금 보면 발전소에 있을 법한 느낌? 카세트 비전 모습 (사진 출처 : consollection)


▲ 카세트 비전의 상세 스펙

카세트 비전은 본체에 CPU가 없고 그래픽, 전원, 컨트롤러만 들어간 독특한 구조였다. CPU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8Bit니 16Bit니 하는 비트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 게임기의 성능도 동시대 북미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ATARI VCS’보다도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 게임화면은 대충 이런 느낌이다. 도트 하나하나의 크기가 엄청난다.
카세트 비젼용 게임인 '뉴 베이스볼' (사진 출처 : 니코니코 동화)

하지만 당시 일본 게임기 시장에는 2만 엔(한화 24만 원) 가까이 되는 고가 기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모두 내장형 게임기였기 때문에, 기기에 포함된 타이틀 수가 아무리 많다 한들 모두 비슷한 방식의 게임들이었다. 막대기를 조작하여 공을 튕기는 테니스, 퐁, 블록 격파 류의 변종 버전이 여러 개 수록되어 있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  카세트 비젼용 카트릿지
사용 매뉴얼이 쓰여 있어 신선한 느낌 (사진 출처 : WEBZAKKI)

이러한 상황에서 카세트 비전이 저렴한 가격은 물론 원하는 소프트웨어를 따로 구매하는 방식으로 출시됐으니, 눈길을 끌 수밖에. 당시 본체 가격 12,000엔(약 14만 원)이었고, 소프트 1개당 약 4,980엔(약 6만 원)에 판매됐으니 소비자들에게는 군침이 도는 가격이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CD나 게임 팩을 교체해서 게임을 즐기는 게 당연하지만 당시로써는 원하는 게임카트리지를 기기에 끼워서 플레이한다는 개념이 매우 신선했다. 또, 매뉴얼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라 게임팩에 조작설명이 쓰여있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처럼 낮은 가격대와 매번 다른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는 점은 어린 아이들과 게임기를 사줘야 했던 부모들 모두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무엇보다 스포츠, 액션, 슈팅 등 다양한 장르를 즐길 수 있었기에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하며 일본 내의 게임기 시장을 석권하였다.

카세트 비전은 아케이드로 이미 나와 있던 게임의 카피 버전을 상당수 출시했다. 조악한 그래픽이긴 하지만 아케이드 게임을 집에서 즐길 수 있다는 점도 게임기 보급에 한 몫할 수 있었다.

물론 요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카피 게임들은 속칭 ‘고소미’(법정 공방)를 불러오기에 딱 좋은 작태였다. 하지만 그 당시는 천하의 닌텐도조차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카피 게임을 개발/판매했을 정도로 저작권 의식이 희박했던 시절이었다. 마치 지금의 카카오톡 ‘게임하기’에 나온 모바일게임을 두고 카피캣 공방이 벌어지듯 말이다.


▲ '파쿠파쿠 몬스터'는 딱 봐도 팩맨의 카피 버전이다
(사진출처 : 니코니코 동화) 


▲ 사다리 배치등이 '동키콩'과 같은 카세트 비젼용 게임 '몬스터 맨션'
(사진출처 : 니코니코 동화)


▲ 닌텐도의 숨기고 싶은 과거 중 하나인 '스페이스 피버'
(사진 출처 : 게임역사의 이야기)

위에서 소개한 게임들 이외의 몇 가지 카세트 비전용 게임의 플레이 화면을 아래에 소개해본다.

 
▲ 나무꾼 요사쿠 (영상 출처 : 유튜브)

▲ 파쿠파쿠 몬스터 (영상 출처 : 유튜브)

▲ 갤럭시안 (영상 출처 : 유튜브)

▲ 몬스터 맨션(카세트비젼 Jr 조작영상) (영상 출처 : 유튜브)

카세트 비전은 1981년 발매 이후 1983년까지 꾸준히 인기를 얻으며 약 70만대의 판매고를 올리며 일본 내 압도적인 쉐어 1위를 기록했다. 카세트 비전에 대항하기 위해 반다이에서 ‘알카디아’, 아타리에서 ‘ATARI VCS’의 일본판인 ‘ATARI 2800’을 내놓기도 했지만 둘 다 북미 게이머들의 취향에 맞추어진데다 가격 역시 카세트 비전 두 배 가까이하는 가격이었다. 결정적으로 게임의 품질 자체가 카세트 비전에 비해 딱히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1위의 아성을 깨트릴 수는 없었다.


▲ 누구냐 넌 (사진 출처 : 게임 노스탤지어)
 
예로 반다이는 북미의 게임기인 알카디아에 자사의 판권 캐릭터를 이용한 게임 ‘마크로스’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다시피 게임 수준은 참담했다. 당시 애니메이션 마크로스를 기대하고 이 게임을 구매했을 어린아이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지.

하지만 2년간 계속된 카세트 비전의 짧은 독주가 끝나게 되는 사건이 찾아온다. 

바로 닌텐도의 초대형 히트작 ‘패밀리 컴퓨터’(이하 패미컴)이다. 패미컴은 에폭 사의 성공에 힌트를 얻어 카세트 비전과 크게 차이 없는 가격 14,800엔(약 19만 원)으로 게임기를 출시했다. 하지만 게임기의 성능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나게 된다. 비슷한 가격에 그래픽, 사운드 등이 카세트 비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수준을 보여주며 당시의 게이머들을 놀라게 만든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플레이스테이션 1을 보다가 플레이스테이션 3를 본 수준의 진화로 느껴졌을 것이다.


▲ 이러한 게임만 보다가… (사진 출처 : 니코니코동화)


▲ 이러한 게임을 만났을때는 다들 큰 충격을 느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패미컴 마스터피스)

패미컴은 빠른 기세로 카세트 비전이 가지고 있던 쉐어를 빼앗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에폭은 사실상 사용하지 않았던 다이얼 패드를 빼고, 2인용 기능을 삭제한 컴팩트 버전 ‘카세트 비전 Jr.’를 5,000엔(약 6만원)이라는 파격가에 발매했다. 

하지만 염가 전략에도 이미 화려한 그래픽에 눈길이 쏠린 유저들은 조악한 그래픽과 사운드의 ‘카세트 비전’에 관심을 둬 주지 않았고, 결국 흥행에는 실패했다. ‘카세트 비젼 Jr.’의 5,000엔이라는 가격은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발매된 거치형 콘솔 기기 중 최저가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  카세트 비젼 Jr. (사진 출처 : Jugem)


▲ 카세트 비젼의 차세대 버젼인 슈퍼 카세트 비젼. 
아쉽게도 기존 카세트 비젼과의 호환기능은 없었다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이에 굴하지 않고 에폭 사는 1984년에 ‘슈퍼 카세트 비전’이라는 고성능 게임기를 내놓는다. 패미컴보다 월등한 성능에 ‘드래곤볼’, ‘루팡 3세’ 등 인기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한 게임을 내세워 반격을 꾀한 것이다. 

슈퍼 카세트 비전의 킬러 타이틀이었던 ‘드래곤볼 : 드래곤 대비경’은 현재 일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프리미엄 타이틀이 됐다. 구매하려면 15,000엔~20,000엔(약 18만 원~24만 원 사이)의 거금을 줘야 구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패미컴이 이미 일본 내 전체 게임기 쉐어의 95%를 점령하는 거대 공룡이 된지라 여기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에폭은 1987년에 게임기 사업을 철수하고 1989년 패미컴의 서드 파티로 참가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에폭 사는 서드파티에 참가한 이후, 닌텐도에게 슈퍼마리오 시리즈의 완구화 판권을 받아 슈퍼마리오 완구를 제조/생산하는 등 현재까지도 닌텐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에폭사에서 발매한 슈퍼마리오 장난감
버튼을 눌러 점프하고 장애물을 피하는 형식의 게임 (왠지 가지고싶다…)
(사진 출처 : 아마존 재팬)

일본 게임기 시장을 석권했으면서도 패미컴의 그림자에 가려져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 카세트 비전. 비록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카세트 비전의 성공이 있었기에 닌텐도가 패미컴을 개발 할 수 있었고, 패미컴이 성공함으로서 지금의 게임기 시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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