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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한국사 게임들, 국뽕 아닌 아픈 역사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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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 중 거리나 숙소에서 한국산 제품을 보면 왠지 모를 뿌듯한 기분이 든다. 올림픽과 같은 국제대회 시상식에서 태극기가 다른 나라 국기보다 높은 곳에 걸리고 애국가가 흐르면, 가슴이 벅차 오른다. 이러한 감정은 한국사 속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느낄 수 있다.

역사 속 영웅담은 한국 사람 누구나 마음 한편에 갖고 있는 애국심을 자극하기에 매우 좋은 소재다. 그래서 이를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이 큰 인기를 끄는 것이다. 게임 역시 마찬가지인데,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약 10년간의 한국사 게임 전성기에 나온 게임들을 보면 만주 벌판을 달리는 광개토대왕이나 해상왕 장보고, 성웅 이순신이 대표 인물로 등장한다.

▲ 과거 한국사 게임은 위인들의 활약상을 주로 다뤘다 (사진출처: acesaga 유튜브 영상 갈무리)

10년이면 강산도, 한국사 게임도 변한다

한국사 게임 전성기는 RTS 장르 인기의 쇠퇴, 국내 패키지 게임 시장의 붕괴와 동시에 막을 내렸다. 이후 10년 넘게 한국사를 소재로 한 신작을 보기 어려웠고, 나온다고 하더라도 널리 회자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인디게임 개발사·팀을 중심으로 한국사를 소재로 한 다수의 게임이 개발 중이다.

인디게임 개발사·팀이 중심이 된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한국사 게임의 부활’에 그치지 않는다. 장르와 배경이 되는 시대, 그리고 주제 의식까지 과거와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RTS가 아닌 어드벤처 장르로, 고대사, 고려 초, 조선 중기가 아닌 근·현대사로, 그리고 영토 확장과 전쟁 승리의 영광스런 순간보다 식민지 치하와 첨예한 이념 갈등에 의한 평범한 사람들의 아픔에 주목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와 같은 경향을 확인해보자. 먼저 겜브릿지에서 개발 중인 ‘웬즈데이’는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게임이다. 위안부 피해자로 설정된 가상의 인물 ‘순이’가 과거로 돌아가 친구들을 구한다는 내용으로, 실존 장소인 인도네시아 암바라와 수용소에서 착안한 가상의 공간 ‘사트킨 섬’이 무대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식민지 조선인은 물론 중국인, 인도네시아인, 네덜란드인 등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게 된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게임 '웬즈데이' (사진출처: 겜브릿지 공식 홈페이지)

다음으로 2인으로 구성된 인디 개발팀 COSDOTS에서 개발한 ‘언폴디드’ 시리즈가 있다. 제주도민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은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한 게임으로 가상의 문학소년 ‘동주’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제주 4.3사건은 현재까지도 민감한 이념 갈등을 내포하고 있어 한국 현대사 전문 연구자들조차 다루기 어려워하는 소재이지만, ‘언폴디드’ 시리즈는 플레이어가 피해자의 시선과 행동, 심리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 짜임새 있는 서사로 모바일로 나온 1편과 2편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마지막으로 MazM 시리즈로 유명한 인디 개발사 자라나는 씨앗이 개발 중인 MazM 페치카가 있다. 연해주 독립운동을 다룬 이 게임은 안중근, 최재형, 이위종 등 낯익은 이름의 위인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게임의 주인공은 앞서 언급한 위인들이 아니라 ‘표트르 세르게이예비치 벨로프’라는 가상의 한인 청년이다. 러시아 제국의 영역이지만 사회주의 운동과 일본 제국의 입김이 교차하는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를 무대로 평범한 한인 청년이 겪는 내적 갈등, 더 나아가 훗날 ‘고려인’이 되는 이들이 겪은 아픈 역사에 대한 공감이 이 게임의 목표다.

▲ 제주 4.3 사건을 다룬 게임 '언폴디드' (사진출처: COSDOTS 공식 홈페이지)

▲ 연해주 독립운동을 다룬 게임 MazM 페치카 (사진출처: 텀블벅 펀딩 페이지)

한국사 게임이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정리하자면 역사에 실존했던 위인보다는 평범한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영광스런 과거사가 아닌 아픈 기억을 되짚어 보는 것이 최근 개발중인 한국사 게임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

가장 직접적인 것은 비슷한 주제의식을 지닌 해외 게임들의 성공을 들 수 있다. 특히 대만 게임 개발사 레드 캔들 게임즈가 개발한 ‘반교’는 지난 2017년 스팀 출시 이후 전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불러모으며 콘솔과 모바일로도 출시됐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게 됐다. 최근에는 동아시아 사회, 문화 역사 연구에 있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하버드-옌칭 연구소 소장자료로 채택되며 학술적 가치까지 인정받게 됐다.

반교가 호평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잘 짜인 서사다. 대만 현대사가 대다수 게이머에게 낯선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열정 가득한 민주투사가 아닌 평범한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비극적 사건에 대한 공감을 손쉽게 유도한 덕분이다. 영광스런 과거사보다 아픈 역사가 세계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보다 쉽고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반교’가 입증한 것이다.

대만 현대사를 소재로 한 공포게임 '반교' (사진출처: 스팀)
▲ 대만 현대사를 소재로 한 공포게임 '반교' (사진출처: 스팀)

아울러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이전보다 더 많아졌고, 접근도 용이해졌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정치적, 이념적 논리에 갇혀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은 크게 주목 받지 못했고, 시선을 돌린다 하더라도 특정 이념·성향에 치우쳤다는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가 100%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건설적인 논의가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마지막으로 게임에 대한 인식 변화를 들 수 있다. 과거에는 게임을 단순히 ‘놀이’로 인식했기에 비극적 역사를 다루기 어려웠다. 그러나 현재 게임은 영화, 소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화콘텐츠’다. 이에 아픈 역사를 놀이로 ‘소비’하는 것이 아닌, 게임이란 콘텐츠를 통해 공감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됐다.

10여 년 만에 돌아오는 한국사 소재 게임들은 과거와 달리 ‘한국 사람만’ 즐기는 게임이 아니다. 전 세계 게이머들에게 충분히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소재와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이 중에서 ‘반교’와 같은 게임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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