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녹 Inoch 만신전의
사제, 대륙의
중심에 솟은 산은 옛 말로 하얀 문, 즉 히라마라고 했다. 그 산 깊은
곳에 왕국 하나가 안겨 있었다. 어떤 나라보다 오래되었으나 나가는
자도 들어오는 자도 거의 없어 잊히다시피 한 곳이었다. 그곳의 이름을
히라마칸드, 그곳에 사는 자들을 히라마 인이라 했다. 느브람의 아들 이녹은 여섯 형제자매 가운데 맏이였다. 아버지와 삼촌은 제사장, 할아버지는 은퇴한 대제사장이었다. 아버지의 형제는 아홉이나 되어서 그는 삼촌들, 고모들, 사촌들에게 둘러싸여 자랐다. 이녹은 아버지를 닮아 성품이 경건하고 단호했거니와 경전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더구나 열다섯 살에 권능 가운데 하나인 이름을 짓는 힘이 나타났으므로 누구도 그의 장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녹을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 어른들 사이에서 이녹이 조숙한 대답을 하는 것을 좋아했고, 글을 쓰면 아들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었으며,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도 아들의 의견을 일부러 물어보았다. 이녹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와 사랑을 생생히 느끼며 자랐다. 조부모와 어머니와 동생들, 삼촌들, 사촌형제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며 이끌어주는 것도 알았다. 가족은 마치 이녹을 지켜주는 성과도 같았다. 그의 등에서 낯선 것이 돋아나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혹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커지더니 옷이 잘 들어가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어머니는 꼽추가 되는 게 아니냐고 몹시 걱정했다. 이녹도 걱정스러웠지만 괜찮아질 거라고 애써 어머니를 위로하고는 천으로 겹겹이 감싸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했다.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찾아와 천을 풀어보라고 했다. 수십 일 만에 풀어본 혹에는 기묘한 털이 돋아나 있었다. 그것은 날개였다. 왕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모두 외우고 있는 느브람이었지만 이런 일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것은 징조인가? 그렇다면 흉조인가 길조인가? 그걸 알고 싶다면 제사장 회의에 데려가 예언을 얻어야 했다. 그러려면 이녹의 상태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무래도 불안하니 숨기자고 했다. 삼촌도 이대로 밖에 내보내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다. 심지어 할아버지조차도 고개를 저었다. 만약 흉조로 밝혀지면 어찌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느브람은 이녹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빛나는 미래를 기대해왔다. 그런 아들을 집안에 가둬두자는 말인가?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일생 동안 죄수처럼 살다니 얼마나 비참한 노릇인가? 심지어 날개는 시시각각 자랐다. 이대로라면 날개를 숨기기 위해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못할 판이었다. 마침내 느브람은 제사장 회의에 나가 이녹을 보였다. 길조였으면 하는 한 가닥 기대를 품고서. 전통대로 열 명의 제사장은 예언을 얻을 자를 제비로 뽑았다. 그런데 뽑힌 자는 다름 아닌 느브람이었다. 제사장들은 이 또한 하나의 징조라고 보고는 그대로 느브람에게 예언을 맡겼다. 사흘 동안 신성한 나무 밑에 앉아 있던 그는 해쓱해진 얼굴로 제사장 회의에 나타났다. 그가 전한 예언은 충격적이었다. `히라마칸드의
마지막 날, 그건
곧 왕국을 멸망시킨다는 뜻일까? 사람들은 크게 동요했다. 누구보다
동요한 것은 이녹 본인이었다. 자신이 왕국을 멸망시킨다니? 그는 아버지를
붙들고 자신이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고,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느냐고
물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매달렸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벽녘,
탈진하여 쓰러진 소년의 곁에는 찢어진 깃털이 수없이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가 가만히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뜬 이녹은 놀랐다. 찾아온 사람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사촌누나 달리아드였다. 달리아드는
이녹보다 고작 서너 살 많은 소녀였는데 그랬기에 그런 일을 벌일 만큼
무모했는지 몰랐다. 이녹은 멍한 상태로 달리아드를 따라 신전을 빠져나가
산으로 달아났다. 하루 종일 발 닿는 곳으로 나아갔지만 준비가 부족해
둘은 굶다시피 했고 추위도 피할 길이 없었다. 이튿날 우연히 발견한
동굴에 들어가 겨우 불을 피우고 있자니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 모조리
꿈만 같았다. 그러나 등 뒤에 맥없이 늘어진 날개는 결코 꿈도 환각도
아니었다. 불 맞은편에서 이녹의 기색을 살피던 달리아드가 말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달리아드는 검을 가져왔지만 손이 덜덜 떨려서 고작 피 한 줄기를 내는 데 그쳤다. 이녹이 직접 잘라내기란 더욱 쉽지 않았다. 한참이나 고군분투하던 둘은 서럽고 답답한 마음에 그만 목 놓아 울고 말았다. 늘 그들을 보살펴주던 어른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어린 둘이 어떻게 해보려 하니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신전에서 달아났을 때는 다행스러웠지만 이제부터 갈 곳도, 살 길도 마땅치 않았다.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했다. 그런 가운데 이 끔찍한 날개는 영영 이녹을 따라다닐 듯했다. 지친
달리아드가 먼저 잠든 후 이녹은 혼자 앉아 생각했다. 이대로는 자신도
누나도 살 길이 막막했다. 곧 추적대도 뒤따라 올 것이다. 히라마칸드는
산맥 안에 고립된 나라여서 도망쳐 살 만한 이웃나라도 없었다. 가자면
아주 멀리, 저 남쪽이나 북쪽의 나라들로 가야 할 텐데 말과 글로만
접한 그 나라들이 어디쯤에 있는지, 과연 살 만한 곳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결국 그들이 갈 곳은 없었다. 돌아가는 길뿐이었다. 돌아가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추적대가
그들을 발견했을 때 달리아드는 피를 멈춰보려고 담요는 물론 제 옷가지까지
모두 벗어 이녹의 등을 감고는 돌바닥에 엎드려 기도인지 뭔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머니, 저희를 구해주세요. 살려주시거나
아니면 어머니의 세상으로 데려가주세요. 저희는 너무 작고 어리석어서
저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예언은 왕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라 했지만 이녹은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핍박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그랬다. 그럴 힘도 없었지만, 있다 해도 차라리 고향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장차 제사장이 되려던 이녹은 경전을 외우다시피 해왔는데 문득 이런 구절을 생각해 냈다. `어머니께서
큰일을 일으키고자 할 때는 그렇다면
자신에게 날개가 돋은 이유도 분명히 있었다. 그제야 이녹은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세계의 수도, 델피나드에서는 날개 돋은 자들을 아스트라라고 부르며 그들 모두가 신관이 된다고 했다. 아스트라는 경건하고 청빈하게 살지만 왕족만큼이나 존경받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세상 곳곳에서 날개가 돋아난 아이들을 찾아 구해서 자신들의 일원으로 삼았다. 그런 아이는 어느 종족에나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제사장 회의의 의견도 크게 기울어져 마침내 이녹은 델피나드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간
이녹은 홀로 오래 생각한 끝에 갑자기 열 살은 더 먹은 것처럼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떠나는 자리에는 달리아드만이 왔다. 그녀도 겨우 회복된 참이었다.
이녹은 미소를 보였다. 달리아드가
언젠가 돌아오라고 하자 이녹은 `누나가 날 구했으니 그러겠다`고 답했다.
델피나드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여행자가 고삐를 쥔 나귀 등에 앉아 이녹은
히라마칸드를 떠났다. 한쪽만 길게 늘어진 날개가 우스꽝스럽게 긴 그림자를
만들며 흔들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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