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사 데이어 Kyprosa Daeior 겨울
전나무의 딸 전나무의
성은 데이어 고원에 솟은 창날이었다. 춥고 황량한 그곳에서 홀로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전나무의 왕, 제임 데이어가 전사하고 그의 아내 로지아가 영주가 되었을 때 가문에는 세 아들이 있었으나 누구도 뒤를 잇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세월이 흘러 늙은 로지아에게는 손자 하나와 손녀 하나뿐이었다. 할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제임 데이어, 그리고 실편백나무의
이름을 따서 붙인 키프로사 데이어. 나무여서 사람들은 괴상하다며 혀를 찼다. 키프로사의 삶은 이름보다 더 나빴다. 아버지는 미치광이 소리를 듣다가 성을 떠났고, 어머니는 갓 난 딸을 버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영주인 할머니는 그녀를 미워하여 하녀들 사이에서 부엌데기로 자라게 했다. 성을 떠났던 아버지가 동생 오키드나를 보내왔던 날, 로지아는 대노하여 아기를 내버리라 했다. 키프로사는 밤중에 홀로 나갔다. 숲에 버려진 아기를 찾으려 했지만 어느새 길을 잃었다. 혹한이 다가오는 시기였다. 걷고 또 걸었지만 사냥꾼의 오두막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별빛이 점차 사라진다 싶더니 높은 벼랑이 앞을 가로막았다. 길을 단단히 잘못 든 모양이었다. 이대로는 아기를 구하기는커녕 키프로사가 먼저 얼어 죽을 판이었다. 키프로사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벼랑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보니 어른이 겨우 들어설 법한 갈라진 틈이 나타났다. 내부가 어떻든 칼바람이 몰아치는 바깥보다는 나으려니 싶어 키프로사는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언저리는 좁았으나 좌우를 손으로 더듬으며 나아가던 도중 갑자기 주위가 탁 트였다. 사방에
불빛이 있어 키프로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런지
어떤지 모르지만 동굴 속은 연옥색 대리석으로 지은 둥근 홀이었다.
불빛은 벽을 따라 걸린 램프들에서 나는 것이었다. 키프로사는 한 바퀴
돈 다음 아치형 출구를 발견해 그리로 들어섰다. 복도를 지나 어느 방으로
나온 소녀는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자신의 침실이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같은 곳이 분명한데 풍경이 전혀 달랐다. 벽난로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포근한 거위깃털 이불이 깔린 침대가 있었다.
이불 위에는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파란 벨벳 드레스가 놓여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굴까? 누구이기에 이렇게 다정한 말을 할까? 키프로사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런 고운 옷이 자신에게 어울리지도 않을 것 같았고, 바느질 방 할멈이 자기 옷을 만든다는 것도 어색했고, 무엇보다 그런 짓을 하면 꿈이 깨져버릴 것 같아서였다. 꿈이더라도 아직은 깨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부녀는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레이븐은 내려가는 내내 키프로사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의 온기가 어찌나 낯설고도 눈물겨운지 키프로사는 내내 그 손에 꼭 매달려 있었다. 내려가서는
또 한 번 놀랐다. 두 번째라 그나마 빨리 예상할 수가 있었다. 어머니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키프로사를 안아주더니 머리를 다시 묶어주며
서둘렀다. 세 가족은 식당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죽은 시어드릭 삼촌,
도망친 덴 삼촌, 심지어 키프로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할아버지까지
모두 다 있었다. 할머니 로지아는 키프로사를 자기 곁에 앉히고 옷매무새를
만져주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전나무의
성에서 만찬 자리가 이렇게 왁자지껄했던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시어드릭
삼촌과 내일 사냥 나갈 계획을 짜고 있었고 덴 삼촌은 무슨 농담인가를
하다가 할아버지에게 핀잔을 듣고는 키프로사에게 도와달라고 눈짓했다.
키프로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지만 할아버지는 곧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깊은
숲 어딘가에 있다는 그림자 성에서는 모든 일이 전나무의 성과 반대로
일어난다고 했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전사하지 않았고, 할머니가 영주가
될 일도 없었고, 아버지는 떠나지 않았고, 삼촌도 죽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두가 키프로사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랬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일은 없었지만 이렇게 좋을 줄도 몰랐다. 어찌나 좋은지 이대로
여기에 눌러 살아야겠다고 거의 결심했을 정도였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만찬장으로 들어왔다. 시어드릭이
죽지 않았으니 엘마가 아기를 또 낳은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기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자신이 뭔가를 잊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뭐더라. "오키드나? 그게 누구지?" 깨달음은
느리게 왔다. 따뜻한 소음이 다시 만찬장을 천천히
의자를 밀고 나와 식탁에서 멀어졌다.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싶었지만 어느새 입구까지 와 있었다. 아버지가 그림자 성을 찾고 싶었던 심정은 이해가 갔다. 키프로사와 같았을 것이다. 전나무의 성이 을씨년스럽고, 영지를 다스리고 창병대를 지휘하느라 그를 돌봐주지 않는 로지아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림자 성에 남아버리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까? 그건 키프로사가 이곳에서 진짜 레이븐, 미치광이 레이븐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림자
성은 진짜가 아니었다. 그림자 성에서 오키드나는 영영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성을 떠나 다른 여자를 만날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키프로사가 여기 남아버린다면 진짜 세상에서 숲에 버려진 오키드나도 죽어 사라질 것이다. 지난밤 키프로사는 목숨을 걸고 성을 나왔다. 오키드나를 찾기 위해서. 그리 쉽게 저버릴 결심이 아니었다. 그림자 성을 빠져나오는 것은 쉬웠다. 전나무의 성과 똑같았기 때문에 익숙한 길 그대로 성문으로 나오면 되었다. 키프로사는 지난밤에 그랬듯 혼자 숲으로 나가며 발그레한 난롯불이 일렁거리던 침대와 그 위에 놓여 있던 파란 벨벳 옷을 생각했다. 다시는 입어볼 일이 없을 그 옷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게 될까? 아니면 그곳에 어울리는 그림자 소녀가 그 옷을 입고서 즐거워할까? 그새 눈이 내려 숲이 하얗게 빛났다. 어제는 왜 길을 잃었는지 모를 정도로, 마치 누군가가 인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키프로사는 곧 아기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동시에 멀리서 늑대 우는 소리도 들렸다. 겁나지 않았다. 걸음을 재촉해 나아가자 저만치 아기가 든 바구니가 보였다. 달려갔다. 망토자락이 전나무 가지를 스치자 언 눈이 부서져 떨어졌다. 얼어 죽지만은 않았기를. 제발 살아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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