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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기반 판타지도 통한다, 18년 역사 '거상'이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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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년간 서비스를 이어나가고 있는 MMORPG '거상' (사진출처: 게임메카 DB)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임진록’ 시리즈 2번째 작품 ‘임진록 2’는 한국사를 소재로 한 게임 중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색다른 그래픽과 시스템,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적절한 조화를 이룬 서사로 이전까지 국내 한국사 RTS(실시간 전략시뮬)에 따라 붙었던 ‘해외 유명 게임의 아류작’이라는 평가를 떨쳐냈기 때문이다. 

독립 확장팩 ‘임진록 2+ 조선의 반격(이하 조선의 반격)’ 출시 이후 국내 패키지 게임 시장이 뚜렷한 사양세에 접어들면서 ‘임진록’ 시리즈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정통성은 온라인게임 ‘천하제일상 거상(이하 거상)’으로 이어졌다. 지난 2001년, ‘조선의 반격’ 부록 게임으로 출발한 이래 한국사의 새로운 면을 조명하고 독특한 한국형 판타지 세계관을 구축하는 등,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18년 동안 대표 한국사 게임으로 자리잡고 있는 ‘거상’은 한국사를 어떻게 다뤘을까?

팔도 방방곡곡을 누비는 거상이 되다

2001년 방영을 시작한 MBC 사극 ‘상도’는 한국사를 문화콘텐츠 소재로 사용하는데 있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었다. ‘상도’ 이전 한국사를 소재로 한 대부분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은 전쟁, 정치, 또는 로맨스에 치중했다. 그러나 ‘상도’ 성공으로 한국사 속 경제도 사람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소재임을 입증했다. 이런 상황은 ‘조선의 반격’ 유저를 대상으로 테스트를 하고 있던 ‘거상’에게 큰 호재로 작용했다. 

‘거상’은 이름에 어울리게 기존 MMORPG와 확연히 구분되는 게임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당시까지 MMORPG는 필드와 던전에서 끊임없이 전투를 치르고, 경험치와 장비를 얻어 캐릭터를 육성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전란의 시대를 다룬 ‘임진록’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는 만큼 ‘거상’에서도 전투가 주요 콘텐츠이긴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장사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독특함 덕분에 ‘임진록’ 시리즈 팬들은 물론, 필드와 던전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전투에 지친 MMORPG 유저들도 ‘거상’에 관심을 갖게 됐다.

▲ 서비스 초기, 마을 주변은 언제나 장사를 하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사진출처: 게임메카 DB)

당시 게이머들은 ‘거상’의 독특함에 큰 매력을 느꼈다. 게임 이름처럼 ‘거상’이 되지 못해도, 한반도 주요 마을이 구현된 지도 위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 팔아 이윤을 남기는 과정에서 실제 조선시대 장돌뱅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는 평가다. 이처럼 ‘거상’은 전쟁과 같은 한국사 속 단편적인 사건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실감나고 깊이 있는 ‘체험’까지 제공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거상’을 지탱하는 핵심 원동력이다.

한국사 기반 한국형 판타지가 태어나다

초기 ‘거상’은 ‘조선의 반격’ 부록 게임으로 서비스를 시작한 만큼 ‘전운이 감도는 시대에서 큰 상인을 꿈꾸는 인물의 모험’ 정도의 간단한 스토리만 갖추고 있었다. 이처럼 전적으로 ‘임진록’ 시리즈 서사에 기대고 있었기에 원작이 흥행하고 있었던 시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RTS 전성기가 막을 내리며 ‘임진록’ 시리즈가 중단됨과 동시에 패키지 게임 시장 침체로 PC RPG ‘임진록: 동토의 여명’도 개발 중 흐지부지 되면서 ‘거상’에 위기가 찾아왔다.

‘거상’ 앞에 내려진 과제는 자기만의 서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거상’이 선택한 길은 한국형 판타지였다. 서비스 초기에도 두억시니, 오니 등 한국과 일본 전설 속 요괴들이 등장했고, 무령왕릉과 같은 실제 역사 유적을 던전으로 만들어 몬스터를 배치하는 등 실제 역사와 판타지를 오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여기서 더 나아가 2000년대 중반부터는 플레이어블 캐릭터 외에 구지모 일족, 챠우 등 오리지널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다.

▲ 신화와 전설상의 괴물들은 오래전부터 등장했다 (사진출처: 게임메카 DB)

이렇듯 단편적으로 심어져 있던 판타지적 요소를 한데 엮어 하나의 세계관이 만들어진 것은 조이온에서 에이케이인터랙티브로 운영주체가 옮겨진 2009년 이후부터다. 에이케이인터랙티브가 ‘거상’만의 세계관을 정립한 뒤 ‘거상’에서의 모험은 돈을 많이 벌어 큰 상인이 되는 것이 아닌, 세상을 혼돈 속에 몰아넣고자 하는 악한 환수 챠우와 그에 동조하는 구지모 일족, 검은상단의 음모를 백상회의 일원이 돼 저지한다는 서사시로 변모했다. 세세한 설정은 동아시아 신화 및 전설, 그리고 한국사에서 차용했다.

예를 들어 검은상단과 백상회의 대립 원인은 ‘거상’의 배경이 되는 16세기 조선의 역사적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검은상단이 세워지게 된 계기는 신분차별 철폐를 위한 봉기가 실패한 데 있다. 실제로 16세기 조선은 신분차별을 비롯한 사회적 부조리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격렬했던 시기였다. 후대 의적으로 전해지게 된 ‘임꺽정’, ‘홍길동’ 등이 활약했으며, 특히 임진왜란 직전 발발했던 ‘정여립의 난’은 ‘거상’ 속 봉기와 흡사한 부분이 많다. 

▲ 허준과 같이 16세기 실존인물은 물론 (사진출처: 게임메카 DB)


▲ 신화에 등장하는 사천왕, 사신 등을 각색해 스토리에 녹여냈다 (사진출처: 게임 공식 홈페이지)

판타지 세계관으로 넓어진 '거상'의 무대

실제 역사 속 ‘정여립’과 달리 ‘거상’ 속 봉기의 주모자 황천복은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봉기가 실패하자 잠적하게 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의 이름은 ‘검은상단’ 대방이라는 직함과 함께 세상에 다시 오르내리게 된다. 신분철폐에 대한 꿈은 여전했지만, 정의감은 사라지고 사람까지 사고 팔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추구하는 황천복의 모습에 실망한 측근 서래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검은상단에서 나와 백상회를 꾸리게 된다.

주인공은 이 백상회의 일원으로 조선, 일본, 중국, 대만은 물론 몽골과 인도까지 탐험하며 혼돈이 천하에 도래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주인공 캐릭터 생성 시 조선, 일본, 중국, 대만 등 4개 국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으며 각 나라마다 고용할 수 있는 용병이 정해져 있다. 실제 역사에서 대만이 국가로서 존재한 것은 17세기 후반 해적왕 정성공이 다스리던 시절이었는데, 이 부분을 16세기로 앞당겨 차용한 것이다. 또한 김유신, 제갈공명 등 16세기와 전혀 상관 없는 실존인물을 용병으로 등장시켜 한국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폭넓게 반영하고 있어 판타지적 허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 몽골에 등장하는 몬스터 '탱그리' (사진출처: 게임 공식 홈페이지)

최근 업데이트로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 삼국지연의 속 초선이 최초 전설 영웅으로 등장했다. 개연성이 없어 보이지만, ‘거상’의 스토리를 잘 살펴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이미 4개국은 챠우 형제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으며, 인도에서 삶과 죽음을 관장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이 담긴 석판들을 모아 백상회에게 전달한 상황이다. 주몽과 초선의 등장은 이러한 4개국 동맹이 힘을 모아 과거의 영웅들을 현재로 불러 악한 힘에 대항하기 위한 판타지적 요소인 것이다.

흔히 판타지라고 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양 판타지를 정립한 소설 ‘반지의 제왕’도 유럽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에서 다양한 모티브를 차용해 만든 작품이다. 결국 역사와 판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거상’은 실제 동아시아 지도를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점에서 그 경계가 더욱 모호하며, 더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 게임은 치밀한 고증이 요구되거나, 치열한 전쟁을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민족감정 자극 등을 겨냥해 만들어지는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거상’은 한국사를 기반으로 했음에도 판타지적 요소로 이러한 고정관념을 탈피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공간적, 시간적인 배경을 확장시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거상’처럼 한국사를 자유롭게 다루는 유연함이 한국사 게임 제작에 있어 필요하지 않을까.


▲ 김유신부터 주몽까지, '거상'은 넘나드는 한국형 판타지를 진행 중이다 (사진제공: 에이케이인터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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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온라인
장르
MMORPG
제작사
에이케이인터랙티브
게임소개
'천하제일상 거상'은 PC로 발매된 '임진록 2+: 조선의 반격'에서부터 분화된 게임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천하제일상 거상'에서 플레이어는 동아시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교역을 통해 최고...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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